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좋아 이불을 널고 커피 한 잔을 끓여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얼마만의 여유인지 모르겠다. 엊그제 본논문 발표가 있었다. 코멘트 속에는 지적 사항과 함께 칭찬도 있었다. 지적 사항에 대해서는 지도교수님과 함께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글을 쓰면서도 새로운 것 하나 없이 혼자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칭찬은 조금 부끄러웠다. 전체 발표가 끝나고 어느 교수님은 그간의 온정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면서, 긴장을 늦추지 말고 마지막 심사가 끝나는 그 시점까지 성실히 마무리할 것을 당부하셨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적 매질을 많이 당한 시간이었다.

 저녁에는 우리 방 사람들끼리 모여 조촐한 뒤풀이가 이어졌다. 맥주를 돌리기 시작하자 냉랭한 강의실 안에서 추위와 긴장으로 굳어 있던 심신이 부드러워졌다. 화제는 어느새 유부녀가 된 내게로 옮겨졌다. 다들 결혼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의견들을 내놓았는데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좋아서 저러는 거라고 일갈해 버렸다. 교수님은 중간에서 이런저런 예를 들어 결혼은 좋은 점도 있고, 안 좋은 점도 있다고 정리를 해주셨는데 그저 그런 마무리이긴 하지만 참 적확한 결론이다. 실제로 그렇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다채로운 감정의 파고를 겪어야했던 연애시절에 비하면 우리가 언제 그랬나 싶을 만큼 서로에게 빠른 속도로 적응해 가고 있다는 점. 어쩌면 부부 교사 특유의 성실성 덕분인지도. 그는 착한 사람인데, 그도 나를 착한 사람이라 착각하고 있으니 이런 뜻밖의 참한 생활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한편 결혼하고 나서는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한 동네에 살게 되어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그 동안 잘 못한 것만 생각이 나서 누가 엄마 이야기만 하면 뭉클해진다. 처음엔 반대도 했었지만 남편을 일단 가족으로 맞고 나니 정말 잘해주신다. 어떨 때는 엄마와 내가 이 남자 하나 잘 먹고 잘 입히려고 결혼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런 엄마에게 고맙고, 나와의 결혼을 통해 편안해지고 건강해진 남편을 보는 것도 흐뭇하다. 내게 매년 11월은 참 힘든 계절이었다. 언젠가 페이퍼에 2월, 6월, 11월에 대해 쓴 적도 있다. 하지만 올해 11월에는 스산한 바깥 풍경 안에 바쁘게 움직이는 내 모습이 보인다. 피곤한 얼굴이면서도 반짝, 생기가 도는. 그 현재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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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11-14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이건 뭥미.?? 결혼은 또 언제하셨데요~~ 암튼 신출귀몰 깐따삐야님 같으니라구!!

깐따삐야 2008-11-16 10:18   좋아요 0 | URL
에엥? 모른 척 하시는 거죠? ㅋㅋ

다락방 2008-11-14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결혼은 정말 언제하신거예요? 늦은듯 하지만 결혼 축하드려요,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08-11-16 10:19   좋아요 0 | URL
엥? 다락방님도 모른 척 하시는 거죠? 제가 넘 뜸했나 봐요. 감사해요.^^

무스탕 2008-11-14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머! 두 분 정말 깐따삐야님 결혼 발표 페이퍼 못보셨어요?
애정이 식은겨... =3=3=3

깐따삐야 2008-11-16 10:20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덕분에 깨달았어요. 애정이 식은겨... ㅠㅠ

순오기 2008-11-14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해서도 엄마 생각 많이 하지만 아기 낳고 나면 더 많이 하지요, 눈물을 글썽이며...
11월의 행복이 깐따님에게 가 있구만유, 한 남자를 잘 먹이고 입히는 것도 중요해요.ㅋㅋ

깐따삐야 2008-11-16 10:23   좋아요 0 | URL
그럴 줄 알았으면 함께 살 때 더 잘할 걸, 후회되고 그래요.
순오기님처럼 씩씩하고 부지런한 주부가 되어야 할텐데 저는 아직 멀었답니다.^^

가시장미 2008-11-14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 우리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거에요? 저도 페이퍼를 못 보았는데... 엘신님이 귀뜸해주셔서 알고는 있었어요. ㅋㅋ 반가워요! 저도 저녁에 갈치를 구울까봐요 ^^

깐따삐야 2008-11-16 10: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어요. 장미님도 바쁘죠? 어제 저녁에 갈치 구우셨어요? ^^

sretre7 2008-11-15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결혼생활 하세요 ^^ 언제나 배움에의 열정 부럽습니다. 파이팅~!

깐따삐야 2008-11-16 10:27   좋아요 0 | URL
감사드려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홈페이지 개편 중이신가요? 님도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요.^^

웽스북스 2008-11-15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머! 두 분 정말 깐따삐야님 결혼 발표 페이퍼 못보셨어요?
애정이 식은겨... =3=3=3 22222

깐따님, 어제 지하철에서 매우 참한 임산부가
할머님이 양보해주시는 자리를 극구 마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깐따삐야님 생각 났잖아요. (너무 앞서 생각난거죠 하하하)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아요 ^_^

깐따삐야 2008-11-16 10:31   좋아요 0 | URL
메피님은 걍 모른 척 하시는 것 같다는...ㅋㅋ

막 빛의 속도로 앞서가는데요. 아직은 그냥 참한 새댁으로만~
미혼일 때가 그리울 때도 있어요. 웬디양님은 지금 그 시기를 맘껏 즐겨요!

2008-11-15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16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까랑 2008-11-1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결혼하셨군요. 뒤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가끔 들러서 '빼어나게 잘 써진' 깐따삐야님의 글을 보는게 낙이라면 낙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글이 뜸해지시길래 논문이 바빠서 그런가, 아니면 누가 생겼나 했더랬어요. 누가 있다는 건 여름에 올린 글에서 보았지만 그 후로 글이 안올라오길래 목하열애중이신가 하고 저도 두달 반 정도 안들어왔었는데, 오늘 와보니 그새 결혼을 하셨군요. ㅋㅋㅋ~ 암튼 다시 한번 축하드리구요,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이런 무명(?)의 팬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시고 가끔이라도 안부글 올려주세요. 행복하시길요^^

깐따삐야 2008-11-19 15:2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연애하고 논문 쓰고 결혼하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달력이 두 장 남았네요. 제 일상에 관심을 가져주는 팬이 다 계시다니 기쁘고 고맙습니다.
까랑님도 추위에 건강 유의하시고 행복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