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형은 자투리를 없애고 여백을 제거하면서 효율적으로 공간을 구획한다. 사각형은 직선만을 허용하며, 곡선을 배제한다. 건물의 여백은 아름다움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비효율로 인식된다....근대 건물은 장소성을 묻지 않는다. 쓰임새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렇게 공간은 이용자가 아니라 건물주의 입장에서 구획된다.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은 주어진 공간에 적응해야 한다....공간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공간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소외된다....가진자의 입장에서 규칙적인 것은 합리성을, 획일적인 것은 효율성을 의미한다...합리와 효율이라는 근대적 이념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인권은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계단은 정상적인 남성의 보폭으로 규정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게단은 어린이와 노인에게, 여성에게 버겁다. 그들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배제된다...경사로가 사회적 소수자를 배려한 공간이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 짓고 확인하는 공간인 셈이다.
1.
무진기행의 갈피를 넘기면서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렇게 배양된 감성이란 것이, 이 소설가와 대중화의 급류가 만나면서 형성된 것이란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게 주조된 나는 그 우물을 벗어나려하지만, 또 다시 그 물결에 휘말려 끊임없이 그리로 빠져든다. 몸은 그 울타리를 어그적거리며 탈출할 수 없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있지 않는 나는 그렇게 별반 새로울 것이 없는 무진기행의 아류에 적셔져 있다. 그게 나다.
2. 나의 아버지는 광부이셨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목전의 삶의 비용을 나의 삶에 접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웰의 소설을 보며 부끄러워 어디 찾을 쥐구멍조차 없다. 몸으로 삶을 각인시키는 그는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 그래서 힘이 있다. 멀리 삶을 지켜보는 나가 아니라, 그에게 삶이 늘 붙어있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힘만 얻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바래지 않는다. 나는 탈출할 수 없다. 늘 한발 떨어져서 너를 존재에 이식시키지 못하는 한 달라질 수 없다.
3. 신영복님의 그림달력을 아*** 누구에게 선물받았다. 한달한달 넘기다보니 이렇게 적혀있고 그려져 있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 궁해야 변하고 변해야 통하고 통하도록 열려있어야 오래간다. 글귀가 또 다른 곳에서 나를 가로막아 섰다. 그리고 이렇게 또 가로막는다.
4. 나는 일상을 달리보려하지 않고, 늘 섞으려하지 않고 보려고만하며, 다름을 끝까지 몸에 연장시키지 않으며, 이것저것 구분하려는 습속에 범벅이 되어있는 구제불능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 궁하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일상에 아주 작은 겹눈이 등에 난 것인지, 몸에 난 것인지...아니면 당신의 눈에, 혀에, 손에 난 것인지도 모른다..그런데 도통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도 어렴풋하다. 그래서 간절해진다. 당신도 나도 변할 수 있을까? 따로따로 변할 수 없다면 당신-나는 변할 수 있을까? 다르자마자 접붙여 움직일 수 있을까? 세상이 천동설론자와 지동설론자, 그리고 또하나 나같은 영원히 변하지 못할 관조론자와 오웰같은 운동론자... ... 그런데 자유의 확장에서 보면 어떤론자가 더 이득일까?... 말많은 나는 여전히 구제불능...무진기행의 구렁텅이로 직행하려한다. 안개는 끼고 보이지 않고.....
>앎,삶, 일상, 주체와 행위자의 간극, 변화에 대한 팁>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의 삶은 변하지만 공간은 늘 제자리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이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거나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화로 지금어디야를 물어보듯 공간과 삶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공간이 삶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일상의 지리학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묻다. 16 공간과 싸움을 관계지으면 싸움의 성격과 의미가 다르다. 연인인지, 부부인지, 조폭인지 장소와 그 관계는 싸움의 성격과 의미를 규정하는데 영향을 주고 있다. 17 영어단어 existance(ex/istence)의 어원에 따르면, 존재는 자아 중심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향한 탈중심성을 갖고 있다. 존재에 대한 모토는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밖으로 나가! 인식론적 주체가 되지말고 윤리적 행위자가 돼라"가 되는 것이다.
일상적인 삶을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잘못된 관습으로 인해, 우리는 삶의 토대가 되는 일상 공간이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기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교과서를 통해서 배우는 공간은 늘 나의 삶과는 거리가 있는 공간이었다. 앎과 삶이 유리되어 있는 학교교육에 익숙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일상의 편린들이 쌓인 일상 공간의 의미 지층은 두껍다. 인간의 삶의 무게를 실어 나르기 때문에 두껍고 무겁다.
하지만 익숙하고 낯익은 일상 공간에서 의미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너무 익숙하고 낯익기 때문에 객체화하여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상 공간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낯익은 공간을 낯설게 바라보아야 한다. 익숙함과 낯익음에서 벗어나야만 일상 공간 속 의미 탐색을 위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홈리스들에게 지하철역은 피곤하고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공간이고, 노점상들에게는 생계를 유지하는 일터이지만, 그곳을 지나치는 행인들에게는 단지 정거장일 뿐이다. 광화문 앞 종로에서 바라보는 종로와 피맛골에서 바라보는 종로가 다르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낯익은 일상 공간을 낯설게 읽는 것은 어렵다. 사람마다 기억하는 일상 공간은 같을 수 없으며, 각자의 일상 공간의 각자의 삶을 대변해주고 각자를 드러내준다. 정착민의 시선에는 일상 공간 속에 담겨 있는 두꺼운 의미 지층을 읽어낼 수 있는 힘이 없다. 기껏 일상공간에 대한 하나의 초월적인 의미를 강요하고 생각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하나의 고정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고려하면서 정자를 바라본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 공간에 쌓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온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요약...
과학으로서 지리학을 지향하는 시선은 의미의 차원에서 공간에 접근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에게 공간의 의미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서양화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양의 원근법적 공간과 같이 과학적 공간이다. 과학의 공간은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을 단순화한다. 이는 관점의 단순화와 관련 있다. 이러한 관점은 경관을 인간에게서 분리시킨다. 그 결과 인간의 경험 사실에 대한 왜곡과 빈약화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험자인 인간이 단순화된다는 사실이다...본래 지리학은 강 건너에 누가 살고 있는지, 그들은 무엇을 먹고 어떤 집에 살고 있는지를 묻는 학문이었다. 인간의 삶을 평균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내력을 갖고 살아왔으며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어떤 내력을 갖고 있는지를 떠들 수 있어야 한다. 그 공간의 쓰임새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 퇴적되어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어야하고, 그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요약
근대화과정에서 생산된 공간에서 주체적인 개인이 존재하기 어렵다. 공간에 구속되는, 피동적인 개인만이 존재한다. 근대적인 사각형의 공간 안에 인간이 갇혀 있는 셈이다. 그 공간은 자아를 찾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자아를 포기해야 편안히 살 수 있는 공간이다....인간이 공간에 적응하면 사는 삶은 분명 행복하지 않다. 공간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
무정형의 공간이 갖고 있는 열린 의미에도 주목해야 한다. 무정형의 공간이 담고 있는 의미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공간의 전유 주체에 따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우리가 공간에 자신을 투사하고, 끊임없이 무엇이 되기 위해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무정형의 공간은 우리를 반영한다. 무정형의 공간의 등장과 소멸의 속도는 우리 삶의 속도를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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