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는 몇 주가 이어지고 있다. 주변을 채근해서 삶의 동선 사이에 채워둔다는 일. 버겁기도 하고 걸음은 중력을 비껴가는 듯하여 갈피를 쉽게 잡지 못한다. 새로운 환경은 마음과 몸의 중심점을 잡기가 쉽지 않다. 일터의 일은 그렇게 충돌하면서 일들을 만들어내고, 전시의 일은 이렇게 책들이 부딪히면서 일들은 만들어내다. 


다행스럽게 부유하면서 두 권의 책을 잡아내어 그 위에서 좀 쉴 수 있었다. 둘로만 나누면 무엇이 문제인가?란 물음에 그것은 언어와 그 구조에까지 물들어있음을 확인하고, 명확하고도 논리정연한 답을 해주고 있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여러 차례 잡담회와 술자리 모임들을 의도적으로 갖기도 하였는데, 지금을 살면서 그 틀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가까운 지인들이라 어느 정도 그 윤곽을 잡고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오산이었다.


절망과 우울을 덕지덕지 바르거나 마음 속에 시시때때로 불쑥불쑥 솟아나지 않고서는 '좋은 삶들'에 대한 인식이나 철학이란 그저 안일한 소리로 들리는 듯하다.  짓누르는 일상들은 납이란 추를 양쪽 어깨에 매다는 일은 아닐까? 그(녀)들은 차라리 쇼펜하우어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듯싶다.  그들의 마음 속에 안정감이란 드문드문 섬처럼 뜬구름처럼 왔다가는 것은 아닐까? 싶다.



어느 날 책방 매대에 있는 책들을 한 독서가이자 애서가가 쓸고 갔다.  조금 다른 속도로 아직 그 상태로 남아있는 매대의 중요한 책들을 담는다.  


혁명. 혁명. 혁명이라?


어쩌면 책들을 너무 쉽게 쓰는 건 아닐까? 지엽적인 안목들만 부유하는 건 아닐까? 문제를 측정하는 것들이 가늘고 얇은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새벽짬들에 뒷장들을 덮으며 보낸다. 젊은 청춘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안녕할까? 무자본 창업이라? 그들이 낳은 새끼들이 정말 복덩이로 굴러들어올까? 가지많은 나무들처럼 바람만 불면 웅웅거리지나 않을까? 부디 안녕하길 바라지만, 왜 하필이면 움직이는 모래 위에 기둥을 세우는 것일까? 거꾸로 물구나무선 책들이다. 안타깝다. 정작 몇 기둥을 제대로 발라내었으나 그 토대가 무엇인지 읽으려는 사람, 보려는 사람의 욕망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몇 년전 보았던 책들이랑 겹친다. 부디 삶의 희망을 변주하길 바라본다. 전시의 삶 가운데 겹쳐 쌓아올린 사상가을 읽어낸다. 무슨 말인줄, 무엇을 얘기하려는지가 뚜렷하게 잡히는 몇 달이었다. 


다시 몇 달 후에 함께 책을 나눈 이들에게 안부를 물어볼 일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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