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이집트를 찾아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2
장 베르쿠테 지음 / 시공사 / 1995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이집트 고대사를 밝히는데 주력하기 보다는 고대 이집트의 유산이 어떤 식으로 사라지고, 어떤 대접을 받으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남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아마 이집트 고대사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라면 약간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문화유산이 오늘날 남게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특히 고대 이집트의 문화유산이 어떤 식으로 세계 열강들에게 수탈되고 훼손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이 아주 적당하리라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역시 유럽 열강들과 일제에게 수없이 많이 수탈되었기 때문에 이집트 문화유산의 수탈 과정은 필자로 하여금 많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책은 첫장부터 도발적인 문구로 시작한다.

- 4세기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는 카톨릭이 지배적이었다.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이교도 신전을 모두 폐쇄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 무렵 이집트에는 전통적인 신(神)이나 여신을 신봉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신전의 폐쇄는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그곳 사이에 쓰이던 상형문자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며,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 한 나라의 수천년 역사가 어둠 속으로 파묻혀 버린 것이다. 처음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집트 고대사를 말살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이집트인들의 문화적 전통을 소멸시키려고 계획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미 이집트인들은 그들 선조의 종교적 · 문화적 소산을 상실한 상태였고, 전혀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던 정책의 실행으로 인해서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문화재 얘기를 할때면 으례 근대 서구 열강이 약탈해간 문화재들과 일제강점기때 약탈당한 문화재들(지금 반환해야 하느니 말아야 하느니 수없이 외치고 있는)에 대해 거론하며 비분강개한다. 물론 필자 역시 마찬가지도 말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우리 선조들이 스스로 우리 문화유산을 상실할만한 바탕을 마련한 적은 없었을까? 예를 들어 오늘날 기독교 단체에서 단군상을 부수고, 문화재로 지정된 불교건축물의 정당성을 따지고 드는 것처럼 우리 역시 종교적 · 문화적인 기준이 바뀜에 따라 우리 스스로 우리 선조의 문화를 외면하고 잃어버린 적은 없었을까? 당연히 없었다고 얘기하지 못 할 것이다. 유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우리는 수천년 불교문화를 상실했고, 그 유교문화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되고 바뀌면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었다. 이후 찾아온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은 그런 문화재의 상실을 더욱 더 가중시켰고 말이다. 우리는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없게끔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집트에 저만큼의 문화유산이 남아 다행인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 문화유산을 이제는 지켜야할 때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음 장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집트의 역사는 시간이 흐르면서 수차례의 사건때문에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이집트 고유 종교가 사라지면서 신을 숭배하는데 읋었던 문자가 사라졌고, 그 후손들마저 그 문자를 아는 이가 없게 되었다. 이후 카이사르의 알렉산드리아 침공으로 인해 70만권이나 되는 장서를 보관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화재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450년 무렵에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 중 상당수가 사라졌고, 고대 이집트 문헌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남지 않았다. 우리가 오늘날 한국 고대사를 공부할때『삼국사기』나『삼국유사』(그 시대부터 상당히 후대에 만들어진)를 갖고 연구하는 것처럼 이집트 역시 그런 전처를 밟게 된 것이다. 우리가 몇몇 단편적인 금석문을 애지중지하면서 고대사를 연구하는 것처럼 이집트 역시 로제타스톤과 같은 몇몇 중요한 금석문을 토대로 그 역사적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으니 이 책을 읽는 내내 동질감이랄까, 그런 것들을 많이 느꼈다. 또한 한국 고대사 연구에 있어 중국 문헌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이집트 고대사에 있어서는 헤로도토스, 디오도루스, 스트라본, 플루타르크와 같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장가들이 남긴 여행기가 중요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제3자의 시각으로 쓰여진 기록이지만 그나마 이집트에 대한 단편적인 역사는 그렇게라도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이집트하면 벨조니를 가장 처음 떠올렸다. 하지만 이 책을 보니 이미 17세기 초 테브노와 같은 선교사들이 이집트를 방문해 미라, 문화, 풍습 등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며, 19세기에는 프랑스 총영사 브노이 드 마예와 같은 악명높은 유물 약탈자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집트에 대해 포괄적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으며(거기에는 1735년 케옵스의 피라미드 단면도를 정확한 측량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도 포함된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수많은 유물들을 약탈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클로드 시카르 신부는 이집트 전역을 여행하면서 최초로 이집트 지도를 완성하기도 했으며, 비방 드농은 이집트학의 탄생에 크게 기여할 정도로 학문적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비방 드농의 연구성과는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게 하였고, 위원회는 2년 간의 준비 작업을 거친 후 기념비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이집트지(誌)』를 남겼다고 한다. 이집트의 초창기 학문적 성과는 로제타스톤이 그 시초인 줄 알았는데 이미 18세기 말에 이러한 학문적 성과가 이뤄졌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것도 자국의 역사가 아닌, 안개 속에 가려진 타국의 고대사를 말이다. 이 책의 번역판이 나와있는지 한번 찾아보고 싶을 뿐이다.

실제 비방 드농의『이집트 나일강 상류와 하류 여행기』, 동방원정대 과학 · 예술위원회의『이집트지』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이집트 열기가 유행처럼 번져 나갔고, 1802년부터 1830년 사이에 프랑스, 독일, 영국, 스위스 등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이집트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학문적 성과는 오히려 부작용을 불러왔으니 바로 유물 약탈이 이전보다 더욱더 활발히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도굴 안내서까지 나왔을 정도니 말 다했다. 특히 오스만투르크 황제가 임명한 이집트 총독 모하메드 알리가 이집트 현대화를 추진하면서 유물 약탈을 조장했으며, 드로베티나 헨리 솔트, 벨조니 등 유명한 약탈자(?)들이 루브르, 대영박물관의 수장고를 꽉꽉 채워주기 시작했다. 카이로 항에서 수많은 유물들이 범선에 실려 지중해를 가로질러 유럽으로 떠났던 것처럼 부산항에서도 수많은 유물들이 증기선에 실려 현해탄을 가로질러 일본으로 떠났을 것이다. 지금은 정창원 곳곳에 쳐박혀 있거나 어딘지도 모른채 숨겨져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또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후 샹폴리옹이 로제타스톤을 해석함으로써 고대 이집트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마리에트, 가스통 마스페로, 하워드 카터, 피에르 몽테 등 수많은 이집트 유적들이 학문적으로 발굴 조사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야기는 일단 여기에서 끝을 맺는다. 투탄카멘의 무덤을 발굴하면서 벌어진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전하면서 말이다. 아마 하워드 카터가 그 앞에서 느꼈을 전율은 김원룡 선생님이 무령왕릉 앞에서 느꼈을 전율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실제 투탄카멘의 무덤 역시 다른 무덤을 조사하기 위해 쌓아놓은 흙더미 때문에 나중에 발견된 것처럼 무령왕릉 역시 다른 무덤때문에 가려져 도굴(도굴적 발굴조사든 뭐든)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은가. 필자 역시 평생에 그러한 대단한 발굴을 한번쯤은 해보고 싶은데, 언제 기회가 올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집트 사막 어딘가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대단한 유적들이 많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 본다. 우리나라도 파면 무조건 유적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또한 책의 뒷부분에는 아부심벨 구조작업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예전에 책에서도 보고 다큐멘터리로도 봤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완댐 공사로 인해 거대한 석조구조물을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을 하다니. 우리 나라에서도 수많은 댐공사가 벌어지고 그로 인한 구제발굴이 수없이 많이 일어난다. 물론 그 안에서 아부심벨 신전과 같은 거대한 시각적 효과를 가진(이건 그만큼 돈벌이가 될만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유적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이러한 보존작업은 행해지지 않겠지만, 무조건 유적을 조사하고 덮어버리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밖에 이 책의 저자인 장 베르쿠테의 하루를 소개한 '고고학자의 하루'라는 1장짜리 챕터 역시 볼만하다. 뭐 오늘날 고고학자의 삶과 크게 다르진 않지만 이렇게 일기 형식으로 매일매일을 기록해두면 나중에 그 스스로에게 굉장히 좋은 기록자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고고학자라면 누구나 현장에서 야장이라고 하는 작은 수첩에 그날그날의 일들을 기록한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매일매일의 작업 진행상황을 알 수 있고, 그것을 토대로 훗날 보고서 작업을 할때 도움을 얻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유적을 조사할때 그 진행과정을 자세히 남김으로써 자료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이런걸 보면 필자 역시 외국에 나가서 이런 발굴조사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을 매일매일 남기면 필자 또한 훗날 이처럼 책을 쓸때 서먹을 수 있을 것 아닌가.

이 책은 전체적으로 많은 삽화와 도판 자료들을 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보는 내내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읽는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책 가장 뒷편에는 이집트 왕조의 연표를 서술해 놨는데 이집트사를 개략적으로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한국 고대사의 현황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았다. 다른 독자분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arine 2009-08-29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인의 단군상 훼손이나 불교 문화재에 대한 정당성 논란은 오늘날 기독교가 욕을 먹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네요. 유럽 역사를 알려면 기독교를 알아야 한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왜 한국사를 알려면 불교를 알아야 한다는 진리를 외면하는 걸까요?

麗輝 2009-08-29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인들의 그런 행동이 싫지만 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고대 히브리사를 공부하면서 기독교에 대해 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관용은 예수님 이후로 사라졌나 봅니다. 어쨋든, 이집트사를 보면서 상당히 그러한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이 느껴져서 조금 의외이기도 했습니다.
 
박정근의 고고학 박물관 - 선사시대를 이해하는 42가지 열쇠
박정근 지음 / 다른세상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부제는 ‘선사시대를 이해하는 42가지 열쇠’인데 부제만 본다면 이 책의 내용이 어떠한 것들로 이뤄졌는지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쓴 논문이나 저서를 봐도 선사고고학 전공자임을 알 수 있는데(머리말에 ‘고고학의 연구대상은 주로 선사시대의 유물 · 유적들이다.’라고 쓴 것만 봐도 대강 저자의 전공을 짐작할 수 있겠다), 실제 이 책에서도 구석기~청동기시대까지 다루고 있었다.

우선 이 책에 대한 총평(總評)을 하자면 비전공자를 위해 쉽게 썼기 때문에 읽는데 부담이 없으며, 중간 중간 저자가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 논지를 전개했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그려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아마 이 2가지가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만큼 너무 쉽기 때문에 관련 전공자들이 읽기에는 조금 엉성한 책이라고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선사고고학에 대한 내용을 한번 정리하고 그에 대해 가볍게 되돌아본다는 차원에서 책을 읽는다면 그 역시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각 장마다 앞에 2~3쪽에 달하는 ‘시대개관’이라는 챕터가 있는데 어느 정도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시험 공부할 때 내용 정리한다는 개념으로 읽어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럼 구석기시대부터 가볍게 살펴보도록 하자. 목차를 죽 보면 정말 저자가 쉬운 주제를 간추려서 글을 썼구나~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구석기시대는 인류가 어떻게 직립보행을 하게 됐는지부터 어떤 연모를 썼고, 불은 어떻게 쓰기 시작했으며, 인류가 어떤 식으로 변화했는지 등을 가볍게 언급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그 다음에 구석기인들도 옷을 해 입었고, 예술이 뭔지 알았으며 장례풍습이 있었고, 흑요석이라고 하는 돌을 교역했다는 등의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석장리와 전곡리 유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처음 책을 딱 펼쳐보고 세부 주제들이 조금 중구난방으로 나열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인류의 변화, 도구 및 불의 사용, 정신세계, 생업경제, 관련 유적 등으로 소제목을 달아서 다시 보기 좋게 내용을 세분했으면 더 좋았지 않았나 싶었다. 

맨 처음 나오는 내용은 ‘네 발보다는 두 발이 낫다’인데 이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기본적인 내용이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두 발로 걷거나 뛰기 때문에 네 발로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서커스나 동물원의 동물 보듯이 쳐다볼 것이다(실제로 아직도 네 발로 기어 다니는 한 가족이 외국에 있다는 신문기사를 몇 년 전에 봤던 기억이 납니다. 해외토픽이었죠). 하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초창기 인류는 네 발로 뛰기도 했으며, 필요하면 두 발로 움직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허리 디스크의 고통, 무좀의 고통, 관절염의 고통 등에도 불구하고 두 발로 걷는 것을 택했는데 그 순간이 언제이며, 그 이유가 무엇인지가 늘 학계의 고민이었다. 책에서는 ‘연모사용 가설’, ‘사냥 가설’, ‘음식분배 가설’, ‘먹거리 유인 가설’, ‘로드만과 메킨리의 가설’ 등을 소개하면서 저자 자신은 ‘연모를 이용한 방어와 먹거리 획득’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여러 학설을 소개하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면서 이 부분은 더 고민을 해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글을 끝맺고 있었다. 독자로 하여금 저자의 생각이 어떠한지 알려주고, 독자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방식이 좋은 것 같다.

그렇기에 필자의 생각을 덧붙이면, 인류는 초창기에 단순히 ‘살기 위해서’ 직립 보행을 했던 것 같다. 초창기 인류는 털이 조금 적은 침팬지와 고릴라의 중간 단계 유인원에 가까웠을 텐데 더 민첩하지도 못 했고, 나무를 더 잘 타지도 못 했고, 이빨이 더 날카롭지도 못 했으며 꼬리도 없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다른 유인원보다 불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잠자리나 먹는 음식 등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즉, 장점은 딱히 없으면서 단점은 더 많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초창기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었나? 아마 자연스럽게 연모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돌이나 나무 등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이나 들고 휘두르며 자신을 방어했을 것이다(초창기 인류가 위대한 사냥꾼이라는 설은 저자도 적고 있듯이 현대인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며 남성중심주의적인 가설이라는 비판을 받은지 이미 오래이므로 연모를 써서 사냥을 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연모를 쓴다고 꼭 두 발로 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필요할 때만 두 발로 서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발로 서면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유인원보다는 더 높이, 더 멀리 주변 환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점차 두 발로 서서 주변을 보는 쪽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높다. 남들보다 더 빨리 위험을 감지하고 더 먼저 위험에 대비한다면 그만큼 생존확률이 높아질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두 발로 더 멀리 이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네 발로 나무 등지를 오르내리며 위험을 피하는 대신 더 강한 연모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을 것이다. 즉, 초창기 인류는 단지 다른 유인원보다 더 불리한 상태에서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직립보행을 하는 것이 낫다고 말이다. 어떻게 보면 저자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여기에 먹거리 획득이라는 조건을 굳이 달아야 할까 싶다. 어쨌든, 이런 부분은 초창기 인류 역시 그 당시 원숭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생각해야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저자는 ‘신이 선물한 불’이라는 챕터에서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인류가 최초에 불을 어떻게 발견했고, 불을 어떻게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를 말이다. 이런 상상은 대부분의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프랑스에서 제작한 ‘불을 찾아서’라는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소개한 것은 좋았다고 생각한다(처음 보는 영화였다). 불씨를 관리하고 요리를 하는 등의 행위는 여자가 담당했을 것이라는 아주 상식적인 인식이 반영된 영화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불을 찾아서 이곳저곳을 여행했을 구석기인에 대한 설정은 굉장히 참신했다. 청동기인으로 추정되는 얼음인간 외찌의 경우에도 박달나무 통에 잿불을 담아 불을 피우는데 사용했을 것이라 하지 않는가. 하지만 필자는 그런 생각도 해 본다. 흔히 최초의 불을 언급할 때 많이 얘기하는 것이 천재지변(특히 번개나 산불 등)에 의한 큰 불을 보고 인류가 경외심을 느꼈고, 그 불을 사용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인데 과연 그랬을까~싶기도 하다. 원래 거대한 존재(산이나 물, 불, 하늘 등)를 보고 경외심을 느끼면 그것을 섬길 생각을 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따라한다거나 소유하려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큰 산불을 보거나 번개 등으로 생긴 불을 보면 신성하게 여기지, 그것을 소유하거나 만지려고 했을까? 그래서 불은 오히려 주변의 아주 소소한 이유로 생겨났고, 호기심 많은 인류가 그것을 계속 관찰하고 따라하다 보니 사용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이 주제 역시 오늘날 밝혀내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이므로 이 정도 상상만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다만, 저자는 저우커우뎬 유적에서 발견된 재와 불에 그슬린 뼈들을 당시 사람들이 불을 사용한 증거로 제시하고 있지만 이는 이후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판명이 났다. 이 책이 2002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이전에도 새로운 연구 성과가 있었을 텐데 참고 되지 않은 것 같아 그 점이 아쉬웠다. 그리고 저자는 이 책에서 ‘슬기사람’, ‘신경굼’, ‘가운눈굼’, ‘가운콧굼’ 등 순수 우리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오히려 이런 부분은 책을 읽는데 불편하기까지 했다. 그 대신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보다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말을 쓰면 어땠을까 싶다. 그 밖에 ‘-굼’이라는 미칭을 쓴 단어는 아직도 뭔지 잘 모르겠다.  

그밖에 필자가 재밌게 본 부분은 ‘천을 짰던 구석기시대 여인들’이었다. ‘끈 혁명’이라는 말이 일단 독특했는데 생각해보니 단순히 가죽을 갖고 옷을 해 입는 것보다 실을 짜고 그것으로 어떤 직물을 만들고, 끈을 이용해 디자인한 옷을 입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화장에 대해 언급하면서 얼굴보다 피부 보호를 위해서 신체 화장을 먼저 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추워지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었을 테지만 마찬가지로 얼굴도 몸뚱이의 일부인지라 역시 무언가로 덮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부보호를 위해 화장을 했다면 얼굴화장 역시 신체화장과 같이 이뤄졌다고 봐야 상식적이지 않을까 싶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좀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는 맨 처음에 동물가죽, 소위 말하는 모피를 입었을 테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부터는 각종 직물을 이용한 옷을 해 입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시대가 흘러 소위 문명이라는 것이 탄생한 다음부터는 문명인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옷을 해 입느냐, 모피를 입느냐는 것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중화인들이 북적이니, 동이니 하는 주변 민족들을 언급할 때 냄새나는 동물 가죽을 입는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다시 비싼 돈을 주고 모피를 사 입으려고 난리를 치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 아닌가.  

또한 ‘구석기시대 예술품과 그 의미’라는 챕터에서 저자는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 확인된 첫소[原牛]의 정강이뼈에 드려진 문양(새인지 물고기인지 잘 분간이 안 가는)을 거론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영혼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궁극적으로 뼈 안에 깃들이고 개체는 바로 그 뼈로부터 부활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첫소의 혼이 저승으로 잘 인도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예술품에 새를 그려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단순히 ‘현존하는 수렵민’이 이러한 행위를 하고 이러한 생각을 한다고 적고 있지만 지구상의 수많은 수렵민의 문화는 모두 다르다. 어느 지역의 어떤 수렵민이라는 언급도 없는데다가 이 부분은 적어도 동북아의 수렵민을 예로 들어야 그나마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왜 하필 정강이뼈에 그렸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으며, 새인지 물고기인지도 모르는 그림에 대한 철저한 분석도 없었다. 그리고 죽은 첫소의 혼을 구석기인이 정말 잘 인도하라고 그렸을까도 의문이다. 그럼 그 첫소는 가축이었는가, 아니면 사냥해 온 것이었는가? 그럼 다른 사냥감들도 그렇게 저승으로 보냈을까?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 수 있는 애매한 주제를 너무 쉽게 처리한 감이 없어서 아쉬웠다. 마찬가지로 아스마트족, 지바로족의 머리사냥에 대한 예를 들면서 죽은 사람의 머리뼈에 대한 생각을 얘기했지만 아주 특수한 경우로 구석기인의 삶을 일반적으로 규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이 부분은 더 많은 인류학적 근거를 제시하거나 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저자가 책을 쉽게 쓰려고 노력했고, 최대한 오늘날 구석기시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흔적은 확인되지만 그 노력이 조금 부족했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부분은 ‘식인습속에 담긴 의미’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저자는 전문적인 내용조차도 너무 쉽게 풀어 쓰려다보니 앞뒤 다 자르고 가운데 부분만 얘기하고 있어 자료의 객관성이나 자세한 근거 자료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식인에 2가지 유형이 있으며 하나는 족외식인(다른 집단을 공격하기에 앞서 상징성을 갖는 행위로서 집단 간 결속력을 다진다)이며, 다른 하나는 족내식인(위대한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부여받기 위해 그 사람의 일부를 먹는다)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몇몇 부족에서 보이는 인류학적 근거가 구석기인들과 동일했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중국의 경우, 기본적으로 자연환경이 우리나라와 많이 다르기 때문에 예로부터 식인풍습이 보편적으로 잔존했었다. 즉, 흉년이나 전쟁으로 인해 먹을 것이 없어지면 근처 수백 ㎢에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으므로 자연스레 식인할 수밖에 없는 실정인 것이다. 이는 산천이 수려하고 지형이 상대적으로 좁아 어로, 수렵, 채집, 농경 등의 활동을 다양하게 영위할 수 있던 우리와는 다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먹을 것이 없을 때 식인 했다는 문헌기록들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확인되고 있는데, 그 식인풍습에 어떤 의식적 · 정신적 의미는 없다. 그저 ‘배고프고 먹을 것이 없으므로 먹을 수 있는 고기’를 찾아 먹는 것뿐이었다. 마찬가지로 구석기인들 역시 먹을 것이 없으니까 식인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애써 인간다운 해석으로 치장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필자가 구석기시대를 다룬 주제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은 바로 ‘구석기시대에 살았던 어느 한 남자의 일생’이라는 챕터이다. 당시 구석기인들의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죽 그려내고 있었는데, 이런 식의 접근은 독자들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이러한 선사시대를 다룬 책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필자의 생각과 조금 다른 부분을 언급하자면, 먼저 저자는 막돌이의 누나를 두고 두 부족 간에 벌어진 문제를 결국 합의를 해서 해결한 것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하지만 선사시대일수록 이러한 중재보다 전투를 통한 해결이 더 많았다는 고고학적 근거들이 속속 발견되는 만큼 이런 설정은 오히려 보다 후기의 모습이 투영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또한 저자는 세습제를 통해 부자간에 지도자의 자리가 이동해간 것으로 보았지만 구석기인들 사이에서 그런 것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힘이 세고 더 발언권이 강했던 사람이 차기 지도자 자리를 꿰차지 않았을까 싶다. 이 두 가지만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 구석기시대를 잘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혹 저자가 개정판을 내놓게 된다면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완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 다음은 신석기시대이다. 저자는 시대개관에서 선사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로 ‘환경’을 꼽았는데 이에는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구석기시대뿐만 아니라 신석기시대, 더 이후의 청동기시대와 역사시대까지도 인류는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환경의 변화에 맞춰 그들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저자는 신석기시대 농경의 시작과 함께 이러한 환경 변화를 언급하고 있는데, 실제 고구려 때는 추웠던 만주지역이 발해 때에는 벼의 특산지로 언급되는 것만 봐도 환경 변화가 인간의 생업경제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은 재삼 언급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시대개관 말미에 ‘토기의 형태와 문양이 다르다면 분명히 지역마다 독특한 문화적 특징 또는 문화적 차이가 있을 터인데, 아직까지 이런 점에 대해서 명쾌하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역시 필자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중국 고고학계의 경우, 이러한 고고학적 문화가 지역적으로 다르게 나타나면 거의 대부분 ‘-문화’ 라는 식으로 이름을 붙여 지역성을 부과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양사오 문화’, ‘홍산 문화’, ‘룽산 문화’ 처럼 말이다. 한국 고고학계 역시 이처럼 지역성을 부과할만한 자료를 충분히 갖추고 있을 텐데 이러지 않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아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먼저 간석기의 출현을 두고 ‘나무 연모를 대체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추운 시기가 지나고 따뜻한 시기가 되면서 나무의 질이 이전보다 떨어졌으며, 나무를 가공했던 기술을 그대로 돌을 가공하는데 사용하면서 이전 시기보다 돌을 더 잘 다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간석기를 사용한 이후에도 목기가 꾸준히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말이다. 즉, 단순히 나무 연모를 대체하기 위해서 간석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너무 작의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뗀석기의 비효율성을 알아채고 그것을 끊임없이 개선한 결과, 간석기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저자는 토기가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된 것을 두고 이동 생활하던 구석기인에게 토기는 불편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과연 그랬을까? 그렇다고 해서 정착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토기를 사용했다고 볼 수만도 없는 것 아닐까? 즉, 토기 사용을 두고 이동생활 혹은 정착 생활하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수렵민들도 토기를 만들며, 정착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무조건 토기를 만들지는 않지 않은가.  

그 밖에 지금 책이 없어서 딱 비교는 못 하겠지만 ‘과연 농경이 신석기혁명이었을까’라는 챕터는 마치 제레드 다이아몬드의『총, 균, 쇠』일부분을 그대로 축약해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 농경의 전파가 더뎠다는 점, 농업을 채택한 사람들의 건강상태가 더 빈약하다는 점, 1840년대 아일랜드에서 감자 충해를 입어 100만 명의 농민이 굶어 죽었다는 점, 부시맨의 여유로운 수렵채집 생활 등 모두 필자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책에서 본 내용들이 언급되고 있었다. 그래서 맨 뒤의 참고문헌을 봤더니 그 책은 없었다.『총, 균, 쇠』개정판은 2005년에 나왔지만 초판이 1999년에 나왔기 때문에 저자가 충분히 읽어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참고문헌에 없다는 것은 다른 책에서도 이 내용을 봤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필자 역시 저자가 본 참고문헌을 전부 본 것은 아니므로 이 부분은 차후 다시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이어 저자는 ‘미궁에 빠진 소금제조법’이라는 챕터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신석기시대 주거지를 보면 불 땐 자리 곁에 반드시 토기저장시설이 확인되는데, 저장시설로 사용된 토기들을 보면 바닥 면을 제거하고 엎어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습기에 약한 물품이나 습기를 잘 흡수하는 물건을 저장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소금이라는 것이다. 소금을 그 곳에 두면 불 가까이에서 열을 조절할 수도 있고, 화재를 예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동안 필자는 그러한 토기저장시설에 조리와 관련된 것들, 예를 들면 음식물 등을 뒀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봤지만 소금일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었다. 일단 한국 고고학계에서 선사시대 소금을 만드는 방법이 고고학적으로 확인이 안 되었기 때문에(아직 우리나라에서 제염토기-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들 때 쓰는 토기-가 확인되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소금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이처럼 재밌는 추정을 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신석기인들이 어떻게 소금을 만들고, 어떻게 해안과 내륙 사이에 소금 교역이 이뤄졌는지 궁금하다고 했는데, 이미 구석기인들도 수백㎞ 거리의 흑요석 원거리 교역망을 갖추고 있었던 만큼 신석기시대에 소금 교역이 그리 어렵게 이뤄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또 ‘최초의 직업병 환자는 누구일까’도 재밌었다. 통영 앞바다 욕지도의 돌무지무덤 2호에 매장된 장년의 남성과 연대도의 집단무덤에 매장된 성인 여성의 두개골에서 외이도골종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깊은 바다 속을 잠수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걸리는 직업병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병은 전문 잠수부들에게 종종 발생하곤 하는데 신석기시대에도 이러한 직업을 갖춘 사람이 있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뭐 당시에는 이미 모든 구성원들이 식량을 수렵 · 채집하지 않아도 잉여생산물이 남을 정도로 생업경제에 있어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전문적으로 깊은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던 사람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능력을 몹시 부러워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굳이 전문 잠수부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데 그 일을 부러워했을까?

마지막으로 저자는 청동기시대를 언급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청동기술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필자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가끔 청동기시대 청동기술의 우수성을 언급할 때 자주 거론하는 ‘숭실대박물관의 국보 141호 청동거울’을 언급하고 있었다. 이 유물의 정확한 출토지와 출토상황은 알 수 없지만 그 세밀함과 정교함은 현대 청동기 제작기술로도 결코 따라갈 수 없는 것이라 하니 그저 경탄할 따름이다. 필자가 짧은 공부지만 다른 나라의 청동기들을 살펴봐도 이처럼 세밀하고 정교한 선을 세부적으로 만든 제품은 없었던 것 같은데 단순히 웅장하고 거대한 규모로만 따지지 않는다면 이 청동거울은 세계사적으로도 길이 남을 대단한 유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저자는 한국 청동기시대 개시연대에 대해서 북한학계의 연구 성과를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피력했는데, 이는 강단에 있는 저자의 이력을 봤을 때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북한학계의 여러 연구방법을 비과학적이라고 치부하는데 반해 저자는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다루고 있었다. 물론 통일이 되면 이러한 연구 성과들이 교류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 청동기문화의 기원지로 한반도가 표시될 수는 있을지 의문이다. 그밖에 고인돌 덮개돌에 새겨진 별자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한국 고고학계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 역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성혈(星穴)들이 피장자의 매장 시기를 표기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는데, 달력도 없는 당시에 그렇게 쉽게 천문을 관측해서 고인돌에 새길 수 있었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다양한 의견제시나 해석은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지나친 억측은 오히려 저자의 생각을 깎아내리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그리고 저자는 청동기시대 마지막에 ‘비파형동검이 말해주는 고조선 영역’, ‘고조선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야기로 된 역사, 단군신화’라는 챕터를 마련했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의 NG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언급하는데 있어 청동기시대 대신에 ‘고조선’이라고 하는 정치집단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중국에서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하·은·주’ 식으로 시대 구분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고조선이 존재했던 시기는 단순히 청동기시대로만 구분할 것이 아니라 ‘-문화’ 혹은 ‘-문화권’이라는 표현을 써서 어떤 특정한 지역성을 부과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분명히 특정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 어떤 특정 정치집단의 영역과 문화가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동기시대 후기 한반도 중남부에서 널리 확인되는 송국리문화 역시 특정 정치집단의 특징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해 보기도 한다. 어쨌든, 저자는 선사시대를 언급한다고 하면서 어설프게 청동기시대 말미에 고조선을 집어넣으면서 사족(蛇足)을 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마치 송시열과 조선시대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연구로 인정받던 이덕일 선생님이 고대사를 괜히 건드렸다가 비판받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고조선을 거론하려면 일단 고고학적 자료뿐만 아니라 각종 문헌자료를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고조선을 전공한 전문 고고학자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냥 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고고학 자료를 인용하는 것으로 연구가 진행되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고조선 연구 현황인 셈이다. 그런데 저자는 어설프게 약간의 문헌을 거론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는데, 그 부족함이 너무 눈에 띄는지라 보는 이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아마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에 비해 챕터가 너무 적어지는 바람에 억지로 집어넣은 부분 같은데 차라리 뺐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저자는 고조선을 두고 ‘막강한 지배력을 가진 대제국(연맹왕국)’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저자가 지금은 알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제국과 왕국은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최근에는 홍산 문화가 주목받으면서 요하 문명이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많이들 거론되고 있다. 물론 저자가 이 책을 쓸 당시 홍산 문화에 대해 얼만큼 자료를 갖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관련된 최신 자료들은 인용하지 않고, 너무 뻔한(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들로 고조선에 대해 거론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분명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고조선과 관련된 여러 고고학적 성과들을 보다 자세하게 소개하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쉽게 쓰려다보니 몇몇 부분에서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하는 부분이다. 비전공자들에게 고고학이 이런 것이다~고고학적 증거들이 이런 것이다~라는 식으로 쉽게 고고학을 소개할 수는 있지만 반대로 너무 쉽게 알려주다 보니 고고학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 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당시인들의 삶을 친숙하게 표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런 스타일의 책들이 더 많이 나와야 고고학이 대중성 있는 학문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arine 2009-08-27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들렸는데 좋은 책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조선 부분은 빼고 읽어야겠네요.
이덕일씨가 괜히 고대사 건드려서 기존의 조선시대 연구까지 싸잡아 욕먹는 거 정말 깊이 공감합니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읽고 정말 허걱 했거든요.

麗輝 2009-08-27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덕일 선생님은 생각을 잘 했어야죠. ㅋㅋ
암튼 이 책도 전체적으로 괜찮긴 한데, 고조선 부분은 완전 손발이 오그라드는...ㅋ
그럼 즐독하세요 ^^
 
고고학의 모든 것
폴 반 지음, 고은별 외 옮김 / 루비박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번역판 제목은『고고학의 모든 것』이며 원제는『The Illustrated World Encyclopedia of Archaeology』이다. 직역하면『삽화로 보는 세계 고고학 백과사전』정도가 될 텐데 너무 의역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차라리 이 책의 엮은이(폴 반)가 콜린 렌프류와 함께 쓴『현대 고고학의 이해(Archaeology : Theories, Methods and Practice)』에 그 제목을 붙이는 것이 더 나을 것도 같다.

일단 책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 책은 폴 반이 지은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관련 전공학자들이 일정 분량의 글을 작성하고 폴 반이 엮은 것이다. 아무리 폴 반이 대단한 고고학자라 하더라도 전 세계 고고학 연구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하고 그와 관련된 세부적인 자료들을 갖고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김원룡 선생님이 고고학, 역사학, 미술사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얻으며 관련 연구 성과들을 여럿 내놓았지만, 이제는 한국 고고학계 역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성장했기 때문에 1명의 연구자가 연구 성과를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실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부터 여러 학자들의 연구 성과 및 여러 발굴현장의 정보를 담은『한국의 고고학』,『한국 고고학저널』이라는 고고학 잡지가 주류성에서 발간되고 있는데, 그것들 중에서 괜찮은 주제들을 골라 이처럼 책으로 만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암튼 다시 돌아와서, 이 책은 폴 반이 엮고 관련 전공자 4명이 각 파트별로 번역을 한 책으로서 정말 다양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다가 내용도 어렵지 않아서 비전공자들이나 일반 독자들이 읽는데 전혀 부담이 없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외국 고고학 서적의 번역서가 국내에 많이 없는 편인데, 국내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스터디 형식으로 모여서 원서를 번역하고 원고를 다듬어서 책을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암튼 먼저 간략하게 책의 전체적인 구성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고고학자들’과 ‘고고학 유적지’로 크게 나뉜다. 그리고 ‘고고학자들’은 다시 ‘고고학의 아버지’, ‘고고학의 선구자들’, ‘현대의 고고학자들’ 등 시기별로 나뉘고, ‘고고학 유적지’는 ‘아프리카’, ‘중동’, ‘지중해’, ‘유럽’, ‘극동’,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등 지역별로 나뉘었다. 이러한 구성 자체가 기존의 다른 책들과는 전혀 다른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시중에 큼직한 삽화들이 가득한 고고학 관련 서적들은 많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만 봐도 브라이언 페이건의『DISCOVERY!』를 꼽을 수 있겠다. 단순히 유적지만 본다면 이 책만큼 괜찮은 책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책들의 대부분은 고고학 유적지를 여러 삽화로 소개한 것들이며, 고고학자에 대해서 그렇게 소개한 책은 별로 없다. 그것도 시기별로 나눠서). 굳이 꼽자면 최몽룡 선생님의『인물로 보는 고고학사』(모든 교과과정의 교과서처럼 읽혀지는 그다지 재미없는 책)가 있겠지만, 삽화도 별로 없고, 각 시기별로 중요한 1~2명의 학자들만 소개하고 있어 전문성은 띄고 있지만 대중성은 갖추지 못 했다고 할 수 있다. 하물며 이 2개의 주제를 하나의 책에 넣고 다룬 것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책을 처음 본 순간 목차에서부터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은 책을 읽으면서 더욱 강하게 생겨났다.

책의 가장 첫 부분은 ‘고고학의 아버지들’, 즉 고전고고학자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다(폴 반은 이들을 두고 대부분 독학으로 고고학을 터득했을 아마추어라고 당당히 말한다). 이집트의 보물약탈을 언급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조반니 벨조니, 로제타스톤을 해석한 천재적인 언어학자인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크노소스를 발견했지만 성급한 복원활동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비난받고 있는 아서 에번스 경, 프랑스의 선구적인 선사학자였던 에두아르 피에트, 군인 출신의 이점을 살려 새로운 발굴 작업의 기준을 세운 오거스터스 피트 리버스(그가 기증한 유물이 기반이 된 피트 리버스 박물관은 유물의 기능별로 전시되어 있는 독특한 구성인데, 한번 꼭 가보고 싶다),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것으로 너무나 유명해진 하인리히 슐리만, 과학적인 고고학의 시대가 오기 전 과학적인 방법을 제시한 톰센과 워새 등 고고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어도 알 수 있는 이름이 대거 등장한다. 왜냐하면 이런 인물들은 이런 대중서적에서뿐만 아니라 수업시간에도 여러 번 듣고 외우고 시험까지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이집트를 발굴했던 프랑스와 달리 아시리아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발굴하면서 경쟁했던 영국의 지원을 받은 헨리 레이어드, 이집트 고대 유물 관리청의 초대 청장으로서 이집트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힘썼던 아귀스트 마리에트(30쪽을 보면 영문 이름이 사진에 지워졌다. 개정판에서 이 부분이 고쳐지길 바란다),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지를 발굴한 자크 드 모르강,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베히스툰 비문을 연구한 헨리 롤린슨, 알타미라 동굴을 연구한 산스 데 사우투올라, 미국 고고학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에프라임 스콰이어, 남아메리카 고고학에 과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한 막스 울레(53쪽의 그가 조사한 파차카마크의 잉카 무덤 사진을 보면 각 유물마다 주기표를 하고 사진 촬영을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연구에도 적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 필자가 처음 보는 인물들도 많이 있었다. 물론 필자의 공부가 짧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매일 달달 외우면서 머리로만 이해했던 인물들 이외에 더 많은 선구적인 고고학자들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러면서 책은 20세기 초반 최초의 진정한 전문적인 고고학자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우리가 흔히 외우는 신고고학 혹은 과정주의고고학, 탈과정주의고고학 시대의 유명한 고고학자들이 별로 안 나온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해서 봤더니만 이 책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굴성과를 냈거나 뛰어난 학술성과를 내놓은 사람들만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고 삽질을 하고 유물을 만지고 사진촬영하고 실측을 하면서 몸으로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만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과과정에서 매번 외우는 고든 차일드나 테일러, 이안 호더 같은 이름이 없는 것만 봐도 이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순간 ‘그래~고고학은 역시 현장에서 경험한 것이 더 값지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국내 학계 역시 외국에서 유학을 갔다 온 학자들이 더 높이 평가받고 더 많은 학술성과들을 내놓는데 반해 평생을 땅만 파고 발굴조사를 진행해 온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평가받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발굴 잘 한다고 교수 자리를 덥석 주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암튼 시간이 뒤로 흐를수록 필자가 아는 학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고고학의 선구자들’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끽해야 람세스 2세의 고분을 발굴해서 유명해진 하워드 카터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학자인 리 지, 인도 탁실라 유적에서의 연구로 유명해진 존 마셜 경, 이집트학의 대가이자 야외고고학의 방법론을 변화시킨 플린더스 피트리 경 정도였다.

특히 이 단락에는 여자 고고학자들이 많이 소개되어서 눈길을 끌었다. 일단 대짐바브웨 유적을 조사함으로써 유명해진 거트루드 캐턴-톰프슨을 꼽을 수 있겠다. 몇 년 전에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아프리카의 고대 문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 잠깐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아프리카의 대짐바브웨 유적을 조사함으로써 아프리카 사람들이 원래부터 열등하고 저급한 민족이 아니라 예전에는 다른 지역에서 확인되는 고대 문명을 이룩했던 사람들임을 역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연구는 당시에는 비난받고 수용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밖에 이스라엘의 카멜 산에서 중요한 구석기시대 동굴을 발굴한 도러시 개로드, 그리스와 에게 해의 섬, 아나톨리아에서 선구적인 발굴 작업을 수행한 위니프레드 램 등이 소개되었다. 특히 그녀는 스파르타의 역사 유적 발굴에도 참여했었다고 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스파르타의 역사는 꽤 알려져 있지만, 어떤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있고 어떤 유적들이 있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밖에 아메리카의 고고학자 하면 신고고학 시대의 미국 학자들만 알고 있었는데, 앨프리드 빈센트 키더(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미국 고고학자의 한 사람으로 신 고고학자 테일러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대부분 테일러는 알지만 빈센트 키더는 모른다)나 페루의 훌리오 C. 테요(페루에서 최초로 교육받은 고고학자이자 페루인들에게 있어 고고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같은 학자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어 좋았다. 또 특이하게도 아가사 크리스티의 남편 맥스 맬로완 경이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에 길이 남을 공헌을 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고고학자들’을 보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유명한 유적들은 알고 있어도 그 유적들을 누가 발굴조사했는지를 그동안 몰랐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타즈매니아와 아넘랜드 등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유적들을 연구한 사람이 라이스 존스라는 것도 처음 알았으며(‘화전 농경’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고 한다. 신기했다),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성곽유적인 예리코 유적을 발굴한 것이 캐슬린 케니언이라는 영국의 여자 고고학자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그러고 보니 예리코 유적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이 들어봤어도 케슬린 케니언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또한 동아프리카에서의 인간 기원에 대한 연구 자체와 동일시되어진 리키 가족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음으로써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 밖에 에스파냐 정복 당시의 잉카 문명에 대한 국제적인 표준 참고서라고 불릴만한 논문을 작성한 존 하우랜드 로, 선형문자B를 해독한 유명한 언어학자인 마이클 벤트리스 등 유명한 학자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밖에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는데, 바로 그리스 고고학자 스피리돈 마리나토스였다. 1901년생인 그는 19세가 되던 해(1919) 아테네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던 학부생임에도 불구하고 유물감독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29년(29세) 대학원 과정을 밟던 중 크레타 섬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장이 되었다. 더불어 그가 1970년대 초 테르모필레 전쟁 유적을 찾았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마라톤 전쟁 이후에 축조된 고대 분묘군 역시 그가 발견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죽음마저 고고학자다웠는데, 1974년 10월 아크로티리에서 고대의 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사고로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마치 어린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까지 올라갔지만 모함을 받아 숨을 거둔 남이 장군이 생각났다. 정말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던 만큼 필자 역시 저런 삶을 살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해 봤다.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한 이력을 가진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마리아 라이헤였다. 그녀는 세계적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페루의 나스카 라인을 연구하는 데만 50년 이상을 헌신했다고 한다. 나스카 라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외계인이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거세게 있었던 만큼 학술적으로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줄 알았다. 엄밀히 말하면 딱히 특별한 유물도 없고, 지표 밑으로 어떤 유구를 조사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지표 위에 그려진 선형 유구만으로도 수십 년간 연구가 진행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마 한국 고고학계와 다른 풍토를 가진 외국 고고학계의 특징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세계적으로 그녀가 인정받는 고고학자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이처럼 수많은 고고학자들을 차례로 소개한 다음 폴 반은 각지의 고고학 유적지에 대해 차례대로 소개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책에는 다양한 유적지들이 소개되고 있어 독자들은 전 세계를 책 1권으로 돌아보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특히 각 단락의 앞부분에 그 지역의 전체 지도와 유적 위치도를 소개하고 있어 처음 보는 유적지라도 대강 그게 어디 붙어있는지 알게 하여 독자를 배려하게끔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책의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9~10쪽).

이 정도 두께의 책에는 전 세계의 수많은 중요 유적과 유물들에 대해 개략적인 것만을 기술할 수밖에 없다. 지구상의 일정 기간이나 일정 지역에 대해서만 다루더라도 이 같은 책 여러 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선정한 유적지는 세계의 여러 위대한 고고학적 보물들에 대해 다른 어느 책에도 비할 데 없는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극동의 신전에서 유럽의 동굴벽화에 이르기까지, 또 중앙아메리카의 수수께끼 같은 도시들에서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테라코타 군대에 이르는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것이다. 

이 멋진 여정은 북쪽에는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있고, 남쪽에는 선사시대 동굴이 있는 아프리카에서 시작된다. 뒤이어 우르크나 수사와 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이 있는 중동의 고고학 여행이 펼쳐진다. 

먼저 아프리카를 살펴보자. 아프리카에서 필자가 알고 있는 고고학 유적이라면 인류의 기원을 알려주는 구석기시대 유적과 나일강 주변에 위치하고 있던 이집트 유적들이었다. 실제 책에는 스테르크폰테인, 스와트크란, 크롬드라이와 같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이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적과 중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된 블롬보스 동굴, 선사시대 대초원지가 펼쳐져 있던 사하라의 자연환경을 묘사한 바위 예술 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자, 사카라, 아비도스, 카르나크, 왕가의 계곡, 아마르나, 아부심벨 등 유명한 이집트 유적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특히 필자는 자위예트 음므 엘-라크함이라는 지역에서 확인된 이집트의 요새 유적이 눈에 확 들어왔는데 이는 이집트 신왕조 시대의 것으로 인접한 리비아 부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람세스 2세가 기원전 1,280년 경 만들었다고 한다. 요새는 인상적인 축성술로 지어졌는데, 육중한 출입구를 포함해서 행정관의 저택과 같은 다기능적인 건축물, 대규모 수비대가 자급자족하는데 필요한 제빵소, 양조장, 수십 개의 우물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군사 요새는 전 세계적으로 발견된 사례가 많지 않은데 그나마 유럽에서는 로마의 군사요새가 많이 확인되는 편이며, 나머지 지역에서는 간헐적으로 확인될 뿐이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한반도 중부에 고구려 것으로 보이는 다수의 군사 요새가 확인되고 있어 학계의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는 실정이다. 고구려 보루라고 불리는 이 유적들은 수십 곳에 달하는데 문헌에 기록된 바도 없고,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 등지와 비교할만한 자료가 없는 관계로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로마를 비롯한 다른 문화권의 군사 요새에 대한 자료를 통해서 고구려 보루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는데, 이집트에서도 이와 같은 군사 요새가 확인된다고 하니 자연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널리 알려진 문명이나 문화라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발굴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만큼 최신 자료들을 섭렵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참고로 이 이집트 요새는 94년부터 작업하고 있다고 하니 거의 최신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그밖에 메로에 유적에 대한 내용도 나왔는데, 이곳은 쿠시의 두 번째 독립왕국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메로에 제국(기원전 300년~기원후 300년 경)의 쿠시 왕들은 이집트가 허약한 틈을 타서 이집트를 정복하고 제25왕조(신 왕국 이후 제3중간기에 제21~25왕조가 포함되어 있으며 기원전 1,075~715년 사이에 해당한다)의 왕으로서 북아프리카를 통치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규모면에서는 작지만 그와 같은 양식의 무덤들이 발견되었으며, 도시의 신전에서는 이집트 신과 토속 신에게 봉헌한 흔적들이 다수 확인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크리스티앙 자크의 역사소설『블랙 파라오』를 보면서 누비아인, 리비아인 등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런 흑인과 백인, 황인종이 공존하는 이집트사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이집트사가 다양하고 박진감 넘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후기 철기 시대의 유적지인 대짐바브웨와 마푼구베 유적은 고대 아프리카인들이 상당히 발전된 복합사회를 형성하고 넓은 영토를 보유하였으며, 그 안에서 여러 정치적 활동을 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물론 기원후(13~15세기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왕국 혹은 제국으로 불릴 정도의 정치적 집단을 형성했던 것은 아니지만 도시국가 수준 이상의 정치집단을 형성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아프리카인들이 혈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원래 저급한 민족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아프리카의 뛰어난 유적들이 왜 갑자기 쇠퇴했는지,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밖에 필자는 나이지리아의 남서쪽에 위치한 이페와 베닌 시 유적을 보면서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도 문명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이지리아의 고고학적 성과는 처음 보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은 2000년 초에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차후 아프리카 각지가 발굴조사되면 더 많은 유적들이 확인되어 아프리카의 고대 문명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중동인데 뭐 다들 알다시피 이곳은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문명이 탄생한 곳이며, 아프리카의 인류가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관문이다 보니 구석기시대 유적 또한 다수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명들과 이 지역에 위치했던 페르시아라는 거대 제국의 흔적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것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 하게 한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오늘날과 비교해 전혀 부족함이 없는 잘 발달된 문명사회가 그 지역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꼭 한번 중동 지역의 여러 유적지들을 가보고 싶은 필자인데, 그 중에서도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관련된 유적지들은 반드시 둘러보고 싶다. 오늘은 메마른 사막 지대에 드문드문 넓은 초원만 펼쳐져 있는 이곳이 어째서 예전에는 인류 문명이 가장 발전했던 곳이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직접 그 곳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결론내리고 싶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도시국가로 불리는 우르크부터 살펴보자. 이곳은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묘사되어 있으며, 성서에도 나와 있는 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다. 기원전 6,000년 경 각지에 있던 여러 마을들은 기원전 4,000년 경 통합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3,500년경에는 그 면적이 250헥타르(2.5㎢), 기원전 2,800년경에는 550헥타르(5.5㎢)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5.77㎢)의 면적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서 지금으로부터 거의 5,000여 년 전에 이 정도 크기의 복합사회가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원전 6,000년 이전~기원전 2,000년까지 지속된 우가리트의 경우 도시의 경우 무려 8,000명의 사람이 살았던 거대한 도시였음이 밝혀졌다. 그밖에 기원전 4,2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흔적이 확인된 수사는 이후 페르시아에 정복당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번성했는데 오늘날 확인된 수사 유적은 무려 550만 헥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고원 지역에 펼쳐져 있는데(55,000㎢) 인류가 무려 5,500여 년간 살았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기원전 3,000년 경 어느 왕국의 대규모 보관소였던 것으로 알려진 에블라 유적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모두 기록을 남겼던 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의미 있는 유적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점토판이라고 하는 특수한 재질과 중동 지역의 고온 건조한 기온 덕분에 오늘날 수만 개의 점토판이 살아남아 연구에 활용되고 있지만 그 당시부터 이미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 놀랄만한 일임에 분명하다(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넘기다가 205쪽의 발굴 작업 사진-사실은 쉬는 시간을 찍은 사진인 듯함-을 보면서 풋! 하고 웃음을 금치 못 했다. 누워서 쉬는 인부나 쉬는 시간임에도 일을 하는 인부들의 모습 등이 한국의 발굴현장과 너무나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은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칼후 유적이었다. 아시리아에 대해서는 세계사 교과서에 기록된 것 이상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는데, 기원전 9~8세기에 이미 이 도시는 무기창고(샬마니저르 요새)를 포함한 360헥타르(3.6㎢)에 달하는 거대 도시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한때 히타이트사에 푹 빠져서 이런저런 고고학 관련 서적들을 뒤적거린 기억이 났다. 중동 지역의 여러 문명들은 확실히 이른 시기에 형성된 만큼 다른 지역보다 많은 부분에서 선진적이었는데, 그에 반해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들은 많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점토판도 없고, 기록도 많이 없는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연구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었다. 특히 칼후 유적에서는 무기고 요새인 샬마니저르 요새가 확인되었는데 30헥타르(0.3㎢ ≒ 9,100평)에 달하는 이곳에서는 아시리아 군대의 구성과 말, 무기에 대한 세부사항 및 세금 징수와 법률 업무에 대해 기록한 점토판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저 이런 글을 보면 한없이 부럽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는다. ‘하아~우리나라에는 왜 이런 것들이 확인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또한 신(新) 바빌로니아 왕국의 중심부였던 바빌론과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를 비롯한 나바테아인들의 수도 페트라까지 중동 지역의 유적들은 아프리카의 것과 달리 크고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또한 매력 있었다. 특히 페트라는 ‘사막의 도시’라고도 불리는데 그런 메마른 지역에 나바테아인들은 댐, 저수지, 파이프, 수로 등 물을 조절할 수 있는 복잡한 체제를 만들어냈다.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고 얼마나 화려한 문명을 남겼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그 다음 지중해로 넘어오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여러 유적들을 만날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수렵 채집인들의 의식용 유적이었던 괴베클리 테페였다. 부싯돌에 지나지 않는 도구와 불, 물을 사용할 수 있던 이 지역 사람들은 지역 기반암으로부터 7톤에 이르는 석회암의 벽돌을 깎아 둥글게 쌓고 거대한 벽돌을 운반한 뒤 그 돌 건조물 안에 곧게 쌓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동굴 건조물들은 놀랍게도 기원전 9,600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선사시대 수렵채집민들도 건축물을 만들 수 있음을 알려준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밖에 이 지역에는 크노소스로 불리는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안에서 발견된 선형문자A와 선형문자B는 고대 미노스인들과 미케네인들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또한 동부 지중해에서 월등한 힘을 가지기 위해 크레타의 미노스인을 쇠퇴시킨 미케네인들이 남긴 유적들 역시 주목되는데 그들은 기원전 14세기 반경 1㎞에 달하는 요새화된 도시국가를 건설하고 왕궁-요새 간의 네트워킹을 처음으로 구축하면서 지중해의 무역을 지배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유적은 울루 부룬에서 확인된 기원전 14세기 후반기의 난파선이었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 경남지역에서 확인되는 철정처럼 당시 이 지역에서는 ‘귀가 있는 금속 비스킷’이라고 묘사된 구리 주괴가 확인되었는데 그 수량이 자그마치 10톤이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양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신안 앞바다를 비롯한 각지에서 고려~조선시대 선박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청동기시대 선박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물론 신석기시대 배는 확인되었지만) 차후 우리나라에서도 이른 시기 선박이 확인된다면 이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외에도 그리스-로마 지역의 여러 유적들이 소개되어 있었지만 필자에게 크게 와 닿는 것은 없었다. 그간 다른 책에서도 많이 보고 외국 여행을 갔다 온 사람들이 필수 관광코스로 반드시 가는 곳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도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튀니지 해안에 위치한 카르타고 유적이라든가, 헤롯왕때 건설되어 유대인들의 처절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마사다 요새 등은 꼭 가보고 싶기도 하다. 특히 마사다 요새는 요세푸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집단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마무리되고 있지만, 실제 발굴 결과, 시신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고 오히려 로마 주둔군이 반란 진압 후 이 곳에서 일부 기간 주둔했음을 알려주고 있다니 과거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의 차이점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려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지중해를 지나 보다 북쪽의 유럽으로 가면 유적의 연대가 다소 늦어지게 된다. 물론 라스코 동굴 벽화나 메치리히의 매머드 뼈로 만든 주거지, 5,300여 년 동안 얼음 속에 갇혀 있었던 아이스맨과 같은 선사시대 유적들도 확인되고 있지만 그 이외에는 로마시대 혹은 그 이후의 유적들이 대부분이다. 필자는 유럽의 역사를 두고 네안데르탈인과 그 뒤를 이은 정복자 호모 사피엔스가 살았을 무렵에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앞서나갔고 활기찼던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 문명이 발생하고(이는 인종 차이라기보다는 환경적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지만) 곧 이어 유라시아 전반적으로 고대 문명이 싹을 띄우는 동안 유럽은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 했다고 본다. 물론 어느 정도 자체 발전하는 성과는 확인되고 있지만 동시대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유적들은 상당히 인상적이고 매력 있게 다가온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유럽의 유적지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베스트 3을 꼽는다면 단연코 스톤헨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간 무수히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수많은 가설과 이론들이 뒤바뀌고 새로 정립했지만 아직도 확답을 내릴 수 없는 유적이 바로 이 곳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수차례 개 · 보수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는데 그간 제사유적이자 천문학적 기능을 담당했다고 널리 알려져 왔다. 하지만 최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주장이 비판받는다고 하니 이 또한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밖에 다뉴브 강 일대의 호이네부르크는 유럽의 초기 철기시대 요새로서 당시 이 지역의 켈트족 족장이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였음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폴란드의 비스쿠핀 유적 역시 마찬가지인데 700~1,000명가량의 거주했던 이 요새화된 마을 역시 당시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서턴 후 유적은 리처드 루드글리의『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라는 책과 여타 책들을 통해서 처음 접하고 ‘와~신기하다!’라고 했던 곳이다. 영국에 대해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가 등장하고 이후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어갈 무렵에도 여전히 아더왕과 관련된 전설과 신화가 판을 치던 조금 판타스틱(Fantastic)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배를 무덤으로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독특하고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확인된 부장품이 굉장히 화려해서 당시 앵글로색슨 귀족의 삶이 상당히 수준 높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리처드 루드글리 역시 기존에는 중세 암흑시대라고 일컬어졌던 시기가 사실은 더 발전된 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한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그 시대에 대한 재평가가 필수적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서턴 후 무덤은 이후에 사형을 집행하던 장소로 사용했다고 하니 그 또한 흥미로웠다. 이렇게 서턴 후 유적을 마지막으로 신비로운 유럽의 고고학 유적지들을 다 둘러봤다.  

이제 드디어 극동으로 넘어왔다. 여기에 중국과 일본은 있지만 한국은 없다. 그게 속상하기도 하고 한국 고고학의 위상이 이 정도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군다나 폴 반은 최근 일본이 자국 내 발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진행 중인 고고학 발굴 작업에 기금을 댈 정도로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어 조금 씁쓸하기까지 했다. 또한 우리나라에도 유학파 고고학자들이 많은데 그들은 왜 세계 유수의 학자들과의 교류가 없는지도 궁금하다. 이런 책을 서술할 때 폴 반에게 한국 고고학자들도 자국 내 유적에 대한 글을 적어서 보냈을까? 아니면 폴 반은 그러한 자료의 요청을 시도했을까? 그냥 이런 생각들이 들면서 한국의 유학파 고고학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학술사업에 뛰어들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학을 갔다 와서 그 공부한 성과를 국내에서만 써 먹으면 아깝지 않을까~싶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나라는 빠진 극동 지역의 유적지를 둘러보자.

일단 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인류의 화석인 베이징원인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다. 몰랐는데 두개골 화석 5점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안전성을 이유로 미국에 보내졌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 남아있는 두개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개된 발굴을 통한 것이라고 한다.  

또 남아시아에서 알려진 유일한 고대 농경 정착지인 메르가르는 처음 본 자료였다. 이곳은 기원전 7,000년경의 촌락 유적지인데 하라파 시대(기원전 2,500년 경~기원전 1,900년)에 인접한 마을인 나우샤로로 인해 쇠퇴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곳에서 구슬에 구멍을 뚫을 때 사용한 돌송곳이 치통을 치료하는데도 쓰였다는 점이다. 신석기시대때 사람들이 이미 충치로 인한 통증을 덜기 위해 치아를 치료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의료 수준이 상당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다.  

그 밖에 인도 지역의 몇몇 유적들을 추가적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먼저 이름은 많이 들어본 하라파-모헨조다로 유적이 어떠한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하라파의 벽돌로 만든 작업장 바닥은 정말 특이했는데 그 위에서 무슨 작업을 했을지 궁금했다. 이들 유적은 신석기시대 때부터 번성했는데 이미 문자를 사용하고 도량형이 통일되었으며, 거대한 성채로 둘러싸여 있었고, 뛰어난 하수시설까지 갖춘 곳이었다. 1986년부터 2001년 사이 파키스탄-미국 합동 발굴팀이 최신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발굴한 결과, 하라파에는 최소 3개 또는 그 이상의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가 있었다고 하니 자못 그 위상이 당시 대단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마우리아 왕조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 유적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처음 보는 유적이었다. 기원전 300년 경 찬드라굽타 왕의 궁정에 특사로 파견된 그리스의 역사가 메가스테네스는 파탈리푸트라를 보고 570개의 탑과 64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쓰고 있는데, 실제 발굴 결과 그에 상응하는 거대한 성벽이 확인되었다고 하니 이 역시 대단했던 마우리아 왕조의 역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다음 나온 것은 역시 진시황릉이었다. 이미 너무나도 많이 알려져 있고, 너무나도 많은 연구가 진행된 진시황릉은 분명 고대 중국의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국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와 더불어 일본의 나라 유적도 소개가 되었는데, 317쪽 Tip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1963년 황궁 전 지역을 역사지구로 지정하고 인근의 땅을 매입하고 보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동서 길이 4㎞, 남북 길이 5㎞에 달하는 도시의 전모가 밝혀지게 된 것이다. 딱 풍납토성이 떠올랐다. 한 20만 평정도 되는 풍납토성을 두고 국가는 보존이다, 보상이다, 문화재 조사다 뭐다 간섭을 안 하고 있다. 아니 관심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건가? 일본에 비해 너무나도 비교되는 대상이다. 일본은 600만 평이 넘는 땅을 매입해서 보존처리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풍납토성의 유구가 생각 없는 포클레인에 의해 짓뭉개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와 더불어 거론되는 것이 앙코르와트 유적지였다. 너무나도 유명한 3곳의 유적지는 오늘날 각 나라에 엄청난 이익을 갖다 주는 관광자원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세계적으로 알려질 만한 유적지가 없다는 의미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아직 저급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심히 좋지만은 않았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루빨리 우리 문화재를 세계적으로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서 문화 콘텐츠로서 잘 활용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은 오세아니아의 주요 유적들이다. 필자는 그간 오세아니아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그 역사 중 흥미로운 것도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이스터섬 정도를 빼놓고 말이다). 그러던 중 제레드 다이아몬드의『총, 균, 쇠』를 읽고는 오세아니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호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석기(5만년 이전으로 보이는)가 발견됨으로써 이 지역이 아프리카만큼이나 인류가 일찍부터 생활했던 대륙임에도 불구하고 그 곳에서 거대한 문명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유적이 바로 호주의 메말라버린 뭉고 호수이다. 이곳에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火葬)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이미 수만년 전에 화로 옆에서 석기를 이용해서 사냥감을 가공한 흔적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93개의 인공 섬이 자리 잡고 있는 난 마돌이라는 유적도 특이했다. 이들은 산호와 잡석으로 채운 거대한 현무암으로 축조되었는데 전체 면적은 약 81헥타르(0.81㎢)에 해당한다. 약 2천 년 전 최초로 거주지로 사용된 난 마돌에는 1,000년 무렵 최초의 인공섬이 조성되었고 1200~1600년 무렵 난다우와스 무덤군과 같은 거대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바다 가운데 자리한 섬이라는 특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다른 독특한 문화적 양상은 확실히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 하게 하는 것 같다. 또한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뉴칼레도니아에서 확인된 라피타 문화를 보니 마치 죠몽토기처럼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한 토기들이 출토되어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아메리카의 주요 유적을 소개하는 것으로 폴 반은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아메리카 하면 마야, 아즈텍, 잉카 등 고대 문명의 흔적들을 많이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인디언들의 선조가 남긴 뛰어난 문화유산들도 많으니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일단 중앙아메리카로 한번 가보자. 

그 곳에는 촐룰라라고 하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그레이트 피라미드가 위치한 당대 중요한 거점도시 유적이 있다. 이곳은 케찰코아틀 신을 모시는 의식의 중심지로서 기원전 1,000~500년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선(先)-콜롬비아 시기 내내 지속적으로 번창한 곳이다. 또한 마야의 중요한 도시였던 티갈의 경우 대광장에 있는 2개의 피라미드식 사원이 압권이다. 기원전 700년에 이미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고 보지만 그 성격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으며, 기원전 350년부터 기원후 900년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도 밀림을 벌목하고 유적을 발굴하고 있다고 하니 그 안에서 고생할 연구자들에게 심심한 노고의 말씀을 전한다. 그밖에 기원후 100년 즈음부터 600년 사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 도시 ‘테오티와칸’과 마야의 제의가 이뤄진 ‘치첸이트사’, 아즈텍 제국의 수도로서 인구 25만 명 이상이 거주했던 ‘테노치티틀란’까지 극동 지역 못지않은 거대한 인공 건조물들을 다수 포함한 유적들을 차례대로 소개하고 있었다. 인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특정 인종의 능력이 우수해서 그 결과 오늘날 국제 역학관계의 판도가 결정 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정관념으로 과거를 바라봐서도 안 되고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의 증거는 이러한 아메리카의 고대 문명들을 보면 더욱더 절실히 느낄 수가 있다. 

이외에도 미국 뉴멕시코 주의 차코 캐니언을 보면 기원후 850~1,250년 무렵 푸에블로(아너사지) 인디언들의 선조들이 지냈던 몇 개의 큰 촌락 유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의 푸에블로 보니토 유적과 함께 이들 인디언 선조들이 만든 유적은 잘 설계된 댐과 도랑을 갖추고 있었고, 645㎞가 넘는 도로망도 갖추고 있었다. 1980년대에 나사(NASA)는 차코 캐니언에 대한 적외선 위성 스캔을 실시했고, 그 결과 협곡과 도로의 포괄적인 연결망이 잘 드러나게 되었다. 이들 도로의 특징은 장애물이 있어도 무조건적으로 직선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당시 운송수단이 없고 도보로만 이동했던 차코인들의 실용적인 측면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선조가 살았던 또 하나의 유적이 바로 메사버드 유적이다. 반지하 흙집과 석조 룸블록을 비롯해서 제의적 용도로 이용했던 원형으로 된 지하 키바들과 대규모 석조 저수시설들은 이 유적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수준 높은 삶을 영위했음을 알려주는 것들이었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유적과 함께 북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또 다른 흔적은 바로 미시시피 강 유역의 카호키아 인디언의 선조들이 남긴 유적들이다. 기원후 700~1,400년 무렵 번성했던 카호키아 유적은 그 면적이 약 15㎢에 달했으며, 몽크 마운드와 같은 거대한 인공 건조물들을 남겼다. 당연히 19세기 미국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이런 거대한 고대 유적을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오늘날 그레이트 서펀트 마운드처럼 거대한 유적들은 모두 이 지역에 살았던 인디언의 선조들이 남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마 19세기 유럽에서 이주민들이 대거 넘어오지 않고 500년 혹은 1,000년가량이 더 지났다면 어떠했을까? 그럼 제2의 잉카, 아즈텍 제국이 탄생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특이한 유적도 2군데 소개되고 있었다. 하나는 랑즈 오 메도스 유적인데 바로 콜럼보스보다 500년 앞선 11세기에 신세계에 정착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정착촌 유적이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전설에 따르면 바이킹의 영웅 붉은 에릭은 기원후 982년 홀연히 사라져 빈랜드라는 숲으로 뒤덮인 땅에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뉴펀들랜드 섬 일대라는 것이다. 실제 발견된 유물, 유적들은 방사선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후 11세기경의 전형적인 바이킹들의 유산으로 판명되었다. 이제 이 가설은 어느 정도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기에 이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또 하나는 리틀 빅혼 전투가 벌어진 곳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라 놀랐다. 어떻게 평야지대에서 벌어진 싸움의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남는단 말인가? 카스터가 이끄는 제 7기병대 대원 647명은 리틀 빅혼 강둑에 사는 인디언 마을을 공격했다가 210명이 몰살당하는 대패를 당한다. 그리고 그 사건의 전말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표조사 결과, 전투에 사용된 총알과 화살촉 등이 확인되었고 유물 분포 분석 결과 커스터가 자신의 기병대를 3개 편대로 나누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더 자세한 연구를 통해 개개인의 전투 위치와 기병대와 인디언 부대의 이동 경로에 대한 가설까지 세울 수 있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전체적인 조사 과정이나 보다 세부적인 자료들을 소개하지 않아 필자의 궁금증을 계속 증폭시키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러한 전쟁의 흔적을 전쟁터에서 지표조사를 통해 밝힐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특이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는데 소위 말하는 관산성 전투와 같은 엄청난 규모의 전투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조사를 꿈도 못 꾸는 실정이다. 차후에 이런 부분은 외국의 연구방법론을 공부하면 어느 정도 해답이 보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이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왔다. 정말 숨 가쁘게 세계 고고학자들과 세계 각지의 중요한 고고학 유적지에 대해 알아봤다. 이 책의 맨 앞을 보면 책에 소개된 유적지를 중심으로 한 세계 고고학 연표가 그려져 있고 맨 뒤에는 책에 나오는 어려운 용어가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책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책에 나온 삽화도 전체적으로 새로운 자료들이 대부분이어서 좋았던 것 같다. 다만 아쉬운 점은 각 유적을 소개하면서 유적 전경을 찍은 사진을 실은 것도 있지만 아닌 것도 많아서 전체적으로 그 유적을 이해하는데 힘들었던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분량의 책에 그 많은 것들을 다 담을 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최신의 자료들을 대중성 있게 편집해서 최대한 자세히 소개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 발굴로 풀어본 살아 있는 우리 역사 이야기
조유전 이기환 지음 / 황금부엉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서론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서평을 쓰는 것 같아 약간 설레는 바이다. 방학을 맞이하여 후배들과 함께 고고학 관련 서적들을 읽고 서평이나 독후감을 쓰면서 자유롭게 토론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자그마한 스터디를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이렇게 첫 번째 책의 서평을 쓰게 되었다. 솔직히 매일 발굴현장에서 일하는 필자에게 있어 방학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으로 끝나기 쉽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수료한 마당에 강제적으로 공부를 할 만한 어떠한 장치도 없어서 이처럼 책을 읽고 서평을 쓸 만한 여유(?)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어찌됐든 스터디를 하게 됨으로써 책도 읽고 서평도 쓰게 됐으니 후배들한테 고맙다고 밥이라도 사야할 것 같다.

오늘 필자가 쓸 서평의 주인공은『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 발굴로 풀어본 살아 있는 우리 역사 이야기』이다. 필자 생각에 이 책만큼 고고학을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설명한 책이 또 있나 싶을 정도로 이 책은 잘 쓰인 책이다. 필자 역시 ‘고고학을 공부하겠다.’ 고 본격적으로 마음먹고 이 책을 읽었는데, 4년 만에 다시 읽으니 그 역시 느낌이 달랐다. 그때 서평이나 독후감을 남겼으면, 지금 다시 읽어보고 어떻게 다른 느낌이었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못 했기에 그저 아쉬움만 남을 따름이다. 아무튼 이제라도 이 책을 읽고 서평을 남겨 차후 이 책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어떠했었는지 알고자 하는 바이다.  

Ⅰ. 책의 차례와 구성

먼저 이 책의 공저자인 조유전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 한국 고고학계의 산 증인이다. 무령왕릉 발굴부터 시작해 안압지, 황룡사지, 감은사지, 황남대총, 천마총 등 초등학교 1학년생들도 다 알만한 너무나 유명한 유적지들을 발굴하고 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장, 유적조사연구실장, 국립민속박물관장,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등을 역임한 분이다. 그렇기에 그분의 30여년 현장 경험이 이처럼 좋은 책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공저자 이기환은 현재 경향신문 문화팀장으로서 조유전의 글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해서 각 장마다 부연설명식의 Tip을 정리했는데, 그러한 구성이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1. 신라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었나 - 신국의 도가 있었던 신라
2. 27만 년 전 구석기인의 세계
3. 1,500년 만에 다시 터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전쟁
4. 되찾은 500년 도읍지, 비운의 한성백제를 깨우다
5. 강아지까지 금목걸이를 찼던 황금나라, 신라의 금관
6. 남한산성이 치욕의 성이라는 편견 뒤엎기
7. ‘대박발굴’을 터뜨린 ‘시험용 발굴’
8. 고인돌의 천국 한반도
9. 경애왕은 그때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었다
10. 왜 일본식 무덤이 한반도에 있을까
11. 60대 남성과 15세 여성의 비극적인 사랑?
12. 충도를 하늘에 맹세한 화랑들
13. 왜 ‘일제’ 빨갱이 고분이 경남 고성에 있었나
14. 2,300년 전의 최첨단 산업, 거푸집
15. 백제 말 무왕의 행정수도, 익산
16. 칠지도는 근초고왕의 하사품?
17. 물구덩이에서 건진 걸작 백제금동대향로
18. 신라의 심장부 경주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의 흔적
19. 신라 귀족의 무덤으로 부활한 개무덤, 경주 용강동고분
20.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문무대왕의 나라 사랑
21. 고등학생이 찾아낸 아라가야의 편린 함안 마갑총
22. 해상왕 장보고의 야망과 좌절이 깃든 청해진 본영
23. 여말선초의 국찰, 또 하나의 궁궐 양주 회암사
24. 영원한 평등세계를 위하여!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궁예
25. “조선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는 고려의 충신이다”
26. 지금은 아파트촌이 된 고구려 최전방 초소
27. 고려 광종의 야망, 어머니 사랑이 담긴 국찰
28. 고구려 남침의 통로, 경기 연천 호로고루성
29. 기원전후 마한인들의 생활공간 신창동유적
30. 고대사의 블랙박스를 열다 - 공주 무령왕릉 발굴

이 책의 차례를 보면 총 30장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인 사진과 큼직한 글씨로 이뤄져 있어 마치 인터넷 블로그상의 웹진을 보는 듯 한 느낌을 준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5년 전에 만들어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으로 이뤄졌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하지만 차례를 보면서 필자가 아쉽게 생각한 것은 구성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분명 저자는 구석기 유적인 ‘전곡리 유적’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 유적인 ‘송은 박익의 벽화무덤’까지 골고루 다루고 있으면서 이를 뒤죽박죽 나열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유적의 발견년도대로 나열한 것도 아니고, 저자가 현장에 참여한 순서대로 나열한 것도 아니라면 그저 저자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혹은 살면서 중요하게 여겼던) 순서대로 나열한 것에 불과할 텐데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또한 책의 제일 뒷부분에 보면 각 장을 쓰면서 봤던 참고문헌들을 정리해 놨는데, 이는 이 책이 학술서적이면서도 대중서적의 스타일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음을 알려준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추후 다른 고고학 서적들에 대한 서평도 계속 쓰겠지만, 우리나라 고고학자들이 쓴 책들 대부분은 이처럼 개인의 경험담을 토대로 한 발굴현장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간 대중서적 아니면 자신의 전공분야를 전문적으로 풀어쓴 학술서적 뿐이다. 그 중도(中道)를 지키는 책은 별로 없다. 아니 이 책 말고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아직 고고학 혹은 발굴, 유적, 문화재라고 하는 키워드가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서지 않았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핫 이슈가 될 만한 문화재(여기서 핫 이슈라 함은 국제적인 관광자원으로 활용할만한 문화 콘텐츠를 의미한다)가 적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현장에서 발굴조사에 치중하거나 강단에서 후학 양성에 몰두하다 보니 대중들에게 친밀한 글을 자주 남길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럼 책의 대략적인 구성에 대한 평(評)은 이만큼만 하고 세부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도록 하겠다. 


Ⅱ. 각 장에 대한 비평

1. 역사적 · 사회적인 의미가 큰 유적 소개

저자는 실제로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유적들을 많이 발굴했고, 그와 관련된 경험담을 책에 풀어쓰고 있는데 그러한 유적들이 저자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만큼, 우리나라 혹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저자는 세계 고고학계에 한국이라는 이름을 알린 ‘전곡리 유적’부터, 수많은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온 ‘풍납토성’, 전 세계적으로 극찬을 받고 있는 ‘신라 금관과 여러 고분들’, 한-일 양국 간의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는 ‘칠지도’,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부실 정도로 정교한 ‘백제금동대향로’ 등 대중들이 친숙하게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세하고 알기 쉽게 서술하고 있다.

그냥 박물관에 가서 볼 수 있는 유물들, 책에서 볼 수 있는 유적들에 대한 단편적인 암기용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발견됐고, 어떤 연구 및 조사를 받아서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저자는 자신의 경험담(신뢰도 100%)을 토대로 재미있게 풀어쓰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독자는 절로 흥미를 느끼고, 저자의 심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고고학계의 대부(大父)라고도 할 수 있는 김원룡 선생님과 김영배 선생님이 무령왕릉 입구에서 ‘寧東大將軍百濟斯 麻王年六十二歲癸’라는 2줄의 명문을 발견하고 가슴이 덜컹했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필자 역시 저런 삼국시대 명문을 발견하면 기분이 어떨까~싶었다. 이처럼 저자는 이 책에서 그간 널리 알려진 유명한 유적, 유물들에 대해 살아있는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게 하고 있다.  

2. 대중적이지 않은 유적 소개

그와 더불어 이 책이 갖는 장점은 대중적인 문화재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문화재 역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송학동고분이나 완주 갈동유적, 감은사 금당터의 지하공간, 밀양 송은 박익의 벽화무덤, 예성동호회의 활약으로 확인된 충주 숭선사와 밀봉된 장군 등에 대한 내용은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봤던 내용들이었다. 문헌사학과 달리 고고학은 매일매일 새로운 고고자료가 현장조사를 통해 밝혀짐에 따라 사료가 무한정 늘어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전공분야와 관련된 자료만 따져도 매일매일 업데이트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비전공분야에 대한 정보는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문헌사료가 한정된 것과는 정반대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유적들은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필자와 같은 고고학도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필자는 고분 내부가 전부 빨갛게 채색되어 있는 송학동 제1호분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이건 일본계 고분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안에는 가야, 신라, 백제, 왜계 유물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마치 6세기 이후 백제와 신라를 중심으로 가야, 왜 등이 각축전을 벌이던 당시 상황이 눈에 선한 듯 했다. 무덤이라는 것이 상당히 보수적인 문화적 요소이기 때문에 남의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데(그렇기에 무령왕릉은 한국사에 있어 아주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일본식 장식고분이 한반도에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 가야-왜의 관계가 아주 밀접했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당시 가야와 영산강 세력을 두고 삼국시대가 아닌 오국시대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있을 만큼 가야는 백제, 신라 사이에서 독자적인 문화권을 이룬 국가였기 때문에 가야사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 활발히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3. 한국 고고학계의 발전상을 잘 소개

한국 고고학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 땅에 넘어와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경주에 존재하는 수십 여기에 달하는 왕릉급 무덤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어떠한 고통을 겪었는지 잘 소개하고 있었다. 금관 혹은 금동관이라고 하는 돈 되는 보물에 눈이 어두운 자들에 의해 벌어진 가짜 금관 도난 사건이나 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의 현장 참관 때문에 이름 붙여진 서봉총에 대한 얘기는 씁쓸하게 들렸다. 하지만 해방 이후 천마총을 성공적으로 발굴한 이야기나 저습지 발굴을 하기 위해 2년간 나라문화재연구소에서 저습지 발굴기법을 공부하고 돌아온 조현종의 사례 등은 그간 한국 고고학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발전해왔음을 알려주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한국 고고학은 기존의 문헌사학이 해낼 수 없었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진위 논란이 뜨거웠던『화랑세기』에 묘사된 신라의 지극히 개방적이었던 성문화도 안압지에서 출토된 목제남근과 성적 행위를 묘사한 토우에서 입증이 되었으며, 자세한 성격을 알 수 없었던 풍납토성이 백제의 한성임을 증명하기도 했으며, 제천 황석리 고인돌의 인골을 통해서 청동기시대 인적 자원의 교류에 대해서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밖에 문헌에서는 알 수 없던 화랑들의 약속이 담긴 ‘임신서기석’이나 고대 백제와 왜 사이의 관계를 알려주는 ‘칠지도’는 물론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려주는 ‘호우총’과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한강 일대의 ‘고구려 보루’들까지 고고학이 아니고서는 풀 수 없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냈는데 이 모든 것이 선학들이 어렵게 쌓아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풍납토성에 대한 글을 읽으면 문화재와 땅값이라는 공존할 수 없는 2가지 현안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문화재 신고에 따른 보상이 적다고 남대문을 홀랑 태워먹은 사건이나 큰 빚을 갚기 위해 바다 속에서 잠든 고려청자를 몰래 숨겨놨다가 들킨 잠수부의 사건 등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필자가 보기에 풍납토성만큼 큰 문제가 있었던 유적은 없었으며, 앞으로 풍납토성 내부가 사적지 등으로 보존되기까지는 해결해야만 부분들이 너무나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역시 오늘날 한국 고고학계가 떠안고 있는 문제점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더불어 앞으로 문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나 이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도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생생한 현장 사진과 진실한 저자의 독백

이 점을 필자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데, 여느 책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고학 관련 서적들을 보면 도면이나 도판이 많이 실려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유적이나 유물의 실측도면, 수습한 후 복원이 끝나 완벽한 형태로 찍힌 사진들보다는 당시 현장을 어떻게 발굴했고, 어떤 이들이 그 안에서 꿈을 키웠고, 어떤 에피소드들이 있었는지 등 ‘있는 그대로의 고고학’을 소개한 것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발굴현장이나 지도위원회 전경을 찍은 사진이나 유물이 출토된 당시의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은 고고학에 대한 상상(인디애나 존스 같은)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좋은 유희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밖에 김원룡 선생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구석기 고고학을 전공한 배기동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실은 것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실제 고고학을 전공하면서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끼리 부부의 연을 맺은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사실적인, 그러면서도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에피소드를 소개한 것이 좋았던 것 같다. 고고학자들 중에는 인디애나 존스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려주니 말이다. 또한 무령왕릉 발굴에 대한 저자의 독백과 후회를 보고 있노라면 고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유적, 유물을 대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다시는 이와 같은 불행한 유적 발굴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던 당시 고고학계의 가슴 아픈 현실이 이해되기도 했다.

결론

대략 전술한 점들 때문에 이 책은 중도를 잘 지킨 최고의 고고학 개설서라고 필자는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필자가 고고학 관련된 책을 전부 읽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책들을 읽어본 결과, 이 책과 같은 책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 책이 나온 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 수준의 책은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고고학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딱딱한 학술서적보다는 이 책을 먼저 읽으라고 권하곤 하다. 굳이 고고학이라고 선을 그을 필요도 없겠다. 단순히 어떤 책에 무슨 기록이 있고,『삼국사기』가 어쩌고 『삼국유사』가 어쩌고 하는 것보다는 이 책의 생생한 기록들을 읽는 것이 우리 역사를 이해하는데 더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지만 이 책 역시 사람이 쓴 것이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수많은 생각을 하는 인간인지라 이 책이 장점만 가진 책은 아니라는 말도 해 두고 싶다. 필자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고고학계의 대원로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지만 필자가 보기에 틀렸다고 생각하는 부분과, 필자가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어 여기에 간단하게 소개하고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저자는 고구려에서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을 신좌(申坐) 위에 두고 제사를 지냈다고 했는데(p.18), 이는 나름 고구려사를 공부한 필자가 보기에 잘못된 해석임에 분명했다.『위서(魏書)』와『북사(北史)』열전에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나라의 큰 모임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구당서(舊唐書)』열전을 보면 제사를 지내는 장소가 수신(襚神)이라고 하는 큰 굴이라는 기록이 추가되어 있다. 그밖에『주서(周書)』열전을 보면 나라에 신을 모신 곳이 2곳 있는데, 하나는 나무를 새겨 부여신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시조신 혹은 등고신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삼국사기』잡지에는 이 내용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저자는 아마 2곳의 신묘에 마련된 나무로 만든 부여신, 고등신 등을 남근으로 해석하는 듯 했지만『삼국사기』에 분명히 적고 있듯이 그것 중 하나는 부인의 형상을 한 부여신, 즉 하백의 딸 유화이며 나머지 하나는 국가시조인 주몽의 모습을 한 고등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용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구의동보루에 대한 내용 중에서는 구의동보루가 백제군의 기습에 의해 손 쓸 겨를도 없이 불에 타 전멸했다고 하면서, 아차산 보루 고구려부대는 구의동의 비보를 접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p.361). 과연 그럴까? 양자는 2시간 정도 거리 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약 구의동보루가 적의 기습에 의해 전멸한 것이라면, 아차산보루에서는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 지금처럼 핸드폰이나 무전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2시간 만에 100~150여명이 주둔하는 군사시설이 토기 약간을 제외하고 전부 소개되는 것도 무리가 있고 말이다. 필자는 구의동보루에서 1천점이 넘는 철촉이 발견된 점, 내부에서 찰갑편 하나 발견되지 않은 점, 아차산보루의 단계적 철수가 가능한 점을 근거로 구의동보루의 주둔 병력이 전멸하지 않고 오히려 보루를 버린 채 전략적 후퇴를 했다고 생각한다. 뭐 이 부분은 연구자마다 개인적인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 밖에 최신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것은 매일매일 신 자료가 나오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미 은퇴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추후 2005년 이후의 고고자료를 이처럼 정리해서 한권의 책으로 엮어내는 이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arine 2009-08-27 0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분명히 읽은 것 같은데 별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대충 봤었나 봐요. 열정적인 리뷰를 읽으니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麗輝 2009-08-2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열정적인 리뷰라. 암튼 시간나면 한번 다시 읽어보세요. ^^
 
8, 9, 10 - 아르네 벨스토르프 작품집, 청년사 작가주의 03 청년사 작가주의 3
아르네 벨스토르프 지음, 윤혜정 옮김 / 청년사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고속도로 휴게소를 잠깐 들렸다가 책을 싸게 파는 코너에 들려서 구입한 것이다. 책을 한번 주욱 훓어봤더니 간단한 내용이 들어있는 만화책 같아서 구입했는데 뭔지는 모르지만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올해의 신인상'까지 받았다니 왠지 재밌을 것만 같았다. 이 책의 작가인 아르네 벨스토르프는 함부르크 대학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고, 다양한 단편 만화와 일러스트를 출간했다고 한다. 일러스트 작가야 뭐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니깐 크게 신경을 안 썼는데, 뭣 때문에 상까지 받았을까~하는 마음에 책장을 한장씩 살펴봤다.

이 책은 작가의 첫 만화 단행본인데...책의 제목부터가『8, 9, 10(acht, neun, zehn)』으로 이상했다. 8, 9, 10?? 무슨 뜻이지? 그래서 한번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당연히 어떠한 리뷰나 코멘트가 없었다. 그리고 인터넷 서점을 찾아가도 다음과 같은 내용만 정리되어 있을 뿐이었다.  

- 주인공 크리스토프는 이번 학기 낙제를 했다. 부모님은 이혼했으며,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와도 잘 풀리지 않는다. 마치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버스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처럼 무료하고, 지치고, 불만이 쌓여 간다.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대신, 무심한 듯 보이려고 가면을 쓰듯 얼굴에서 표정을 거둔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올해의 신인'으로 선정된 아르네 벨스트로프는 간결한 연출과 흑백의 톤으로 크리스토프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 나간다. -

이게 뭐야?? 알고보니 책 뒷표지에 적혀져 있는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 왠만한 책들은 기자가 쓰든, 출판사에서 리뷰를 남기든 그 책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인터넷 서점 등에 소개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 책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아마 독자들에게 크게 어필하지도 못 했고, 그다지 출판사에서 광고를 적극적으로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하긴 이런 류의 책은 뭔가 독자들에게 크게 어필할만한 내용이 없는 경우, 비주류 도서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잘 안 읽는 분야이긴 했다. 일단 책에 대한 무미건조한(?) 소개글에 의하면, 이 책의 작가는 인생의 낙오자(?)와도 같은 주인공의 삶을 무덤덤한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한 일상을 소개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어떤 비판적인 메세지를 내비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암튼 주인장은 이 책이 무슨 내용을 갖추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 한채 책장을 한장씩 한장씩 펼쳐봤다.

일단 이 책의 구성은 8, 9, 10이라는 약 90쪽 가까이 되는 본문 내용 말고도 여러가지 단편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 단편들은 이 책의 프롤로그 · 에필로그 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작가의 개인적인 사상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먼저 '무제_내가 만화를 사랑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작가는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를 펼 수 있는 만화를 좋아하는 한 아이를 등장시킨다. 그는 무료하게 학교에서 일과를 보내고 반복되는 지루한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러면서 저녁에는 재빠르게 돌아와 만화책을 읽는다. 아마 작가에게 있어서 만화는 일상을 탈피할 수 있는 삶의 도구이면서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뒤이어 등장하는 '눈'을 보면 작가의 성격이랄까? 그런 것을 내비치는 것 같았다. 작가는 눈밭에서 눈싸움을 하는 연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남자는 약간 이기적이면서도 여자를 잘 배려하지 못 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과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여자가 왜 화가 났는지를 모르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작가 본인이 그러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이 2편의 단편을 보면서 '광수생각'이 떠올랐다. 다만 둘의 차이점을 고르자면 광수생각에 비해 이 작가는 텍스트를 거의 넣지 않아 대부분을 이처럼 상상과 추론에 맡기고 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본문을 잠깐 언급하자면...그야말로 크리스토프라는 학생의 삶을 무덤덤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의 드라마라고 말하기도 뭐한 너무나도 일상적인 한 아이의 삶을 말이다. 그의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어머니와 둘이서 살아가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가족의 불화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낙제를 했고, 무료한 삶에 빛을 제공한 여자친구 미리암과의 만남으로 근근히 생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모든 일에 소극적이며, 별 관심을 가지지 못 하고 있다. 미리암과의 만남 속에서 그는 키스나 섹스와 같은 스킨쉽을 통해 자신의 불만이나 생각을 분출하려고 하는 듯 하지만 그것 뿐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하고 정이 들기 위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고, 크리스토프는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온다. 가정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는 그렇게 본래의 삶으로 돌아온다. 제목인 8, 9, 10은 어쩌면 그저 그렇게 시간이 흐르듯이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삶을 사는 주인공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크리스토프의 삶이 유럽(더 세부적으로는 독일)의 일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대변한 것인지, 어떤 건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는 불행한 한 아이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밖에도 몇편의 단편들이 책 뒷부분에 실려져 있는데 주인장이 이 책을 보면서 놀란 것은 이 책에 정말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사실이었다. 다양한 캐릭터는 서로 다른 그림체로 그려져 있으며, 서로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어 마치 여러 명의 작가가 한 책에 각자 자신의 작품을 실은 것과 같은 느낌을 들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 장르도 굉장히 다양한데, 드라마나 코믹적인 요소는 물론 약간 몽환적인 분위기의 작품까지 작품의 범위가 굉장히 폭 넓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물론 서양인(작가)과 동양인(주인장)이라는 문화적 차이점 때문에 이 책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을 수도 있다(결국 이 작가가 신인상을 왜 탔는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 그렇기 때문에 2번 정도 책을 봤음에도 불구하고(200쪽이 조금 안 되는 분량이지만 만화이기 때문에 2번을 읽어도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작품들이 있었다. 물론 주인장은 제대로 이해했나~싶었지만 분명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이해한 작품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 속에 텍스트가 별로 없다는 점이 아쉽기는 했지만 이건 작가의 개인적 성향이니 어쩔 수 없는 도리일 것이다.

암튼 일반적인 만화와는 상당히 다른 작품을 보면서 나름 철학적(?) 생각을 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