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추스르자마자 개강을 했고 곧 결혼을 한다. 청첩장을 돌리면서 천천히 알리고 싶었는데 대학원 동생 하나가 입방정을 떠는 바람에 소문이 나버렸다. 몇몇 사람들은 쇼크라느니, 배신이라느니 하면서 흥분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는 무조건 쑥스럽기만 했다. 교수님께 많은 배려 부탁드리겠다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논문에 대한 걱정이 모락모락. 너 그래서 파마했구나? 대체 머리카락의 웨이브와 결혼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제 사람들은 나의 모든 사소한 변화들을 결혼과 결부시키겠지.
논문을 진행시키면서 결혼 준비를 하는 게 만만하지는 않다. 간단히 생각하면, 논문은 계획했던 대로 열심히 생각해서 부지런히 쓰면 되는 것이고 결혼 준비야 엄마가 더 바쁘시지만 마침표를 못 찍고 계속 중언부언 해대는 사람처럼 스스로도, 남 보기에도 영 심란한 것 같다. 오전엔 학생, 오후엔 예비 아줌마로 입장을 바꾸는 일도 아리송한 문제다. 이번 학기엔 셰익스피어를 신청했는데 과제를 하려고 작품을 읽다가 오후엔 무언가 흥정을 하러 가기도 한다. 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 느끼는 눈부신 괴리감 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 주변을 보니 다들 바쁘게 출퇴근 하면서도 결혼만 잘하길래 아, 나는 지금 여유 있을 때 해야지, 했던 것인데 스스로를 너무 과신한 건지도 모르겠다.
상대는 평범한 사람이다. 꿈꾸던 이상형도 아니고 숨이 막힐 정도로 매력적이지도 않지만 착하고 편해서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다. 그 동안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나를 꾸준히 견뎌준 공로도 높이 산다. 겁이 많으면서도 궁금한 것은 못 참고, 다정하지만 한편으론 의심도 많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뒤바뀌는 나를 사랑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실상은 그 사람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 것이겠지. 언뜻 보기엔 여차하면 시시때때로 눈이나 흘겨대는 내가 우세해 보이겠지만 능글맞게 빙글거리는 그의 얼굴을 보라. 괜히 약 오르는 이 감정은 뭔가? 그는 어쩌면 이미 간파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입으로는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손과 발을 부지런히 놀려 먹이고, 입히고 할 거라는 사실을. 모쪼록 아무도 내가 네추럴 본 무수리라는 것을 그에게 알리지 말 것.
올해는 꼬박꼬박 펴보는 일기장 같은 이곳에 자주 들르지 못했다. 가끔 다른 사람들 근황만 읽고 가기도 하고 어떤 글은 쓰다가 지워버리기도 했다. 끝까지 읽은 책보다 보고나서 잊어버린 영화가 더 많다는 점이 부끄럽고, 이곳에 또박또박 쓰고 싶은 말들을 식후 수다로 대충 풀어버린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허접한 논문과 나태한 독서 실태는 인생의 반려자를 얻은 것으로 자연스럽게 무마되긴 어려울 듯 하고... 앞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과거에 연애나 결혼을 핑계로 공과 사를 못 가리며 뺀질대는 인간들을 못마땅해 했던 너 스스로를 돌아봐라, 깐따삐야! 이제 격려해주고, 격려 받을 사람이 하나 더 늘었으므로 더욱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무겁고도 행복한 부담감을 즐기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