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사 ㄹ ㅁ. 아 ㄹ ㅁ.그 공약수와 공배수. 활발한 모임들과 교육, 화려한 강사진과 성찰과 소통에 대한 많은 기획과 행사들. 그 흐름들이 잡고 가는 것들, 섞고 가는 것들은 무엇일까? 뜨거운 교감의 경로를 통해 서로 나누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강연소비자로 더 더 강한 강연자만 찾는 것일까? 그러다보니 강연평론에 익숙해지는 것일까? 그런 앎이 나의 삶과 어떤 공약수가 있는 것일까? 약발이 떨어졌으므로 또 들어야되는가? 삶과 앎을 따로 떼어낸 것이 어제 오늘일이 아니기에, 앎을 삶에 접속시킨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삶이란 도식이 흔들리는 것일까? 앎을 매개로 사ㄹㅁ의 간극은 움찔하게 되는가? 삶의 머리 속에 아편처럼, 아니면 일용할 양식처럼 주입될 뿐, 요지부동인 살음은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  

인문을 부여잡는 강연의 주제는 유명세인가 삶의 결을 세세히 확장할 수 있는 공감의 노력인가? 더 쎈 앎, 더 강한 강연자의 끌림을 요구하는가?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높아지는 눈은 또 다른 불감인가? 내 속에 갇혀있는 앎이 흔들려 요동치는 것인가? 그리고 그 앎이 나의 삶의 근저를 따듯하게 만들거나 나의 동선 속에 있는 일상을 다시 다른 눈으로 보게하는가? 그 따꼼한 소리에 명민해지는가? 가까이 있는 너-나로 예민해지지 못하는 나의 삶만이 아니라 나-너의 삶으로 같이 흔들리지 않는 그저 따라만 유행의 바다처럼, 인문의 단맛만 한차례 흘러내려가는 것이라면, 나의 뿌리깊숙히, 너의 뿌리깊숙히 연결짓지 못하는 앎과 삶의 언저리에도 가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저 황수관류의, 또 다른 건강강좌에 별반 비견할 것이 없다. 

앎과 삶의 연장. 확장. 안온한가? 평안하기만 한가? 그 역시 작고 얕아지고 분권이 되지 않으면 현실에서 교감과 현실의 삶의 결 나누기로 이어지지 않을 확율이 크다. 고민은 대행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 고민의 결이 모여 현실의 바다에 해본 것도 한번 없으므로, 그저 아련한 추억으로 향수처럼 흘러갈 확율이 크다. 그렇지 않기로 했음에도, 너도 나도 기획의 전제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낫다는 것이 맞기도 하는 말이지만, 우려는 [왜]하는지보다 그저 유행된 [소통]과 [연대]처럼 빠른 속도로 현실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우려때문이다. 

아무도 유명강좌나 강연회에 까끌까끌하거나 밤톨같거나 현실의 삶으로 농축되는 어떤 다른 것이 얕아보인다. 아무런 연결에 대한 기획이 없는 것 같다. 기우이길 바라지만 어디서나 강좌인데 그 숨결이 진해보이지 않는다. 그냥 하면 낫지 않을까? 막연한 것은 아닐까? 상흔마저, 상흔을 배후한 독식의 흐름. 그저 우연한 접촉점 이상도 아닌 것 같아 불안하다. 지나가는 길에 맛난 음식을 먹거나 좋은 구경했다는 정도의 인식. 우려의 그물로만 기획이 자라는 것 같다. 없는 것 보다 낫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깊어지지 않는 기획이란 늘 제일 우려스러운 것이 단맛이 빠지면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는다. 너도하고 나도하는 것도 좋지만, 접촉점의 사람들과 교감도 앎도 삶도 별반 까칠함이나 다른관점이 섞이지 못하는 경험은 그 뒷일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주제의 전환과 구체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