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에 대한 관심 - 나를 무너뜨리다. 너를 무너뜨려라
스스로 돌이켜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아니 이기적이라는 것이 맞겠다 싶다. 나를 잘 짚어내는 친구. 어제 술자리에서 동기녀석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최근의 관심사이기도 하구. 어제 내려오면서 읽던 김우창교수의 정의의 조건 모두도 그러한 이야기였다. 친구는 나에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야구든, 축구든 직접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도통 보는 것과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없는 나에게 일침을 가한다. 사실 코리안시리즈 몇차전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선수이름도 도통 모르고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고 했다. 시를 철저히 좋아하는 한켠은 늘 다른 허전함이 도사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으로 무용하다고 치부하곤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이 맞겠다. 그 무용이 언젠가는 문제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묻어오길 시작했다.
구체보다는 추상을 더 선호하는 성격이라, 추상의 직선에만 매료되길 반복하고, 꾸불꾸불은 늘 외면하거나 곁가지를 잇으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반신불수가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간간히 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데... ...
사소하거나 사변적이라는 생각의 언저리는 늘 용도폐기의 전제가 있다. 논리나 사실의 나열과 세밀함에 대해 거부한 것은 아니었을까? 단순함으로 보관하고 담으려는 욕심들 가운데 하나하나 그 사변적인 잡다함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한 것은 아닐까? 사대주의-자판기 교육기계를 통과한 10대의 기억들 가운데는 사소한 것과 결별을 요구한 일상들의 동선, 연애에 넋을 잃어 보낸 20대의 편린들을 되새기다보면 나란 인간이 얼마나 내 중심축으로만 사물을 배치했던 것들만 보인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들을 없는 것으로 세뇌했던 모습도 보인다. 관계의 연장은 없고, 관계들을 애써 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사소한 것들을 잇지 못하는 무력함은 혼자만을 세웠던 것은 아닐까? 내 삶의 변방에 남들의 삶을 묻히지도 못하는 무능함이란, 그 일주문으로 외로운 고도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딴생각
뇌 1) - 만약 기억을 심을 수 있다고 하면, 리셋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기억을 고스란히 이전할 수 있다면 그런 끔찍함이 뇌과학의 진전으로 이뤄진다면
상/사/념/려 2) - 사고가 연결될 수 있다면, 생각이 - 상/사/념/려-로 구분해서 모아지고 자랄 수 있다면, 더 이상 나를 고집하지 않고 싶다. 내 속에 말잘하고 사변적인 그를 그녀를 심고 싶고, 그 생각(상/사/념/려)를 빌려주고 싶기도 하다. 내속에 소설과 작은이야기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 무용의 맛을 보이게 하고 싶다. 다른 눈들이 만날 수 있다면, 다른 감수성이 서로를 내어주어 보듬을 수 있다면, 교차면들이 있다면... ...
추체험 3) - 글씨, 조각, 그림, 시 의 맛을 보려면 조금이라도 할 줄 알아야한다.
내삶만 있고 너삶은 있지도 않은, 외로운 나만 만드는 삶이란
1) 일터 회의 - 무겁고 심각한 회의인데 딴 생각이 나서 적어두었다.
2) 해콩님 페이퍼 정민씨 정리본인데 생각의 결을 볼 수 있어 옮겨쓴다.
3) 미술사학 관련하여 방법론에 대한 글이 매력이 있고 단어도 적절하여 빌려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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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세계의 바깥에 너희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희들은 나를 가지고 춤을 추고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의 세계는 내가 보는 너희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아 우리는 모두 인형들이고 너희들이 들고 있는 인형 역시 나일 것이지만 너희들이라는 인형을 들고 있는 유령 역시 바로 나이지'"( < 제1막 인형의 미로 > 부분)
새로운 언어의 개척자라는 측면에서 김경주씨는 강정씨보다 더 극단적이고 근본적이다 한겨레 0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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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누군가에게 무어라도 주지 않으면 이 저녁이 계속 될 것 같은,
이 검푸른 시간 밖으로 걸어나가지 못할 것 같아
주머니를 뒤적여 보기도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합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한 그릇의 설렁탕도 아닌
한 잔의 차가운 소주도 아닌
종이 한 장의 무게도 채우지 못하는 몇 줄의 시 나부랭이입니다
당신이 그래도 10월의 한 장 남은 저녁을 넘기지 못하는
한 삼십대 가장의 쓸쓸함에 동행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염치없지만...
언젠가 당신도 이런 저에게 염치없는 손을 건넨다면
그 손을 잡아드리지요.
지금은 걸어갈수록 짙어가는 어둠 속으로 향합니다.
지금은 걸어갈수록 우물의 바닥같이 추워집니다.
그래도 당신이 옆에서 걷고 있겠죠.
참 고맙게도 이제 막 하루가 저물어가네요. (서진배시인으로부터 온 시 덧글)
11월 초순을 넘기고서야 게시판에 이 시를 보았다. 그리고 그 시가 시월말미였다. 아마 그날이었다. 일터 일로 세미나를 참석하지 못한 미안함도 있었고, 첫 작은강의이기도 해서. 벌서 제법 얼콰할 정도의 술로 취기도 있었다. 택시로 이동하는 동안 올라오는 취기는 점점 세어지고, 도착한 뒷풀이의 기억은 불빛처럼 반짝일 정도였다. 제 몸에 붙은 쓸쓸함이나 외로움들이 이렇게 잡혔다. 쓸쓸하다고 외롭다고 힘이든다고 이야기를 했어야 할터인데. 이런 몸짓이 멀리서 잡힌다. 쓸쓸함이나 외로움이나 힘겨움에 익숙하고 표시를 내야...쓸쓸함도 외로움도....따듯할텐데. ... 고맙다. 이렇게 곱게 담아주는 친구가 고맙다. 어제서야 이 시가 나를 위한 시였음을 알게되었다. 따듯한 연고의 기운이 가슴에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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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외로움이나 쓸쓸함에 소유권이 있는 것일까? 시를 읽으며 덧글에 있는 내모습을 읽으며, 쓸쓸함이나 외로움보다 [나]에 대한 연민에 더 익숙해진다. 염치없는 손을 건네지도 못하는 쓸데없는 나의 울타리만 잔뜩인 나를 보며 갈등한다. [외로움이나 쓸쓸함들]이 너로부터 생긴 것들임에도 그것을 나의 울타리에 잔뜩 가두려했던 것은 아닐까? 소유욕이 강해, 그렇게 풀어져 느슨해진 쓸쓸함만이 검문당하고 마는 나는 어떤가?
1.1 아마 쓸쓸함이나 외로움을 싼 값에 바겐세일했더라면, 늘 나를 줄이고 너를 편하게 넓혔더라면 마음은 덜 쓸쓸했을까? 알량한 나마저 이식하지 못하는 [너-나]라니? 마음도 빌려주지 못하는 주제에...캄캄한 어둠의 시간을 견디겠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염치없는 손]을 건넬 수 있을까? 무장무장 커버린 홀로나를 건네줄 수 있을까? 너로부터 생긴 감당의 몫이 많은데 왜 그 감당을 왜 나에게 꾸겨넣고 이고, 짊어지고 있는 것일까? 081118
2.0 대물림 송년모임 날. 식구들이 먼저가구. 일터 동기와 저녁을 먹구 움직일 요량을 한다. 몇순배하니 술이 얼콰하고 움직이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대물림 사람들 얼굴 기억이 긴가민가 하며 깨니 옷을 입은 채이다. 안해가 하는 말. 왜 이리 술을 많이 마셨어. 오는 길 차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나.? 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가고, 대물림 식구들에게 나누고 싶은 마음들이 잔뜩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대면하고 싶은 것은 아닌 것도 사실이구. 하지만 그렇게 대면하는 것이 나이다. 챙피하고 부끄럽다는 사실보다 그것이 나인 것. 자존심을 세우는 나의 경계가 아니라 그렇게 경계가 희미한 것도 나. 경계가 무너진 것도 나일뿐.
그렇게 생각해본다. 추스리는 나. 망가지기를 저어하는 나의 정체가 아니라 희미한, 무너지는 나에 대한 연민을 해본 적은 있는 것인지 말이다. 추스리려는 생각뿐은 아니었는지? 망가져 의탁해본다고, 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닐런지? 일터 일로, 힘든 동료를 생각하며 챙긴다는 것이 오버였겠지만 그렇게 챙겨주지 않으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정작 나도 챙겨야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지만, 어제까지는 그렇게 챙겨야 했고, 죽음의 문턱에 간 동료의 삶에 대한 문제도 진지하게 얻을 수 있음이다. 어제의 한순간이 그에게도 나름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나의 흐릿한 동선에 대한 측은지심도 든다. 뱉어내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늘 그런 나를 뱉어내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음에도 말이다. 이 소리가 더 망가지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ㅡ렇게 추스리려고 하니 더 망가진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점이다. 맛이갈 분위기의 날에 대한 예상력이 높아진 것인가? 굳이 나를 이기려고 하는 마음은 줄어드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계를 흐릿하게 놓아본다. 흐릿흐릿.
3. [세월이 젊음에게] 서울 출장길 차 뒷자석에 놓여있는 후배책을 들여본다. 적당히 독자를 의식하고, 적당히 얘기를 만들거나 둘러낸 것들. 읽으며 스친 몇꼭지를 남긴다. 신화의 작가 킴벨을 빌리면저 자아 속에 있는 나의 위치를 규정짓는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기에 늘 중심이 그것을 제외한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거기에 붙어있는 나에 대한 인식은 며칠전 마노아님 페이퍼에서 본 [나]와 [자존감]이란 설명에 겹쳐지기도 한다. 싫고 나쁜 모습의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훨씬 풍요롭고, 풍부하고, 적확하다는 이야기다. 081215 서울 출장길
4. [그림에, 마음을 놓다] 관계의 속성은 방랑에 가까운 것 같다. 자연을 방랑하는 태도로 상대방의 세계에 다가가면,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은 배로 넓어질 것이다. 자연은 해마다 돌아오는 계절처럼 규칙적이면서도 형형색색 그 모습이 변화무쌍하고, 때론 폭풍우처럼 예측 불가능하다. 자연은 늘 바위처럼 한결같은가 하면 파도처럼 모험적이고, 얼음처럼 차갑기도 하다. 자연을 사랑하듯 사람을 맞이하고 사랑해야 한다. 91 08121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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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 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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