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남짓한 자본주의를 음양이나 동양적 사고, 아니 에너지 보존의 과학적 원리로 설명하더라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다.  땅 속에 묻혀 갇혀 있던 에너지를 불과 200년 사이에 끄집어내어 지지고 볶고, 비틀고 날리고 하여 먹고 입고 자고, 생활하는 곧곧에 심고 호흡하는 것으로 쳐보자. 그것을 끄집어내어 내것이라고 환경과 자연은 무관하다고 한 짓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생태적인 부가 아니라 자본의 부만 살지운 것은 결과는 무엇일까? 그렇게 부르짓던 잘 먹고 잘 살자라는 논리와 이상은 여지없이 "아니오"를 외치고 있다.

자본의 본연적 생리는 무엇일까? 증식과 집중, 에너지는 아닐까? 무한성장의 가도를 달리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브릭스를 끌여들이는 노력이 성공할 수 있을까? 국가를 이미 넘보고 수중에 넣은 자본은 얼마나 더 집중을 할까? 얼마나 합종연횡에 이어 독식을 할까? 또 다른 공룡들은 아닐까? 무한 성장을 바라는, 에너지를 거침없이 먹어치운 공룡시대와 닮아 있다. 과연 지속가능할까? 파열음과 경고는 아닐까?

더 이상 끌여들일 에너지가 부족하단다. 공룡같은 자본을 키운 덩치만큼 먹일 에너지가 부족하단다.10년 20년 사이에 고점을 지나 빠른 속도의 하향을 그린다고 한다. 자본주의는 극복해낼 수 있을까? 에너지와 금융, 그리고 다른 것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자본은 단물을 빼먹고 죽든 말든 나머지는 어이할까? 작은 공룡들은 버틸 수 있을까? 버틴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먹을거리의 집중과 자본에 포획된 역사는 참으로 기가막힌 것 같다. 140년된 식품은 온갖 에너지를 보태어 지구의 반대편에서 식탁에 올린다. 설탕과 비육된 지방덩어리 고기와 소금, 온갖 향신료와 보존제로 범벅이 되어 비만으로 기아만큼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녹색혁명과 기아를 해결할 것처럼 부르짖던 국가는 자본에 건강도 최소한의 기아도 지키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집중도 만큼, 그 많던 밀, 옥수수, 쌀, 콩의 종류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종으로 단순화하여 키우고 먹이고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만큼 먹을거리는 건강과 동떨어진 세계화를 이뤄내고 있지만, 바로 그 이유때문에 위기를 맞고 있다. 육해공군이 모두 면역력과 건강을 좀먹고 있다.

자본주의는 거대한 도시를 만들어냈다. 이 폴리스국가는 여지없이 슬럼을 그늘처럼 만들고 양쪽 모두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자원의 집중과 중독, 끊임없는 신천지같은 이미지들의 향연은 고향을 내팽겨치게 한다. 세계인구의 1/6은 기아선상에서 헤어날 줄 모른다. 더욱 더 가혹한 자본은 국가를 협박하며, 더 싼 굶주림에 허덕이는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 도시는 도시대로 반대편을 향해 치닫는다.

그런 자본의 시대는 안녕할까? 무한증식의 욕구는 점점 사람을 내동댕이친다. 자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식욕도 더 늘어, 작은 공룡들의 먹을거리조차 제 것으로 만든다. 자본은 커지고 그곳에 고용된 사람은 준다. 제어할 줄 모르는 자본은 자신의 꼬리조차 먹어치울지도 모른다. 드디어 국가를 넘어서, 국가조작을 넘어서 물리력을 앞세워 에너지도 제 것으로 했지만 늘 불안하다.


찬란한 자본의 시대는 걱정거리가 생긴 것 같다. 물론 그 사슬에 엮여있는 무고한 사람들의 삶이 가장 비참한 것이겠지만, 날씨가 하루가 멀다하고 미친다. 불과 100년만에 0.7도가 올라갔을 뿐인데, 연신 기침이다. 고열에 냉증에 주체할 줄 모른다. 가뭄과 한파, 폭우와 폭염에 물론 좋아라, 즐기는 공룡의 몰골을 보는 것이 비참하다. 주검 뒤에 돌아서서 주판알을 튕기고, 돈을 세고 있을 것이다. 수천가지 종들이 전멸하고, 또 다른 재생에너지라고 대량으로 한 작물만 한 곳에 심는 어리석음을 반복할 것이다. 이렇게 자본의 집중만큼, 위험도 비례해서 커진다.


자본이 만들어낸 미친양극화는 바로 그 이유때문에 스스로 끝을 볼지도 모르겠다. 백년, 이백년 뒤의 먼 일이 아니라, 당대의 비참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더욱 높아지는 것 같다. 자본론으로 다시 확인을 하지 않더라도, 무슨무슨 이론으로 검증을 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너무 미쳐있다. 자본에, 기업에 인격을 준 이후로 그 무한 확장의 본능은 불과 몇백년이 지나지 않아 주기적으로 돈줄과 에너지, 먹을거리를 쥐락펴락하면서 키워왔다.

서로 연결된 명증한 증거는 자본주의의 몰락과 새천년을 약속해주지도 않는다. 무너지면 같이 무너질 뿐이다. 몰락에 마조히즘을 느끼면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자조하는 것 만큼 미련한 일도 없다. 자본이라는 뇌수와 심장이 동맥과 정맥을 통해 국가와, 마을과 권력과 제도와 개인의 일상, 영혼을 농락해왔는지 보지않으면 안된다. 그 뇌수와 심장에 사람이 들어서고, 분권이 들어서고, 공익이 들어서고 동맥과 정맥을 통해, 모세혈관으로 세세히 흐르고, 국가와 권력과 제도와 마을과 개인의 일상, 영혼이 따로 또 같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팍스 미국도, 팍스 유럽도, 팍스 중국도, 팍스개발도상국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먹을거리와 에너지, 모아온 만큼 거꾸러 거슬러 오르는 지혜, 분산과 분권, 자치의 회복이, 앎의 명증한 증명을 일상으로 가져와, 끊임없이 활동의 면적을 넓히는 일도 초라한 시작이지 않을까? 시청각의 시대에서 오감의 회복, 육감의 회복 지향, 석유에서 나온 비료 살충제, 온난화로, 유전자조작으로  절멸해가는 종의 다양성회복으로....경제적부가 아니라 생태적부의 개념으로 회복하는 일... 개인으로 함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서 함께하는 제도밖-곁-안의 몸에 밴 분권으로 성숙, 세밀한 노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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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

01. <식품전쟁> 음식 그리고 문화와 시장을 둘러싼 세계대전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꽤나 틈실하고 참고자료도 방대하다. 권하고 싶은 책이다. 몇몇 책들을 읽으면서 겹치는 부분이 많아 생각흔적을 이어가고 있기도 하다.

02.  이맛 저맛 보다나니 생각이 겹쳐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 이어진다. 얕은 잠, 긴꿈. 자본과 그 자리를 대체하는 적절한 묘사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러가지 사실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어떻게 ... 여기저기 발표 지면도 생각들이 겹쳐지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이론의 쟁점은 여전할까? 여전하겠지 싶다.

03. 주제넘은 생각흔적을 창고에 모아둔다.

04. 자본은 본질상 예방을 하지 않는다. 예방해서 미리 막는 것보다 그 분기점이 지난 뒤 득실을 따진다. 정책을 살필 때에도 기능같은 것에 시야를 좁힐 필요가 없다. 생태를 보고 관계된 것을 건강하게 하지 않는지로 판단을 우선하여야 한다. 자칫 이해-득실의 논리고리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힘들다. 08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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