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말, 그리고 쓰기에 대해

말이야말로 봉사하고 추종해야한다. 만일 프랑스어가 그 정도가 아니라면 카스코뉴 사투리라도 사용하면 된다. 나는 사물이 우위에 서고, 듣는 자의 생각을 채워 주고, 어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말 사용법은 단순한 자연 그대로의, 입으로 내는 것이건 종이에 쓰인 것이건간에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의 사용법이고, 충실하고 생기가 있는, 간결하고 순박한 것이고.

또한 나의 말 사용법은 안이하고 매끈한 맛이 없다. 거칠고 경멸조이며, 자유롭지만 규범에 다르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마음에 든다. 나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의 버릇에 의해서이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쓰기보다는 말하는 편이 더욱 능숙하다. 운동과 행동은 말에 활기를 준다. 특히 나처럼 급히 움직이고 잘 흥분하는 인간에게는 그렇다.

두 사람이 같은 일을 가지고 똑같이 판단하는 적은 없다.


학문과 혼의 관계에 대해 

학문을 혼에 부착해서는 안된다. 합체시켜야 한다. 학식을 혼에 흘려 보내서는 안 된다. 학문으로 혼을 물들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학문이 혼을 변화시키고 그 불완전한 상태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분명하게 학문을 그대로 방치하는 편이 더욱 좋다. 이는 위험한 칼이고, 그 사용방법을 모르거나 힘이 약한 손 안에 있는 경우에는 그 주인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손해를 끼친다.

학문이란 좋은 약이다. 그러나 어떤 약도 그것을 담는 항아리가 나쁜 경우에는 나쁘게 변하며, 썩지 않고 보존될 만큼 강한 효력을 갖지 않는다.

나는 또한 즐겨 우리 교육의 무능함이라는 문제로 되돌아 온다....그것은 덕과 지혜를 추구하고 그것을 품고자 하는 의욕을 가르치지 않고, 고작 단어의 파생과 어원 정도를 우리 머릿속에 심어 주었다.

우리가 편안히 사는 데에 학문은 거의 소용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학문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과 그것을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하여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 이 시대에 학문은 돈주머니를 채워주는 역할은 하지만, 결코 혼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학문은 둔중한 혼과 만나면 소화되지 않는 덩어리가 되어 영혼을 무겁게 질식킨다


아는 것과 교육 그리고 선생에 대해 

선생은 마치 깔대기에 물을 부어넣듯 계속 우리 귀에 대고 소리친다. 그리고 그의 (선생이란) 직책이란 누가 이미 말한 것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나는 선생이 이 방법을 고쳐, 그가 가르치는 아이의 능력에 따라 사물들을 음미해 보고, 먼저 자신이 선택하고 식별하여 보게 한 뒤 그 자질을 시험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어느 때는 그의 길을 열어주고, 어느 때는 학생 스스로가 길을 열어 가게 인도하기 바란다. 나는 선생 혼자서 생각하고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제자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다.

무엇이 확정적이라고 보는 자는 미친 자들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이건,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소 학파의 원칙이건, 그것이 가르치는 자의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할 수 있으면 택하고, 아니면 의문으로 두어야 한다.

외워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이 주는 것을 기억 속에 보관해 두는 수작이다. 똑바로 안다는 것은 선생을 쳐다볼 것 없이, 책을 들여다 볼 것도 없이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다. 순전히 책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역량은 비참한 역량이다!

무엇이 어떻든간에 나는 아이를 가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아이를 혹독한 학교 선생의 우울한 기분에 맡겨 두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짐꾼같이 아이를 하루에 열 너댓 시간이나 고역과 노동에 얽어두어, 그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싶지 않다..


습관이 저지르는 오만함에 대해

우리에게 진짜처럼 생각되지 않는 것을 가짜라고 경멸하며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우쭐거림으로, 이는 보통 사람보다도 자신이 뛰어난 판단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결점이다. 나도 옛날에는 그런 식이었다...지금 손에 잡히는 사물에 대한 인식의 대부분도 얼마나 많은 구름을 걷어 내고, 얼마나 암중모색한 결과 얻어진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실제로 우리는 지식보다도 오히려 습관에 의해 우리 주위의 사물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유와 시간, 그리고 삶에 대해

자연이 누구에게는 더 큰몫을 주고 누구에게는 더 적게 허락한 것은 이들 사이에서 형제애를 일깨워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남을 도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우리 모두는 태어나면서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 점에서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단 한순간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를 하나의 무리로 만들어 준 자연이 그 무리 가운데서 누군가를 노예로 예정해 두었다고 누가 감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시기가 나쁘고 불쾌하면 시간을 빠져나간다. 몇 번이나 시간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맛보며, 매달린다. 때가 나쁘면 그것을 쫓아내고, 좋으면 주저앉힌다. '시간을 보낸다'든가 '시간을 죽인다'는 통상적인 표현은 저 훌륭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인생을 흘려보내고, 피하고, 빠져나가고, 죽이고, 교묘하게 피하고, 또한 인생이 고달프고 경멸해야 하는 것인양, 가능한 한 무시하고 회피하는 것만큼 멋진 삶의 방식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지금 내가 그것을 잡고 있는 최후의 노경에 와서도 인생은 가치가 있으며, 쾌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정에 대해

내가 말하는 우정은, 두 개의 영혼이 서로 상대의 내면에 완전히 용해되어, 그들을 결합시키는 매듭이 없어져 알아 볼 수 없게 된 정도를 말한다. 누가 내개 왜 그를 사랑하는지 물어본다면 나는 대답할 수 없다. 다만 '그가 그였고, 내가 나였기 때문이다'라고밖에 답할 수 없다.

 

뱀발. 제목만 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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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5 1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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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6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