개념

애정에서 비롯되지 않은 관찰은 허구다...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과정보다 이유가 궁금하다. 작가가 밝히는 정확한 이유 못지않게, 감상자가 미루어 짐작해서 만들어낸 그럴듯한 뒷이야기에 마음이 더 끌린다.......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고, 어려운 생각을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쉬운 생각을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은 의외로 쉽고, 쉬운 생각을 재미있게 풀어내어 다른 의미를 생산하는 것은 많이 어렵다. 새로운 대상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평범하고 쉬운 대상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정말 어렵다.....아는 것은 힘이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에만 의지하려는 것은 병이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느끼고 관찰해서 발견한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전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이다. 진부한 지식과 평범한 대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의외의 해석....평범 속에 비범이 있다고 믿는다. 사소한 것에 특별함이 깃들어있다고 믿는다. 성공 못지 않게 시행착오의 경험도 값지다고 믿는다. [ 어느 게으른 건축가의 디자인 탐험기, 천경환]

길바닥, 볼라드, 지하철(공간활용, 비상손잡이)

 

 

 

존재와 주체 


아감벤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방식을 되찾아야 한다고 본다.

사실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의 이런저런 특성(금발임, 키가작음, 상냥함, 절름발이)에 집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랑은 무미건조한 유적 성질(보편적 사랑)의 이름으로 그 특성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대상을 그것의 모든 술어들과 함께, 그 대상의 있는 그대로를 원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탈주체화를 기존의 모든 주체성의 파괴라는 한 축과 비인격적/비인칭적 역량과의 관계맺음이라는 한 축 사이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장치에 의한 (탈) 주체화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재주체화로 포획되지 않고, 어떻게 탈주체화의 주체에 머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는 이것을 푸코의 '자기배려'를 통해 설명한다. 푸코에게 자기배려는 자기를 배려하는 것인 동시에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즉,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자기실천이 아니라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자기실천이 열쇠이다.

잠재성에는 생명체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역량인 살다, 욕망하다, 지각하다, 기억하다, 말하다, 사유하다 등이 있다. 이것은 개별 생명체가 아니라 유적 존재의 생물학적 역량이다. 프랑스어에서는 익명의 대명사 '옹on(사람들)'으로 이 존재를 표현한다. 잠재성은 내가 말하다가 아니라 사람들이 말하다, 내가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지각하다 등으로 표현된다

 

 뱀발. 1. 디자인꼼수, 핀란드디자인산책과 이책을 마무리하다. 이 친구는 모두에 개념이라는 내용의 글을 써놓고 후기에 다시 되돌린다. 다시 보니 글이 마음에 들어 남겨놓는다. 디자인은 앎을 전달하기 보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음악도, 미술도 그러하고, 건축이란 언어도 그러하다. 앎에 대한 강박은 몸을 움직일 수 없다. 느낌이 살아나고 전달되지 않는 이상, 그 이상은 없다.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보니 건축의 디자인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형광펜의 앞쪽 지적에 뜨끔거리면서....  

 

2. 한사님 서재에서 사랑에 대한 악셀호네트의 글옮김, 그리고 인식의힘 서재 최근글에서 바디우의 사랑에 대한 글을 올려둔 것이 있는데, 봤던 글이라 새삼스럽다. 그러다가 오늘 마무리하면서보니 아감벤의 것이 또 하나가 남는다.  말미 종교라는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분리시키고 말았는데, 그리고 그것에 소비라는 꼬리표를 두게된다. 그런데 그 막장, 짙은 어둠에 새벽이 오듯, 끝장을 세속화시키는 놀이가 정치이자 다른 세상에 대한 나침반이 된다고 한다. 어린이의 시선으로 자본주의가 극단까지 밀러붙인 경제, 법....이란 도구를 사용해서 종교제의가 체스, 공놀이 등으로 세속화되듯이 세속화시키는 놀이를 만드는 것이 지금 이순간의 정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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