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일본 영화는 크게 좋아하지 않는데, 간만에 괜찮은 영화를 한편 봤다. 예전에 <춤추는 대수사선>은 그럭저럭 볼만했는데, 나머지 일본 영화들은 확 와닿는게 딱히 없어서 가끔 일본 드라마는 보지만, 영화는 잘 안 보는 편이었다. 그런데 일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일단 특이해서 본 영화가 있다. ‘황금빛 졸음’이라는 의미의 ‘Golden Slumber’가 영화의 제목인데, 감독은 영화 내내 이 제목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었다.
영화의 내용은 검색해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쉽게(?) 정리해 보겠다. 주인공인 아오야기는 2년 전 아이돌 스타를 위기에서 구해줘 유명인이 된 일반인이다. 그런데 하루는 대학 친구인 모리타가 낚시하자고 그를 불러내서는 약을 탄 물을 먹여 차에서 자게 만든다. 마침 근처에서는 고향을 찾은 젊은 신임 총리가(Naver 영화에서 검색해보니 그 총리는 반미 성향을 가진 인물이란다. 영화에서는 딱히 안 나온 거 같던데 암튼) 퍼레이드 도중 爆死하게 된다. 그리고 모리타도 차 안에서 爆死하고. 그때부터 아오야기는 도망가기 시작하는데, 거대한 권력의 손아귀에서 아슬아슬하게 탈출을 계속하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딱 보고, ‘어? <프리즌 브레이크>랑 초반 설정이 비슷하네~’라고 느꼈다. 다만 차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캐릭터 설정에 신경을 좀 더 쓴 것이랄까?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석호필의 형아는 평범한 일반인이다. 그런데 거대한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방에 들어간다. 물론 동생인 석호필이 이를 구하러 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여기에서도 평범한 일반인 아오야기(택배기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차이라면 그는 2년 전 유명 아이돌 스타를 구해줌으로써 일반인 아닌 일반인의 삶을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 영화에서 종종 나오는 대사였던, ‘이미지다! 이미지!’에 어울리는 삶이랄까? 사람들은 한때 유명했던 사람이 총리를 암살했다는 것에 더 자극받고, 더 이슈화할 수 있고, 열광할 것이다. 총리 암살을 지시했던 권력층은 이런 대중과 언론의 힘을 교묘히 이용해 한 사람을 몰락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음...주인공이 정말 평범하네...’라는 생각이 든다. <프리즌 브레이크>에서는 석호필이 뭐였더라? 특이한 병(?)인가 뭐가 있어서, 주변의 사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났지 않았는가. 또한 이런 스릴러(음모론이 가미된)물을 보면 주인공이 한 능력하는 것으로 나오지 않는가(거대 권력층과 맞서려면 뭔가 특별한 게 필요하지 않겠는가). <컨스피러시>에서도, <세븐 데이즈>에서도 그렇고 주인공은 뭔가 하나 잘난게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딱히 그런게 안 보였다. 즉, 감독은 같은 스릴러라고 하더라도 이 영화에서 이를 다르게 풀어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주인공의 월등히 뛰어난 능력이 돋보이지 않는 대신, 감독은 그를 신뢰와 믿음으로 연결해주는 수많은 주변인물들을 등장시킨다. 대학 때 친구, 전혀 모르는 연쇄살인범(그나마 가장 능력자), 역시 전혀 모르는 병원 환자, 같이 일했던 직장 동료 등등.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 역시 특출난 인물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다(1명 빼고). 그래서 더 해학적인 느낌이 난다랄까? 일본 영화 특유의 코믹스러움(그 긴박한 도주과정에서 주인공 주변의 친구들은 지속적으로 주인공에게 묻는다. 그 아이돌 스타와 잤냐고~ㅋ)도 자연스레 배어나오고 있어 더 훈훈한 느낌이 났던 것 같다.
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건 원작이 있는 영화란다. 그에 대한 스포츠조선의 기사가 있어 약간 발췌해본다(http://sports.chosun.com/news/ntype2.htm?ut=1&name=/news/entertainment/201009/20100903/a9c75140.htm).
아사코 코타로의 원작 소설과 비교해 볼 때,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은 소설과는 약간 다른 < 골든 슬럼버>를 만들었다. 소설에서는 '스릴러'와 '인간애에 근거한 신뢰'가 튼튼한 두 개의 골격을 이뤘다. 소설에서 스릴러의 긴장은 공권력과 개인간의 추격과 도망에서 나왔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감시-거짓-폭력과 권력'으로 개인을 무력화시키는 거대하고 부당한 공권력 묘사가 대폭 줄었다. 우선 센다이 시내 전체를 도청, 녹화, 감시하며 아오야기의 동선을 바짝 뒤쫓던 시큐리트 포트가 사라졌다. 또한 권력을 가진 추격자들의 압박과 폭력이 줄었다. 예를 들어, 후배 가즈를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고문과 폭력이 지극히 은은하게 깔려있고, 추격자들이 옛 연인 하루코의 아이까지 납치하려 했던 행동도 빠져 있으며, 빨간 헤드폰 장총의 무차별 난사와 살생도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아오야기의 소심하지만 살기 위한 절박한 육탄전과 달리기도 줄었다. 대신 영화는 인간적 신뢰의 축을 대폭 살렸다. 소설에서 인간적 드라마를 비중 있게 취하고, 소설에는 없었던 따뜻한 에피소드를 더하기도 했다. 반면 스릴러적인 요소를 줄였다. 관람 도중 가끔 감동하고, 가끔 웃는 것은 좋지만, 명색이 스릴러 원작인데, 긴장마저 '가끔'이라는 것은 약간 난감하다.
아하~원작은 정말 스릴러 같은 소설이고, 이번 영화에서는 전혀 다르게 그걸 표현했구나. 위의 기사 글만 보면 원작은 거의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와 같은 내용이 아니었나 싶었다. 긴장감이 강하게 배어있는 전형적인 스릴러물 말이다. 아직 영화 <이끼>를 보지 못 했지만, 영화화된 작품은 만화 원작과 많이 다르며, 감독이 다르게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원작과 달라도 꽤 인기가 있었던 걸 보면 영화도 나름 재밌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봤을 때 필자 역시 소설은 보지 못 했지만 영화는 꽤 재밌게 봤다고 말하고 싶다. 아마 소설 그대로 만들었다면 오히려 식상한 스릴러 영화라고 느껴서 별로 감흥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아~스릴러 영화를 이렇게 풀어쓸 수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영화는 전반적으로 드라마적인 전개가 강했던 것 같다. 자극적인 격투신이나 추격신, 피와 살이 튀는 잔인한 장면, 스릴러 특유의 도청과 감시, 추격과 도망 등이 거의 보이지 않았으니깐. 오히려 주인공 아오야기를 도와주는, 언론플레이에 쉽게 속지 않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주인공을 도와주는 사람들의 유대관계를 그려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 점이 오히려 이 영화의 약점이 될 수도 있긴 하다. 아무리 일반인들이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고, 도와주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권력층의 힘 앞에서는 솔직히 鳥足之血이지 않을까? 그런데도 일이 너무 잘 풀리는 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은 오히려 현실을 비꼬는 해학적인 해석때문이 아닐까? ‘너네 권력층이 아무리 잘나도 우리 서민들을 함부로 할 수는 없다고!’ 라고 말이다.
이는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한 번 더 느낄 수 있다. 탈출에 성공한 아오야기는 성형을 하고 딴 사람으로 살아가며(평생 숨어살아야 한다. 불쌍하게스리~어떻게 보면 베드엔딩인가?), 그 대신 어떤 시체가 발견되고 아오야기로 밝혀져 사건은 종결된다. 순간, ‘어? 아오야기 그렇게 죽이려던 사람들이 DNA 분석 이런 거 안 해볼까? 어떻게 속였지? 그냥 넘어간건가?’ 등등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대게 화려한 액션영화나 스릴러물에서도 이런 설정이 나오지만, 그 주인공들은 원래 잘난 놈들이라서 이런걸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아오야기는 안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런 건 뭐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감독도 원래 그런거 고민 안 하고 넘어가는 설정 같기도 하고. 오히려 젊은 총리는 누가 죽이려고 했으며, 어떤 음모 과정이 전개되어 모리타가 친구를 이런 위험에 빠뜨렸는지 등등은 전혀 나오지 않고 영화는 끝을 맺는다. <프리즌 브레이크>와는 전혀 다른 전개~정통 스릴러물을 즐기려고 이 영화를 봤다면 정말정말 후회할지도 모른다(얼마 전 필자는 <뮬란>을 보고 나오는데, 뒤에 앉았던 남자 2명이 ‘액션도 별로고, 스케일도 안 크고, 전투씬도 별로 없다!’라고 하면서 투덜댔던 일이 있었다. 속으로 ‘그럴려면 미리 알아보고 딴 영화를 보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를 필자는 별 기대를 안 하고 봤기 때문에(검색을 안 해봐서 내용도 모르고 봤다) 지금 이렇게 재밌다고~글을 쓸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제 글을 끝맺자. 영화의 제목이자, 모리타가 죽기 전에 아오야기에게 들려줬던 노래, 비틀즈의 ‘골든 슬럼버’. 이것은 모리타가 속세에 찌든 현재의 모습(부인이 빠찡코 중독이어서 빚이 산더미처럼 불었고, 이 음모에 가담하면 빚 탕감을 해주겠다는 제안에 친구를 팔아먹게 되는 자신의 모습)에서 벗어나, 순수하고 열정 가득했던 대학 때 친구에게 줄 수 있는 사과의 노래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죽기 직전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으라는 친구의 말에 아오야기는 성형을 하고 신분이 불분명한 상태로 평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또한 이 노래는 주인공 아오야기가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을 되새기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금 말도 안 되는 음모에 휩싸여 주변 사람들이 다치고, 자기 자신의 삶도 망가지는 이때에 이 노래는 현실도피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영화 중간마다 자꾸 회상신이 나오는 것도 그때문인 것 같다. 이 노래 솔직히 영화에서 처음 들어봤지만, 상당히 듣기 좋았다. 잔잔하니 잠도 잘 오고~ㅋㅋㅋ
일상에서 스릴러적 요소를 찾아낸 영화라고나 할까? 전혀 스릴러물 같지 않은 스릴러물이라서 더 끌렸던 영화다. 요즘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영화이기에 한번쯤 보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