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가 발달하지 않을 때, 건축물은 그 자체로 언어이자 기념비였다. 모든 것이 응축된 산과 같은 것이었다. 산처럼 들어선 그 건축물은 생활인에게 모든 것을 표현해주는 종합예술물이었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은 건축을 일상에서 분리해내었다. 새처럼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를 나누어서 가져가 버렸다. 미켈란젤로의 그림들도 모두 건축의 일부였다. 그러던 것이 박물관과 미술관이란 전시공간이 생기면서 미에도 서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술을 음미하기 위해선 두가지 방법이 있다. 작품에 빨려들어가는 법과 작품이 빨려오는 체험 두가지이다.  작품에 빨려들어가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상의 일이어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다른 한가지 특별한 의도가 없이 방만한 상태에서, 산만한 상태에서 체험하는 건축물이다. 밖에서 사진으로 음미하는 행위는 일부분일 뿐, 건축물 사이를 비집고 산만하게 돌아다니면서, 의도하지 않은 채 얻는 무의식적인 것이다.

이런 예술이 없어진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건축가는 이런 의미에서 복원을 필요로 한다. 일상의 무의식을 형성하는 건축이 재정립되어야 한다라고 한다.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문득 책이 다가서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란 시공간에 딱 버티고 서서 고를 수밖에 없는 책들이 있다. 어쩌면 우연한 계기에 그 접촉점이란 대면이 없었으면, 생각길이 어디로 길을 내었을지도 모를 그런 상태 말이다. 잠깐 인근 공장을 다녀오는 길, 점심을 틈타 도서관에 들르다가 예상치 못하게 대면한 책이 그렇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야 한다고.

수잔 손택은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라 한다. 그렇게 잔혹함을 보여주는 사회의 이미지들을, 그런 <타인의 고통>을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로 소비해 버리는 현실은 고통을 경험하지 않고도 진지해질 가능성 마저 없애게 만든다 한다.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온갖 진흙탕것이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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