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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에 어느새 찬 맛이 스민다. 가을이 묵묵히 깊어가는 사이 나도 묵묵한 주부가 되었다. 연애할 땐 나날이 심란하기도 하더니 막상 결혼하고 보니 나날이 바빠 심란할 짬이 없다. 손에 익지 않은 살림과, 낯선 동거와, 불쑥 다가온 논문발표 등으로 나~안 분주하고도 단순한 일상을 꾸려갈 뿐이고.
‘사과’는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며칠 안 되어 그와 함께 본 영화다. 개봉 전부터 꼭 봐야겠다 싶어지는 영화들이 있는데 이 영화가 그랬다. 사실 이런(?) 영화는 둘이 함께 보고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둘이 함께 봐도 괜찮을까? 하는 양가감정을 품게 만들곤 한다. 얼마 전 ‘멋진 하루’를 참 좋게 보았고 이 영화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대를 품었던 것 같다. 이제 결혼을 했기 때문일까. 의외로 ‘사과’가 더 좋았다. 덕분에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보고나서 여운이 찰랑거릴 때 바로 리뷰를 썼다면 좋았을 텐데. 아, 주부란 참 고단도 하다.
오래된 연인, 현정(문소리 분)과 민석(이선균 분)은 여행 중에 민석의 일방적인 결별 선언으로 갑작스럽게 헤어진다. ‘나를 점점 잃어버리는 것 같다’는 민석의 고백은 ‘나를 점점 잃어가는 게 싫다’는 거부의 뜻 아니겠는가. 어느 정도 나를 버려야 비로소 채워지는 사랑과, 결코 버릴 수 없는 자아의 한 모서리 때문에 부딪쳐 본 적이 있는 아무개들이라면 그를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로 승천하지 못한 관념은 결별로 추락할 뿐. 모든 헤어짐이 그러하듯 현정은 많이 아파한다. 그런 그녀 주변을 맴돌던 상훈(김태우 분)은 꾸준한 구애로 현정의 마음을 얻고 그들은 별다른 장애 없이 결혼한다.
떨어져 지내는 것을 감수하고도 목표를 이루려는 상훈과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현정. 남자는 ‘미래’를 보고 여자는 ‘지금’도 소중하다. 대개는 ‘잘해보려고’ 한 일들이 ‘몰라주는 게’ 되어버리니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현정이 더 잘 사랑해 보려고 한 말이 “너 나 미워하잖아.”라는 상훈의 대꾸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렇듯 영화는 남녀 간의 생각 차로 인해 이들이 겪는 해프닝과 진실의 시간차 때문에 방해 받는 소통에 대해 가감 없이 보도한다. 연애와 결혼 속에서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아무도 나쁘지는 않다. 입장 차이만이 존재할 뿐. 그 시선이 참 공평하고 담백했다.
관객이 많지 않아 낯모르는 커플 몇 쌍이 오붓하게 봤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예상 밖의 반응을 들었다. 앞서 걷던 중년 부인이 남편을 향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영화라고 원 그지 같아서.”라고 불평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주보며 다소 당황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연령대에 따라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데에 동의했다. 십대라면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고, 목하 연애 중이거나 우리처럼 갓 결혼한 커플들이라면 꽤 흥미로울 것이며, 이미 그 세월을 넘어선 커플들은 주목할 만한 사건 하나 없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간만의 데이트를 망쳤다거나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도. 결별과 결혼의 시즌,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그들을 타깃으로 했는가 보다.
“난 결혼하고 나서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
“나는 참 사랑을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노력은 안 했던 것 같아.”
얼마나 흔해빠진 대사들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층 새로워진 눈빛의 문소리는 그 진부한 대사들로 내 마음을 툭툭 건드렸다. 그처럼 ‘사과’는 나와 당신을 포함한 아무개들의 거울 같은 영화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했으면. 고로, 이제 노력할 일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