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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의 경제적 약자들에 관한 문제 중 제일 시급한 것 세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십대들의 억압에 관한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다.
둘째, 이십대들의 비정규직에 관해 다른 접근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셋째, 농업의 생태적 전환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들을 사회적 논의의 장으로 모아내는 총파업이 우리 사회의 한 단계 진화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연간 50만원이 가능한 대학운용 방안을 요구하고 총파업을 한다면 중학교 4시간, 고등학교 6시간 수업을 제안하고, 대학서열제의 금지 같은 것을 내걸고 사회 전부문이 총파업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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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세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이런 와중에 총파업이라니,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여기시나요? 그 총파업을 할 수 있다면, 이런 주제로 마음을 모을 수 있을까요? 마음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누굴까요? [88만원 세대]를 듣거나 읽으셨죠. 비정규직의 일상화. 20대의 80-90%이상이 처할 수 있는 환경과 세대간의 굴곡에 대한 책말입니다.
시니컬하다못해, 이런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다니, 우리에 대해, 이곳의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알기나 하는 것일까요? [88만원세대]를 읽고 어떠셨는지 모르겠어요? 별로였다구요. 솔직하시네요. 너무 세대에 치우쳐 계급을 드러내지 못했다구요. 현실성은 있지만 대안이 부족한 책이었다구요. 조목조목 비교문화의 입장에서 십대, 20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인상깊었다구요. 그래요. 편하게 갑시다. 책 한권으로 무엇을 평가하기엔 부족한 면이 많죠. 더구나 득실을 따지는 독서라면 읽는 독자의 편의에 따라 가감되는 것도 많겠죠. 개인적인 독서로는 편하게 읽거나 따끔하게 읽거나 했습니다. 이것을 읽는 십대, 이십대들은 어떨까? 싶기도 하구요. 여전히 의문은 꼬리표를 뭅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우리의 현실과 전망은? 겨울-겨울-겨울-겨울인가요? 자본주의 속살을 드러내는 지금은 암울하고 침울하기만 합니다. 봄이라지만 햇살을 드리울 수 있을까? 어떤 진단이나 방책이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 암담하기만 한데 말입니다. 저자의 소개를 받아 CEO의 그늘로 들어가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땅에 장사하거나 사업하는 사람들 속은 어떨까요? 그러고보니, 비정규직 88만원세대 가운데 확율 5%-10%의 바늘구멍을 뚫고 일터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고용없는 성장, 영혼까지 팔게 만드는 우리의 일터는 안전한가요? 어느 덧 무서운 기업으로 전락하거나 재충전이 구조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우리의 일터는 경쟁력이 있을까요? 끊임없이 경쟁을 뚫고 입사하는 친구들이 조직을 바꾸어나갈 수 있을까요?
그래요. 우리의 일터를 감싸고 있는 두번째 책 [조직의 재발견]을 보더라도 희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경쟁과 협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조직의 분열증과 맥락이 부족한 우리의 일터는 역시 개인의 헌신만 강요할 뿐, 아름답고 문화적 아우라를 갖는 일터들이 거의 없습니다. 기를 쓰며 들어간 조직 역시 사회적 위험과 파고에 견딜 수 있는 유연성과 풍부함은 점점 시간의 함수에 반비례해서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요?
저자는 난감하게도 [좋은 경제학]과 [인간의 모습을 한 자본주의]를 말합니다. 마치 거대한 계획이 있는 듯 비정규직으로 몰입하거나 나만 살아남겠다고 자신의 발등마저 찍는 촌스럽고 천민수준의 자본주의에 경악합니다. 최소한의 원칙도, 최소한의 시야도 확보하지 못하는 우리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끌려가는대로 끌려가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좋은 경제학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이야기하는 저자가 총파업이라니, 어떠신가요? 더구나 농촌생태학을 말하니 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미친듯이 달리기만 해서, 압축적이라는 표현만 숭배해서 이 지경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삶이나 앎에는 도통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다른 삶이나 촌스럽지 않은 자본의 영역이나 좋은 경제학은 마치 없는 것처럼 내달린 것이 현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교육현실과 지금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아직 견딜만 한가요? 일터에서 해고되면 그래도 무엇을 먹고살거나 할만한 것들이 떠오르시나요? 어쩌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공포는 아닌가요? 벼랑끝은 생각조차 하기싫은 그것. 내 아이만은 아니겠지하는 그런 현실은 아닌가요?
저자는 이런 암울한 이야기를 다음과 이어 이야기를 나눕니다. 세계공황. 1929년의 공황. 그 말미를 이끌면서 나타난 것이 무엇인가요? 전쟁이자 파시즘이죠. 어려움을 틈타 야비하게 스멀스멀 우리를 잠식하는 기운들이 그것이죠. 경쟁을 이야기하며 협동을 이야기하지 않는, 내새끼만 잘되면 만사가 아무일 없는 현실은 쌍둥이처럼 닮아있습니다. 십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공부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너만은 경쟁에 이길 수 있다가 아니라, 우울의 극단, 병리의 극단에 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것이 경제의 가장 야만적인 상태. 전쟁의 병리로 이어질지 모른다고 합니다. 한국-중국-일본의 평화가 아니라, 더욱 더 서로를 자극하는 또 다른 천박한 상태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이점은 저자가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강남 대치동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잠식한 괴물의 나라. 우리는 그 한 복판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더 더구나 신자유주의 아니 승자독식주의를 종교처럼 떠받들고 온몸으로 나아가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이없는 [괴물의 탄생]이 그 프랑켄슈타인이 저지르고 있는 일들을 그저 힘없이 바라만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
저자의 총파업 이야기는 암울한 현실에서 출발했는지도 모릅니다. 절망밖에 없는 현실. 좋은 경제가 아니라, 좋은 주체도, 양식있는 CEO도, 평화를 주장하거나 현실화하려는 노력조차 없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안타깝게 외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이야기란 그래도 생각있는 사람들이 묵묵히 잘 견뎌내길 희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책의 기승전결에서 각기 따로 나누고 있고, 4권의 시리즈를 통해 관통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예의, 합리성, 열정의 결합을 나누고 싶은 것은 아닐까? 주제넘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어쩌면 세상이 늘 흐르는대로, 시키는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물꼬를 , 주체의 물꼬를 경제의 물꼬를 돌리는 연습이 함께 한다면, 저자가 마무리하고 있는 표현 "우리는 결코 지는 법이 없습니다."에 좀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까 합니다. 견디고 있는 3년도, 다가올-저자가 우려하고 있는 30년도... ... 더 천박해지길 원하지 않는 100년도, 200년도, 300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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