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손님 (양장)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내 이름을 불러줘


그해, 여름 손님, 안드레 애치먼, 2018.


  그해 여름을 기억하며 시작하는 소설은 “나를 당신의 이름으로 불러 줘요”라는 말로 끝맺는다. 제목이 전체 소설 이미지를 가늠‧장악한다는 점에서 원제와 다른 번역본 제목은 상반된 느낌을 준다.  <그해, 여름 손님>은 나른하고 간지럽고 아련한 느낌이다. 과거의 어느 시간대에 머물러 있는 느낌을 준다. 시간과 공간이 주는 이미지, 감각적인 분위기에 더 휩쓸려 보게 된다. 반면 원제는 강하고 격렬한 느낌이다. 아련함보다는 움켜쥐려는 느낌과 대화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두 이미지를 겹쳐두고 보면 결국 이 소설은 사랑이야기다. 아주 익숙한. 그렇잖은가?


내가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세계였다. 하지만 이 세계가 좋았다. 이 세계의 언어를 배우고 더욱 좋아졌다. 그것은 내 언어이고 호칭이었다. 가장 깊은 곳의 갈망이 정감 어린 농담으로 밀수되는 곳. 두려운 일에 미소를 보이는 것은 더 안전해서가 아니라 내가 새로 발 들인 세계의 모든 욕망은 오로지 연기로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란 경험해보기 전에도 사랑하는 그 순간에도 늘 판타지일 것이다. 열일곱 살 엘리오는 ‘한번도 와 본 적 없는 세계’라고 말한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사랑을 채워가는 과정의 호기심, 떨림, 두려움은 엘리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엘리오는 감성적이고 감각적이고 또한 열일곱 소년의 무게로 자유분방하고 매우 도전적이기도 하다. 그해 여름 이탈리아 해안가의 별장에서 소년은 부모님이 초대한 학자 스물넷의 올리버를 만난다.

  소설은 회상이기에 올리버를 만난 그해 여름은 특별히 기억된다. 햇살 하나까지도.

  올리버이기에 엘리오의 마음이 끌린 것일까. 그때 그해, 열일곱으로 성장한 엘리오의 그 나이가 그 마음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어쩌면 일탈, 그러나 사랑. 어쨌든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더욱 적극적이다. 올리버의 시각으로 쓴 책이기에 엘리오의 감정이 뚜렷이 드러나지만  학자로서 스물 넷 성인으로서 올리버는 좀더 제 감정을 컨트롤하려 한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연주할게요,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내 손가락이 벗겨질 때까지. 난 당신을 위해 뭔가 해 주는 게 좋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말만 해요.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어요. 친근하게 다가가는 나에게 또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반응할 때조차.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여름을 눈보라 속으로 가져가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예요.


  우리나라와 외국의 문화는 매우 다르고 특히 성과 사랑의 면에서 큰 차이가 있다. 엘리오를 미성년자로 두 사람을 동성이라는 틀로 가두고 보면 이 사랑은 매우 ‘문제시’되는 것으로 치부된다. 실제 상황이라면 엄청난 파급력으로 가십의 대상이 되어 포털을 뒤흔들고 있을 얘기다. 어쩐지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배경 때문인지 소설을 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인지, 전혀 놀랍고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다. 엘리오와 올리버만이 조심스럽다. 그들 또한 마냥 자유롭지 못하기에 그들의 사랑은 좀더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눈짓과 손짓으로 오간다. 세상의 모든 사랑이란 어느 정도 타인에게 감춤과 드러냄의 밀당을 지속하는 과정이다. 그러하기에 틀을 치우고 본다면 그냥 사랑하는 사람들이 ‘썸’을 타고 사랑을 확인하는 일련의 감정과 상황이 자연스럽고 감각적으로 펼쳐진다. 그 간질거림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수많은 이들의 첫사랑처럼. 

  그래서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열일곱 소년이라거나 동성애라거나. 특별할 것 없는 사람과의 사랑이야기라고. 하지만 이것 역시 ‘틀’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작용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소설을 읽어가며 사랑에 눈뜬 소년의, 특히 피아노 치는 아이의 감성은 다르구나 생각하면서 읽었지만,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딱히 이 문장이 다가왔던 건 아니다. 우리에겐 너무도 유명한 “김춘수의 꽃”이 있어 이 문장에 대한 생각은 나름 각인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지점에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 어떤 느낌이지 생각했다. 

 

그동안 난 어디에 있었던 거지? 올리버, 내가 어릴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이게 없는 삶은 무슨 의미일까?’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끝에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만둔다면 난 죽을 만큼 괴로울 거예요. 그만둔다면 난 죽을 만큼 괴로울 거예요.”라고 말한 사람이 그가 아니라 나인 이유였다. 그것은 내 꿈과 환상, 그와 나, 그의 입에서 내 입으로, 다시 그의 입으로 입에서 입으로 왔다 갔다 하는 욕망의 말을 완성하는 길이었다. 내가 외설스러운 말을 시작했는지 그가 부드럽게 따라 하다가 말했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 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태어나 처음 해 본 일이었다. 그를 내 이름으로 부르는 순간 나는 그 전에, 어쩌면 그 후에도 타인과 공유한 적 없는 영역으로 들어갔다.


  공유. 타인과의 합일. 사랑할 땐 흔히 눈이 먼다고 한다. 생각은 많이 하지만 한 부분에 집중되어 생각되기도 하고. 엘리오는 올리버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사랑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한다. 열일곱 소년은 더욱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휘둘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각하는 것은, 어떤 순간에도 나는 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그 이상적인 뜻을 수긍하면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 더욱 나는, 사랑할 때일수록 내 이름을 지켜야 할 거라는 생각을 아주 굳건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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