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하자마자 연구소 선배들(물론 남자들 -.-;)이랑 다 같이 관람한 영화가 있다(그런데 왜 지금 리뷰를 쓰는지 물어보지 말라. -.-;). 바로 이 영화 <로빈후드>다. 아마 개봉 당시 분위기들이 기억이 나실텐데, <글레디에이터>의 신화가 깨진다느니, 뭐 하느니 이러면서 극찬을 했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아직도 <글레디에이터>만한 액션이 결합된 시대극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쨋든 일단은 각설하고 영화 얘기 한번 해 보자.
로빈훗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기존에 여러개가 있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도 그렇고, 최근에 검색해보니 작년에 영국 BBC에서 만든 드라마도 있다고 하더라. 그중 1976년에 <로빈과 마리안>이라는 영화가 했었다는데, 이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암튼 대강의 내용을 보니 이건 로빈훗이 좀 나이가 들었을 때 얘기같고, 그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1991년에 개봉한 <의적 로빈훗>이었다. 그리고 필자가 정말 흠뻑 빠져 봤던 영화도 바로 이 영화였다. 당시 <늑대와 함께 춤을>의 주인공으로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케빈 코스트너가 바로 이듬해에 찍은 영화인데, 여기에서 그는 '영웅' 로빈훗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지금은 내용이 거의 생각나지 않지만(다시 구하려고 해도 참 구하기 어렵다), 당시 케빈 코스트너가 귀신같은 활솜씨를 보여주며 농민 반란군(산적이라 해야 하나? 암튼)을 이끌던 모습은 필자에게 영웅이란 저런 거구나~라는 것을 알려준 영화였다. 그리고 이번에 러셀 크로우가 주연으로 등장한 영화가 바로 <로빈후드>다. 영화 예고편 등을 보면 감독은 분명히 얘기한다. <로빈후드 더 비기닝>이라고! 그동안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감독이 얘기하려 한다고 말이다.
한때 <베트맨 더 비기닝>, <다크나이트> 등 베트맨이 왜 생겨나게 되었고, 그 베트맨이 어떠한 고뇌를 갖고 살아가게 되었는지, 평범한 부잣집 아드님이 어떻게 럭셔리 영웅, 베트맨으로 거듭나게 되었는지를 무게있게 다룬 영화들이 나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아마 이 영화도 그런 새로운 시도? 혹은 신선한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본다면 분명 성공적이었다. 특히 로빈훗을 일반 평민, 하지만 大意를 갖고 장렬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들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캐릭터 설정이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로빈훗이 실존 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 아직도 학계 혹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은데 인터넷을 찾아보니(http://ko.wikipedia.org/wiki/%EB%A1%9C%EB%B9%88%ED%9B%84%EB%93%9C) 기존에는 평민으로 보기도 했지만, 록슬리의 영주로 보는 등 이견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활을 기가 막히게 쏘는 평민으로 등장시켜서 오히려 더 좋았던 것 같다.
또한, <글레디에이터>에서 보여준 영화 초반부 관객들을 압도하는 스펙타클한 전투씬 대신에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사자왕 리처드의 퇴각로 확보 전투(프랑스 여기저기를 까부시고 다닌다)를 전반부에 보여주고 있었는데, 고증이나 묘사가 잘 되어 있었던 것 같다. 확실히 고대 로마와 중세 유럽 국가의 전투는 스케일이 다르구나~를 영화를 보는 내내 실감할 수 있었다. 음~그런데 지난 영화들을 봐도 로빈훗의 활약 시기는 다 사자왕 리처드 시기로 그려내는 것 같다. 사자왕 리처드는 1189~1199년까지 재위했었으며, 흔히 무용과 기사도의 정신에 빛나는 전형적인 영웅으로 그려지지만 오히려 정치적인 통치력면에서는 무능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영화에서도 그렇게 그려내고 있었으며, 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면서 아크레에서 수천명의 포로를 학살했다는 내용 역시 영화에서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물론 로빈훗의 사실적인 대답에 리처드는 좋아했지만, 결국 그들은 전투가 끝나면 처벌받기 위해 형틀에 묶이고 만다. 정직한 영국인이라고 칭찬할 때는 언제고 -.-;). 그러다가 그만 전투에서 리처드가 죽게 되고, 영국의 필립 2세는 리처드의 동생 존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존의 절친 고프리 경을 매수한다.
뭐 역사적 사실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기본 스토리 라인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사실 3차 십자군 원정에서 리처드는 무사히 귀국하고 있었고, 필립 2세가 존을 왕위로 올려놓는다고 하자 무리하게 귀국을 서두르다가 배가 난파당하게 된다. 그래서 육로로 유럽 대륙을 횡단하다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잡히게 되고,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신병이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엄청난 몸값을 치뤄 돌아온 다음 존을 밀어내고 다시 왕이 된 리처드는 필립 2세와 싸우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가고, 거기에서 42살의 나이로 죽게 된다. 즉, 영화에서는 중간에 잡혀 몸값을 치루고 다시 복위하여 프랑스와 싸우러 갔다는 내용을 은근슬쩍 십자군 원정 귀국길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버무려 버린 셈이다. <글레디에이터>에서도 뭐 큰 스토리 라인은 따왔지만 세부 역사적 사실은 각색이 많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대립적인 두 라이벌로 감독은 영국을 구할 영웅 '로빈훗'과 영국을 프랑스에 팔아먹은 배신자 '고프리 경'을 내세운다. 로빈훗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어느 날 록슬리 가문의 아들로 둔갑하고 록슬리 경의 며느리 마리온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고프리는 멍청이 존 왕을 부추겨 윌리엄 마샬을 쫓아내고 최고 권력자로 등극해 각 영지를 돌며 세금을 쥐어짜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필립 2세와 내통해 대규모 프랑스군이 영국 해안에 상륙해 영국을 정복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영화의 전반부가 로빈훗의 십자군 원정에서의 활약과 귀국길과 관련된 스토리가 전개된다면, 중반부로 넘어오면서 또라이 존 왕의 왕위 등극 후 폭정, 고프리 경의 악행, 외롭게 영지를 지키는 마리온의 강인한 활약 등이 돋보인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는 영화 초반부 살짝 아쉬웠던 대규모 전투씬이 등장하게 된다. 실제 영국 웨슬리와 프레시워터 해변에서 촬영했다고 하는 마지막 전투씬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하게 만드는 멋이 있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실제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저 당시 영국을 침공했고, 이를 막아낸 역사적 사실은 없다는 것,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대헌장(마그나 카르타)을 새롭게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앞의 전투씬이야 영화의 극적 요소를 절정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대헌장에 서멍하겠다고 존 왕이 약속하고 각 영주들은 그제사 병력을 내놓으며, 이 전투에서 고프리 경을 죽일 수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로빈훗은 이 전투의 승리로 일약 영국의 대영웅이 되어 버린다. 그럴려면 이 전투는 꼭 필요한 요소였다) 등장시킨 것이지만 대헌장에 대한 내용은 흥미로웠다. 1215년 6월 15일에 존 왕이 서명한 대헌장을 통해 영국왕은 어느 정도 봉건영주들의 통제를 받게 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해 서명하겠다고 약속한 존 왕이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로빈훗을 영국의 '공공의 적'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의적 로빈훗>에서 리처드가 로빈과 마리온의 결혼을 축하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론이었으나, 오히려 필자는 이것이 더 현실감있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인터넷에 어떤 분이 이 대헌장을 권리장전으로 오해하시기도 했는데(http://cafe.daum.net/v76/ISxF/343?docid=17F6H|ISxF|343|20100911004436&q=%B7%CE%BA%F3%C8%C4%B5%E5&srchid=CCB17F6H|ISxF|343|20100911004436), 오해를 푸시기 바란다. 권리장전은 대헌장과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문서이니 말이다.
또 몰랐는데, 인터넷에서 이 망치를 들고 싸우는 로빈훗을 두고 말이 안 된다, 궁수가 무슨 망치냐? 라는 꼬투리를 잡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궁수는 그럼 장거리에서 활만 쏘고, 적이 가까이 오면 무조건 도망가야 하나? 아니면 스타크래프트에서처럼 무빙 샷을?? 동서고금을 통틀어 주무기 외에 보조무기를 착용하는 것은 당연하게 취급되었고, 저 당시의 궁수들 역시 활 하나만 미친듯이 사용했다고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거기다가 로빈훗은 주인공인데, 망치랑 활 2개밖에 사용 안 한건 오히려 애교로 봐줘야 하지 않나? 요즘 액션영화 보면 주인공들이 온갖 무기를 다 잘 사용하는 것으로 나오지 않는가.
영화를 보면 종종 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더 비기닝'이라는 부제를 달고 영화 1편보다 앞의 내용을 다루는 경우가 있다. 앞서 언급한 베트맨 시리즈도 그랬고, 스타워즈 시리즈도 그러했으며, 터미네이터 시리즈도 그렇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성격의 영화가 전작들보다 인기를 끄는 경우도 많았다. 필자가 볼때 그런 인기의 비결은 '이유있는 내용 전개'때문이 아닐까? 갑자기 새로운 배경, 새로운 내용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했던 내용들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됐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있어 그런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이번 영화는 캐릭터 설정, 스토리 라인, 전투씬 등등 포스터에 대문짝만하게 써붙여놓고 엄청나게 광고한 것처럼 '<글레디에이터> 10년 신화'를 깨드릴만한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별 1개를 비워둔 이유를 간단히 적고 이만 마치도록 하겠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더 비기닝이 뒤에 나와 인기를 끌었던)은 이미 기존에 탄탄한 스토리 라인이 구축되어 시리즈로 연재되었던 영화들이 많다. 베트맨이 어떠한 활약을 하는 영웅인지, 스타워즈의 우주관이 어떠하며, 거기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다 어떤 사이인지, 터미네이터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T-800과 T-1000이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 등등 기존에 나왔던 영화를 통해 이미 하나의 '세상'을 창조해 그것을 유지했던 영화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 '로빈후드'는 앞서 그런 전작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맨 처음 언급했던 76년 작품과 91년 작품은 일단 캐릭터 설정이나 주변 배경, 스토리 라인에 있어서 이번 영화와 큰 상관이 없이 서로 다른 영화로 인식되는 게 더 크다. 그런 상황에서 '더 비기닝'을 표방했으니 무슨 영화의 '더 비기닝'이란 말인가? 아니, 영화가 아니라 단순히 로빈훗이라는 인물에 대한 '더 비기닝'적 성격의 영화를 만든게 아닌가~하는 반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로빈훗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설이나 명확한 설명도 없지 않은가? 그 상황에서 '더 비기닝'이라는 부제를 다는 것이 과연 유리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리들리 스콧 감독이 <글레디에이터>, <킹덤 오브 헤븐>과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에서도 로빈훗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며 그의 전성기를 그린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