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탈 정체화
인정을 위한 투쟁은 대다수의 경우, 좋든 싫든 하나의 성적 정체성 또는 사회적 인종적 정체성을 사회가 수용하도록 촉구하고 문제의 정체성 범주에 대한 존엄성과 권리를 부여하도록 사회에 압력을 가하는 운동에 기초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 속에서 그러한 정체성 정치에 기초한 사회운동은 개인을 고정된 추상적 규정성, 예컨대 여성, 동성애자, 노동자, 부르주아지, 기업가 등등의 범주 속에 가두는 위험을 치르게 된다. 161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정 개념이라는 문제틀은 그것이 개인들을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에 고착시키고 개인들을 단지 하나의 유형이나 그들의 독특한 본질을 표현해 주지 않는 부편적인 하나의 공통 통념으로 환원시키게 될 때 그 불충분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한 개인은 결코 성별, 인종, 사회적 지위 등의 불변의 특성에 구속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질 개념은 섬세한 차이와 존재들의 특수성을 고려하도록 또한 갈등적 관계들을 인정의 용어보다는 인식의 용어로 사유하도록 이끈다. 161
개인적 자아의 해체: 『팡세』“자아란 무엇인가” 파스칼은 세 단계에 거쳐 자아 개념을 해체한다. 1. 창밖에서 거리를 내다보는 구경꾼의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2. 사랑에 빠진 연인의 시선에서 자아를 고려한다. 3. 나의 판단력과 기억력때문이라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일까? 노화 혹은 사고와 질병 등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앗아가 버릴 수 있다. 사랑은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내게 잠시 주어진 특성들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 특성이 신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특성이든 그것은 모두 빌려 온 것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몇가지 특성을 사랑할 뿐이다. 162-165 물론 파스칼이 이러한 자아 개념의 해체를 통해서 의도했던 바는 틀림없이 인간이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영원히 불안정한 존재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 따라서 인간은 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통해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의 실체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6
자아의 유령적 성격 166 잭 런던의 마틴 에덴
사회적 자아의 해체:
모든 정체성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언제나 일종의 사칭이다. 「위인의 조건에 관한 첫 번째 담론」171 풍랑을 만나 뜻밖에도 미지의 섬에 내던져진 사내의 경우처럼 우리는 우연한 마주침의 결과로 세상에 던져졌다.. 조난자처럼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해 주는 어떠한 공적merite도 없다 173 파스칼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신체와 정신의 가소성이다. 정신과 신체는 어떠한 상태이든 구별 없이 수용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욱 유리하고, 살아가기 더 편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은 끊임없이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이동하는 인간의 본성과 합치하지 않는다. 한편 기질 개념은 개인들의 통일성과 정체성의 원리로서 실체적 자아 혹은 주체-자아라는 관념이 폐지된 자리에 드 대안을 제공해줄 수 있다. 왜냐하면 기질 개념이 인과 규정들의 짜임새를 출신과 도착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175
이행으로서 기질: 『권위의 조건에 관한 첫 번째 담론』 패싱passing 통행자 누구인 체 하며 이행하기: 패싱:이라는 말을 프랑스어로는 이행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에서 태어난 클레어(패싱의 실천)와 아이린 『패싱』작품, 한 방울의 원칙one-drop rule.177 이 단어가 지닌 의미론적 다양성 탓에 이해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다양성 덕분에 선을 넘는다는 의미와 두 세계의 경계를 넘는 밀행자paaeur가 된다는 의미를 표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79
적응과 도태 사이의 계급-이행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교양 있는 부르주아 세계로 들어갈 때마다 그 문턱 앞에서 내보여야만 했던 나의 유산을 드러내는 것을 그만두었다. 적응은 내려 두는 과정을, 심지어는 새로운 자리를 잡기 위해 기존의 것을 내팽개쳐버리는 과정을 포함한다. 적응은 예전의 가치와 방식을 버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적응은 자신의 허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탈피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변신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된다. 183
쁘띠 브르주아지와 최상층 부르주아지
상류층 사람들은 상당한 호감을 준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간 조건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평과 불만의 토로를 아예 제거해 버리고 누구에게나 유익한 이타주의의 일환에 따라 실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에 계급횡단자가 변신하게 에는 필연적으로 일정한 시간과 긴 숙성의 과정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일단 자신의 화법에서 사람들이 거슬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변신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89
『표범』의 부유한 농부 돈 태로지: “너 귀가 먹은 거야 뭐햐?”라고 말하지 않고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1
수많은 유리잔들과 식사 용품들은 그 사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세련미와 화려함을 보여주는 증표라기보다는 오히려 식사 중 결례를 범할지도 모르는 횟수의 증가를 의미할 뿐이다. 그래서 계급횡단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만이 아니라 물건들까지도 두려워하게 된다. 그는 언어의 법정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물들의 법정 앞에 서 있다. 193
계급횡단자에게 사건은 자신의 여유로움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 그의 불만족스러움을 이겨 내야 하는 시험이다. 스피노자적 용어를 빌려 온다면 자족감보다는 만족을 낳는다. 자족감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행위 역량을 관조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기쁨이라면, 만족은 바랐던 것보다 상황이 더 낫게 이루어진 일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만족은 예상되었던 슬픔을 이겨 낸 기쁨의 형식이다. 계급횡단자의 기질은 무모함과 소심함 그리고 호전성과 유순함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
복합물 혹은 화학적 합성물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기질의 형성은 화학적 분자 구조와 유사하다. 195
Ⅱ.틈새
거리의 에토스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경계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코드에 알맞게 행동하고 상황에 어긋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그에게는 잠시 물러나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고, 다라서 그의 생각과 실천에는 항상 거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209
부르디외 이중의 거리 마틴 에덴,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디디에 에리봉 낯도깨비같은 존재 - 그들의 기질 자체가 긴장 속에 있다. 221
마음의 동요: 긴장 속에 있는 기질.
부르디외 『자기-분석을 위한 초고』
카뮈 『최초의 인간』어머니-가사도우미 자크는 수치심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수치심을 동시에 경험한다. 왜냐하면 카뮈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크는 세상의 판단과 “또 자신의 악한 마음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수치심은 자가 증식의 폐쇄 회로 속에서 계속 재생산된다. 234 일반적으로 수치심은 생각, 행동 또는 자신이 보여지는 방식이 나쁜 것으로 지적-그 지적이 옳건 틀렸건 간에-받는 데서 생겨나는 모욕감이다. 수치심이 원천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이 감정은 언제나 평가하고 판단하는 자의 시선-이 시선이 외부의 것이든 혹은 내면화된 것이든-에 대한 표상을 함축하고 있다. 235 주체 자신이 판단하는 자와 판단되는 자로 분열되어 있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스피노자가 수치심을 우리에 대한 외부의 비난의 결과로 국한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의 어떤 행동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으로 정의하는 까닭이다. 235
사실 그 누구도 사회적 수치심을 느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자신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단지 부르주아지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혹은 프롤레타리아트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키가 크거나 작다는 이유로 상대로 낙인찍는 것만큼이나 부조리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적인 주장이 자신이 수치스러운 존재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줄 힘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사회적 수치심은 객관적인 멸시의 상황에 대한 반사적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감정은 치욕의 원인이 사라졌을 때조차 계속해서 실재적인 결과들을 생산하는 허구적 표상들을 먹고 자라난다. 사회적 수치심이 감정은 이 점에서 다른 형태의 수치심들과 동일한 규칙을 따르고 있다. 사회적 수치심의 발생론 239
수치심의 사상계는 삶의 방식과 사회적 실천들 사이의 격차를 존재에서 가치로 이행시키는 절차로부터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 판단의 가치론적 판단으로 전환이 수치심을 낳는다. 요컨대 사회적 자긍심이나 수치심은 특정한 환경의 삶의 조건에 관해 단지 어떤 삶은 이러저러하다고 사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안혹 그것이 저속하다느니 고상하다느니 비난을 규정할 때 생겨난다. 240
결국 문제는 세상의 모든 차별을 만들어 내는 존재에서 가치로의 이 은밀한 미끄러짐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 이행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존재에서 가치로 이행은 역관계들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것은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의 결과이며 그러한 지배 관계를 피지배자들의 동의까지 이끌어 내는 기만적 의식과 결합되어 있는 영속적 지배에 대한 욕망의 결과이기도 하다.240
수치심의 상상계는 역사적 우연에 의한 결과인 지배 관계를 마치 실존에 앞서는 본질인 것처럼 둔갑시키고 누군가의 운명이 원래부터 천한 것처럼 만드는 형이상학적 바꿔치기 속임수에 의해 구축된다. 피지배자들은 지배 관계가 마치 자연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또한 자신들의 열등성을 타고난 결함이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의 표식으로 여길 정도로 지배 관계를 내면화하게 된다. 수치심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 된 모멸감의 체화에 기초한다. 242
신생전설: 스탕달 『적과 흑』쥘리앵 소렐 주워온 아이, 부유한 누군가의 사생아 250
타자를 통해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기
어떻게 하면 이행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찢기고 파열된 기질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어려움은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있다. 타자성이냐 소외냐. 이것이 계급의 변화를 거치면서 일어나는 자기-변형에 걸린 판돈이다. 256
강인한 영혼은 올라가는 일이든 내려가는 일이든 상관없이 수행할 수 있다. 260
민중 계층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연대와 상부상조는 그 밖의 다른 자원이 전혀 없는 결핍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전된 행동 양식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을 자연적 선함과 온정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연대는 빈자의 유일한 자산이다. 따라서 연대가 알아서 잘 지내는 유복한 계급에는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는 것. 그것은 민중으로 남는 것을 말하는가? 그러나 우선 실체적 자아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이 민중적인지 부르주아적인지 논하는 것은 무용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장 어려운 것은 계급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엄격히 말해 민중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아비투스 도야를 통해 민중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민중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생겨나고 변천하는 여러 민중만이 있다. 265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과 화해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에 대한 명예 회복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어빙 고프만이 낙인의 전도라고 부른 것, 다시 말해서 모욕의 기호를 도리어 당당히 드러내고 자신의 상징으로서 주장하는 것을 통해 일어난다. 268
미슐레가 보기에 개인적 수준의 계급의 변화는 집단적 진보의 운동과 연장선상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올라간 자들이 자신의 색을 잃고 싶지 않다면 그들은 야만인이 되어야 한다. 즉 계몽하는 자가 되어 되찾은 자긍심의 기호들을 널리 퍼뜨리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 이는 계급횡단자들이 단순히 사는 곳의 경계를 바꾼 이행자로 존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부정의한 속박의 굴레를 계급과 함께 파괴하고 승리의 역사를 향해 전진하는 개척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274
어쩌면 이상화된 형태의 민중에 대한 지적 옹호야말로 배신이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옹호는 후견주의 우민 정치 이상으로 일상적 현실에 대한 무지와 경멸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민중은 자신의 해방보다는 억압 상태를 지속시키는 온갖 소외와 편견으로 가득한 일상 속에 살고 있다. 민중 계급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중 계급의 상당수가 여성, 동성애, 이민자의 권리와 그들의 사회적 자리를 인정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진보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상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치심과 관련해서 구별한 것과 마찬가지로 건강한 자긍심과 해로운 자긍심을 구별하고 출발 계급와 도착 계급에 대한 이중의 이상화를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277
계급 횡단자가 타자를 통해서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제어함으로써 이 감정을 동력원으로 바꾸어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지렛대로 변형시키고 기장들을 오히려 발돋움판으로 사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은 없다. - 이 죄책감이야말로 결정적인 것입니다. 이 감정이 제 글쓰기의 기저에 있다고 한다면 그와 동시에 글쓰기가 저를 그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281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아버지의 삶에 흔적을 남긴 사건들, 나 역시 공유하고 있는 한 존재의 객관적인 기호들을 모아보려 한다. 추억의 시도, 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 평평한 글이 자연스럽게 쓰여졌다. 내가 부모님께 중요한 소식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식 그대로 쓰인 글이. 286
대립물들을 합치시킨다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일이라기보다 타자와 자기 자신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일이다. 이러한 화해는 타자를 그리고 계급 장벅 뒤편에서 부정하고 억압했던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자신 안으로 재통합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재회를 주선해 준 것은 지배자들의 세계 중심에서 획득한 민족지적 문화이다./<<슬픈 열대>>를 반대로 뒤집은 것이 부르디외의 민족지적 프로젝트다. 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