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화요모임에서 행복의 조건이란 주제로 이야기를 서너시간이 넘치도록 나눠봤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나누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 설레이는 것이 행복이지 않느냐는 합의아닌 합의를 보기도 했습니다. 행복은 무엇일까요? 결론은 정의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행복을 방해하는 조건들을 먼저 이야기해야한다는 방법적인 결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미에 그 조건을 한 단어로 각자 정리해봅니다. 교육, 직장, 욕심, 돈, 속도가 거론됩니다. 그리고 행복에 대해 좀더 가볍게 행복언저리에 묻어있을 것부터 출발해볼 것을 권합니다. Are you happy? 해피하세요. 해피와 행복 사이에는 무슨무슨 색깔들이 있을까요? 그 단어에 붙은 삶과 생활방식의 차이는 없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에게 행복은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 가치는 아닐까요. 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지 않기에 한꺼번에 너무나 많이 주문해버리는 습관을 잔뜩 껴입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모임은 아카데미에서 스펙트럼이 넓은 연장자 모둠에 속하는데요. 그들의 청춘시절 이야기를 꺼내어 봅니다. 그 때 행복하셨나요? 그리고 연장자 모둠일 뿐만아니라 정치, 사회적인 입장의 색깔이 강한 것 같은데 어디까지 생각이 번지는지 한번 찾아가볼까요? 1987년과 아이엠에프를 주요한 지점으로 생각합니다. 정권의 문제도, 권력의 문제도, 과도한 권력지향은 또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가? 민주주의의 문제도 제기합니다. 행복을 규정짓기도 만만치 않고, 개인적인 울타리에 가두기도 어려운 상황이므로, 그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회적인 조건과 개인적인 조건이 서로 엮이고 고민이 불거집니다. 사회-정치적인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문제는 체념과 죽음, 정상인, 평균적인 상황을 넘어선 철학적인 시야로 번집니다.
일제부터, 근대의 속도는 점점 개인을 옭아죕니다. 사회가 감당할 문제를 압축파일처럼 개인에게 모두 넣어버립니다. 평균 가족수 2.58명 3명이 되지 않는 가족이 감당할 사회,정치적인 부담이 커지는 속도는 빨리빨리의 모니터를 스크롤하는 듯합니다. “오늘 감당하실 사회문제가 도착했습니다. 혼자 알아서 해결하세요. 감당지수가 100포인트 올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출근길에 행복의 심리학이란 책의 쾌락의 쳇바퀴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하면 생각나는 물건을 몇가지 고르라고 했답니다. 16년이 지난 뒤 같은 사람에게 똑 같은 질문을 했고, 사람들은 대부분 원하는 물건을 소유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또 다른 행복이 생각나는 물건을 말하고 있답니다. 가지고 싶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이 가지고 싶은 세상은 그 간극을 채울 수 없다고 하네요. 행복을 소유하는 속도보다 박탈당하는 속도가 더 커져 그 차이는 영원히 메울 수 없답니다. 그 무한궤도에 오른 것이고 정말 비껴날 수 없는 것일까요. 여러분에게 질문의 키워드를 던져봅니다. ”자네 진보!!, 대안을 정말 소유만하고 싶은거야?“ 음..행복의 조건에 대한 개선여지는 정말 없는 것일까요.
[대안학교, 광장과 밀실]
#1. Happy와 행복의 사이
거대담론이 우리사이에 비집고 들어온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그 질문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없을 것이므로 갑자기 진지해진다. 삶-행복-부 사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소시민처럼, 안분지족하거나 그저 해피한 것은 행복의 범주에 기웃거리지 못하는가? 무더운 여름날 샤워하고 웃통벗고 랄랄라... 어느 사이에 행복에 무임승차한 녀석들이 있다. 수준-욕망-욕구를 행복이라 가정하고 무작정 쫓아가기만 한다.
#2. 행복을 방해하는 조건 - 1. 교육 2, 직장 3. 욕심 4. 돈 5. 속도
교육 - 예전의 근로학생대출의 경험과 다르게 지금의 학생들은 학자금을 당연히 대출을 받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미 학생개인은 학교의 새마을금고식의 그래도 강제 추심을 하지 않고, 그래도 학생이기 때문에 봐줄 수 있는 이삼십년전 문화를 잃어버렸다. 이미 그런 고리는 모두 끊기고 은행에서 대출과 추심의 과정을 겪는 문제를 안아버린 학생개인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교육의 문제 이전에 인권의 문제다. 이자장사에 은행도 학교도 학생이 노출되었고, 오로지 학생이 무한책임을 지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학생의 인권문제만이 아니라 부모의 인권문제와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다. 학자금을 내지 말아야 된다는 인식이 생겨야 한다.
직장 - 아이들이 대학까지 마칠 수 있는 정년까지는 사람들이 직장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돈없음 - 천원한장과 십만원이 있었도 불안할 경우가 많다. 독신에게 인간관계와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다. 없을 때 초조하다.
속도 - 토목설비, 치과기술, 인공위성까지 제어장치를 비롯해 기술의 발달은 인간적이지 않다. 사람이 만들면서 사람이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그런 기술이 인간의 세련된 감각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상추 한 장을 씹는 정교한 느낌을 그 기계가 감당할 수도 없으며, 토목설비도 한번 고장이 나면 오히려 다른기술자까지 해결자로 붙어야하는 병목지점이 존재한다. 스프링과 부품하나만 고치면 해결될 것을 전자장치까지 손을 봐야하는 손실은 전혀 인간적인 면모가 아니다. 고속도로는 빠름에 경도되어 올레길의 느림을 영원히 맛볼 수 없다.
#3. 행복하셨나요? 지금과 차이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학생운동할 때는 행복했는가? 행복하고 싶다는 것을 스무살 때 인식을 하지 못했고, 이것저것 따질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배운 것과 현실의 차이가 피를 끓게 만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하면 할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 같다. 그 이후로 사람들이 이렇게 자본주의를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의아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내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겁이 난다. 돈 이야기도 그 스무살엔 마음에 있었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삼십대에서 조금 나오기 시작하고 돈 있는 사람 위주로 모임의 좌중이 정리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한편 그 돈에 대한 내면화와 더불어 경쟁이라는 것도 아이들에게 깊숙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싶다. 경쟁하지 않으면 재미없어하고 스티커 한 장 받으려고 안달하거나, 칭찬받고 싶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변화의 한단면인 것 같다. 가장들이 일터에서 웃음을 팔고 밥벌이의 비루함을 느낄 때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든 아이들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들까? 삼성의 가족 구성원이 아니고서야 모두 루저로 무의식 중에 생각하는 현실이 된 것은 아닌가? 모두 그 자리를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꿰차고 싶어 안달하는 현실은 아닌가?
## 이야기에 잠입하기 위한 시대에 대한 작은 이해(87년과 97아이엠에프)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결과를 얻었지만 그 이후 [열망과 절망]에서 논의된 바와같이 부동산개발이나 자본의 시스템 속의 편입은 연속선상에서 이뤄졌다. 권력의 프레임을 담당할 고민의 주체들도 없었다. 제헌의회 같이 권력을 고민하는 그룹은 전혀 그 생각을 확장하지 못했다. 통일을 주장하는 그룹도 마찬가지로 민주화의 여운만을 향유할 뿐 다른 분야에 심도있게 접근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변화를 프레임으로만 사후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역사 속에 무수한 변화가 전략전술이나 기획의 문제로만 접근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선험적이거나 이상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접근하는 것은 아닌가?
70년대, 80년대 학번이 나름대로 다른 문화의 흐름을 형성하며 사회에 진출하게 된 것 같다. 그렇게 형성된 흐름이 사회, 정치적인 조건 속에서 판단과 행위가 달라졌는데 그 문화의 물길이 아이엠에프 이후에 부각되는 문제들을 사전에 판단의 장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것 같다.
아이엠에프란 상황은 생활인들이 “살다보면 살겠지” 란 인식, 가파른 성장의 과실만 맛볼 수 있다라는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문제는 그 어려운 상황이 나도 한방, 로또식의 사고처럼 한몫 잡자라는 더 욕망을 세게 꿈꾸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사십대, 오십대, 그리고 비정규직의 그늘은 더욱 더 야생의 현장으로, 정글의 현장으로 정치-문화-사회적인 생태를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이제 불안이 현실을 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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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민주주의가 성숙되었는데도 왜 더 행복해지지 않는가?
정치상황, 현실 인식의 문제, 정치-사회적인 조건이 행복한 사회와 연결된다는 가정이 있는데 정말 그러한가? 1987년 민주주의가 성숙되면 행복해진다는 가정이 있었는데 그 이후 민주정부가 들어서도 행복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조건들과 연루된 행복이 무엇이냐하면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난감하다. 나의 문제로 가져오면 별로 행복한 적이 없던 것 같다. 따지고보면 현실에 있어 제도적인 민주화만 이야기했지만 일제시대 이후 구체적인 삶의 행복을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또한 해방이후에도 스스로 행복을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최근 아이엠에프 이후에서야 사회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전체적인 상황을 전제로한 질문이 아니라 개인 측면의 질문으로 되돌아간 계기가 된 것은 아닌가 한다.
이십대는 삼십대, 삼십대때는 사십대때 내눈으로 세상으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러지 않았다. 깨달음을 요구하는 것 같다. 해피하다는 것은 만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큰 근심없고 쩔쩔매지 않다면 해피를 이야기한다. 우리보다 거창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까지 함께 생각해본 경험이 없는 것 같다. 분하고 화가 나있는 상태에 경험이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돈과 권력이나 명예라는 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것 같다. 돈따로, 권력따로, 명예가 따로따로 충족되어야 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돈도 갖고 싶고, 권력도 갖고 싶고, 명예까지 갖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의 반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과 달리 지금은 삶이 보인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하지만, 벼가 익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숙이면 아무 결실도 없지 않은가.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아쉬움도 있었지만 삶이란 것이 보였으면, 젊을 때 그 열정들이 더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행복한 것을 반추해보고 찾아보니 정치적인 부분이고 행복의 객관적인 조건을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순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고 개인에 대한 비중이 더 커지는 것 같다.
개인이나 개성이 발견되면서 딱딱한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순간순간 소프트웨어로 관점이 비쳐지는 것 같다. 모임에 오는 순간을 생각하면 행복해진다.
#5. 행복?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각에서 접근해본다.
5.1 행복은 개인적인 것인가? 사회적인 것인가?
행복을 생각하면 대부분 자신과 가족이란 범주로 좁히는 것은 아닐까? 평온하고 정상적인 상황만을 고려하게 되는데, 만일 전쟁중이라거나 내전중이라거나, 결핍의 현장을 목도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상황도 행복은 개인과 사회의 경계에서 냉정할 수 있을까?
최근 통계청의 발표를 보면 가족이 세대당 2.58명으로 3명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이 행복을 자신과 가족이란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은연중에 행복도 개인이 감당해야한다는 것으로 결부되는 것은 아닌가? 구석기시대와 같은 야생의 경험을 갖는 것은 아닌가? 마치 제도와 사회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행복을 개인이 감당해야하는 것처럼 논의되는 것은 아닌가?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사이엔 엄청난 공백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제도나 사회를 이야기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닌가? 사회가 생겨야 개인에게도 여유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기독교가 행복의 문제를 신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닌가. 삶과 생겨난 여유, 문화적으로 공간이 벌어질 때 행복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거창한 행복을 지금도 꿈꾸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 이야기에 잠입하기 위한 노신의 쇠로만든 방에 대한 논쟁
이영희선생님의 전환시대의 논리 가운데 루쉰의 쇠로만든 죽음의방 이야기가 생각난다.
깨어나라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보편적인 행복이 있는가? 그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머뭇거리게 된다. 그것을 행복을 너무도 추상적이고 개인으로 가둬두는 것은 아닌가? 현실에 있어서는 타자와 관계 속에서 봐야지 개인으로 고정시켜봐서는 곤란하다. 그 사람을 행복이란 관점에서보면 내버려두어야 한다. 시민운동을 하는 입장에서는 두드려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주변에 불편을 주지 않고 자기 행위만 한다면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러나 타자와 관계 속에 연관을 시킨다면 다른 문제다.
자본주의가 개입한 무수한 사례들을 본다. 양모생산, 대량생산, 기계 도입 등 자본주의 신자는 생산에 경도되어 계몽을 하지만 현재 사는 것이 행복한 수준이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상적으로 개인이 순수한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전쟁이라는 상황, 사회와 삶이 혼용되는 상태에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발언하고 개입하여야 한다. 행복만이 아니라 윤리의 문제도 생겨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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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니더라도 객관적인 조건이 있는가?
일단 배불러야 된다.(생존), 현대사회에서 삶이 있다. 학교도 다녀야하고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보장이 된다. 역사적으로 변하기는 하지만 거창하지 않다. 노후, 교육, 애들이 별문제없이 자라서 원하는대로 하고, 부당하게 억눌리지 않는 수준이지 크게 바뀐 것은 아니다. 노동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 사회의 차이가 천배까지도 이해하겠지만 수천배 수만배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요양원에서 노동을 하고 서로 욕심이 생길때 건강해진다. 적절한 행복엔 노동과 피해를 주지 않는 욕구, 욕심이 필요하다.
5.3 이 사회가 행복의 사회성을 빼앗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못난 놈도 잘난 놈처럼 살려고 하고 잘난 놈은 없는 놈 뺏어서 하는 것이 문제다. 이 정도의 차이는 있는데 그런 존재에 대한 차이를 느끼는 것이 관계다. 그 차이로 관계를 해야하는데, 관계를 맺지 못한다. 차이를 나눌지 모른다. 관계도 맺지 못하면서 그 이전에게 관계가 경쟁구도로 가거나 화폐로 동일화되는 것이 문제다. 이런 불감증은 삼국지처럼 피를 보고 꿈을 꾸진 현실의 접촉면이 사라지고 더 이상 꿈꾸지 않고 대행하는 시스템인 화폐로 치환되기에 살면서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그 불감이 행복을 사회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부분임에도 요구하지 못하게 한다. 이라크 전쟁처럼 전자장치로 폭격을 해도 아무도 살육을 아파할 수 없다.
5.4 행복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불행과 박탈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행복을 이야기하기위해서 먼저 불행을 이야기해야 한다. 먼저 박탈을 이야기해야한다. 사회적 구조와 개인적인 문제가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사회가 변화하고 상대적으로 박탈이 커지는 속도는 행복을 찾는 속력보다 훨씬 더 커지는 것 같다.
또한 불행을 경험해본 사람들이 그 행복을 다루는 방법이 다른 것 같다. 며칠전에 화면을 통해 본 오뎅집 사장은 처음에 포장마차를 했던 장면을 걸어놓는다고 한다. 불행을 다루거나 체념을 배우는 과정에서 상대적인 행복의 모습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6. 행복에 대해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접근은 가능한가?
공학적으로 행복을 표현한다면? 분자구조에서 보면 행복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우리가 행복하는 것은 언제일까? 인지심리학자들이 뇌의 시냅스이야기하고 뇌과학자들이 그 속에서 과학적으로 행복을 논한다. 신은 뇌속에 있다는 이야기나 핵자기공명장치와 공상과학영화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기기의 특성상, 과학을 대리하는 장치는 볼 것만 보게한다는 단점이 있다.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곳과 불안을 느끼는 부위가 비슷하다고 해도, 천재나 분열증이 유사하다고 해독한다해도 그것을 뇌의 한 부위나 기관으로 말하는 것이 문제이기도 하다. 한 부분을 그 감정의 복잡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 성과를 만들어내겠지만 전부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오만이다. 마약은 무엇인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행복영양제라고 해야하나? 고통을 느끼는 사람에게나 말기 암환자에게 적용하는 문제가 있다. 21세기의 가장 큰 병이 우울증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주사한방으로 해결되는 문제인가? 과학이 행복을 제조할 수 있는가? 질문이 무척 작위적이고 촌스럽지 않은가?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보면 행복의 정상상태만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물질의 상태로보면 고체,액체,기체 가운데 물의 액체상태에서만 행복을 논의하는 것은 아닌가? 건강한 상태로 쳐도 건강한 상황만 고려하는 것은 아닌가? 암환자에게 3년이 남았는데 행복하냐?는 질문이 무의미한 것 같지만, 병이 걸린 불안정한 상태에서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없는 것처럼 논의하는 정상인의 정상상태에 대한 행복의 가정은 울타리가 너무 강하다. 열외로 치는 상황에 말을 걸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행복의 조건과 관계를 가정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닌가? 죽음이 잠과 친구 사이에 있다고 하는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건강에 대한 관념이 새삼스러워 병과 죽음에 사유를 가까이 가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사고와 느낌이 강렬할수록 삶의 강도는 역으로 강해진다. 어쩌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행복이란 이상상태만 가정해서 물가엔 한발짝도 가지 않으려는 유아같은 것은 아닐까? 행복을 말하려고 한다면 그만큼 행복을 살게하는 많은 것들의 울타리를 넓혀야 하는 것은 아닌가?
“몰핀을 맞아도 너무 아프네. 하지만 제발 저기 살랑거리는 바람이 들어올 수 있게 창문을 조금만 더 열어주게.”
자본가들에 대해, 자본주의의 위기
자본가들은 똑똑한 이들을 생산에 이익에 되는 뛰어난 기술자라고 하여 고용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을 회피하려하고, 그런 이유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하면 자른다. 자본은 남겨야 된다는 그 논리가 무서운 것이다. 그로인한 이동성도 말이다. 돈은 돈을 낳고 더 큰 돈을 원하고, 사람을 삼키도, 사람도 삼키고, 살림살이도 삼키고 삶도 삼키고, 돈만의 친교를 원하고 하다가 삶도 사람도 발라낸다.
#7. 행복찾기/ 비관과 낙관 사이, 그래(도) 행복을 요구하자. 광장과 밀실의 회복.
필론의 돼지도 행복하다. 전쟁, 파시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상황을 예단한다는 것도 어리석지만 상황은 늘 원하는대로 과학적으로 사고한다고 그대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낙관과 비관사이에 앞이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 어쩌면 상상하는 경계밖의 일들이 현실로 불쑥 솟아오를 수도 있다. 필론의 돼지도 필요하다. 필론의 판단이 맞다면 말이다. 돼지처럼 자는 시늉을 할 수밖에 없다면 말이다. 노신의 쇠로된 방에 갇힌 이들이 깨어났지만, 깨어난 자들이 여전하다면 방을 부수었을 뿐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고 바뀔 수 없다면... ... 머리만 깨었지 가슴도, 마음도, 손도 발도 온전히 결빙되었다면 말이다.
행복하려면 일하고 대충욕심이 있어야 하고, 교육문제도 해결해야하고, 시간적인 여유도 있어야 한다.
불행은 상대적인 개념이고, 무엇 때문에 불행한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나이에 상관없는 이야기다. 마치 나이가 들면 천수를 누린 듯 하지만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 같다.
행복의 객관적인 조건을 만들기 위해, 사회이든 공동체이든 정치적, 경제적인 개선을 해나가고 행복을 요구해야 한다. 개인이 느낄 수 있는 관계에서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것은 개인이 될수도, 모임이 될 수도 있다. 개인의 발견이 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개인적인 조건과 사회적인 조건이 별개가 아니라 병립하는 상황으로 이해해야 한다.
광장과 밀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 사회의 열린 통로를 위해 광장과 밀실 모두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자본의 속도에 밀려 자의든 타의든 점점 더 좁은 밀실에 갇혀있다. 하지만 이런 좁아지는 방향과 반대로 현재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걸쳐 알던 사실들이 이십대, 십대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때 알고 있는 세상보다 몇백배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어렵게 생각하지말고 밀실이 좁아지긴 하지만 광장사이가 의외로 얇은 것은 아닐까? 오늘 지금, 재미있는데 그 재미가 네트워크 상에 세단계만 더 재미있으면 많은 이들을 광장으로 나오게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는 나이의 문제도 아니고 우리의 노력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사는 세상이 행복의 폭이나 넓이가 정해진 것 같은데, 다음세대나 후배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r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자리가 행복하다. 왜그런지 모르겠지만, 행복했으면 되는데 왜 집에가서 또 생각하는지? 사람을 믿지 않는데... ...세상도 변하는데 왜 인간이 변하려하지 않는데,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하는 것은 아닌가? 정확히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결벽증이 있는 것 같다. 완벽한 인식에 다다를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반론이 스며든다. 말이 몇순배 돈 뒤에... ...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행복한 논의를 하다본 후, 행복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는 느낌이 든다........아~ 이 자리가 행복하다.
청소년은 건방떨어야 한다. 이 복잡한 사회에서 시건방떨지 않으면 세상을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을 갖고 노는 것이다. 해결을 하지 못하더라도... ...
# 부록.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던지는 몇가지 질문
- 대안학교에 대해: 대안라는 것도 자본이 인식을 만든다. 대부분의 삼십대는 대박의 수혜가 나에게 있을 것이란 자신감으로 충만하다. 주부는 아이들이 대박나기를 바라고 남자는 돈으로 대박나기를 바란다. 아이들도 일단 돈을 많이벌어야죠란 이야기가 거침없이 입에서 나온다. 과학자가 되려는 이유는 무엇이냐하면 무조건 돈을 많이 벌기때문이라고 한다. 초등학교 삼사학년이 너무 민감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아이들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대안학교의 경우도 그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살 수 있게 해야하는데 제도권의 학교가 싫지 않은데도 대안학교를 보내려는 것은 아닌가. 비행청소년을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면서 지리산을 들어가는 경우를 말한다. 이것은 부모의 삶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대안은 말 그래도 시스템이 아닌가. 자본주의 외부에서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많고 늘어날 때 자본주의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닌가? 좀더 다양한 경로를 인정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서로 가는 길이 많아지고 서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길만이 객관식의 정답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386, 486스럽지 않은가?
- 내 아이를 잘키우고 싶다는 욕심은 근본적이다. 내가 사는 여건하에서는 해줄 수 있는 만큼 해줘야 한다. 내 아이의 삶과 나의 삶이 교차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만큼 해줘야 한다면, 저기 변두리로 밀려난 아이들에게 해줘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들도 이 시대를 똑같이 살아내고 있다면 그 생각은 이기적인 것은 아닌가? 진보적으로 살아내고 결정을 해야 한다면, 그렇게 경쟁하고 이 질곡을 겪은 아이는 다 진보적이지 않은 아이가 되는 것일까. 진보적이지 않은 어른이 되는 것일까? 내 아이를 진보적으로 키우든, 성공하게 키우든 그래도 부모란 가족의 울타리안에서 크는 아이들이다. 문제는 나름대로 똑 같이 우리와 같이 삶을 살아내는 이들이다. 내 아이만이 아니라 너의 아이로, 우리 아이의 울타리가 커지는 것과 상관있는 일이다.
그러려면 너무 내 아이를 잘 키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음을 덜어내고 내가 잘 살아내는 일과 관계있을지도 모른다. 당장은 아프겠지만 나도 아이도 좋은 일은 아닐까? 그래야 경계에서 다른 급수의 물에서 살 수 있는 것을 아닐까? 이 사회의 변화속도를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서 혼자 소유하기엔 그 속도를 감당할 수 없다. 다른 속도의 세상을 만들기 시작하는 편이 훨씬 빠를 것이다.
2010. 8. 22 일 화요모임 행복의 조건에 대한 토론 녹취를 가필하여 정리함. 100911 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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