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셋이라고 적다보니 이크 참*에 마음이 쏙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헐렁하다싶고, 잘 챙기질 못하고 있구나 싶다. 버*치와 이야길 나누다보니 이야기하면서 정리되는 것이 몇꼭지다. 실타래처럼 쭈욱 이어져나오는 새로운 일들을 어떻게할 수 있을까? 아이때문이 아니라 아이도가 되기 위해서 부모들이 강연이나 마을학교 프로그램을 좋은 영화 보듯 찰라찰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내 삶하고 아주 조금씩, 희미하게 연결되어 나오는 것이 있다라고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무얼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도 마음은 좋은 강연, 유명한 사람에게서 단물 잠깐 빼먹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슬쩍 그 물을 뭍히는 것이란 것, 나-너의 삶에 슬그머니 그 느낌을 옮겨놓는 것이라구. 그래서 내삶이 조금은 흔들려야 아주 조금 아이때문에 모임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이도로 조금은 고개돌릴 수 있는 것이라구 말이다. 좋은강연은 좋은 영화보듯 그렇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화 50편 속에 있는 삶이 덜거덕거리며 불편해져 다른 이의 삶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게 흔들리고 이어져 이야기들이 덜그럭거리는 것이다.
2.
강연과 세미나의 방식이 그 주제와 책에만 머물러있는 것은 아닐까. 작은 일상에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그렇게 작은 일상의 불편으로 이어져 너-나가 그 불편을 줄이는 방법을 나눠야하는 것은 아닐까. 일상이 어떻게 덜그럭거리는지, 어떻게 기우뚱하는 것인지? 어떻게 생각이 불쑥 가족을 넘어서고, 결혼도 넘어서고, 왜 이렇게 온전히 자식들을 감당해야만 하는 것인지. 물건너 삶들을 지긋지긋하게 섞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강연이라는 물건너와 책속에 있는 물건너를 우린 너무 소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용할 사건 사고처럼 그냥 뭉클거리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머리속만 배회하거나 가슴으로 소화시키지 못하는 아둔함이 섞여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일주일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그렇게 일주일일주일을 미루면서 인생은 아닌가. 해답은 저기있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오늘여기 막다른 골목에 있는 것은 아닌가. 책속과 강연은 늘 저 속에 있는 것, 오지도 못하는 미래는 아닌가. 답답함과 막막함을 나눠 실 한오라기라도 건져야하는 것은 아닌가. 모임과 마음의 영양간식은 드시지 않고, 늘 있지도 않는 저 거울 속의 신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책 속엔 답이 없다. 강연 속에도 답이 없다. 답은 옆에 있는 당신의 얼굴에 눈동자에 묻어있다. 앞에 있는 당신의 어깨에 붙어있다.
3.
생각의 진도는 그렇게 사소한 끈을 부여잡고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마누라와 남의편의 불편이란 실오라기를 이어 끝까지 당겨보는 것이다. 그 끝 턱 막히거나 걸리는 삶이란 놈이 걸리는 것이다.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는 삶이 매듭을 매고 있어 불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불편을 한번 나눠보는 것이다. 정말 불편해서 환장해보는 것이다. 고민의 진도는 그렇게 나가는 것이지 구름처럼 천상천하의 책속에나 있는 것은 아니다. 미끌미끌거려 핑계만대 현실을 빠져나가는 그런 이론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온몸에 마음이 상처나 살이 저며오는 것인지 모른다. 현실을 들이대며 아파 어쩔줄 모르는 것인지도... ...
뱀발.
1.잠깐 짬을 내어 씨* 친구들을 만나다. 머뭇머뭇하다 속내를 나누는데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와 주책없이 남겨본다. 책엔 없고 모임들 사이에 비추는 고민들 한점을 건져올려본다.
2. 셋만 있으면 정말 좋겠다는 말이 남는다. 셋만있으면 버전 3.0이 된다. 모임도 세상도 그런데 늘 1.*이나 2.* 머무르는 것이 현실이다. 불쑥 짜투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그래서 모임의 앙꼬나 꿀단지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꿀단지나 앙꼬가 아니라 버전 업을 시키는 지렛대인지도 모른다. 둘은 너무 외롭다. 죽음을 감당할 수 있지만 외로움은 감당할 수 없다는 데리다의 조사 문구가 겹치는 것은 왜인지. 셋. 마음도 모임에도 셋이 필요하다. 셋.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