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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정치의 무덤’ 위에 핀 촛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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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가 이명박 정부를 좌초시킬지도 모른다는 보수적 관점이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진보적 관점 모두 수용할 수 없습니다.”
지난 20일 정년퇴임한 고려대 최장집 교수가 마지막 수업에서 한 말이다. 그는 “(집회 참가자들이) 직접민주주의적 요소 확대를 통해 이상적 민주주의에 대한 선망을 보이고 있지만 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최선의 체제라고 생각한다”며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정당정치의 복원 내지는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 강화, 이를 통한 운동의 역할을 축소하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선 “역시 최장집이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정부 여당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야당의 지지율은 10%대를 맴돌고 있는데다 촛불집회에서 여야 가릴 것 없이 정치권이 배제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는 ‘반(反)정치’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정치의 무덤’ 위에 핀 꽃이다. 그간 정당들이 해온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지만, 이후 정치권이 더 큰 불신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그렇다고 ‘촛불정당’을 만들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어떻게 해야 정당정치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세 가지 의제를 던져보고자 한다.
첫째, 기간당원제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대안은 없는가? 기간당원제는 정당 민주주의의 희망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성정치 기득권 세력의 방해 때문인가? 그게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연고조직 가입률은 89.2%(동창회 50.4%, 종친회 22.0%, 향우회 16.8%)에 이르지만, 공익성이 짙은 단체들의 가입률은 2%대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건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는 문화며, 이런 토양에서 기간당원제는 ‘연고 기간당원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독특한 현실을 감안한 참여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둘째, 기존 ‘집단적 응징 투표’ 현상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유권자들의 투표 행태는 ‘반감’(反感)과 ‘응징’을 두 축으로 삼고 있다. 정치가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투표 행태는 극단적인 쏠림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쪽을 죽였다가 저쪽을 죽이는 식으로 돌아가면서 죽인다. 그런 죽임의 부작용이 나타나면 그땐 직접행동으로 해결하려고 든다. 너무도 비생산적이다. 의원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느슨한 형태의 정당 조직문화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인물 평가가 가능해지고 극단적인 정당 쏠림 현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의원이 되는 것이 출세로 여겨지는 기존 풍토를 바꿀 수는 없는가? 그간 시도된 여러 정치개혁 프로그램이 실패로 돌아간 최대 이유는 ‘정치인=국민 뜯어먹는 직업’이라는 등식을 전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은 무조건 악(惡)으로 보거나, 물갈이를 많이 하는 걸 개혁으로 보거나, 세상에 대해 단순하게 말할수록 개혁파로 본다거나 하는 수준에 머물러 왔다. 그러질 말고 의원에 대한 예우를 서민 수준으로 낮추면서 금배지를 ‘근로봉사’의 상징으로 여기게 만들 수는 없는가?
나는 세 번째 의제에 관심이 많다. 유치하거니와 황당한 제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처럼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이들이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도 개인과 가문의 영예를 위해 금배지 한 번 달아보겠다고 목숨 걸고 발버둥 치는 풍토가 계속되는 한 정치개혁은 영영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정치의 무덤’ 위에 핀 촛불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면서 해 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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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을 보다. 왠만하면 남의 생각을 옮기기 싫어하는데 경황이 없긴 없는 모양이다. 적반하장의시대 요동치는 정국은 마음과 몸에 찰싹달라붙다. 그래서 더욱 스스로 정신도 생각도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회의감, 뭔가 제자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나오고 든다. 열정과 생각, 아이디어들이 어디를 막론하고 큰 홍수처럼 여기저기 구석구석 차오른다. 어디쯤 스며들고, 어디를 들어갔다 나오는지도 모르겠지만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차오른 수위만이 잠깐 잠깐 감지될 뿐이다.
저 수위와 현재의 수위의 간극. 그 많은 홍수같은 열정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어디 한 곳만 바라보는 흐름은 아닐까? 그것이 샘물이 솟아나오는 것일까? 아니며 흘러가는 강물,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방향만 확인할 수 있는 그 물결들인가? 밀물이라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면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샘물이 솟는 그곳들은 얼마일까? 샘물의 줄기와 연결될 수 있는 실개천들은 얼마나 있을까?
접힌 곳의 의견처럼 대의정치는 이런 정황도 열정도 아이디어도 받을 시스템도 받을 역량도 없는 사막과 같다. 여전히 반감과 응징으로 사막화해 온 일상은 이런 현실을 응시하지 않는다. 현실화와 과잉된 열정의 강물 사이의 간극은 만조와 간조, 홍수와 가뭄 사이의 수위 차이다. 우리에게 정치는 죽은지 오래되었다. 4-5년만에 한번씩 투표만 하는 현실은 진보도 틈만 나면 투표하지 않는다. 제도안의 정치 영역에 있으면서도 사막 바깥의 영역과 차이를 고려하지 못한다.
어쩌면 사막화된 정치를 감싸안고 다니는 아무런 뿌리도 없는 절규만이 지금일까? 그들은 받을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하는 방법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로 인한 구조다. 그 들 뼈에 붙은 살들은 그렇게 시키는대로 하고 간다. 과잉된 열정과 의도, 아이디어도 가져갈 생각이 없다. 풀어낼 능력도 없어보인다. 시간의 함수로 낮아진 수위에 걸린 온갖 날생선들을 모조리 썩혀서 버릴 확율이 크다.
사막화된 정치란 그물이 응축된 국민의 요구도 열정도 노력도 건져낼 수도 없고, 해석하지도 못하고 풀어내지도 못한다. 어쩌다 걸린 대어들도 생선들도 가져놓을 곳도, 요리하는 방법도 몰라 썩히고 어찌할 줄 몰라 허덕일 것이다.
홍수라는 표현도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불안이나 현실을 감안한다면 작은배에서 닻을 내리거나 내려서 어이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게 하는 현실. 내가 내릴 곳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적은 상황은 아닐까? 내가 탄 배가 어디로만 향해야 되는지? 닻을 내릴 곳은 있는지? 이 곳의 작은 배들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 이곳이 강물이 다 빠진다면, 가뭄이 닥친다면 어떤 우물이나 샘물로 시작할 것인지?
현실과 지금의 간극은 현실과 이상만큼 거리가 크다. 반감과 응징이란 뿌리로 만들어진 강물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은 아닌가? 이 큰 강물이 샘물과 청초한 시냇물이 만나 현실을 채우고 있지 않기에, 그렇지 않겠지만 말하지 못하는,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말해야 할 곳을 찾지 못한, 말할 공간을 한번도 만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동선이기때문에 주저스럽다.
현실이라는 간조기와 반감-응징으로 어이없이 만들어진 꿈같은 현실의 홍수만조 사이. 만일과 현실의 사이를 냉정하고 엄정하게 보고 생각하고 또보고 갈 수 있는 길, 할 수 있는 방법, 해야하는 것. 아니면 정말 홍수물을 샘물로 쓸 수 있는 방법이나 우리의 담수로 갈수기를 고려한 발명을 연습해보는 일도... ...관점을 석방시키는 홍수의 국면을 선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 머리아프다. 촛불정당??이라도 ....... 아~. 쏠림이 없이 온전히 문화로 뿌리내리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스스로 발 딛는 곳의 연결망과 현실화에도 시선만이 아니라 고민을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후 국면에 대한 말로도 연대를 위해 촛불의 간조기를 감안하고 연습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반찬이 너무없다. 아니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촛불의 자양분을 현실로 내리려는, 콩나물에 물주듯이 퍼붓더라도 콩나물을 키울 수 있는 여기 발딛는 곳에 대한 생각품기를, 제 몸에 끊임없이 붓는 연습을... ...
노학자와 지식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현실화는 반비례다. 제도권안이 할일이 가장많고 제도곁, 지금처럼 재야에서 하는 동선은 현실화와 한참이나 먼 것이 현실이다. 연습은 제도화시킬 수 있는 방법부터 거꾸로 거꾸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