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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 - 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평점 :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까? 이 책을 막 읽고난 지금 주인장의 기분은 들떠있다. 뭐랄까? 대단한 걸 접하고 난 다음의 희열감이랄까? 맨 처음 이 책을 본건 신문에서였다. 우리 부대에서 보는 조선일보 - 아마 전군이 이 신문을 보지 않을까 한다 - 에서 매주 토요일이면 '조선BOOKS'라고 하는 조그만 정보지가 곁들여져 나오는데 거기에는 신간 도서에 대한 것과, 그런 책에 대한 다양한 내용들이 실려있다. 거기에서 황석영에 대한 소개와 함께 나온 책이 바로 이 심청이었다. 한 여인네의 운명을 통해 본 민족적 애환이라고 해야할까? 뭐 그런 내용이란다. 솔직히 주인장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제요, 스타일의 책이었다. 황석영도 그 이름이 유명하고 그의 작품도 몇몇 읽어봤지만 - 최근에는 그가 쓴 삼국지를 4권까지 읽었다 - 그의 문학 세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기에 그냥 책 잘쓰는 유명한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는게 전부였었다.
그런데 왜 이 책을 보게 됐나? 지금은 전역하고 없지만 선임병 중 한명이 이 책을 보고 있는 걸 우연히 본 것이다. 어떤 내용이냐, 재미있냐 등등 물어봤을때 그 선임병이 한말은 "야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게 됐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남자들만 있는 군대라는 집단에서 그런 류의 정보는 상당히 인기가 있다. 하지만 다 읽고난 지금은 상당히 기분이 좋다 -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기를, 그런 쪽으로 기분이 좋다는게 아니니까 - 동기야 어쨌든 - 황석영님한테는 죄송하지만 - 읽고나니 이 책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책이 대단하다기보다는 쓴 사람이 대단하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심청 하권을 다 보면 이 책에 대해 어떤 사람이 쓴 비평이 실려있고, 작가 자신이 쓴 후기도 담겨있다. 모더니티니, 자본주의니 뭐니 별의별 말이 다 나오지만 주인장은 그런 어려운 말은 잘 모르겠고, 그저 책을 읽은 그대로 느낀 것만을 여기에 한번 적어보고 주인장 나름대로의 생각도 같이 곁들일까 한다.
내용은 15세의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조건으로 공양미 3백석을 받아가는 뺑덕어미와 심봉사,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심청의 우여곡절, 80세가 다 되어 겨우 조선으로 돌아와 삶을 끝마칠때까지 한 여인네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주인장이 가장 신기해했던 것은 황석영이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 그것도 상당히 자세히 - 설정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구한말, 더 자세히 말하면 서양 열강들이 동점해 중국을 난도질하고, 러-일 전쟁, 청-일 전쟁 후 일본이 조선을 강점할 때까지 반세기, 그야말로 역동의 반세기 이상을 청이는 겪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심청이에 관련된 소설이 여럿 있었다고 하는데 주인장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흥미로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심청은 인당수에 던져졌다가 다시 건져졌고 렌화 - 연화의 중국식 발음 - 라는 이름으로 중국 부잣집 할아버지의 시첩으로 팔린다. 당시 중국 상인들이 조선의 가난한 집 딸들을 이런 식으로 사다가 뱃사람들의 제물로 쓰고, 또 다시 부잣집 시첩으로 팔아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서부터 심청은 더 이상 조선땅에서 태어나자란 심청이 아니다. 그녀는 '렌화'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첫번째 변신이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는 우선 난징으로 갔다가 다시 진장으로, 다시 타이완의 지룽으로 흘러가고 그 곳에서 만난 외국인의 첩으로서 싱가풀로 가면서 다시 로터스 - 연화의 영문식 표기 - 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여기서 그녀는 '로터스'라는 사람으로 다시 한번 태어난다. 또한 그 곳에서 다시 돌아와 류쿠를 거쳐 나가사키로 가기까지 심청은 렌카 - 연화의 일본식 발음 - 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렇게 일본으로 가면서 '렌카'로 다시 태어난 심청은 일생동안 4개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분명 그녀는 한명의 자아체다. 그리고 렌화-로터스-렌카 역시 연화, 연꽃이라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개의 자아에 3~4개의 명칭,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삶의 애환을 대표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렇게 여러개의 명칭을 얻기까지 그녀 자의적인 의지라기보다, 외부에 의한 타의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이 더욱 보는 이로 하여금 절실한 심정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다양한 삶을 살던 그녀는 나중에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면서 비로소 심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기까지 무려 65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흘렀고 이미 고향땅은 자신이 예전에 보고 듣고 자라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세계의 흐름에 부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편안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고생에 보답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자세한 시대적-공간적 배경의 제시는 이 소설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판소리, 전래동화의 한 종류로만 느끼게 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구한말 격동의 시대만큼 여인의 애환을 그려내기 쉬운 배경도 없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우여곡절은 한 여인의 삶을 통해 당시 조선이 처했던 상황, 아시아가 처했던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중심에 심청이 서 있는 것처럼 느끼게끔 해준다. 그로 인해 독자는 현실성있게 그녀를 이해하는 것이리라. 막연히 조선시대에 살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한말 격변하는 시대에 살던 한 억센 여인의 이야기로서 말이다.
보면 알겠지만 '매춘'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청이의 삶은 흘러간다. 어린 나이에 늙은 할아버지의 회춘용 시첩이 되고 그 할아버지가 죽자 그 셋째 아들에게 몸을 허락하는 대신 그를 따라간다. 그리고 그녀가 배운건 일급 창기로서의 자세였다. 아울러 심청은 남자라는 존재에 대해 그녀의 생각을 정립해 나간다. 그녀는 세상을 힘이 지배하는, 격동하는 존재로 인식했으며 그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여자라는 간단한 원리를 깨닫는다. 이제 남자는 그녀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용해야 할 존재다.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 심청이 살아가면서 성숙해지면서 점점 드러나는 그녀의 성격이 바로 이것이다.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그녀의 삶은 보는 이로 하여금 대단하다고 느끼게끔 한다. 하물며 남자가 봐도 이럴진대 같은 여자가 보면 어찌할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책 중간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남자는 돈 버는 것에 매달려 허덕인다. 그 짓밖에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뭐 대강 이런 대사인데 심청이 세상에 대해 내뱉은 강렬한 비난같이 들린다. 마치 권상우가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영화에서 "대한민국 학교! 다 X까라 그래!"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주인장은 예전에 '노는 계집 창'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역시 신은경이 나오는 야한 영화였기에 본 거였지만, 볼수록 신은경이라는 여자가 점차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무슨 메세지를 남기려는 듯 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미군 기지 부근에서 양공주를 했던 여자가 썼던 자전적 소설도 본 적이 있었다. 한결같이 밑바닥에서부터 살아온 여인의 삶을 통해서 사회에 대해 뭔가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렇게밖에 자신이 살 수 없게 된 사회와 그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낸 남성들에 대한 강한 저항감, 여자의 위대함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한다. 세상 모든 것의 어머니, 대지의 여신이라고 불릴만큼 무한한 포용력을 가진 그런 여자의 위대함 말이다.
심청은 여기서 더 나아가, 포용력에서 끝난게 아니라 남자를 주도할 수 있는 적극성, 강한 개척 정신까지 내포하고 있다. 그 표현이 바로 심청이 싱가폴과 류쿠에서 실시한 고아원 설립이다. 지룽에서 기녀 생활을 하면서 창녀가 낳은 자식이 어떻게 길러지는지 깨달은 심청은 자신이 아끼던 동생이 애를 낳다가 죽자, 그 아이를 자신의 딸처럼 기른다. 그리고 양인의 첩으로 싱가폴에 가서 살면서 그녀는 고아원을 짓는다. 주인장은 왜 하필 고아원 사업일까하고 생각해봤다. 그것은 바로 아이와 모성애로 대변되는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심청은 20대가 되면서 성숙한 여인의 내면을 다질 수 있겠 됐고, 그러면서 여인의 본성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자신의 버려진 처지, 먼 이국땅에서 몸과 마음을 원하지 않는 타인에게 빼앗긴 그녀는 자신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의 삶을 다독거려 준다. 여기서 여자의 포용력이 극에 달한다. 자신의 상처를 뛰어넘어 남의 상처까지 다독거리며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포용력 말이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책을 읽는 독자는 황석영이 심청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게 무엇인지 느낀다. 거기다가 시대적 배경에 맞는 심청의 삶은 당시 한국인과 아시아인의 삶마저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서양인의 잣대, 서구주의가 팽만한 세상에 마치 경종을 울리듯이 말이다.
심청은 상처입은 소녀에서 성장해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아가씨,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으며 그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여인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며 세상 속에서 잊혀져가는 노부인으로 그 모습을 변모시킨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삶의 굴곡은 근대화 시기, 아시아와 그 아시아를 노리는 서양인의 모습과도 잘 들어맞는다.
상권은 중국과 타이완 등이 배경이지만, 하권은 류쿠, 나가사키 등 일본이 주무대다. 수많은 남자들, 심청이 만난 수많은 남자들이 대표하는 공간적 배경은 우리들에게 색다른 느낌을 준다. 일반적으로 이 책을 본 사람들은 하권이 상대적으로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야한 내용들이 상권에 많이 있기도 하지만 일본 문화가 우리들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일본이 유일하게 서양식 근대화에 성공해 아시아 각지를 침입했다는 사실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일본의 사회적 환경은 상당히 엄격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통제된 사회였다. 그녀의 운명을 예견이라고 하는 것일까? 일본에서의 그녀 역시 중년 부인의 절제되고 완벽한 어머니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일본에서의 삶도 마무리하고 개항기를 맞이한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녀에게 조선이란 고향은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곳이건만, 정작 이 책에서 고향인 조선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이 여겨진다. 조선이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 것은 책의 맨 처음과 제일 마지막 일부분일 뿐이다. 심청은 3개의 이름으로 3개국을 거쳐 살았지만 그녀가 마지막에 당도한 곳은 결국 심청이 태어나 자라던 조선땅이었다. 우리 민족의 애환이랄까? 심청을 통해 본 이 사회는 가슴아픈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내가 심청이었다면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그녀에게 무한한 경외심을 표하고 싶을 뿐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이 느껴지는 건 유독 주인장만이 느끼는 감정일까?
주인장이 이런 문학 작품을 즐기지 않아서 있는 감정, 느낀 그대로를 두서없이 썼는데 부족한게 분명 있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주인장에게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행여나 주인장이 쓴 글이 이 작품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깍아내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