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아마 십년쯤으로 기억이 되돌아가는 것 같다. 아빠손에, 엄마 손에 삼촌과 이모들을 그렇게 자주보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외치던 구호들도 동요들에 대한 기억들.  대전역광장, 오월말미의 신록은 두툼하고 짙었다. 꼭쥔 손, 아빠와 함께 내미는 손은 저절로 힘이 들어갔고 재미있었다. 거리를 누비며, 따라부르는 송아지송, 미국소는 미친소 너나~ 먹어라. 드셈도  그러했다.  그쯤해서 붙인 아파트 한편에 걸린 쇠고기반대 현수막. 친구들도 부러워했고 자기집에도 걸고 싶어했다.

그 뒤로 몇달간이 추억이 자주 떠오른다. 초딩 2학년.  한차례 파도처럼 불어닥친 촛불문화제, 촛불토론회, 촛불대자보, 삼삼오오대자보단, 삼분발언회의 꼬리가 이어지면 엷은 미소가 흐른다. 지금은 고3. 언젠가부터 시작된 8시간 학습권쟁취하기와 미국이 아니라 유럽따라하기의 물결은 삶을 미묘하게 흔들어놓았다.  파격에 파격을 거듭하면서 엄마의 마음은 작은 동네의 분위기에 섞여 그 뒤로 다른 기류를 타고 있었다.

그 때 천정부지의 기름값, 곡물값이 팝콘처럼 커졌고, 촛불문화제로 시작한 주부시국토론단의 행보는 놀라웠다. 따로국밥처럼 놀던 인식의 그물. 유전자조작에 미동도 하지 않던 엄마는 광우병사태로 시작한 먹을 거리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교묘해지고 치밀해졌다. 제멋대로여사의 씨에스아이드라마에서 시선을 옮겨놓은 것도 아마 그때쯤인 것 같다. 먹을거리 라벨에 대한 관심도가 내 과제물과 준비물, 과외를 챙기던 습관에 버금가게 달라졌다. 무엇을 먹게하고 무엇을 먹게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을 먹게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하는지로 질문이 달라졌던 것 같다.

그해 가을쯤. 주부시국토론단은 내삶에 있어 주요한 결정을 내렸다. 과외를 포함해서 하루 8시간 공부에 매여두지 않기로 작심을 하고, 작은 사회단체와 연결해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한다. [같이 다르게, 새롭게 꿈꾸기] 강연은 그 뒤로 작은 파장을 몰고왔다. 물론 나의 과외도 피자파이처럼 몇개가 짤려나갔다. 잠시 텅빈 시간들 때문에 어쩔 줄 몰라했지만 이어지는 기억들은 신선했다. 자전거도 마음대로 탈 수 있었으며, 삼촌과 이모들과 함께한 주말 소풍같은 촛불마당은 늘 새로운 잔치였고, 자극제이자 놀이터였다.

그리고 작은 동네 생협,아파트부녀회, 학교급식소위원회를 중심으로 [먹을거리 공동구매단]이 꾸려졌는데, 매우 행보가 특색이 있었다. 구청, 주민자치센터 단위로 해서 [너네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요구가 이어졌다. 그때 2mb정권은 연이은 민영화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악재의 악재를 거듭했다. 물사유화작전은 쇠고기고시와 은근슬쩍 밀어제쳤고, 국면을 타개한다고 하면서 발표한 민영화 발표와 소폭 청와대개각은 더욱 더 촛불을 높이게 만들었다. 절망이 한 95%로 먹구름을 드리울 쯤, 희망의 꼭지를 점점 넓히게 한 것은 오히려 기계사단인 2밀리바이트 예스맨들 덕분은 아닐까 한다. 그들은 마치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았다. 연신 어쩌면 그리 짜고하는 것처럼 악수의 악수를 거듭 두었다. 

기계같은 딴나라당 대구부산권역 시장들은 그 와중에 낙동강운하를 주장하다가 인터넷의 폭탄을 맞았고, 대전시장도 금강운하를 국면타개책으로 주장하다가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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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년, 미니의 십년전 회상 (2) (作)
    from 木筆 2008-06-01 12:59 
    이렇게 행정단위의 경직성은 오히려 무기력함을 보여주었다. 그 와중에도 한미에프티에이 찬성에 쇠고기만 반대하는 기만적인 통합민주당 역시 국면을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식의 균열과 공백을 채워준 것은 여전히 자발적인 누리꾼과 그 인식의 폭을 넓혀가며 만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유연한 행보였다. 조금씩 느리지만 세분화된 공극의 채움은 점점 예민해져갔다. 아마 그것 역시 작은 실타래를 푸는 개사곡들이 아니었나 싶다. " 아빠가 출근할 때 기름 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