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양심-인권  리콜과 다시 관계맺기


변 화


벌써 아카시아향이 짙게 내리는 계절이 왔군요. 날씨 안부가 부담스럽지 않을 거라고 이렇게 시작하는데요. 어찌하여 날씨이야기도 그렇지 않은 주제가 되어 버렸군요. 자본의 세계화나 경제만의 세계화처럼, 요동치는 날씨가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부담스럽습니다. 봄에 차례차례 피던 개나리 목련 벚꽃 철쭉들도 그 시간의 간격이 짧거나 한꺼번에 만개를 하더군요. 봄이 화사하다고 좋아할까요? 올해는 유독 황사가 적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름이 슬그머니 걱정됩니다. 가뭄이나 이상고온, 아니면 집중호우………….


그래요. 세상이 변했습니다. 더욱 더 예측가능하고 일상에 부담의 적은 일로만 변화가 드러나면 좋을 텐데. 자본만의 세계는 이 작은 나라에 오로지 돈만 생각하거나, 끊임없이 더 벌겠다는 사고만 팽배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속도와 압력, 그로인한 원심의 효과는 우리의 작은 일상마저 낱낱이 가장자리로 뱉어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5년전, 10년전, 15년전, 20년전으로 한번 돌아가거나 그쯤에서 지금을 돌이켜볼 수 있을까요?


상식-양심-인권


세상은 기준이 바뀐 것이 아니라 엄연히 변했습니다. 상식이라고 여기던 모든 것은 악화된 것은 아닐까요. 양심이라는 것도 시간의 속도를 달리하며 변한 것은 아닐까요. 아파하거나 느끼는 감수성이 혹시 퇴화된 것은 아닐까? 인권이라는 것도 더 이상 약자를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식-양심-인권은 그 자리에 머물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상식 따로, 양심 따로, 인권 따로 거나 그것들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그렇게 한꺼번에 묶어 (상식-양심-인권)은 세상을 지켜내는데 도움이나 되는 것일까요?


자본에 의해 좁아지고 경제만의 지구화로 좁아진 이 땅덩어리는 정치의 세계화나 문화의 세계화, 아픔의 세계화엔 더욱 더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혁명, 아니면 더욱 더 깊숙이 종교개혁 하는 시점으로 돌아가 그 원점을 논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돈과 성장에 세뇌된 우리의 인식 저편에 점점 더 불감증이 강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정말 그것에 중독되어 이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한쪽에 점점 처박히는 것은 아닐까요. 인권이나 양심도, 상식마저도 말입니다.


자 라 기


상식과 인권, 양심을 회복하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들 마음에 혹시 세상에 대한 인식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5년전, 10년전, 15년전, 20년전의 기준으로 지금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본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는 일상은 어이가 없어집니다. 유독 이땅, 이 나라는 자본의 마름인 듯 더욱 더 설치는 것은 아닐까요? 그 와중에 우리는 서로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일까요? 아픔 마음을 서로를 향해 내밀거나 품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생각과 변하지 않는 수사만 전해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들의 관점은 안녕한가요? 우리의 기준이나 관점은 20년전-15년전-10년전-5년전으로 풍요로워진 것일까요?


다 시 보 고


역시 하루에 1년 치의 7-8할이 되는 비가 한 번에 오는 강릉의 집중호우 피해를 경험해도 운하를 파고,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나라나 시스템을 만드는 나라도 많은데 광우병 소를 들여오거나 아무런 합의 없이 자본에 항복하여 GMO는 이미 들여왔고, 8시간 노동권을 주장하지만 아이들의 8시간 학습권을 주장하지 않는 이상한 나라의 0교시와 곧 학원자본에 점령될 일상. 인권이라는 것도 민주만 생각 고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압박과 점령되는 선, 점점 작아지는 우리의 반경에서 다시보아야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 속도와 압박에 우리의 상식도 양심도 인권도 하찮아지는 것은 아닐까요?

 

다시 관계 맺기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따듯한 불씨와 열정은 예전과 같은 호흡, 같은 인식으로 관계 맺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아픔의 촉수를 더욱 더 예민하게 해보면 어떨까요? 지구 반대편까지.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세계의 비참에, 목도하는 자본만의 일상에 생각이라도 균열을 내어보는 일. 한번 쯤 옆의 따듯한 모임. 사람들과 마음과 고민을 나눠보는 일. 함께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는 일. 함께 다른 식으로 행동해보는 일. 따로 또 같이 다른 식으로 살아보는 일. 조금 더 든든해지고, 이런 일들이나 관계로 둘러싸이면 우리의 따듯한 불씨와 열정은 온전히 작지만 옆으로 옆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놓친 관점들을 연결시키고 살려낼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 진심들이 동심원처럼 퍼져 불감하거나 중독된 일상을 흔들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머리에 머무는 앎이 아니라 가슴으로 내려오고 몸으로 꽃피는 일상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몸으로 꽃핀 일상들이 가슴으로 머리로 올라가는 일상을 꿈꿔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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