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이라는 무의식이 갖는 함의
1.
해내야한다는 강박. 꼬리표붙이기. 다른 것에 대한 경원. 홀로 우뚝서고 싶은 야욕
2.
백명의 아빠, 엄마/ 한명의 아빠-엄마/아이에게 되라고한다.
3.
늘 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4.
문화라는 수로, 예술이라는 수로, 공유라는 수로, 철학이라는 수로
아름다움이라는 무의식이 함유하는 의미/문화적이라는 의식이 갖은 함의
5.
공유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웅숭깊게 만들어 고이게 할 수 있을까? 정복의 코드가 아니라 스스로 낮춰 모이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한명이 과외하면 10만원 100만원이 되지만, 만원이 열명, 백명이 모여, 만원의 행복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모든 것을 감당해내야하는 엄마-아빠가 아니라 열명의 아빠, 백명의 엄마의 색깔이 아이에게 삶의 관점을 틔우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십만원이 천원이 되는 공연을 늘 일상에 깃들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공유의 네트워크는 정녕 희망사항인가? 시간의 강박에서 풀려날 수는 없는 것일까?
6.
경제적이라는 무의식이 갖은 함의는, 이렇게 고루한 표현을 쓰는 이유. 개인이라는 점이 늘 사회라는 야생의 세계를 온전히 감당해내는 모습. 그 모습이 흡사 구석기시대 사람과 같을지 모른다. 내가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명은 아쉽게도 모임이나 단체에 대한 사고에서도 순환된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는 늘 성곽을 쌓고,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줘야한다. 나라는 점. 내가 있는 모임이라는 점. 내가 있는 단체라는 뭐가 있는 전제가 늘 도사리고 있다.
7,
생활좌파-마음좌파-몸좌파에 대한 논의가 정녕 술자리 안주는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조금이라도 경제적이라는 함의를 벗어나는 시도를 할 수는 없는 것일까? 무수히 붙이는 레떼르의 잔치를 끝낼 수는 없는 것일까?
나라는 점이 아니라, 나-너라는 선, 모임이라는 붓이, 사회라는 공간에 난초를 그리듯 그릴 수는 없는 것일까? 사회라는 여백에 한획, 한필, 여백을 서로두는 란을 칠 수는 없는 것일까? 완충지점마저 감염되는 세상은 숨쉴 곳이 없다. 그늘도 마당도 없다. 모임과 모임 사이, 문화의 수로를 내고 잇는 일. 따듯한 온기가 흐르게 하는 시작도, 뜨거운 여름 시원한 등목같은 시작은 어쩌면 이렇게 촘촘히 또아리틀고 있는 경제적이라는 무의식을 걷어내는 것에서 새로 시작될는지도 모른다. 오고싶은곳 가고싶은곳이지 않고, 올라가야할곳이라면 아니지 않는가?
뱀발.
이것 역시 경제적인 산술이네. 이래서 경제적인 무의식이 문제라니까. 아 조금만이라도 어제와 다르게 숨쉴 수는 없는 것일까? 아 조금만이라도 어제와 다른 마음이 깃들게 할 수는 없을까? 아 조금만이라도 경제적 야욕에 풀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숨을 죽이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아 조금만이라도 만원이 천원이 되게하는 하루는 없는 것일까? 아 조금만이라도 내것이 우리 것이 되는 순간이 없는 것일까?
이 생각은 어제 있던 분들의 마음결이죠. 제것이 아닙니다. 마음도 몸도 그 시간도 빌려썼을뿐. 생각길은 주제넘게 현실저쪽으로 자꾸 기웃기웃. 그러니 더 현실적인 생각이 아닌가보다. 아마 현실은 더욱 더 경제적인 꼬리표부근에 있을지도. 어쩌면 모임환원론..어쩌면 신석기시대주장꾼의 객적은 소리...
080427,28 홍*면/ ㅇㅇㅇ,ㄱㅇㅎ,ㅅㅈㅂ 오리,맥주. 取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