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 1> 학문은 시대적 산물이다!
“어떤 학문이든 시대적인 산물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지난 백여 년간의 ‘학문’은 전문적인 영역들로 작고 깊게 분화되어 왔던 반면, 현대에 와서는 학문 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지식의 통섭(統攝, Consilience)’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분리되었던 각각의 학문들이 만나 <큰 줄기를 이루면> 우리시대를 병들게 하는 불필요한 매듭들을 풀어낼 수 있을까요? 안타까운 것은 동서고금을 자유롭게 횡단하는 학문의 전당이 되어야 할 대학이 시장논리를 도입하여 실용학문 위주의 학과 통폐합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학문은 시대의 거울이기도 하겠지만, 시대의 등대가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성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기세춘 선생님의 동양사상 강좌가 벌써 4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강좌를 통해 노장의 민중사상, 공자의 보수주의, 묵자의 진보주의에 이어서 유학의 쇠퇴 ․ 유교와 성리학의 역사를 공부했었습니다. 이번 4기에는 유교의 성리학이 조선의 성리학으로 정착하는 과정을 강의해 주실 것입니다. 선생님은 조선 성리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조선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2기 묵자의 진보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강의도 우리역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서양문명 중심의 세계사를 학습했던 편향과 무지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열심히 공부해 봅시다.
유교는 15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있었다고 합니다. 비단 조선의 유교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한문을 쓰기 시작한 것도 BC 108년 한사군 설치 이전부터였다고 하니 이때 유교가 함께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유교가 생활규범으로 자리 잡은 시기를 삼국시대 초기로 보고 있습니다. 유교가 이렇게 일찍부터 영향을 끼쳤다는 역사적 사실은 선생님께서는 언급하신 몇 가지 사례에서도 충분히 드러납니다.
가. 유교 교육기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 국립대학 태학(太學) 창설
나. 유학 보급 - 백제 근초고왕(371-374) 아직기와 왕인 박사 일본에 유학 전수
다. 유교적 생활규범 - 신라 600년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
라. 유학의 진흥 - 신라 김춘추 647년 당(唐)을 다녀온 후 유학 진흥에 힘씀
- 신라 신문왕 682년 국학(國學) 설립 유교경전 교육
마. 유학자 - 崔致遠 등 당나라 유학생들 文名을 떨쳤으며, 고려의 崔沖은 海東孔子로 불림
고구려가 국립대학을 설치하여 유학을 장려하던 무렵 서양에서는 라틴어 성서가 완성되었다고 하니, 성서의 역사가 유구한 것과 같이 우리 학문의 역사도 그러합니다. 물론 조선 성리학의 시작은 고려 말엽인 1286년 안향에 의해서입니다. 노파심에서 몇 말씀 드리자면, 유교의 성리학은 공맹의 유학(儒學)과 동중서의 유교(儒敎)와 구분됩니다. 공자의 경세치학(經世治學)을 근간으로 하는 유학은 정치학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군현제(郡縣制)의 진(秦)나라가 무너지고 봉건제의 한(漢)나라가 들어서면서 동중서에 의해 민간의 도참설(圖讖設)과 결합하여 BC 136년 유교(儒敎)라는 종교로 정착되었고 400년간 국교의 지위를 누렸었지요. 이후 진(晉)나라 300년간은 불교의 흥성과 도교의 발흥으로 쇠락을 길을 걷다가 당(唐)나라에 이어 송(宋)이 들어서고서야 주희가 北宋 五子를 종합하고 도교와 불교의 장점을 수용하여 새로운 유교를 창립하였는데 이를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합니다.
기세춘 선생님의 명쾌한 말씀으로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겠습니다. “한나라 이전의 원시유교는 하늘님 제사를 매개로 하늘과 소통할 수 있다는 이른바 開天의 사제(司祭)인 제사장으로써 성왕(聖王)을 따르는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였으며, 漢나라 동중서의 유교는 하늘님을 대신하는 성왕의 말씀을 믿고, 이를 증언하는 선지자로써 공자를 따르는 복음주의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리학은 하늘님을 사람의 마음에 내재화시켜 <人心이 곧 天理>라고 하는 이념을 믿는 理神論(deism)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성리학은 노장의 객관주의적인 道 개념, 불교의 주관주의적 心論으로 우주론과 인성론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한족의 문화적 우월성을 읽고 금(金)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겨우 잔명을 유지하던 남송(南宋)에 주희가 나타나 중화의 정체성을 확립할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성리학은 송(宋), 원(元), 명(明), 청(淸) 등 4왕조를 거쳐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적 중심사상이었으며, 서양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17-18세기에 계몽주의를 열게 하였다고 선생님은 강조하십니다. 계몽주의가 여전히 유효한 사상인 반면 그 모태인 성리학은 잘 읽히지 못하는 현실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야겠습니다. 안향은 연경에서「주자대전」필사본과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들고 와서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합니다. 그 후 많은 학자들이 성리학을 공부하고 文名을 떨치게 됩니다.
가. 백이정 白頤正 ; 원나라에서 정주의 성리학 서적을 가지고 돌아와 보급
나. 이재현 李齋賢 ; 원나라에서 주자를 연구하고 문명을 떨침
다. 고려 삼은(三隱) ; 이색 李穡, 정몽주, 길재吉再 - 不事二君의 충절
라. 조선 건국 ; 정도전, 권근 - 성리학을 국교 지위로 끌어 올리고, 역학 ․ 경학 체계화
선생님은 조선이 성리학을 국교로 세우는 과정에 대해 ‘1392년 불교의 고려가 망한 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은 1398년 성균관 문묘와 팔만대장경의 해인사 이전작업을 진행하면서 성리학의 국교화를 추진하였다.’고 말씀하시면서 “1413년 중앙집권 관료제를 확립했다. 이것은 당시 세계적인 현상인 영주가 세습되는 봉건제와는 다르며 秦나라의 법치주의적인 군현제(郡縣制)와 비슷한 것이다. 조선에서만은 중국이나 서양이나 일본처럼 지방의 영주가 세습하여 자치권을 갖는 일반적인 형태의 봉건제가 존재한바 없기 때문이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더불어 1403년 금속활자를 보급한 점, 1420년 집현전의 설치와 1426년 삼포 개항에 이어, 1443년 민족의 자랑인 훈민정음의 창제 등에 이르기까지 민족사적 대 사건이 일어난 조선의 초창기는 학문의 진흥과 더불어 문화적 황금기를 열었다고 하겠습니다. 1517년 성리학의 교과서인 소학(小學)이 한글로 번역되었으며, 10년 후에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가 간행되고, 1560년 退溪의 도산서원, 1575년 栗谷의 聖學輯要 등의 유학의 부흥은 조선에서 활발한 학문 연구의 풍토를 조성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이 성리학을 받아들일 당시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기세춘 선생님은 “피렌체 가문에서 르네상스의 싹이 트고 있었다. 그것이 16세기에 이르러 르네상스 운동이 만개했고 드디어 종교개혁 운동으로 중세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1517년 조선에서 소학이 한글로 번역되던 같은 해에 독일에서는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긴 것이다. 퇴계가 태어날 때쯤엔 에라스무스가 愚神禮讚을 지었고, 1516년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가 1535년에 처형되었다. 1513년 왕권을 옹호하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나왔다. … 1598년 낭트칙령에 의해 신앙의 자유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처럼 서양에서도 학문과 신앙의 자유가 없던 16세기 초에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른바 사칠논쟁, 격물논쟁 등 활발한 학문 연구를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역설하십니다.
봉건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구적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중국의 성리학은 조선의 성리학으로 군림하게 되었지만 17세기에 들어서자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형해화 되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이념적 독제로 고루해지면서 후유증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율곡의 말을 빌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지금 백성은 흩어지고, 군사는 쇠잔하고, 창고는 비었는데,
왕의 은택은 아래에 미치지 않고 신의는 땅에 떨어졌으니,
만약 외침이 있어 변방이 위태롭고
완고한 백성이 무장하고 저항한다 해도 막을 병사가 없고,
먹일 곡식이 없고, 벼리를 지탱할 신의가 없으니,
이러한 때에 전하께서는 어떻게 대응하실지 알 수 없습니다.
퇴계, 남명, 율곡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성리학은 퇴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16세기 후반부터 조선은 지배계급의 곪은 치부로 인해 내리막길을 가파르게 뛰어간 셈이지요. 1559년 임꺽정의 난,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과 그 직후 일어난 8년간의 왜란이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선생님은 지적하십니다. 조선의 멸망은 그렇게 시작되었나봅니다. 西人들의 인조반정이후 尊明 反淸의 말뿐인 북벌 정책의 강화는 조선을 쇄국의 길로 안내했으며 세계 문명으로부터 더욱 더 고립시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反淸의 강화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은 조선민중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조선 성리학의 흥망성쇠를 조선의 역사와 더불어 개관하고 나니 자괴감이 많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당부말씀처럼 ‘고민했던 역사를 돌아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으며, 그 배우는 자세는 경건하고 존중하는 자세여야’ 할 것 같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의 씨앗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뱀발.
강의 정리를 해주셔서 이렇게 날름 받아 먹는다. 세상에는 공짜란 없지만, 더구나 학문에는 필시 공짜가 또 다른 헛점을 낳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되새김한다. 맥락과 처지나 상황을 알려주지 않는 앎이란 쓸모가 그만큼 얕다. 역사에 대한 인식도 그러하며, 인물에 대한 지식도 그러하다. 모두 잘게 잘게 나뉘고 부서져서 연결이 되지 않는 앎이란 더 더구나 그러한 것 같다. 한문맹이자 역사맹인 나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맥락을 설명해주니 그래도 작은 안도감이 든다. 그렇게 모르는 것이 아니구나. 조금이라도 맥락과 처지나 상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으면 낱개인 앎들이 그래도 제법 볼 품있게 연결될 수 있는 희망이라도 이는 것 같다. 가뜩이나 비슷한 고민을 담는 책들을 보다나니 반갑기도 하다.
이것 또한 공짜 속셈이니, 그 만큼 싸한 아픔을 빨리 느끼고 어려움의 응어리를 가져가는 것이 더 빠른 지름길이 될 것이다. 날름받아먹지 말고, 고민고민하다 받으면 그래도 몸에 한구석엔 붙어있으리라. 이렇게 머리로 들어와 후르르 날라가기 전에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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