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신호를 보냈을 때 돌봤어야 하는 건데 괜찮겠지, 외면했더니 역시 탈이 났다. 여름 내내 두통약을 아마 수십 알은 먹었을 거다. 건강과 젊음을 과신했던 것 같다. 침을 무서워해서 웬만하면 안 가는 한의원인데 엄마 성화에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했다. 안 가고는 못 배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기도 했고. 눈동자를 움직일 때마다 하늘이 느릿느릿 돌아가고 가만히 누워 있을 때 빼고는 도통 어지럼증이 가시지를 않으니 아예 머리가 아픈 것보다 더 괴롭더라는. 증상을 묻고 맥을 짚어본 의사 선생님은 기운이 완전히 바닥이 났으니 무조건 쉬어야 한단다. 나도 잘 몰랐던 내 체질을 소상히 읊더니 침을 꽂은 채 누워있는 동안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다. 육체적인 과로도 있지만 정신적 스트레스가 큰 원인인 것 같은데 무엇이 문제인지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안타까워하는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요즘은 그간 먹어본 약 중에 가장 비싸고도, 가장 쓴 약을 먹으며 요양 중이다. 어지럼증은 쉬이 가시지를 않고 있지만 매일 먹는 닭죽과 보약 덕분인지 몸에 따듯한 기운이 도는 것도 같다. 논문은 아직 갈 길이 먼데 잠시 손을 놓고 있고 일단 회복하는 데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처음에 아파서 정신이 없을 땐 내가 너무 딱하고 주변 사람들이 괜히 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말하지 않고 표내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고 몰라줄 때 떼를 써대는 유치한 아이처럼 나는 혼자 씩씩거리다가 지쳐버린 것이었다. 마음과 육체의 병을 키우는 건 모두 나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이렇듯 미련한 나를 미련하게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들과 나 스스로를 동시에 괴롭혔다. 왜? 두려워서. 이젠 몹쓸 가학 대신 수양이 필요하다. 재밌는 건, 쉬는 내내 올림픽 경기를 보며 위안을 많이 받는다는 것. 각종 스포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명쾌한 열정이 바닥에서 웅얼거리는 내 기운들을 한껏 모아주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스포츠 정신인지도?

 이번에 나로 인해 가장 많이 마음고생을 한 사람은 우리 부모님, 그리고 긴 속눈썹을 껌벅이며 어쩔 줄을 몰라 하던 한 남자. 그는 내가 이렇게 몸져누울 줄 몰랐고 나 또한 갑자기 퓨즈가 나가듯 맥없이 쓰러질 줄은 몰랐다. 무조건 괜찮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건강을 잘 챙기는 것도 연애의 기본기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엊저녁까지 생글거리다가 갑자기 반쪽만한 얼굴이 된 애인이라니. 사람은 그저 아프면 약을 먹고, 슬프면 울면 되고, 피곤하면 쉬면 된다. 하다가 그치면 쌓이고 쌓여서 큰 병 나는 거다. 비록 기운은 바닥이 났지만 그와 더불어 심신의 솔직한 상태가 바닥을 드러낸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앞으로는 잘난 척 하지 말고 솔직해져야지. 보약 넘 비싸서 아프면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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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8-19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같은 기운이여 솟아라..라고 주문이라도 외워야 겠군요..^^
그.런.데....

"그리고 긴 속눈썹을 껌벅이며 어쩔 줄을 몰라 하던 한 남자."와 "엊저녁까지 생글거리다가 갑자기 반쪽만한 얼굴이 된 애인이라니."를 주의깊게 다시 읽어 보는 중....

뜸했던 이유 중에 또 다른 이유 하나를 발견한 느낌...

깐따삐야 2008-08-19 02:32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메피님. 깐~따삐야~ 미련~ 곰퉁이~ 그러시겠지요? ㅋㅋ

그걸 이제 아셨다니요. ㅠㅠ

순오기 2008-08-19 07:46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 바로 아래에 곁에 있어주는 남자, 이야기를 썼는데~ 메피님이 못 보셨구나.ㅎㅎㅎ

Mephistopheles 2008-08-19 09:24   좋아요 0 | URL
워나악...뜸하시다 보니~~~

순오기 2008-08-19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궁~ 뜸해도 무소식이 희소식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밧데리가 나갔군요.ㅜㅜ
몸이 살려달라고 소리칠 때 잘 귀담아 듣고 적절하게 처방했어야 되는데...이제라도 섭생을 잘 하고 푹 쉬셔요~~ 그래도 속눈썹을 껌벅거리는 그남자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깐따삐야 2008-08-19 22:04   좋아요 0 | URL
네~ 순오기님 말씀 잘 듣는 착하고 건강한 깐따삐야가 되겠사와요.^^

치니 2008-08-19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고, 몸이 알아서 경고를 보내준거네요. ^-^
그리고 원래 믿는 구석이 조금 있어야 아프기도 한답니다, 속눈썹 긴 그분이 든든하게 지켜보니 아플만했던거 아닐까 하는...^-^;;
얼른 나으세요!

깐따삐야 2008-08-19 22:06   좋아요 0 | URL
엎어진 김에 쉬어가란 말, 정말 맞는 것 같아요. 요즘은 그래서 무념무상으로 단순하게 살고 있어요.
근데 아직은 남자보다 엄마를 더 믿는답니다.ㅋㅋ 어여 나아야죠!

BRINY 2008-08-1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유, 치료비 생각해서라도 아프시면 안되요...

깐따삐야 2008-08-19 22:07   좋아요 0 | URL
그럼요. 아프면 심신도 고생이고 돈 팍팍 나가고, 이중고에요. BRINY님도 건강 잘 챙기시구요.^^

레와 2008-08-19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밝고 좋은 기운이 깐따삐야님을 감싸도록 당분간은 유쾌하고 즐거운것만 보고 생각하세요.

소식이 없으셔서 요즘 깐따삐야님은 모하실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아팠다니요..!!

음..
이용대 선수 윙크하는 사진을 크게 프린터해서 천장에 붙여놓는건 어떨까요?! 으흐~

깐따삐야 2008-08-19 22:09   좋아요 0 | URL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아 눈을 감고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네요. 점점 좋아지겠죠.
나만의 용대가 아니라 만인의 용대라서 좀 외로와요. 으흣~^^

2008-08-19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19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25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웽스북스 2008-08-19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잉 보고싶은 깐따삐야님
오늘은 다시 생글거리고 있나요?

깐따삐야 2008-08-19 22:15   좋아요 0 | URL
다시 예전처럼 글도 쓰고 댓글도 달면서 잼나게 알라딘놀이 하고픈데 바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그래도 웬디양님 생각은 문득문득 하고 그래요.^^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기는 한데 약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하늘이 빙글거려서 좀더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웬디양님도 건강 과신하지 말고 평소에 잘 관리해야 되요!

개츠비 2008-08-19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아프셨군요. 깐따삐아님 ! 여름 내내 고생하셨네요. 근데 좋은 소식도 있는가보군요. 곁에 따뜻한 사람이 있다는건, 그래도 위안이죠. 계속 그러시면, 검진 꼭 해보시고 기운차리세요..위로와 축하를 동시에 ^^ 화이팅 하세용

깐따삐야 2008-08-19 22:1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잘 지내시죠? 저는 의젓하게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하고 아이처럼 징징거리면서 여름을 다 보냈어요.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면서 말이죠. 그래서 벌 받는 건가 싶기도 해요.
호전되지 않으면 다시 병원에 가보려구요. 님도 평소에 건강 잘 챙기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