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눈이 내린다.는 소식이다. 카톡과 페북에는 한 장 두장씩 눈소식이 펼쳐진다. 아니 이 공간도 눈이 오고 있다. 첫눈이라고!! 꺅! 은 아니어도 이런 분위기다. 이것저것 동선을 갖고 남은 시간, 비닐봉투에 챙긴 귤을 가지고 서점엘 들르다. 마침 주문한 책이 도착한다.
-1
대구를 천천히 음미하며 걸은 적이 있다. 아니 대전도 그렇고 목포도 그렇다. 대구역과 순종의 길과 읍성, 서문시장도 들러봤다. 청라언덕도 그렇게 한 발 두발 걷고나서야 이 도시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근대 문학 공간도 그렇게 채워간다. 포항 구룡포도 그러하다.
0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뭔가 심각하게 부족했다는 걸 느낀다. 뭔가 중요한 것을 빠트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하나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다. 축구경기의 축구공처럼 110년 역사, 어쩌면 자본주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 상품에 대해서 신랄하게 얘기한다. 공의 그림자를 쫓고 있지만 공이 튀어가는 방향과 그 삶의 황폐화하는 축구 경기와 선수, 심판, 그리고 관객에 대해 동시에 이야기하고 있다.
19세기 제국 일본은 동아시아로 영토를 넓혔고 일본인들은 그 새로운 영토로 디아스포라를 시작했다. 조선의 읍성에도 일본인 이주자들이 늘고 제국의 군대와 이방의 신 아마테라스가 기차를 타고 들어왔다. 총칼과 신이 지나간 곳엔 공장과 유곽이 지어졌다. 군대-신사-유곽. 이 식민 기술 삼종세트가 펼쳐진 곳은 한반도만이 아니었다. 제국 일본의 점령지 타이완, 남양군도, 사할린, 난징, 상하이, 랴오둥반도와 만주 들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시아에 편친 황군의 네트워크 모든 곳에 천황의 조상인 아마테라스, 고귀한 태양의 여신과 함께 유곽의 여인들이 뒤를 따랐다. 6
1
그녀는 6개월을 대구에 머물렀다 한다. 사진을 찍고, 인터뷰하고, 작품을 만들고, 걷고 다니고 쓰고 작가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채운다. 팔중원정, 야에가키초. 미나리꽝 습지. 여덟 개의 담이 드리워진 곳을 파고파도 알 수 없다. 다가서지 않는다. 그러다가 미식거리는 속을 주체하지 못하고 앓는다.저자는 날카롭게 잡아낸다. 그리고 거침이 없다. 그 시작이 냄새다. 가장 오래가고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은 읽히지도 보이지도 않아 겪어내게 만든다. 그리고 여덟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작업.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도 놀랍다. 신들리지 않고서는 어찌 이런 작업을... ...
이모, 삼촌, 오빠, 이 호칭들의 중심에는 '아가씨'라 불리는 생략된 발화 주체, 젊은 여성이 있다. 이모도 오빠를 오빠라고 삼촌을 삼촌이라고, 다른 이모들을 이모라고 부른다. 삼촌도 이모를 이모라고 오빠를 오빠라고, 다른 삼촌들을 삼촌이라고 부른다. 오빠도 이모를 이모라고 삼촌을 삼촌이라고 부르고, 다른 오빠들을..., 오빠들을 손님이라고 부른다. '아가씨'의 시선으로 서로를 부르며 '아가씨'의 시선으로 서로에게 존재한다. 아가씨가 없다면 이들은 휘발된다. 한가운데에 아가씨를 놓고 에워싼 습지 전체가 가족이다. 이모, 삼촌, 오빠는 '아가씨'를 일-에너지로 전환한다. 아가씨-일-에너지는 자기 자신을 고정자본 삼아 자기 자신을 유동자본으로 일하고 자기 자신이 원료, 자원이자 상품이다. 아가씨-일-에너지는 재생산되지 못한다. 그저 소모된다. 130
2.
작년 초 대전역 앞 성매매를 다룬 김인경 作 <정동여인숙>이란 연극을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 지경이라는 걸. 팔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살아갈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세상은 가장 약자에게 모든 비난과 책임을 거꾸로 씌우고 면피한다. 그 밖을 나서기도 건너뛰기도 어렵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장소에 매여 있다. 장소는 공간적이라기보다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옆 사람들의 시선들이 교차하는 곳이다. 우린 그들의 시선에서 밀려나고 실패할까봐 두렵다. 공부가, 싸움이, 초이스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인정받기 위해서다. 인정 투쟁에서 실패할 때, 그 시선들의 바깥으로 밀려날 때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생을 끝내기도 한다. 습지가 지옥이더라도 살아야 한다. 149
습지는 여덟 겹으로 잠겨 있다. 습지의 생태계는 성 판매 여성들이 돈을-벌고-돈을-쓰는-기계로 살아가도록 짜여 있다. 삶의 바깥으로 나가는 방법밖에 없다.
3
이 책은 하나의 작품이다. 찍은 사진들과 보탠 작품들이 글과 함께 어우러진다. 대나무 숲에 이야기하는 심정으로 만든 이 작품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단선의 시선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세 번을 살고 네 번을 살아도 그 시선으로는 아무런 앎도 깨우침도 가져갈 수 없다. 110년만에 없어진 유곽. 그래도 계속 찾는다.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때로는 통찰과 자신의 삶의 방식에 물음표를 제공하는 이 작품은 크다. 초기에 물음을 제기한 X나 저X새끼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또 다른 물음을 던진 그의 작품에 경의를 표한다.
볕뉘.
1. 이 책을 읽으면서 이계수 교수의 <<반란의 도시>>가 겹쳤다. 역사를 묶어서 볼 때, 우리의 출구가 가까워 왔음을 느낀다고 할까. 빛일까...아니며 또 다른 터널이 이어진걸까. 그건 알 수 없지만...
2. 날씨예보가 아니라 시대예보가 필요하다. <<핵개인의 시대>> 서문을 읽다. 예상이 된다. 하지만 에필로그는 새벽에 펼치다 잠들었다. 다시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