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문국현 현실"을 안고 넘자(酌)
책을 한점도 보지 않는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웠는데, 식곤증으로 몇차례 선잠이 지나간다. 초1 민이는 목욕재개를 하구 받아쓰기 숙제를 한다. '방귀를 뽕하고 뀌었어요' 불러달라고 하고, 방귀소리에 깔깔깔 웃고 하더니, 틀린 것도 정답으로 하더니, '아빠, 백점맞으면 뭐해줄거예요'라구요.한다. 그렇게 응석을 부리다가 이내 잠에 골아떨어진다. 딸래미도 시험이 코앞인데, 틀린 문제를 가져와 식초가 노란색깔이 아니냐고 한다. 단무지? 양파생각해봐~ㅇ. 그렇게 바꾸어가며 조용해진다.
야구 경기-축구경기-시흥갯골환경스페셜-태왕사신기까지 골고루 맛을 보았다. 한쪽에서는 권영길 초청토론회 - 한쪽에서는 문국현토론회라는데, 지역방송은 권영길 초청토론회를 보여준다. [초청토론회-질문있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은 사전 질문지를 주지 않고, 즉석질문으로 후보자의 순발력-대안제시력 등등을 보여주도록 꾸몄다. 이명박이 더 궁금해진다. 깔끔-명쾌하지 않았지만,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에 편승하지 않고 지적하여 넘어서는 것도 괜찮다 싶다. 사표심리-백만집회-정책현실성-노조과격화와 파업-가치의 연정. 한미에프티에이와 비정규직 등등, 물론 가슴을 움켜지게 하는 절실함과 쌈박함까지는 기대할 수 없지만 쟁점을 드러내는 것도 봐줄만 하다.(물론 나의 관점은 토론회 전후 일반인이 보았을 때를 고려하면? 이란 전제이다.)
총선이 코앞에 다가온 것인도 모른다. 불과 몇달전으로 돌아가 문국현-노회찬-심상정-권영길이 없는 경선은 어떠하였을까? 늘 현실은 후회해도 소용없다. 현실은 만일이 없으니말이다.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사라져주면 좋겠다는 희망 역시 만일이다. 훨씬 삭막하지 않았을까? 심바람의 세박자경제도, 노회찬의 촌철살인도 여전히 유효하지 않은가? 권영길이 험로로 만들어온 것이 구태일 수 있을까? 문국현에게 많은 사람이 설레이는 것이 왜 마이너스라고 장담하는가? 대중의 가슴에 주목하지 못하고, 똑같은 한표로, 몸뚱이란 산술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아래 토론에서 어떤 것이 다른 관점에서 논의되었는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발제 논문은 논의를 숙성시켜야 할 지점에 대해 논거를 제공한다. 자유주의, 공화주의란 관점에서 진보가 품어야 될 것, 여러 매체에서도 쟁점이 없는 것 같아 아쉬웠는데, 좀더 숙성시킬 계기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주택-교육-노후, 일에 대한 쟁점이 폭발하여 생활인에게 실감나게 다가갈 수 있다면, 이번 대선에 지고 이기고를 떠나, <참진보>의 외연을 확장하며, 불과 몇년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번 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면에서 역동적인 우리들 모습이 기회를 많이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가치>를 열어두고, 그것이 우리 가족의 품안에 들어가, 우리 친구들의 가슴으로 들어가 얼마나 뭉클거리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그렇게 마음에 작은 틈이 생긴다면, 그것으로도 진보는 큰 승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면에서 열어두지 못하고 진보를 가장하여 제것만 옳다고 주입하려하고 세뇌하려는 의식이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역에서도 정책참모진들이 바쁘겠지만 공유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것. 가슴을 울려내는 실천공약으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 우리 패거리가 아니라고 배제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일이 바쁜 와중에도 놓치지 말아야할 한가지는 아닐까? 느슨한 사회단체 연대 조직의 몫도 공정선거감시가 아니라 질적으로 한단계 다른 일을 해볼 수 있는 계기가 우연히 주어진 것은 아닐까? 하고 혼자 쓸 데 없는 생각을 해본다. 집식구들과 <울린 가슴>을 가지고 나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면, 모든 주변 상황은 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상수가 아니라 오히려 영향도 못미치는 변수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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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선, 새로운 정치질서의 서막인가?
참여사회포럼 "2007년 대선과 한국정치의 새로운 선택" 개최
2004년 과반의석을 차지했던 범여권의 지리멸렬과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 고공행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07년 대선을 기점으로 한국사회는 대중적 보수주의의 시대로 접어들 것인가? 아직은 미풍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바람으로 등장한 문국현 현상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소장 이병천 강원대 교수)는 10월 12일 오후 3시 “2007년 대선과 한국정치의 새로운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참여사회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포럼에서는 2007년 대선과 대선을 기점으로 전개될 새로운 정치질서의 향방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민생문제 해결없인 '51:49'는 희망사항일 뿐
첫 번째 발제자인 정상호 한양대 교수는 이명박 후보에 대한 ‘묻지마 지지’ 현상을 실현가능한 ‘사회경제적 대안의 조직화’에 실패한 민주개혁세력의 무능력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라고 분석했다. 또 이명박 후보와 다른 범여권 후보와의 지지율 격차의 원인은 후보 개인의 리더쉽과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정당의 차이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한나라당이 전국적으로 가장 잘 조직화된 직능위원회를 갖고 있으며, 생활정치의 기반인 자치단체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경부운하 건설이나 교육공약과 같은 정책을 통해 지지자들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함으로써 지지층을 넓혀나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범여권은 지지층이 요구하는 민생문제 해결을 통해 지지기반을 넓혀가기 보다는 모바일 선거와 같은 고공정치만을 구사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51대 49의 ‘박빙의 승부’를 예상하는 것은 단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두 번째 발제자인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도 비슷한 지적을 하였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선거를 통해 무엇을 위임받았는가를 고민하기보다는 ‘대연정 소동’과 같은 자의적 아젠다를 남발했다는 것이다.
문국현은 자유주의 진영을 혁신할 수 있을 것인가?
안병진 교수는 신자유주의적 CEO 정치관에 대한 평면적인 비판을 넘어서 변화하는 정치현실을 의미있게 포착할 것을 제기했다. 천민자본주의적 재벌인사들에 대한 비판 기준의 잣대를 진보진영이 문국현 후보에게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유한킴벌리 모델에서 보여준 문국현 후보의 가치와 실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토론에서는 진보개혁진영이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모색해야 할 지점들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진보개혁진영이 안보담론에 맞서는 평화담론에 있어서는 성공했지만, 발전과 성장에 맞서는 자생적 사회경제모델은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대안은 어렵더라도 기본으로 돌아가 부동산ㆍ일자리ㆍ중소기업ㆍ교육 등 대중의 삶과 직결된 민생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생산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도 단순히 문국현 후보를 비판하기 보다는 문국현 후보에 주목하는 대중의 열망을 급진적으로 의제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과 함께 정치연합에 대해 좀 더 유연하고 적극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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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원문
[참여사회포럼]
2007년 대선과 한국정치의 새로운 선택
참고 1. [CEO 정치론 논쟁의 재검토: 공화주의적 시각에서]
문제의식
지금까지 CEO 정치론은 한국에서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선명한 찬반의 입장으로 나누어져왔다. 보수적 성향의 지식인들은 이를 그간 대통령의 과다한 권력과 당파성, 비효율을 치유하기위해서는 기업적 리더가 국가경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거에서 주장해왔다(우성대 2007). 반면에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은 본질적으로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가치와 위계적 운영원리와 공익을 추구하는 정치의 민주주의적 특질은 질적으로 다르다며 이는 정치를 기업에 종속시키는 신자유주의의 변종이라고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다(최장집 2002).
필자는 <동향과 전망> 2006년 여름호에 게재한 “탈정치론의 시대”(2006) 등 최근 대한민국 정치에 만연하는 탈정치론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글을 발표해왔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전자보다는 후자의 입장에 긍정적이다. 하지만 단순히 기존 신자유주의적 CEO 정치관에 대한 평면적 비판의 구도를 넘어서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의미 있게 포착하는 이론적 발전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단순히 CEO 정치론의 비판에 그치는 것에 회의를 가지게 된 현실적 배경은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두 가지 새로운 현실이다. 하나는 이례적일 정도로 매우 강력한 현실적 힘을 가지는 소위 ‘이 명박 현상’ 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의식이다. 과거 에티엔 발리바르의 고전적 지적을 떠올리자면 한 사회의 지배적 사상은 그 사회 다수 서민들의 욕망을 일정정도 반영해서 구성해낼 때 비로소 지배적일 수 있다. 미국과 한국 공히 리버럴 엘리트층의 심한 혐오감이나 실패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부시 대통령과 이명박 후보가 오fot동안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어느 정도는 대중적 욕망의 상징적 구현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제적 힘을 가지는 담론에 대해서는 평면적인 비판보다는 그 속에 담긴 서민적 욕망이 무엇이며 이 욕망을 더 발전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담론과 정책을 찾아나갈 필요가 있다.
필자가 또 하나 이론적으로 고민하게 된 계기는 2005년부터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의 기업의 경계를 넘어서는 독특한 경영사상, 기업 활동을 어떻게 정치학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의식 이였다. 그는 경제효율성 만능주의의 기존 신자유주의적인 경영사상과는 매우 다른 형태로 공적인 문제의식이 스며든 정치, 경제적 사상과 실천을 보여 왔다. 그렇다면 그의 실험은 기존 신자유주의적인 CEO 정치론이나 혹은 반대로 기존 민주주의론 으로는 이론적 포착이 가능한가, 아니면 새로운 이론적 발전이 필요한가의 화두가 필자의 관심거리였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의식에 기초해서 필자는 이미 2007년 2월 <창작과 비평>의 ‘대한민국 레짐체인지론’을 통해 CEO 정치론의 재검토를 화두로 이미 던진바 있다. 이 발표문은 그 화두에 기초하여 토론을 위한 개념적 시론의 형태로 제기하고자 한다.
새로운 현실, 새로운 이론의 필요성: 공화주의적 CEO?
정치학에서 가족과 같은 사적 조직과 공적 조직의 가치와 운영원리의 구분은 멀리 아리스토텔레스의 Oikos 와 Politeia 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고전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다. 아테네나 로마, 이태리, 미국이나 심지어 서희경, 박명림 교수가 지적하듯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서도 꽃핀 내재적 공화주의 사상(2007)은 바로 이러한 구분에 기초하여 사적인 주종 지배관계를 넘어 모든 시민들의 공동체로서 공적인 조직인 국가를 형성해오는데 기여하였다. 이 민주공화국의 고전적 정의는 키케로에 따르면 “법(또는 정의)에 대한 합의와 공동의 이익에 의해 결속된 다중의 공동체”를 의미한다(김상봉 2006에서 재인용). 이 고전적 공화주의의 법치, 견제와 균형 등의 다양한 개념은 이후 서구의 자유주의를 풍요롭게 발전시키는 자양분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70년대 이래로 영미권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노선은 국가를 공적 조직으로 정립한 공화주의 이념을 기업주의 국가의 이념으로 변형하려는 기업의 대대적 반격의 역사였다. 이에 따라 시장이 국가의 전통적 영역에 전방위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단순한 경제적 효율성의 관점은 결코 사회적 헤게모니를 가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전략이 아니기에 최근 들어 서구의 기업들의 가치나 활동양식이 급격히 변모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여전히 국가와 기업의 주요한 사명은 공익과 이윤이라는 점에서 다르나 그 경계가 상당한 정도 흐려지고 있다. 이는 21세기 사회의 구성이 변모하기 때문이다. 21세기 기업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개별적인 상품을 어떻게 매력적으로 만들어 내는가에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브랜드가 각 소비자들의 욕망과 가치를 어떻게 구현하고 가공해내는 가에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구입하면서 돈을 지불하는 셈이다(안병진 2001). 그런데 중요한 것은 노동자, 소비자들의 욕망과 가치의 윤리적, 정치적 수준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전 사회적 이슈나 지속가능성, 전 지구적 상호의존성 등을 몸으로 잘 이해하고 있다. 전 지구적 통합을 신자유주의적 기업들이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지구적 상호의존성의 현실을 예리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시민들은 신자유주의적 행태를 넘어서는 사회적 책임 기업을 요구하고 있다. 네그리, 하트는 이러한 새로운 힘과 창조적 지성을 가진 존재형태를 다중(multitude)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다중에 대해 헤게모니를 기업이 행사할 수 있으려면 기존 기업의 가치나 경계를 넘어서는 가치와 실천이 필요하다. 최근 기업의 공공성 강화의 추세를 이러한 거대한 사회적 흐름의 수용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이는 기본적으로 진보적 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더욱 진보적인 성격으로 변모시킬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전 지구적 담론으로 위력을 떨치는 사회적 책임 기업론은 갈수록 지배력을 확대해나갈 주목할 만한 흐름이다. 이를 단순히 남는 이윤을 기부하거나 주말에 사회봉사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한국의 일부 기업들의 협소한 시각을 훨씬 넘어서는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사회적 책임의 문제의식을 지구적 협약으로 구체화한 ‘글로벌 컴팩트’는 무노조경영의 삼성과 같은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적 재벌들과 달리 투명성, 노동자와의 파트너쉽, 인권 등의 상대적으로 진보적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기업내부 조직 측면에서 주주자본주의는 한국의 재벌처럼 사적 지배구조 보다는 훨씬 더 공적이고 그런 점에서 더 진보적으로 기능해왔다. 아직까지도 주주자본주의의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재벌의 사적 지배의 공간이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적 규정을 철저히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전지구적인 기업의 경향은 이미 주식자본주의보다 더 공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기업들은 미국식 주주 모델을 넘어서서 주주, 시민사회, 노조 등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조정하는 정치의 기업, 즉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경향을 갈수록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이해관계자 모델을 지향하는 기업의 CEO 은 매우 높은 수준의 정치적 조정능력을 요구한다. 마치 국가의 정치가 제반 사회세력들의 이익을 조정하면서 공적 균형을 찾아나가듯이 이러한 기업의 CEO 는 기업의 대통령으로서 정치를 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미국의 경영학은 기업의 이해관계자들 간의 조정을 시도하는 균형의 리더십을 이론화하는데 그 내용은 그 자체로 국가의 공화주의적 정치 리더십론과 매우 흡사하다 (패터슨 2004). 그리고 개별 기업 내의 직원들 하나하나에게 마치 국가가 시민에게 하듯이 철저히 책임지는 경영기법이 날로 혁신되고 있다. 이렇듯이 기업 자체를 보다 공적인 공간으로 넓혀나가는 것은 넓게 보면 민주공화국을 만들어가는 공화주의적 가치의 실현이며 매우 정치적 활동이다.
또한 치열한 시장 경쟁 속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나가야 하는 기업의 이해관계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공성의 가치와도 어느 정도 상생하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중국, 인도 등지의 가난한 인구를 새로운 소비자로 편입해낼 때만이 지구적 자본주의는 부단히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이 편입되려면 국가적 인프라를 지원하고 이들이 소비자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간 마이크로소프트나 휴렛 패커드, P& G 의 CEO 들이 가난한자들 속에서의 지구적 자선과 기업활동을 강조하는 것은 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제 기업은 누가 더 공익적 덕성을 가지는 가의 공화주의적 문제의식과 기업 수익성 사이에 균형을 적절히 맞추고 있는가를 둘러싸고 경쟁을 일으키는 경향이 조금씩 나타나는 전례 없는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병천 교수가 한국의 기업들이 사회적 ‘시민’ 기업으로 질적으로 거듭나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전 지구적 경향과 정확히 조응한다(2007, 63).
반면에 국가나 비영리 공익조직들은 부단히 소비자들의 이탈의 위협보다는 많은 안전판들을 가지고 있기에 그간 상당부분 비효율성들을 노정해오고 이는 신뢰의 위기, 반대로 신자유주의의 득세를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로 기존 국가보다 더 국가적인 문제의식을 가지는 기업, 기업보다 더 기업적으로 포획된 국가라는 새로운 경계 파괴의 현상들이 생기고 있다. 하지만 기업이 본래 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국가가 기업보다 덜 혁신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가는 시장의 공공성에 자신의 역할을 넘길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21세기 국가는 이제 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의 확산과 동시에 기업적 혁신의 수단에 힘입어 능력 있으면서도 공공성을 강화하여 신뢰받는 조직으로 획기적으로 발전될 시대를 맞이하였다. 최근의 다양한 사례들은 이것이 단지 이론적인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구본형 외 2007). 이는 바로 공화주의의 고전적 이상이 21세기적 조건에서 실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공화주의 철학의 근저에 있는 문제의식이 단순한 국가의 통합적인 기능이 아니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궁극적 목적으로 실현하기위한 공동체라는 점에서 능력과 공공성을 함께 실현할 수 있는 21세기 국가는 공화주의의 이상의 실질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경제적 인간의 자유만을 궁극목적으로 하는 천민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국가론, 신자유주의 CEO 론보다 휠씬 더 높은 수준의 삶의 질의 사회를 만들어 낸다.
이렇듯 공적 조직과 사적 조직들 사이에서의 경계가 흐려지고 기업이 공적 문제의식을 강화하는 21세기 현실에서 기존 경제만능주의 지향의 신자유주의적 CEO 론은 매우 낡은 이론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이론이 신자유주의적 기업 이전에 천민적 자본주의의 정치권력화를 위한 정당화로 작용하는 한국 현실에서는 더 위험할 수밖에 없다.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한국에서는 단 한번도 신자유주의적 CEO의 정치실험이 개시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천민자본주의적 재벌인사는 사회적 소유 개념의 주식자본주의 CEO 이전에 가부장적 전제나 그 전제의 하수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김동규 2007). 그런 점에서 CEO가 정치를 경영해야한다는 말은 아이아코카 등 서구의 기업인에게는 논리적으로 해당될 수 있는 말이지만 기업이라기보다는 노골적인 가부장적 전제를 행사하는 인물들에게는 적용할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아직 공화주의적 국가 개념이 내면화되지 않고 국가와 사적 가족 구조 사이에 경계가 불투명한 한국의 상황에서 CEO 정치담론은 정치를 효율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도와 사기로 점철된 천민자본주의의 정치권력장악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사실상 연고주의적 부패의 온상으로 다시 전락시킬 가능성이 크다. 맥락적으로 보면 서구가 민주공화국에 대한 반격으로서 신자유주의적 CEO 정치론이 제기되었다면 한번도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인적이 없는 한국에서 CEO 정치론은 그나마 있는 국가의 역할을 극도로 악화시키며 건국의 시조들이 민주공화주의를 명문화한 대한민국 헌법을 사실상 완전히 폐지하는 급진적 제헌 행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CEO 정치론을 단순히 비판하고 기존 정치의 고유 영역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 기업, 비영리조직, 정당 중 어느 출신이라도 그간의 실천과 비전이 얼마나 국내외적으로 공적 공간을 넓혀나가면서 삶을 보다 풍요롭게 발전시키고 있는가의 공화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CEO 담론을 비판하고 이를 기존 정치의 우월성으로 대체하는 것과 공화주의적 리더십의 기준 하에 국가나 기업의 활동을 발전적으로 유도하는 것은 상당히 다른 관점과 실천을 낳게 된다. 전자는 시민들이 강제해나가고 있는 기업의 다양한 공적 문제의식을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가치와 동일시하고 이와 기존 정치관을 대립시킴으로서 스스로 시민들에서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있다. 반면에 후자는 시민들의 발전적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이를 새로운 정치적 운동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일각에서 전개하는 도덕주의적인 공동체운동보다는 마치 환경영향 평가 지수처럼 공화주의적 지수를 향후 개발하여 모든 법안, 국가, 기업, 시민의 활동이 그러한 방향성을 가지도록 제도적, 문화적으로 유도한다면 의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병천 교수의 제안처럼 기업의 이해당사자 책임, 사회적 책임, 지역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법률로 정할 필요가 있다(2007,63). 더 나아간다면 위에서 언급한 글로벌 컴팩트의 내용을 보다 진보적으로 강화하는 지구적 공화주의 운동을 전 세계 다중들과 함께 연대하여 전개할 수 있다. 이러한 발전적인 담론 경쟁과 정치적 실천의 경험의 과정은 곧 기존 천민자본주의적이거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정치 관점과의 치열한 갈등의 과정이자 곧 민주주의 정치의 모습이다. 이를 통해 시민들은 비로소 기업의 과거 경제만능주의 이데올로기와 기존 정치의 이분법적 강요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민주주의적 의식을 형성해나갈 수 있다.
자유주의 내면화의 적자(deficit)의 한계
지금까지 필자는 공화주의적 개념의 차원에서 공공성을 확대하는 기업론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은 한국의 현실 정치를 설명하는데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 필자는 결론적으로 그간의 CEO 정치론을 넘어서서 공화주의적 방향과 가까운 가치와 실천을 보여온 문국현 전 유한 킴벌리 사장은 한국 자유주의의 미래에 의미있는 시사점을 준다고 진단하고 있다. 아래에서는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최근 소위 대통합신당이 갖가지 불법적 행위로 점철된 경선을 전개하며 과거 열린우리당의 모습보다도 후퇴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개혁적 리버럴 진영들의 퇴행적 경향의 누적에 대해 크게 실망한 김영춘 의원 등은 심지어 총선불출마까지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필자가 보기에 김영춘의원의 희생적 결단은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이 한 시대를 마감하고 질적으로 새로운 시대로 나가는 시작의 시작인 것 같다. 사실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의 기원은 멀리는 지주계급에 뿌리를 둔 한민당까지 맞닿아 있다. 하지만 이 진영은 권위주의 정부와의 투쟁과정에서 부단한 혁신을 통해 민주화로 이행을 선도하는 역할에 성공하였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연이은 집권에 성공하면서 한국의 개혁적 리버럴 진영은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고 제왕적 대통령제를 보다 민주화해나가는 등 많은 역사적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집권을 하기위한 과정이나 집권 후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한 과정은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보수적 헤게모니를 일정 정도 수용하는 과정이기도 했다(최장집 2002,130). 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후보자시절 재벌체제를 일정정도 용인하는 강령 수정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에는 시장에 권력이 넘어갔음을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발언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기존 한국의 헤게모니를 가진 보수의 이념은 아직 건전한 자본주의적 틀을 갖추지 못한 천민자본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이러한 이념에 견인된다는 것은 한국의 자유주의를 낙후된 성격으로 한계지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김대중 정부의 신용카드 남발 정책이라든가 노무현 정부의 초기 부동산 정책 등은 한국의 자유주의가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회의감마저 심어준다.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이 극심한 정도의 위기에 자주 봉착하는 것은 자유주의 가치와 운영원리를 철저히 내면화하지 못한 것에서 근본적으로 기인한다. 예를 들어 그간의 자유주의 정부는 가장 기본적으로는 자의적 지배가 아닌 선거에서 확인된 민의를 정당을 통해 결집하고 정부 아젠다를 통해 실현한다는 관점조차도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서구에서는 이를 민의의 위임(mandate) 라고 부른다. 무엇을 선거에서 위임했는가를 둘러싸고 각 정치세력이 치열한 해석투쟁을 벌이는 갈등적 합의의 과정 대신에 한국은 대통령과 집권정당의 자의적 아젠다가 난무한다. 대통령 스스로 오만했다고 인정한 대연정 소동은 자의적 대통령의 한계를 극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최소한의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나아가 국가가 주요 조약 등에서 절차적 공공성을 지키거나 각 개인의 안위에 철저하게 책임진다고 하는 관점으로까지 나가는 것은 거의 기대하기 어려웠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자유주의 내면화의 적자'(deficit)가 현재 한국의 개혁적 리버럴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핵심적 문제라고 생각된다. 현재 많은 대안적 담론들은 이러한 핵심적 문제를 불투명하게 가리는 효과를 가진다. 예를 들어 그간 유행하였던 담론 중 민주화 이후 공정한 선거경쟁 등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어졌는데 사회경제적 내용 등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제 이루어야 한다는 담론이 그러하다. 이 담론은 아직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 진영과 대한민국 전반이 절차적 민주주의 측면에서 많은 한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는 효과를 가진다.
또한 개헌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제도개혁론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개헌 등의 제도적 개혁은 주체의 행위 패턴을 변경하는 긍정적인 구조적 요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간 노무현 정부와 집권당의 민의와의 지속적 괴리 현상에는 비자유주의적인 자의적 통치의 관념이 지속적인 배경으로 작용한다.
결국 자유주의의 결핍은 민의와 괴리된 정치주의적 개혁에의 집착, 국가의 철저한 책임성 대신에 삶의 조건의 급격한 불안정화를 야기하는 보수적 경제노선으로 나타나고 말았다. 그 결과 개혁적 리버럴들의 척추를 이루는 중산층과 중산층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희망의 상실이 확산되어 왔다(신광영 2003, 52). 반면에 한국의 자유주의는 마치 70년대 미국에서 대중적 보수주의가 출현하기 전처럼 부정적으로 낙인찍히기 시작하고 있다.
현재 소위 ‘묻지마 성장주의’ 지지로 표현되는 '중도세력 극단주의'(center extremism)에 가까운 현상들은 바로 이러한 조건을 자양분으로 하여 자란다. 여기서 ‘중도세력 극단주의’란 케빈 필립스에 따르면 미국의 자유주의 진영 여론조사가인 패트릭 캐델이 자유주의가 퇴조하던 72년 유권자에 대한 심층면접조사에서 발견한 현상을 말한다. 그는 조사를 통해 “이념적 성향이 가장 약한 계층으로 간주되었던 중간계층이 가장 동요하고 있으며” 이들은 미국적 삶의 방식이 사라지고 불안정해지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극단적 정치선택에 강박관념처럼 집착한다(2004, 563).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형적일정도의 보수와 개혁 후보들 간의 균형의 파괴는 다소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물론 이는 대중적 보수주의 시대의 서막을 열어갔던 닉슨의 지지기반에 비하면 매우 취약한 성격을 가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당시 미국의 경제적 위기의 심화라는 객관적 조건에서도 그러하고 주관적 리더십에서도 닉슨은 대 공산주의 관계나 뉴딜적 복지, 환경의 측면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어쨌든 앞에서 언급한 자유주의의 적자의 누적과 이로 인한 민심과의 상당한 괴리, 한동안 지속되는 중도극단주의 현상 등의 매우 이례적 증후들은 한국의 자유주의가 급격히 새로운 가치와 세력으로 재편되는 레짐 체인지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시사한다.
공화주의적인 CEO 는 기존 한국의 자유주의를 혁신할 수 있는가?
기존 한국의 자유주의가 지속적인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유한킴벌리의 문국현 사장은 얼마 전 대선 후보로 정치 참여를 선언한 바 있다. 이에 대해서 기존 여권의 개혁적인 정치인들이나 일부 지식인들은 기존 정당정치의 외부에서의 정치참여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사실 최장집 교수 등의 일관된 지적처럼 정당 정치를 강화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핵심 과제중의 하나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를 강화하려면 기존 정당들이 은폐하거나 효과적으로 표출시키지 못한 비정규직, 중소기업 등의 사회적 균열선들을 포착하여 이를 공적 아젠다로 구현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국가적 합의를 구성해나가는 정치적 리더십이 요구된다.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의 현주소에서 사뭇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리더십의 문제의식과 실천이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의 리더인 정부나 집권 정당이 아닌 외부에서 더 보여진다는 것에 있다. 미국의 경우에 보수나 진보 정치세력은 건국의 자유주의적 공화주의 이념에 근거하면서 이를 제도권 정치 내에서 치열하게 구현하고자 노력한 바 있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수의 경우 링컨이나 테오도르 루즈벨트같은 공화주의 전통의 대통령으로 나타났고 진보의 경우 제퍼슨이나 케네디 같은 대통령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민주공화국의 헌법적 규정은 박제된 채, 집권한 개혁적 리버럴들은 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을 발전시켜오지 못했다.
그러한 발육부진의 민주주의 과정에서 문국현 전사장의 자유주의는 매우 흥미로운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는 천민자본주의가 지배해온 한국의 현실에서 수 십년 간 매우 독특하게 공적 인 공간을 넓히는 공화주의적 실천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가 기업인출신으로서 이례적으로 로마공화국의 공화주의자인 카토에 흥미를 보여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서재경, 2007,55). 이는 그의 경영사상이 피터 드러커주의에 근거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된다. 드러커주의는 흔히 왜곡되어 이해되는 것처럼 단순히 경영론이 아니다. 드러커는 오히려 미국에서 매우 선구적으로, 공공성을 가지는 사회적 시민으로서의 기업의 의미와 지식노동자 사회의 연방주의적 운영원리 등을 규명한 사상가이다. 그의 “기업은 그냥 기업이 아니다. 기업은 민주주의를 이끌어가는 경제적 기관이다”(2007,45) 라는 지적은 사회적 기업 시민의 성격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드러커는 기업은 사람중심주의의 관점에서 비영리단체, 주주와 이해관계자, 종업원, 그리고 고객 등 전반에 철저히 봉사해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한다(ibid., 205).
이러한 드러커의 사상적 관점은 문국현 사장의 사상과 실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국내적으로 본다면 사적 주종관계인 재벌체제에 반대하고 기업의 사회적 시민으로서 책임성 경영, 내부의 철저한 절차적 공공성, 연방주의적 분권화, 비정규직을 없애고 평생학습을 통한 혁신의 기회 제공, 각 개개인에 대한 리더의 철저한 책임과 헌신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지구적으로는 글로벌 컴팩트 운동, 온난화 방지등에 헌신하면서 지구적 기업의 지배구조의 공적 공간 확대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재벌 등 사적 주종 지배관계를 타파하지 않으면 고전적 공화주의자들이 경고하였듯이 시민 영혼이 노예화되고 결국 민주공화국의 정치공동체가 해체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김동규 2007). 그리고 평생학습 등을 통해 경제적 노예가 아닌 가처분 시간을 확보해나가는 공화주의적 경제철학은 삶의 자유와 공익적 덕성을 실현할 조건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도 정치적이다. 반면에 이러한 구조적 조건의 마련을 위한 갈등이 전제 되지 않는 시민덕성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공동체주의 요구는 탈정치적인 도덕주의적 설교에 그치거나 억압적이기까지 하다.
결론적으로 문국현 전사장의 가치와 실천은 그간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에서 보기 어려운 질적으로 새로운 공화주의적 문제의식이 강하게 깔려있다. 만약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들이 단순한 선거 공학이나 중도층에 매력적인 제 3후보론이라는 협소하고 부정확한 이해를 넘어 새로운 레짐 체인지의 계기로서 그 의미를 이해한다면 이는 의미심장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국현 전사장의 실천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만 아직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비록 그의 자유주의는 흥미로운 가치와 실천을 담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서 그러한 공화주의적 자유주의 진영은 아직 강력하게 정치세력화 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지체현상은 그의 참여가 직면한 가장 큰 장애가 될 것이다. 만약 앞으로 장기적으로 새로운 정당의 건설이 단순히 기존 자유주의진영 보다 더 깨끗한 사람들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이 아니라 질적으로 혁신된 자유주의적 가치와 실천을 벼려낼 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만약 그가 새로운 가치 구현의 과정에서 기존 자유주의 진영과 새로 유입되는 이들을 발전적으로 결합해내는 정치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한국 자유주의 진영의 미래는 그리 어둡지 않을 것이다.
결론
앞에서 밝힌 것처럼 필자는 올해 2월 논문에서 2007년은 대한민국 레짐 체인지의 서막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밝힌 바 있다. 최근 북미관계의 급속한 진전은 대한민국 내부뿐 아니라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 차원의 심대한 변화가 동반될 것임을 예견케 한다. 이 글에서는 공화주의적 시선에서 문국현 전사장의 새로운 자유주의 실천이 이러한 변화에 유의미한 변수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하지만 그의 실천의 파장의 강도에는 다른 전략적 행위자들의 반응도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특히 두 가지가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과연 민주노동당이 어떠한 새로운 실천을 보여주는 가의 문제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문국현 전사장의 자유주의는 기존의 세력들의 가치와 실천과는 사뭇 다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 결과 비정규직, 중소기업 등에 대한 정책강령들은 창조적이고 진보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이는 민주노동당내외의 진보적 공화주의자들과 수렴되는 측면이 강하다. 그들이 자유주의적 가치의 일정한 의의를 부정하지 않은 진보주의자들이라면 정책연합을 통해 상호간에 많은 생산적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반면에 만약 이들이 자유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모든 기업일반을 적대시하는 조야한 급진주의적 관점에서 그를 단지 우파적 CEO 정치론으로 규정한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천민자본주의 세력의 확산을 방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또한 남재희 전장관등 한국의 개혁적 보수세력 일부에게도 문국현 전사장의 공화주의적 실천은 무시 못 할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사적 주종관계로서 재벌지배체제가 강고하고 지속가능하지 않은 개발주의가 득세하며 노블리세 오블리지가 부재한 현실은 궁극적으로 보수의 헤게모니 기반을 침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미국의 보수 대통령인 테오도르 루즈벨트는 강한 개혁의 주도권을 행사한 바 있다. 하지만 개혁적 보수가 취약한 한국에 대해 이미 블룸버그 통신은 이후 거품 경제의 폭발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의 보수세력들 중 이러한 문제의식을 강하게 가지면서 공화주의적 지향성을 가지는 새로운 보수주의의 혁신을 모색하는 이는 많지 않다. 뉴라이트 일각에서 사용하고 있는 공화주의라는 용어는 단지 도덕주의적 공동체운동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쉽지 않은 가능성이지만 만약 한국의 개혁적 리버럴과 민주노동당의 진보, 개혁적 보수가 민주공화국 헌법의 정신에 따라 공화주의적 지향성하에 반천민자본주의 연합을 지혜롭게 이루는 것에 성공한다면 이는 2007년의 레짐 체인지를 매우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과연 2007년 한국의 정치세력들과 시민들은 어떠한 선택을 하며 대한민국의 체제를 변모시켜나갈 지 사뭇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한 해가 아닐 수 없다.
참고 2. [2007년 대선과 진보개혁진영을 향한 성찰적 고회]
1. 통렬한 성찰과 인식 전환의 시점
지금의 대선과 가장 유사한 선거는 3당 합당 이후 벌어진 1992년 대선이었다. 이 선거는 정주영 후보가 출마하여 보수층 유권자의 분열을 가져왔음에도 3당 합당을 통해 호남고립화에 성공한 김영삼 후보는 약 200만 표차로 압승을 거두었다. 범여권의 지리멸렬한 상황이 지속되는 등 결정적 변수가 작용하지 않는 한 이번 17대 대선은 역대 선거 중 가장 큰 득표율의 격차를 낳을 것으로 예상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13대 총선 이후 16년 만에 여대야소 국회를 만들어 놓은 17대 총선이 불과 3년 전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놀랄 만한 일이다. 나는 거기에는 두 가지 근본적 원인이 있다고 확신한다.
1) 실현가능한(plausible) 진보 경제학의 상실과 소진에 의한 민주화
첫째,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현재 1970년대와 80년대 남미의 군부 세력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메인워링(Mainwaring, 1994)은 1980년대 후반 이후 남미에서 이어진 군부정권의 병영으로의 복귀는 미국의 우아한 퇴각이라는 세계전략과 더불어 국정운영능력의 고갈에 따른 자발적 선택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에도 대중의 사회경제적 삶이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되었음이 명백해지면서, 즉 ‘대안의 소진(attrition)에 따른 민주화’가 당시 민주화 물결의 근본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자신들의 임무로 설정하였던 절차적 민주주의의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어 놓았다는 점에서 ‘성공의 역설’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이명박 현상은 자유주의 정부의 집권 10년 동안, 동시에 사회적 양극화와 세계화가 가장 고조되었던 급격한 전환기에 ‘사회경제적 대안의 조직화’에 실패하였던 민주개혁세력의 무능력이 가져온 정치적 결과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DJ 정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과 노무현 정부의 ‘성장과 분배의 균형발전론’이 실질적 성과를 낳지 못한 데 따른 대중들의 정당한 평가이다. 여기에서 이명박의 사회경제모델의 적절성을 따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탈규제ㆍ민영화ㆍ감세ㆍ자율화ㆍ개방 등 신자유주의의 방대한 정책프로그램과 체계화된 사상들은 이미 차고 넘쳐, 감각 있는 적용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심각성, 즉 자생적 사회경제모델의 부재는 선거 국면과 이후에도 해소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간간히 잊고 있는 사실 중 하나가 도덕주의적 분노와 더불어 사회경제적 대안이 한국의 민주개혁세력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해방 이후의 토지개혁,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등이 그러하였다. 우리 앞에 범람하고 있는 것은 지나치게 소소하게 파편화된 미시정책이거나 유럽 혹은 미국식 모델의 아류인 탈맥락적 서구이론뿐이다. 한미 FTA 반대에 들였던 열과 성의의 절반만 쏟아 넣었더라도 중소기업ㆍ교육ㆍ부동산ㆍ고용문제를 해결할 비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2) 기본으로 돌아가자(bringing to the basic): 이익과 대안을 조직화하는 근대 정당의 역할
지지도 차를 낳은 근본 원인은 이명박과 다른 후보의 퍼스날리티(리더십과 능력) 차이가 아니라 정당의 차이이다. 진보진영의 흥미로운 공통점 중 하나는 정치의 단위로서 조직과 이익이 아니라 개별화된 시민을, 활동의 근거지로서 정당보다는 시민단체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탈정당ㆍ반(反)이익 정치의 결과물들이 도덕주의적 정치담론의 팽배와 관념주의적 공익 숭상론이다.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은 계급ㆍ종교ㆍ언어ㆍ직능 등 상이한 중간결사체들의 이익집단화와 정당과의 연계이다. 그것이 정책과 대표를 매개로 연계될 때 정당의 사회적 기반은 공고화된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문국현 솔루션, 장하준의 사회협약, 심상정의 삼박자경제 등 대중의 삶을 다룬 사회경제모델의 타당성에 대한 유보 없는 토론이다.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는 대의민주주의의 원리와 현대 정당의 작동체계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다. 그들이 사학법ㆍ국가보안법 등 자신의 지지기반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개혁입법과정에서 보여준 원내전략들은 책임정치의 원리와 정확히 부합한다. 한나라당은 뉴라이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가장 잘 조직화된 직능위원회를 갖고 있다. 246개 지자체 중 현재 한나라당 당적을 갖고 있는 자치단체장은 171개(약70%)에 달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생활정치의 기반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쟁점이 되고 있는 이명박 후보의 경부대운하 건설이나 교육공약은 당의 이념 및 정체성을 잘 반영한 것으로서 ‘정책정당’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 나는 현재 어떤 정당과 후보도 이에 견줄만한 정책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민주개혁진영이 진성당원제, 지구당폐지, 모바일, 선거인단, 전자민주주의 정당 등 고립 분산된 개별 시민을 대상으로 한 고공정치를 구사하고 있을 때, 한나라당은 이익ㆍ조직ㆍ지역ㆍ정책ㆍ인사 등 당의 외연과 내포를 충실히 다져 왔다. 51:49의 선거 예측은 이러한 기본 인프라와 과정을 무시한 희망사항일 뿐이며, 지금 필요한 것은 창조적 모방의 학습효과이다.
2. 민주개혁진영 내부 개혁을 위한 5대 극복 과제
1) DJ를 넘어서, 대담한 희망 만들기(the audacity of hope)
필자는 아직도 진보개혁진영의 정치경제적 인식틀은 DJ의 틀을 못 넘어 서고 있다고 생각된다. 남북 및 외교관계는 햇볕정책을, 사회정책은 생산적 복지를, 정당건설은 중산층과 서민정당의 캐치 프레이즈를 계승ㆍ발전한 포괄적 프로그램으로 진전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양극화와 세계화는 이에 대한 근본적 극복을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남북한 정상회담에서 오간 평화협정은 진보의 구호가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새로운 사회경제모델의 제시를 통해 생태ㆍ평화ㆍ복지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대담한 접근의 일례로, 해외파병정책의 근본적 전환을 들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은 베트남전, 레바논, 동티모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전쟁과 분쟁 지역에 적지 않은 병력을 파견하여 왔다. 노무현 정부는 분쟁지역에 정전감시요원 파병, 테러와의 전쟁을 위한 국제연대 동참 등을 통해 국가 위상을 제고하고 한·미 동맹을 강화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국정브리핑, 2007.6.4). 남북정상회담과 6자회담의 원만한 진행 속에서 북미관계의 정상화와 정전협정에서 평화협정으로의 전망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제 안보와 병력 중심의 ‘파병정책’에서 인도주의와 NGO 중심의 ‘평화정책’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고 판단된다.
2) ‘빠’의 정치를 넘어서, 선진 정당정치로
지난 대선 이후 나타난 흥미로운 현상은 노사모, 명사랑, 박사모 등 열렬한 지지자 모임의 분출과 이들 조직들이 내부 경선이나 전체 선거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후보 중심의 선거과정은 미국식 선거전문가정당의 보편적 현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경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빠’의 정치가 정당정치의 발전으로 연계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실례로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개인 지지도는 정당의 지지도를 항상 선회하였다. 보다 더 큰 문제는 ‘빠’의 정치가 대중과 정치지도자간의 정보와 인식의 흐름을 단절시켜 소통의 정치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빠의 정치를 정당의 안정적 기반으로 흡수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3) 싸가지 정치를 넘어서, 정책집단의 네트워크 정치로
또 하나의 흥미로운 현상은 여야 모두 강한 개성과 화법을 가진 캐릭터들의 정치적 부각이다. 이는 보수언론의 의도적 쟁점화나 집단 따돌림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지만 약한 정당 규율과 폐쇄적 의사소통의 결과라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색무취한 리더십도 문제이지만 언어와 행동의 자아도취식 리더십은 더 큰 문제이다. 이러한 패턴의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책과 노선에 대한 분명한 자각과 표명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언론 노출이나 충성심 경쟁을 의식한 인기전략의 소산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적 풀이 좁고, 협력적 네트워크의 경험이 일천한 풍토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또한 그것은 온라인 시대에 심각한 소통의 장애현상과 소모적 논쟁을 일삼는 천박한 정치문화를 가져온다.
구체적으로 이를 극복할 방안은 갈등적 핵심 의제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실현할 당내 혁신세력(core group)의 존재이다. 정책그룹 형성을 통해 집권에 이른 대표적 사례는 클린턴 정부의 민주지도자위원회(Democratic Leadership Council: DLC)인데, 이들은 공화당 정권(레이건)의 장기 집권을 마감시키고 민주당 시대를 개척한 중도혁신세력으로 평가된다. 민주지도자위원회는 민주당의 정책(의료보험)ㆍ선거 및 통치전략(going the public)ㆍ인사개혁을 주도하였다. 또 하나는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 세력이다.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이 주도하였던 신노동당 프로그램 혹은 블레어 프로젝트는 노동당의 좌파화가 아니라 급진중도파(radical center)에 의한 좌파의 실용주의적 시도였으며, 이를 통해 보수당 집권 15년을 종식시켰다. 이 프로그램은 노동당의 집권 방안으로 노동당의 전면 개혁과 집권 청사진을 담은 새로운 영국(New Britain)을 작성하였다. 핵심 내용은 북아일랜드 평화협상, 일하는 복지(welfare-to-work), 최저임금제도와 사회헌장 채택 등이다. 최근의 사례는 미국의 민주당 내 이라크 연구그룹과 보수파 네오뎀(Neo-Dems)이다. 이들은 집권에 성공한 후보자 그룹은 아니지만 정책과 성향 중심의 정치인 그룹으로서 핵심 사안에 대한 일관성 있는 정책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이번 중간선거의 승리에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 NGO 정치를 넘어서, 생활정치로
최근 일부 시민사회단체의 대선 참여로 다시 한번 이 문제가 뜨거운 관심이 되고 있다. 보수 성향의 뉴라이트 그룹의 활동이 본질적으로 정치 활동인 것처럼 어떤 잣대를 적용하든 낙천낙선운동 역시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 물론 여기에서 정치의 의미는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정당 활동이 아니라 공공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집합적 행위를 의미한다.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전시작전통제권, 북핵 문제 등에 있어서 나타난 보수 언론의 행태는 너무나 이중적이다. 과거 진보적 시민단체의 정치적 관여와 정책적 개입을 정부에 종속된 관제 홍위병으로 몰아붙였던 보수언론들은 최근 보수적 시민단체의 정치세력화 움직임에는 침묵을 넘어 노골적으로 홍보에 나서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중 잣대는 늘 공정성과 일관성을 훼손하는 강자의 비겁한 무기이다.
필자의 제안은 뉴라이트이든 참여연대이든 일체의 정치적 관여를 피하고 엄정한 중립이나 비정치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답은 그 반대로 정치적 연계의 활성화와 다양화에 있다. 대신 그 관계는 연줄보다는 정책에 근거한 제도적 형태이어야 하며, 명망가의 개별 영입보다는 상호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공식적 연대이어야 하고, 밀실야합이 아닌 공식적이고 투명한 공론화 과정을 수반하여야 한다. 이제 누구도 대변하지 못하는 시민후보론, 실체와 부합하지 않는 정치적 중립의 도그마는 폐기되어야 한다. 미국식의 정치활동위원회(PAC)이든 아니면 유럽식의 정당협약이든 정책과 정당을 매개로 한 다양한 형태의 공개적이고 제도적인 연계가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최근 전개되고 있는 ‘미래구상’의 실험은 성공가능성도 높지 않을 뿐 아니라 시민운동 진영은 물론 한국정치의 발전에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필자가 이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데에는 몇 가지의 근거가 존재한다.
첫째는 운동진영의 실험으로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조급증 때문이다. 최근 민주노동당의 가능성과 한계를 둘러싼 논쟁이 있지만, 적어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은 전노협과 민주노총, 국민승리 21 등 한국노동운동의 20여년에 걸친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험난한 여정의 결과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회운동의 정치적 성공 모델로 유럽의 녹색당을 떠올리지만, 그것의 성공은 10여년에 걸친 근본주의(Fundis)와 현실주의(Realos)의 장구한 노선 투쟁의 역사와 ‘생활정치’라는 모토를 내건 유럽의회에서의 예비적 진출의 축적된 경험에 근거한 것이었다(Bomberg 1998, 85-99). 이에 반해 최근 ‘미래구상’의 시도는 착실한 준비(주관적 역량)와 건실한 인프라(객관적 조건)라는 두 가지 필요조건 모두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모험주의적 시도에 가깝다.
둘째, 보다 근본적 문제점은 ‘미래구상’의 시도가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와 구분되는 독자적 방식, 가치, 정체성, 세력, 정책 등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유럽에서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는 환경ㆍ여성ㆍ평화 등 고유한 정체성과 독자적 가치의 수호 아래 전개되었다. 상당 기간의 사회적 투쟁과 정치적 훈련 속에서 이러한 정체성과 가치에 동의하는 사회적 세력이 구축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기반의 성장 속에서 기존 정당과의 연대와 신생 정당의 창당이라는 상이한 경로에 대한 전략적 선택에 대한 고민이 뒤따랐다. ‘미래구상’의 시도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대선이라는 상황의 엄중함과 불리한 선거환경이라는 정치적 조건이 선행적으로 고려되었고, 이러한 정치일정의 역산 속에서 그 기반을 창출하려 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상층 명망가 중심의 엘리트 정치’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정치를 대하는 방식과 접근은 미래구상이라는 단체의 명칭과는 대조적으로 구식의 보수정치와 너무나 닮아 있다.
셋째, 소통과 대표성의 문제 역시 심각하다. 녹색당의 창당 실험이든 미국의 민주당과 인권단체의 정책연합이든, 아니면 영국의 노동당과 여성운동의 연대이든 사회운동과 정당의 연계는 사회운동 내부의 치열한 공론화와 전략적 논쟁을 야기하였다. 동유럽의 민주화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때로는 이러한 극심한 노선투쟁이 운동의 중요한 분화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미래구상’은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에 의혹을 품고 있는 일반 국민들의 부정적 인식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물론이고 시민단체 내부의 이견과 반대를 해소하는데도 소극적이었다. 문제는 단절되고 왜곡된 소통과정과 협소한 대표성의 문제로 이러한 실험이 실패하였을 경우, 그것의 부담과 후유증은 전체 시민운동 진영이 고스란히 져야한다는데 있다.
요점은 시민운동 진영이 ‘주제넘게’ 정치와 선거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왕 할 것이라면 ‘운동답게’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에서 그것의 출발점은 인물 중심의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 정책 중심의 지자체나 총선이어야 한다. 동시에 ‘정당명부비례대표제’와 같은 선거법 개혁 투쟁을 지역주의 청산은 물론이고 진보정당과 시민운동의 정치적 진입을 촉진시킬 필수 조건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새로운 스타일의 정치 방식과 대안 제시를 통해 단체회원(membership)을 넘어선 시민권(citizenship) 영역으로 운동정치의 영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회운동이 현실 정치로 진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그것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는 운동이라면 제도(PR)ㆍ기반(주민)ㆍ가치(정책)에 대한 확고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합당한 순서일 것이다.
5) 정책이 정치를 결정하는(policy shape politics) 생활정치의 원리
현 시점에서 민주개혁집단의 과제는 자명하다. 부동산ㆍ교육ㆍ중소기업(일자리)ㆍ생태 등 한국사회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으며 대중의 삶을 퇴락시키고 있는 4대 민생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보개혁진영의 싱크탱크들의 연대회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시급하다. 한국의 민주화는 범국본, 연대회의, 국민회의 등 민주개혁진영의 통일전선체 조직이 한 몫을 하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운동의 분화와 전문화가 대세지만 적어도 국민적 관점, 아니 민중적 입장에서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작은 차이를 묻어두고 연대와 연합의 정치의 활성화가 요구된다.
정당사의 관점에서 열린우리당의 해산은 현직 대통령 임기 중 집권당 해체라는 정치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정체성과 리더십의 상실이 가장 큰 몫을 하였다. 이는 비단 남의 일만이 아니다. 오늘 진보진영이든 민주개혁세력이든 우리들을 묶어주는 내재적 정체성의 응집력과 세련됨은 취약하기 그지없다. 거대 이념으로 이를 묶어두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4대 민생문제에 대한 최소강령이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정당만의 몫이 아니라 우리들의 문제이다.
3. 시민참여 책임정치의 비전
한국정치의 실질적 진전은 개혁적 정당과 시민단체의 연대가 느슨한 형태나마 이루어졌을 때 가능하였다. 필자는 당분간 한국정치의 비전으로서 ‘시민참여 책임정치’를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시민참여 책임정치는 정치의 일차적 주체로서 정당과 정부의 주도권을 정당한 것으로 승인한다는 점에서 대의제에 기반한 책임정치, 보다 구체적으로는 민주적 책임정당정부를 지향한다.
그렇지만 시민참여 책임정치는 편협한 이익정치를 극복하기 위해 자율적 시민과 사회단체의 자발적 참여를 또 다른 원리로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구분된다. 현재의 대의제 하에서 정당과 선거 그리고 그것의 반영으로서 공공 정책은 시민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많은 자원을 갖고 잘 조직화되어 있는 집단과 그 구성원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개별 시민과 사회단체의 참여와 견제는 그러한 편향성을 억제하는 구조적 힘(counter-valence)으로 작동하여 대의정치의 추를 보다 균형적으로 잡아줄 것이다. 아울러 시민과 사회단체의 참여는 관료주의적 습성과 점증주의적 타성 때문에 항상 대중의 욕구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제도 지체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따라서 정치제도의 능력과 활력을 위해서는 자율적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기초한 부단한 혁신운동이 필수적이다. 액커만(Bruce Ackerman)은 미국헌법의 전통을 정부에 의한 일상적 정치결정과 특별히 고양된 순간의 민중에 의해 결정되는 이원적 민주주의로 정의하였는데, 이 개념은 민중적 참여의 결과가 궁극적으로 헌법적 내용을 혁신해 나가는 역동적 과정을 포착하고 있다. 필자는 액커만의 문제의식에서 더 나아가 예외적 상황이 아닌 일상적 정치에서도 시민들의 다양한 공적 참여를 강조하고자 한다. 요약하자면, 민주주의의 양대 지축으로써 정당과 시민단체가 서로를 강화시키는 상호연계의 강화가 시민참여 책임정치의 본질이다
■ 일시 및 장소
일시 │ 2007년 10월 12일(금) 오후 3시
장소 │ 배재대학교 학술지원센터 세미나실
■ 진행
• 사회 _ 이병천(강원대학교, 참여사회연구소장)
• 발표 _ 2007년 대선과 진보개혁진영을 향한 성찰적 고회
/ 정상호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CEO 정치론 논쟁의 재검토: 공화주의적 시각에서
/ 안병진 (경희 사이버대학교)
• 토론 _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이주희 (이화여자대학교)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장)
조희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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