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동아리 활동 무렵 ‘시계’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외할머니와 외사촌 동생, 그러니까 지금의 S옹주가 함께 노는 모습을 보면서 쓴 시였다. 일곱 살 꼬마와 칠십대 노인은 종종 사소한 먹을 것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하고 가끔은 S옹주가 더 어른스럽게 할머니에게 사물의 이모저모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물리적인 외양의 차이일 뿐 당시 두 사람의 시계는 같은 시각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총기가 넘쳤던 할머니도 세월이 흐르니 아이 같아졌고 할머니가 노쇠해지면 노쇠해질수록 S옹주는 총명하게 자라났다. 몇 년 전 외할머니는 돌아가셨고 S옹주는 그새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내 시를 본 선배들은 모티브가 좋다는 평을 하며 그러한 일상 속 관찰이 깊은 통찰로 나아가기를 바랐다.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갓난아이로 태어나 기억과 오감을 잃은 채 죽어가는 인간의 삶이란 대개 비슷하다. 그렇듯 누구나 젊고 무지한 상태로 생을 출발하여 노쇠하고 반쯤 도통한 상태로 마감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육체 연령과 정신 연령이 반비례하는 이상한 남자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주인공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 분)은 병약한 노인의 육체로 태어나 근처 양로원에 버려진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통보를 듣고 양로원에서는 그저 일상일 뿐인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차례차례 목도한다. 삶을 알기 이전에 죽음부터 보았기 때문일까. 육체와 정신의 불균형에도 벤자민은 별다른 번민 없이 내내 담담하고 침착하다.

  다만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예고 없는 운명과 맞닥뜨렸을 때, 나와 연인의 시계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시간을 붙잡을 수 없는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벤자민에게 대처란 없었다. 그는 데이지(케이트 블랑쉐 분)와의 사랑을 피하지 않는다. 육체와 정신의 갭에도 불구하고 모르면 모르는 만큼, 알면 아는 만큼 본인의 현재 상태에 충실한 채로 그녀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각자 무르익은 젊음의 정각에 닿아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벤자민은 데이지와 딸의 안정된 삶을 위해 조용히 떠나는데...

  긴 러닝타임 동안 점점 젊어지는 벤자민의 모습에 감탄하고, 몇 차례 허리가 아파 몸을 뒤척거리기도 하고, 케이트 블랑쉐가 브래드 피트보다 얼굴이 큰 것 같다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일곱 번 번개를 맞았다는 할아버지의 넋두리에 쿡쿡대기도 하면서, 이 겁나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생각을 많이 했다. 기대가 컸던 영화인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특별한 교훈은 모르겠고 그저 남들처럼, 세월 따라 늙어가는 것이 최선이구나 싶었더랬다. 나는 전부터 TV프로그램에 연령을 둔갑하여 출연하는 사람들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스무 살이면 스무 살다워야 하고 쉰이면 쉰다운 게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신은 시드는데 육체만 싱싱하면 무엇하고, 육체는 늙었는데 당최 철을 모르는 경우도 문제 아닌가. 그리고 인생을 대하는 벤자민의 자세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불균형한 시간에 울상을 짓지도, 이별의 고통에 몸부림치지도 않는다. 그저 마주하는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 담대함이 나지막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한편 영화를 보면서 곁에 앉은 남편이 벤자민 같아 보여 다소 언짢았다. 나는 요새 손가락이 쑤시고 눈가 주름도 걱정되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은데 남편은 점점 반질반질 팽팽해지는 피부에 하는 짓까지 점점 아이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십 년 쯤 지나면 남편은 때깔 좋은 벤자민이 되어 있고 나는 쭈그러진 데이지가 되어서 거꾸로 가는 시계를 원망해야 할 때가 오는 건 아닐까 염려스럽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런 고로, 이 영화를 보는 커플들은 매우 당연한 현실임에도 함께 골골대며 늙어가는 것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 또한 교훈이라면 교훈이려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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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2-1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남편과 보면 이런 감상이 되는군요..

깐따삐야 2009-02-16 21:10   좋아요 0 | URL
아하하 그렇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저의 한계입니다.ㅠ

프레이야 2009-02-17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담대한 벤자민,
그의 태도가 저도 맘에 들었어요.^^

깐따삐야 2009-02-19 10:37   좋아요 0 | URL
하도 차분하고 담대해서 세월이 흐를수록 늙어가는 것보다 젊어지는 것이 덜 슬픈 일일까? 생각했는데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존경스런 주인공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