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다시 주말이구나. 시간은 속사포 같고 쉬고 싶단 생각이 들 때 즈음 기막히게 찾아오는 주말. 신입생들끼리의 다툼이 잦아 더듬이를 곧추세운 채 일주일을 보냈고 드디어 실장과 부실장도 선출했다. G-드래곤의 실명을 잘못 말해서 실컷 망신을 당했고 당최 컨셉불명의 급식 메뉴에 대해 함께 흥분하기도 하며 알콩달콩한 시간들을 보냈다. 아이들 때문에 힘도 들고, 또 아이들 덕분에 웃기도 하는 그런 나날들이다.

  목청 하나만큼은 타고난 덕분에 목이 아프다가도 하루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지는데 병원을 다니는 동료 선생님을 보고 큰 마음 먹고 기가폰을 샀다. 당신 것도 하나 사라고 했더니 남편은 자기는 아직 괜찮단다. 수학을 가르치다 보니 남편도 목을 많이 쓰는 편인데 고3 교실은 잔소리를 안 해도 아이들이 척척 알아서 하기 때문에 오히려 중학교보다 편하단다. 그 점 참 부럽다. 나는 만발하는 질문들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들도 금방 자라겠지. 그나저나 막상 최신형의 기가폰을 사놓고는 사용을 거의 안 한다. 확실히 에너지는 절약되는데 나와 내 목소리가 인공적인 느낌이 들어 아이들과 나 사이에 불투명한 막이 끼는 것 같다.

  직장을 그만둔 Y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편지와 스카프를 보내왔다. 하늘색 편지지와 화사한 스카프 색상에서 봄을 보았다. Y의 존재와 Y의 삶은 가끔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는 좋아하는 소설책의 한 페이지 같다. 그녀는 소신껏 살고 있다. 소신껏 사는 척하기는 쉬워도 정말 소신껏 산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학교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존재한다. 그 안에서 이러저러한 잡음들에 갸웃거려질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나 스스로를 향해 상기시키는 것은 소신이다. 내 마음은 수천 평의 갈대밭이더라도 외면상으로는 항상 일관된 자세를 유지하는 것. 그리 되도록 노력하는 것. 요즘 나의 화두다. Y의 소설은 어느 문예지의 최종심에 올랐다. 더욱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며 그녀의 건필을 빈다.

  옆자리 선생님의 남편은 선생님의 생일 날, 혼자 여행을 떠나고 늦게 퇴근해서는 혼자 소주를 마신단다. 너무나 심상하게 말씀하셔서 선생님은 참 무던하신가 봐요, 라고 했지만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무던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으면 사흘 낮밤 안 재워가며 바가지를 긁을 텐데, 생각하면서도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겠다는 체념. 그 선생님도 왜 불만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불만해봤자 안 바뀌니 내버려두게 된 것이다. 묻어둘 뿐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상대가 가만히 있다고 해서 정말 괜찮은 게 아니란 걸 금방 알 텐데 말이다.

  직업이 주는 보람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에 오늘 어떤 아이가 그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보람을 느끼세요? 그럼. 언제요? 너희들이 수업시간에 활발히 참여하고 열심히 할 때지. 우리가 잘 못하면요? 잘하게끔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지. 그런데도 계속 못하면요? 아이는 마치 나를 시험해보려는 듯 집요하게 물었다. 잘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도와줘야지. 곤란할 땐 방송용어처럼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 최선이긴 한데 막상 과연 내가 그럴 수 있는가, 라고 자문하니 별로 자신이 없었다. 정작 두려운 것은, 역시 미움보다도 포기인가 보다. 무섭게 화를 내는 것보다 쉽게 돌아서는 것. 분노의 열기보다 체념의 냉기가 더 가혹하다.  

  남편과 나는 소소한 계획들을 세우고, 일상을 꾸려가고, 대수롭게 느껴졌던 것들이 점점 대수롭잖게 여겨지는 기이한 체험을 하면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틀어졌다가 화해하는, 화해랄 것도 없이 풀어지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고, 사랑한다는 말 보다는 밥 먹자, 밥 먹었어?, 밥 먹어야지, 란 말을 더 많이 하고 종종 친정에 가서 엄마한테 밥 얻어먹으며 더불어 생활지도를 받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맛난 밥은 누가 차려주는 밥이다. 그 중에서도 엄마가 차려주는 밥이다. 밥을 주며 잔소리를 하면 그것도 들을만 하다.ㅋ 그와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아직도 인생의 미숙아들이고, 서로 그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노력한다. 누군들 성질 없는가. 다 성질 있지만, 그래도 성질보단 미덕이라고, 한번 잘 살아보기 위해 오늘도 나 스스로를 다스린다.

  아, 이번 주말은 푹 쉬고, 영화 보고, 또 등등. 만끽만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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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3-15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주변에 소쩍새가 울지 않던가요. 이 페이퍼 속 깐따님의 분위기는 딱 그거에요~~

깐따삐야 2009-03-20 21:32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소쩍새 울음소리는 어릴적 고향에서 들어본 이후로는 못 들어본 것 같아요. 그나저나 대체 어느 부분이 소쩍새 분위기라는 것인지...?

Mephistopheles 2009-03-24 00:11   좋아요 0 | URL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울어 재끼는 새가 무슨 새게요..

깐따삐야 2009-03-25 16:08   좋아요 0 | URL
아항. ㅋㅋ ^^

레와 2009-03-1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한 삶이예요! 네에~ ^^

깐따삐야 2009-03-20 21:33   좋아요 0 | URL
학부모 면담 끝에는 에너지 고갈로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어째 지친다 싶으니 금요일이네요.ㅠ 부디 건강해야 할텐데 말이죠. 에휴.^^
 

  새학기가 시작되었고 원래 3학년을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덜컥, 1학년을 맡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들은 초등학교 7학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교복을 입은 폼이 엉성하고, 매사에 질문이 많으며, 눈빛이 참 맑다. 우리 반 아이들은 담임인 나를 닮은 건지 살짝 더 엉뚱한 것 같다. 아이들의 다채롭고 독창적인 언어들이 매일매일 교실을 한 가득 메운다.

  지난 2년 동안 교단을 떠나 있었던 것, 그리고 새 학교로 발령을 받은 것이 이렇듯 신선한 느낌을 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첫 발령을 받은 새내기 교사처럼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두근대고 설렌다. 목도 아프고 팔도 뻐근하고 쉬는 시간 십분은 너무 짧지만 기대와 열의에 찬 아이들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바짝 긴장이 된다.

  전에 근무했던 학교의 아이들이 학습의욕이 다소 부족한 대신 순박하고 정스러웠다면 새 학교의 아이들은 똘똘하고 깔끔한 반면 간혹 이기적인 아이들도 눈에 띈다. 특히 중3 여학생들의 포스란 상상 이상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도 넌 참 귀엽게 생겼구나, 넌 목소리도 예쁜데 발음까지 좋구나, 라고 말하면 해벌쭉 좋아하니 아이들은 결국 아이들이지 싶다.

  젊다(?)는 이유로 수업도 많고 업무량도 많은 편인데 아직은 초반이라 괜찮지만 건강관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늦게까지 자율학습 감독 하느라 남편도 고생인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침밥과 홍삼을 챙겨 먹이는 것. 요즘 들어 잘 먹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하고 있기에 그야말로 둘 다 열심히 먹고 있다. 그 날의 컨디션이나 업무량에 상관없이 항상 고른 질의 수업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은 비록 당연한 의무이긴 하나 쉽지만은 않다. 사정을 아는지 일과 중에 기관지에 좋은 녹즙이나 건강식품을 팔러 오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정말 요즘 같아선 아픈 것도 호사다.

  엊그제는 소매 단추가 떨어졌다고 오더니, 어제는 체육복을 잃어버렸다고 하고, 모레는 또 무슨 얘길 하려나. 초등학교 7학년과 보내는 나날들이 정신없이 바쁘고 한편 즐겁다. 신학기라 조금 피곤하지만 가정이든 학교든 내가 내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교사도 사람인데 평범한 사람 그 이상이 되어야 할 것처럼 무리한 요구들이 많은 가운데 힘 빠지게 하는 일들은 어디서나 벌어지지만 잡음이 소란할수록 본분에 충실하기로 한다. 특히 현장으로 복귀하면서 결심한 게 있다. 대학원에는 전국에서 모인 건강하고 의욕적인 선생님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로부터 받은 좋은 기운을 아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 많이 받는 요즘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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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3-0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깐따삐야님께 수업 듣고 싶어요. 살랑살랑 새학기의 설렘이 봄기운과 함께 느껴져요.

깐따삐야 2009-03-13 21:34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같은 여학생들이 많아요.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퍼지면 교실이 환해집니다.^^

hnine 2009-03-0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쁘고 한편 즐겁다'라는 말이 참 듣기도 놓은데요?
밥, 중요하죠. 저도 홍삼 열심히 주고 있는데 ^^ 홍삼이 잘 받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더라구요.

깐따삐야 2009-03-13 21:36   좋아요 0 | URL
몸은 힘들지만 아이들 덕분에 많이 웃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홍삼 참 좋아요. 꾸준히 먹으니까 하루 종일 기운도 나고 저한테는 잘 맞나 봐요.

Mephistopheles 2009-03-08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참...메차장님은 젠틀맨인것 같아요.란 한마디에도 헤벌래 하니까 결국은 나도 애군요.

깐따삐야 2009-03-13 21:37   좋아요 0 | URL
저도 인정! 메피님은 젠틀맨이시죠. 아마 입이 귀를 지나 옆통수에까지 걸리셨죠? ㅋㅋ

프레이야 2009-03-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매단추 떨어졌다고(^^) 오는 초등 7학년 남자아이들과 생활하게 되었군요.
바쁘고도 즐거운 하루하루 건강 잘 챙기시며 보내시길요.^^

깐따삐야 2009-03-13 21:39   좋아요 0 | URL
어제는 미술시간 준비물이라고 4B연필 깎아달라고 오더라구요. 깎아주긴 했는데 언제까지 이럴 건지.-_- 아직도 아이들이 초딩 때 습관을 못 버린 모양이에요.
잘 먹고 열심히 움직이며 지냅니다. 아자아자.^^

레와 2009-03-09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네!!
밥도 많이 먹고, 잠도 잘자고..
모쪼록 아자아자예요!! 깐따삐야님~ ^^*


남자중학교 1학년, 한달정도 교생 실습을 나갔던 적이있었는데.. 힛~ ^^;;

깐따삐야 2009-03-13 21:42   좋아요 0 | URL
밥은 많이 먹는데 잠은 잘 안 온답니다. 한번 푹 자봤으면 좋겠어요.ㅠ

오홋~ 레와님도 교생실습 경험이 있으시군요. 어땠나요? 제가 보기에 중1 남자아이들은 어린이도, 청소년도 아닌 개구쟁이들이죠. 개구쟁이!

레와 2009-03-16 14:20   좋아요 0 | URL
개구쟁이!! 맞아요!! ㅋ
밤톨 같은 개구쟁이들..^^;


러시아어를 영어 시간에 한시간 실습했는데,
반짝반짝 했던 눈빛들과 우렁찬 목소리들..
잊지 못하고 있어요.ㅋ

깐따삐야 2009-03-20 21:38   좋아요 0 | URL
저를 누나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_-

레와님 러시아어를 하세요? 우왓! 무슨무슨 -코프 -스키로 끝나던 복잡한 러시아 이름들이 생각나네요.^^ 레와님을 뵌 적은 없지만 레와님이 선생님을 하셨으면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되셨을 것 같아요.
 

#   

코멘트 부탁해.
Y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고 소설 한 편을 파일로 보내왔다.
그곳에 있기엔 네 재능이 아까워. 너무 소모적이야.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한편 걱정이다.
그간 밥벌이를 위해 밥은 먹었을 텐데 그나마 안 먹고 지낼까봐.
1박 2일 멤버들은 아침밥을 먹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더라.
잘 먹어야 잘 쓸 수 있다면 Y는 밥을 열심히 먹게 될까. 

S씨는 남편의 오랜 친구다.
지난번에 식사 초대를 했더니 이번에 교외로 나가 밥을 샀다.
사람이 살갑지는 않은데 겸손하고 진중하다.
이상하게 그를 만날 때면 Y가 떠오른다.
둘 다 싱글이고 좋은 사람들인데 엮어주고픈 마음은 안 생긴다.
두 사람 모두 자기세계가 완고해서 틈이 잘 안 보인다.
이 부분은 남편도 동의한다.
그런데도 S씨를 만날 때면 우리는 늘 Y의 이야기를 한다.   

#

엊그제는 새 학교에 인사.
젊은 교사들이 으레 그러하듯 남편은 고3을, 나는 중3을 맡게 되었다.
서로 염려 섞인 조언을 하다가는 결국 너나 잘하라는 감정 섞인 결론.
이렇듯 마음 놓고 유치해질 수 있는 것도 우리끼리만 가능한 일.
조만간 학교로 돌아가면 모쪼록 유익해져야 한다.

요즘 하고 있는 생각 한 가지.
저마다 살아가는 모양새가 다 다르고 늦고 빠른 건 문제가 아닌데,
쉽게 도통해버린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좀 역겹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일평생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부지런히 노동한 노인의 아집은 이해하지만,
젊은 개인주의자가 취하는 초속의 포즈란 어쩐지 컨닝 같다.
그것이 무결점의 보편적 진실일지언정,
사흘도 못 가 힘을 못 쓸 훔쳐 쓴 정답인 것이다.  

#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2월도 한 주 남았다.
곧 엄마 생신인데 후리지아를 한 다발 사야겠다.
예전엔 다른 방식으로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렇듯 소소한 호사를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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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9-02-23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지기 분과 함께 모두 진학을 목전에 둔 학년의 담임쌤이라서 할일이 많으시겠군요. 그래도 유사한 정보를 부부가 공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좋겠네염. 3월의 새날이 오고 있어염. 희망을 생각해 보려구 합니다. ^*^

깐따삐야 2009-02-24 13:22   좋아요 0 | URL
네. 담뿍 재충전 했으니 열심히 해야죠. 3월, 새날, 희망, 참 기분 좋은 말들입니다. 전호인님과 함께 아자아자.^^

레와 2009-02-2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이 오기전에 노오란 원피스를 사고 싶어요..

깐따삐야 2009-02-24 13:25   좋아요 0 | URL
근데요, 레와님. 쫌만 기다렸다 사세요. 아직 세일 기간이 아니라서.ㅋ
농담이구요. 기대합니다. 노오란 원피스를 입은 레와님의 싱그런 모습.^^

무해한모리군 2009-02-2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학년을 시작하시니 분주해지시겠네요.
전 어머니께 꽃을 딱 한번 사드렸는데, 눈물까지 글썽이시며 너무 좋아하셔서 죄송하더라는.. 그 놈으 꽃이 뭐라고..

깐따삐야 2009-02-24 13:30   좋아요 0 | URL
봄방학도 얼마 안 남았고 곧 분주한 3월이 시작됩니다. 두근두근~
글게요. 그노무 꽃이 뭐라고.-_- 저는 꽃을 사러 갔다가 유리 화분을 샀어요. 물 먹은 듯 생생한 푸른색이 무척 곱더라구요. 엄마도 좋아하셨습니다.^^
 
2009년 2월 러브테마 내맘대로 좋은 책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소녀 시절,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나를 사로잡아버린 소설. 언젠가 김혜수, 손창민 주연의 TV문학관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범벅이 된 혼란상태에서 자기를 건져 내야 한다고 어두운 강물을 바라보며 늘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몸을 내맡길 수 없는 것이 나의 입장이고 또 그 마음 가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분열된 생각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사춘기의 풋사랑이 혼돈인 까닭은 ‘미지’이기 때문이다. 미지로 향하는 자기분열 속에서 한층 촘촘해지는 나이테. 
 

 

  

 

앙드레 지드의『좁은 문』과 더불어 플라토닉 러브의 정수를 보여주는 소설. 평생 누워 지낼 수밖에 없는 소녀를 사랑하게 된 한 남자의 외침. 너의 오빠라도 좋고 너의 아버지라도 좋다. 아니 너를 위해 세상의 무엇이라도 되고 싶다. 나의 것이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너의 것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종교적 사랑. 사랑으로 아플 때, 욕심을 버려야 할 때, 참선하듯 떠올렸던 소설.

 

 

 

                                         

윤대녕의 작품들은 방황하던 내 젊음의 한때와 맞닿아 있다. 나는 떠날 용기를 내는 대신 그의 책을 집어 들곤 했다. 그의 첫 장편인『달의 지평선 1·2』는 알듯 말듯 참신한 은유로 가득한 연애소설이다. 사막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아이스크림 같은 여자. 어르고 찌르기를 반복하는 선문답 같은 대화. Ever After를 우아하게 비껴감으로써 오롯한 미적 성취를 이루는 연애. 사랑의 빛과 이면의 그림자를 동시에 그려 보이는, 불안했던 내 젊음의 기념비적 소설이다. 
 

  

 

 

젊은이들은, 경험을 했다는 건 하나의 패배라는 것을, 모든 걸 다 잃고 나서야 겨우 뭔가 좀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사회가 갈라놓은 사람들을 고독이 서로 결합시켜 주는 것이다. 인식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으나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절제력은 기르지 못했을 무렵 카뮈의 문장들을 빌려 내가 하고픈 말을 해야 했다. 처음엔 나를 표현하려는 열망에 그의 글에 기대었지만 카뮈를 꾸준히 읽으면서 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를 알고 나서 나는 변했고,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믿는 건 오로지 카뮈 때문이다. 큰 일에 임해서는 자신의 원칙을 세워 그에 따를 것이요, 작은 일에는 자비심만으로 족하다. 이 문장처럼 살고 싶다.『안과 겉』의 세계관은 현재의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만약 다른 모든 것이 없어지더라도 그가 남아있다면, 나 역시 존재하는 거야. 그는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야. 이 괴이쩍은 로맨스를 읽으며 영원한 사랑을 꿈꿨다. 일찍이 소울 메이트였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에게 육체, 재산, 결혼으로 상징되는 물리적 세계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고, 캐서린은 곧 히스클리프이기에 그 외의 사람들은 들러리에 불과할 뿐 아무런 힘도 없다. 마침내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 황야에서 영혼으로 재회하는 두 사람. 당신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에요.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랑. 워더링 하이츠의 두 영혼이 오래도록 잔영으로 남아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러나 절대적인 사랑을 그리워했다. 

 

 

갓 구워낸 연어 한 점에 정종 한 잔. 또는 데친 두부에 따끈한 정종 한 잔을 떠올리게 하는 부드럽고 담백한 연애담. 아내를 잃고 적적한 선생님과 잃을 사람조차 없어 울적한 쓰키코의 우연한 재회. 뜨거워질 만큼 뜨거워져 시커먼 재로 남는 사랑이 아니라, 언제 불을 지폈는지도 모르는데 은근한 불씨가 오래오래 남아 두 사람을 따습게 밝혀주는 사랑. 뜨거움과 뜨거움이 만나는 게 아니라 외로움과 외로움이 마주쳐 서로를 알아보고 안아주는 것. 그런 사랑도 있고 혹은,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연민에서 시작되는 사랑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사랑의 정점이 연민은 아닐까 한다. 중년 혹은 노년에 이른 주위 어르신들을 보면 정으로 산다, 의리로 산다, 그리고 연민으로 산다는 말씀들을 종종 하신다. 나한테 미쳐서 결혼했다는 남편도 언젠가는 심상한 어투로 그런 말을 하게 될지 모르는 일. 박완서 할머니가 쓰신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책에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오래 산 부부들의 모습이 나온다. 인생의 늦가을 풍경으로 가득한 단편들을 읽으며, 짐승 같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면서 상대의 누추한 그늘까지 받아들이고 보듬을 수 있을 때, 감히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겸손해졌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  에밀리 디킨슨 -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가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리는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지.

 
That Love Is All There Is 

- Emily Dickinson -  


That Love is all there is,
Is all we know of love;
It is enough, the freight should be
Proportioned to the groove. 
 

가끔씩 이 시를 떠올린다.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지.  정말,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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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2-1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깐따삐야님. 마지막 시가 가슴을 때려요. (저 살짝 개인 미니홈피로 담아가요.)

깐따삐야 2009-02-17 13:34   좋아요 0 | URL
이 시가 제 가슴도 좀 때려요. 가끔 저 문장이 떠올라서 자학하고 그러기도.ㅠ (얼마든지요.^^)

Mephistopheles 2009-02-17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누가 유부녀라고 보겠어요. 첫사랑에 눈을 뜨는 소녀 깐따삐야님 같으니라구.

깐따삐야 2009-02-17 13:37   좋아요 0 | URL
메피님, 그래서 저는 힘들어요. 내 안에 소녀도 있고 마녀도 있고.ㅠ

Mephistopheles 2009-02-17 14:09   좋아요 0 | URL
에....뭐......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8050

이런 마녀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깐따삐야 2009-02-19 09:55   좋아요 0 | URL
오홋~ 미야자키 하야오네요? 봐야지.^^

레와 2009-02-17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없이 깐따삐야님 책들을 보관함에 담다가, 마지막 싯구에서 얼음!
이게 아닌데 말이죠..;

수줍은 고백을 하자면,
정리되지 않고 뒤죽박죽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복작복작
이 이야기하다 저 이야기로 빠지기 일수..
제 머릿속이 이러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깐따삐야님 글을 통해 싸라락 정리되는 경험을 종종 하고 있답니다.

이제 '땡'해주세요. 좀 움직이게..^^;

Mephistopheles 2009-02-17 14:58   좋아요 0 | URL
제가 살던 동네에선 '조각' 이였습니다.

레와 2009-02-17 15:09   좋아요 0 | URL
아, 정말요??

'얼음'하고선 '조각'???!!!! 오호홋~

일단 메피님이 풀어주셨으니, 레몬차 만들러 가야겠어요. ㅋ

깐따삐야 2009-02-19 09:57   좋아요 0 | URL
레와님께 땡~ 해드렸어야 하는데... 메피님이 해주셨네.^^
제 머릿속도 다르지 않아요. 더 혼잡스러워지지 않고 정리가 되신다니 저로선 다행이고 고맙네요!

다락방 2009-02-17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추천하고!

아아, 젊은 느티나무!
오빠. 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것이다! 제가 무척 무척 무척 무척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우리에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미국엘 가든지. 으윽. 최고예요, 최고.

그리고 독일인의 사랑은 보관함에 넣고 갑니다.

레와 2009-02-17 15:10   좋아요 0 | URL
플라토닉 러븐데요?! 다락방~

난 에로틱 러브가 좋던데..ㅎㅎㅎㅎㅎ

다락방 2009-02-17 15:35   좋아요 0 | URL
음...그럼 보관함에서 빼까요? ( '')

레와 2009-02-17 15:4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 );;;

깐따삐야 2009-02-19 10:0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아시는군요! 사춘기때 이 단편을 읽고 tv문학관으로도 보았는데 참 청순한 작품이란 인상을 받았더랬죠. 그 무렵 <상록수>, <무정> 등 근대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이번에 떠오른 <젊은 느티나무>를 포함해서 모두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지금의 느낌은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요. 한편으론 너무 다르면 어쩌지 걱정되는 건 왜일까요.
<독일인의 사랑>은 추천합니다. 비록 고루하지만 기품 있는 로맨스에요.

레와님- 에로틱 러브가 좋으시다면 제가 일단 책장을 좀 뒤져보고...ㅋㅋ

노이에자이트 2009-02-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재 씨 젊었을 때 사진 보면 한 미모했지요.젊은 느티나무는 한때 젊은이들(지금은 장년 이상이 되었겠군요)에게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고 합니다.그런데 옛날 소설인데도 굉장히 부유한 집안이 나오죠?

깐따삐야 2009-02-19 10:13   좋아요 0 | URL
그렇죠. 미인이었고 문체도 다정하고 감각적이고.^^ 당시 이화여전에 입학했을 정도면 작가 자신이 상당한 부유층 자제였을 거에요.

프레이야 2009-02-17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승 같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면서 상대의 누추한 그늘까지 보듬을 수 있을 때..
이 글귀에 붙들리네요. ^^ 갈등하고 고민하고 그러다 어떤 '끝'이 오긴 올까요.

깐따삐야 2009-02-19 10:27   좋아요 0 | URL
어른들이 결혼은 생활이야, 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간혹 떠올리곤 해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얼마든지 낭만적일 수 있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다분히 현실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갈등하고 고민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더 잘 사랑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돌아보며 미소지을 날도 오려나요.^^

마늘빵 2009-02-17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하나도 모르는 책들인데요. 다락방님이 올려주신 페이퍼와 함께 읽을 책들이 많아집니다. ^^

깐따삐야 2009-02-19 10:31   좋아요 0 | URL
옹?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아실 것 같은데. 아프님도 독서 편식이 심하시구나. 이 참에 제가 좋아하는 알베르 카뮈에 관심을 가져보심이 어떨지.^^

2009-02-19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0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mji 2009-02-19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벤트도 있었군요. 추릅~ ;; )
강신재 소설의 첫 문장은, 정말 강한 인상을 주었더랬죠. 그래서 한 시절, 이성을 만날 때 그에게서 맡을 수 있는 냄새에;; 민감해보고 싶어했던 적도 있었다는;; 소싯적 이야기입니다만.
윤대녕 소설도 좋아하는 저로서는, 아, 윤대녕! 하고 깊은 탄식을 하는 걸로...

깐따삐야 2009-02-20 17:40   좋아요 0 | URL
kimji님도 참여하세요. 어떤 리스트를 만드실까. 궁금하고 기대 되요!
저는 막 운동을 마친 오빠들의 땀냄새에 이끌렸던 적이...쿨럭;; 소싯적 이야깁니다만.^^
kimji님도 윤대녕 좋아하시죠. 어서 신작이 나왔음 좋겠는데 요즘 머하며 지내시나 궁금해하는 중이에요.

Alicia 2009-02-23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깐따님 사랑해요!
눈물 나올 것 같아요.. :)

그간 어학원다니느라 많이 바빠서 이런 글을 쓰셨는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폭풍의언덕,은 제 연애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소설이에요.
소설이 연애관을 움직이게 했으니 그 연애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윤대녕은 저도 좋아하는데 달의지평선은 아직 못읽어봤어요.
제비,미란,은어낚시통신...(상춘곡도 읽어봤어요:)
윤대녕은 사막같지만 또 바다같은 남자같아요.
윤대녕이 그리워 지난 여름 제주도로 훌쩍 떠났지만 결국 그 분을 만나지는 못했고...

그리고 까뮈는 아직 다 못읽어봤어요- 리스트에 찜해놓으려구요 ^^

깐따삐야 2009-02-24 13:43   좋아요 0 | URL
오호! 리스트가 알리샤님 맘에 들었군요. 기쁩니다.

에밀리 브론테의 고독한 상상력의 산물인 <폭풍의 언덕>만큼 기이한 로맨스도 드물 거에요. 알리샤님이 앞으론 부디 알콩달콩 유치한 연애를 하게 되기를.^^

윤대녕을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반가워요. '상춘곡'은 최고의 단편이죠. 향긋한 봄꽃 내음이 페이지 페이지마다 은근히 배어있는 명품 소설이에요. 윤대녕은 내면에 바다를 감춘 사막 같은 남자? 그나저나 알리샤님 멋지군요. 윤대녕이 그리워 제주도로 훌쩍, 이라니. 우-와-♡

알리샤님은 카뮈도 좋아하게 될거에요. 분명히.^^
 


 

  과거 동아리 활동 무렵 ‘시계’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외할머니와 외사촌 동생, 그러니까 지금의 S옹주가 함께 노는 모습을 보면서 쓴 시였다. 일곱 살 꼬마와 칠십대 노인은 종종 사소한 먹을 것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고 가끔은 S옹주가 더 어른스럽게 할머니에게 사물의 이모저모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물리적인 외양의 차이일 뿐 당시 두 사람의 시계는 같은 시각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총기가 넘쳤던 할머니도 세월이 흐르니 아이 같아졌고 할머니가 노쇠해지면 노쇠해질수록 S옹주는 총명하게 자라났다. 몇 년 전 외할머니는 돌아가셨고 S옹주는 그새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내 시를 본 선배들은 모티브가 좋다는 평을 하며 그러한 일상 속 관찰이 깊은 통찰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갓난아이로 태어나 기억과 오감을 잃은 채 죽어가는 인간의 삶이란 대개 비슷하다. 그렇듯 누구나 젊고 무지한 상태로 생을 출발하여 노쇠하고 반쯤 도통한 상태로 마감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육체 연령과 정신 연령이 반비례하는 이상한 남자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주인공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분)은 병약한 노인의 육체로 태어나 근처 양로원에 버려진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통보를 듣고 양로원에서는 그저 일상일 뿐인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차례차례 목도한다. 삶을 알기 이전에 죽음부터 보았기 때문일까. 육체와 정신의 불균형에도 벤자민은 별다른 번민 없이 내내 담담하고 침착하다.

  다만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예고 없는 운명과 맞닥뜨렸을 때, 나와 연인의 시계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시간을 붙잡을 수 없는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벤자민에게 대처란 없었다. 그는 데이지(케이트 블랑쉐 분)와의 사랑을 피하지 않는다. 육체와 정신의 갭에도 불구하고 모르면 모르는 만큼, 알면 아는 만큼 본인의 현재 상태에 충실한 채로 그녀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각자 무르익은 젊음의 정각에 닿아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벤자민은 데이지와 딸의 안정된 삶을 위해 조용히 떠나는데...

  긴 러닝타임 동안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의 모습에 감탄하고, 몇 차례 허리가 아파 몸을 뒤척거리기도 하고, 케이트 블랑쉐가 브래드 피트보다 얼굴이 큰 것 같다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일곱 번 번개를 맞았다는 할아버지의 넋두리에 쿡쿡대기도 하면서, 이 겁나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생각을 많이 했다. 기대가 컸던 영화인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특별한 교훈은 모르겠고 그저 남들처럼, 세월 따라 늙어가는 것이 최선이구나 싶었더랬다. 나는 전부터 TV프로그램에 연령을 둔갑하여 출연하는 사람들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스무 살이면 스무 살다워야 하고 쉰이면 쉰다운 게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신은 시드는데 육체만 싱싱하면 무엇하고, 육체는 늙었는데 당최 철을 모르는 경우도 문제 아닌가. 그리고 인생을 대하는 벤자민의 자세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균형한 시간에 울상을 짓지도, 이별의 고통에 몸부림치지도 않는다. 그저 마주하는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담대함이 나지막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한편 영화를 보면서 곁에 앉은 남편이 벤자민 같아 보여 다소 언짢았다. 나는 요새 손가락이 쑤시고 눈가 주름도 걱정되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은데 남편은 점점 반질반질 팽팽해지는 피부에 하는 짓까지 점점 아이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십 년 쯤 지나면 남편은 때깔 좋은 벤자민이 되어 있고 나는 쭈그러진 데이지가 되어서 거꾸로 가는 시계를 원망해야 할 때가 오는 건 아닐까 염려스럽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런 고로, 이 영화를 보는 커플들은 매우 당연한 현실임에도 함께 골골대며 늙어가는 것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 또한 교훈이라면 교훈이려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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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2-1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남편과 보면 이런 감상이 되는군요..

깐따삐야 2009-02-16 21:10   좋아요 0 | URL
아하하 그렇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저의 한계입니다.ㅠ

프레이야 2009-02-17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담대한 벤자민,
그의 태도가 저도 맘에 들었어요.^^

깐따삐야 2009-02-19 10:37   좋아요 0 | URL
하도 차분하고 담대해서 세월이 흐를수록 늙어가는 것보다 젊어지는 것이 덜 슬픈 일일까? 생각했는데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존경스런 주인공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