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러브테마 내맘대로 좋은 책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소녀 시절,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나를 사로잡아버린 소설. 언젠가 김혜수, 손창민 주연의 TV문학관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범벅이 된 혼란상태에서 자기를 건져 내야 한다고 어두운 강물을 바라보며 늘 생각하는 것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몸을 내맡길 수 없는 것이 나의 입장이고 또 그 마음 가는 일 자체에 대해서도 분열된 생각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사춘기의 풋사랑이 혼돈인 까닭은 ‘미지’이기 때문이다. 미지로 향하는 자기분열 속에서 한층 촘촘해지는 나이테. 
 

 

  

 

앙드레 지드의『좁은 문』과 더불어 플라토닉 러브의 정수를 보여주는 소설. 평생 누워 지낼 수밖에 없는 소녀를 사랑하게 된 한 남자의 외침. 너의 오빠라도 좋고 너의 아버지라도 좋다. 아니 너를 위해 세상의 무엇이라도 되고 싶다. 나의 것이 되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너의 것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종교적 사랑. 사랑으로 아플 때, 욕심을 버려야 할 때, 참선하듯 떠올렸던 소설.

 

 

 

                                         

윤대녕의 작품들은 방황하던 내 젊음의 한때와 맞닿아 있다. 나는 떠날 용기를 내는 대신 그의 책을 집어 들곤 했다. 그의 첫 장편인『달의 지평선 1·2』는 알듯 말듯 참신한 은유로 가득한 연애소설이다. 사막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아이스크림 같은 여자. 어르고 찌르기를 반복하는 선문답 같은 대화. Ever After를 우아하게 비껴감으로써 오롯한 미적 성취를 이루는 연애. 사랑의 빛과 이면의 그림자를 동시에 그려 보이는, 불안했던 내 젊음의 기념비적 소설이다. 
 

  

 

 

젊은이들은, 경험을 했다는 건 하나의 패배라는 것을, 모든 걸 다 잃고 나서야 겨우 뭔가 좀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사회가 갈라놓은 사람들을 고독이 서로 결합시켜 주는 것이다. 인식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으나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절제력은 기르지 못했을 무렵 카뮈의 문장들을 빌려 내가 하고픈 말을 해야 했다. 처음엔 나를 표현하려는 열망에 그의 글에 기대었지만 카뮈를 꾸준히 읽으면서 나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를 알고 나서 나는 변했고,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믿는 건 오로지 카뮈 때문이다. 큰 일에 임해서는 자신의 원칙을 세워 그에 따를 것이요, 작은 일에는 자비심만으로 족하다. 이 문장처럼 살고 싶다.『안과 겉』의 세계관은 현재의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만약 다른 모든 것이 없어지더라도 그가 남아있다면, 나 역시 존재하는 거야. 그는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야. 이 괴이쩍은 로맨스를 읽으며 영원한 사랑을 꿈꿨다. 일찍이 소울 메이트였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에게 육체, 재산, 결혼으로 상징되는 물리적 세계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고, 캐서린은 곧 히스클리프이기에 그 외의 사람들은 들러리에 불과할 뿐 아무런 힘도 없다. 마침내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 황야에서 영혼으로 재회하는 두 사람. 당신은 나보다도 더 나 자신이에요.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랑. 워더링 하이츠의 두 영혼이 오래도록 잔영으로 남아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러나 절대적인 사랑을 그리워했다. 

 

 

갓 구워낸 연어 한 점에 정종 한 잔. 또는 데친 두부에 따끈한 정종 한 잔을 떠올리게 하는 부드럽고 담백한 연애담. 아내를 잃고 적적한 선생님과 잃을 사람조차 없어 울적한 쓰키코의 우연한 재회. 뜨거워질 만큼 뜨거워져 시커먼 재로 남는 사랑이 아니라, 언제 불을 지폈는지도 모르는데 은근한 불씨가 오래오래 남아 두 사람을 따습게 밝혀주는 사랑. 뜨거움과 뜨거움이 만나는 게 아니라 외로움과 외로움이 마주쳐 서로를 알아보고 안아주는 것. 그런 사랑도 있고 혹은,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연민에서 시작되는 사랑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사랑의 정점이 연민은 아닐까 한다. 중년 혹은 노년에 이른 주위 어르신들을 보면 정으로 산다, 의리로 산다, 그리고 연민으로 산다는 말씀들을 종종 하신다. 나한테 미쳐서 결혼했다는 남편도 언젠가는 심상한 어투로 그런 말을 하게 될지 모르는 일. 박완서 할머니가 쓰신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책에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오래 산 부부들의 모습이 나온다. 인생의 늦가을 풍경으로 가득한 단편들을 읽으며, 짐승 같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면서 상대의 누추한 그늘까지 받아들이고 보듬을 수 있을 때, 감히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문득 겸손해졌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  에밀리 디킨슨 -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가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리는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지.

 
That Love Is All There Is 

- Emily Dickinson -  


That Love is all there is,
Is all we know of love;
It is enough, the freight should be
Proportioned to the groove. 
 

가끔씩 이 시를 떠올린다.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하지.  정말,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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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2-1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깐따삐야님. 마지막 시가 가슴을 때려요. (저 살짝 개인 미니홈피로 담아가요.)

깐따삐야 2009-02-17 13:34   좋아요 0 | URL
이 시가 제 가슴도 좀 때려요. 가끔 저 문장이 떠올라서 자학하고 그러기도.ㅠ (얼마든지요.^^)

Mephistopheles 2009-02-17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누가 유부녀라고 보겠어요. 첫사랑에 눈을 뜨는 소녀 깐따삐야님 같으니라구.

깐따삐야 2009-02-17 13:37   좋아요 0 | URL
메피님, 그래서 저는 힘들어요. 내 안에 소녀도 있고 마녀도 있고.ㅠ

Mephistopheles 2009-02-17 14:09   좋아요 0 | URL
에....뭐......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8050

이런 마녀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깐따삐야 2009-02-19 09:55   좋아요 0 | URL
오홋~ 미야자키 하야오네요? 봐야지.^^

레와 2009-02-17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없이 깐따삐야님 책들을 보관함에 담다가, 마지막 싯구에서 얼음!
이게 아닌데 말이죠..;

수줍은 고백을 하자면,
정리되지 않고 뒤죽박죽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복작복작
이 이야기하다 저 이야기로 빠지기 일수..
제 머릿속이 이러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깐따삐야님 글을 통해 싸라락 정리되는 경험을 종종 하고 있답니다.

이제 '땡'해주세요. 좀 움직이게..^^;

Mephistopheles 2009-02-17 14:58   좋아요 0 | URL
제가 살던 동네에선 '조각' 이였습니다.

레와 2009-02-17 15:09   좋아요 0 | URL
아, 정말요??

'얼음'하고선 '조각'???!!!! 오호홋~

일단 메피님이 풀어주셨으니, 레몬차 만들러 가야겠어요. ㅋ

깐따삐야 2009-02-19 09:57   좋아요 0 | URL
레와님께 땡~ 해드렸어야 하는데... 메피님이 해주셨네.^^
제 머릿속도 다르지 않아요. 더 혼잡스러워지지 않고 정리가 되신다니 저로선 다행이고 고맙네요!

다락방 2009-02-17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추천하고!

아아, 젊은 느티나무!
오빠. 그는 내게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이었다.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것이다! 제가 무척 무척 무척 무척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우리에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미국엘 가든지. 으윽. 최고예요, 최고.

그리고 독일인의 사랑은 보관함에 넣고 갑니다.

레와 2009-02-17 15:10   좋아요 0 | URL
플라토닉 러븐데요?! 다락방~

난 에로틱 러브가 좋던데..ㅎㅎㅎㅎㅎ

다락방 2009-02-17 15:35   좋아요 0 | URL
음...그럼 보관함에서 빼까요? ( '')

레와 2009-02-17 15:4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 );;;

깐따삐야 2009-02-19 10:0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아시는군요! 사춘기때 이 단편을 읽고 tv문학관으로도 보았는데 참 청순한 작품이란 인상을 받았더랬죠. 그 무렵 <상록수>, <무정> 등 근대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이번에 떠오른 <젊은 느티나무>를 포함해서 모두 다시 읽고 싶어지네요. 지금의 느낌은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요. 한편으론 너무 다르면 어쩌지 걱정되는 건 왜일까요.
<독일인의 사랑>은 추천합니다. 비록 고루하지만 기품 있는 로맨스에요.

레와님- 에로틱 러브가 좋으시다면 제가 일단 책장을 좀 뒤져보고...ㅋㅋ

노이에자이트 2009-02-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재 씨 젊었을 때 사진 보면 한 미모했지요.젊은 느티나무는 한때 젊은이들(지금은 장년 이상이 되었겠군요)에게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고 합니다.그런데 옛날 소설인데도 굉장히 부유한 집안이 나오죠?

깐따삐야 2009-02-19 10:13   좋아요 0 | URL
그렇죠. 미인이었고 문체도 다정하고 감각적이고.^^ 당시 이화여전에 입학했을 정도면 작가 자신이 상당한 부유층 자제였을 거에요.

프레이야 2009-02-17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승 같은 시간들을 함께 보내면서 상대의 누추한 그늘까지 보듬을 수 있을 때..
이 글귀에 붙들리네요. ^^ 갈등하고 고민하고 그러다 어떤 '끝'이 오긴 올까요.

깐따삐야 2009-02-19 10:27   좋아요 0 | URL
어른들이 결혼은 생활이야, 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간혹 떠올리곤 해요. 사랑이라는 감정은 얼마든지 낭만적일 수 있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다분히 현실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갈등하고 고민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더 잘 사랑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돌아보며 미소지을 날도 오려나요.^^

마늘빵 2009-02-17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하나도 모르는 책들인데요. 다락방님이 올려주신 페이퍼와 함께 읽을 책들이 많아집니다. ^^

깐따삐야 2009-02-19 10:31   좋아요 0 | URL
옹?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아실 것 같은데. 아프님도 독서 편식이 심하시구나. 이 참에 제가 좋아하는 알베르 카뮈에 관심을 가져보심이 어떨지.^^

2009-02-19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0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mji 2009-02-19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벤트도 있었군요. 추릅~ ;; )
강신재 소설의 첫 문장은, 정말 강한 인상을 주었더랬죠. 그래서 한 시절, 이성을 만날 때 그에게서 맡을 수 있는 냄새에;; 민감해보고 싶어했던 적도 있었다는;; 소싯적 이야기입니다만.
윤대녕 소설도 좋아하는 저로서는, 아, 윤대녕! 하고 깊은 탄식을 하는 걸로...

깐따삐야 2009-02-20 17:40   좋아요 0 | URL
kimji님도 참여하세요. 어떤 리스트를 만드실까. 궁금하고 기대 되요!
저는 막 운동을 마친 오빠들의 땀냄새에 이끌렸던 적이...쿨럭;; 소싯적 이야깁니다만.^^
kimji님도 윤대녕 좋아하시죠. 어서 신작이 나왔음 좋겠는데 요즘 머하며 지내시나 궁금해하는 중이에요.

Alicia 2009-02-23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깐따님 사랑해요!
눈물 나올 것 같아요.. :)

그간 어학원다니느라 많이 바빠서 이런 글을 쓰셨는지도 모르고 있었네요^^
폭풍의언덕,은 제 연애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 소설이에요.
소설이 연애관을 움직이게 했으니 그 연애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윤대녕은 저도 좋아하는데 달의지평선은 아직 못읽어봤어요.
제비,미란,은어낚시통신...(상춘곡도 읽어봤어요:)
윤대녕은 사막같지만 또 바다같은 남자같아요.
윤대녕이 그리워 지난 여름 제주도로 훌쩍 떠났지만 결국 그 분을 만나지는 못했고...

그리고 까뮈는 아직 다 못읽어봤어요- 리스트에 찜해놓으려구요 ^^

깐따삐야 2009-02-24 13:43   좋아요 0 | URL
오호! 리스트가 알리샤님 맘에 들었군요. 기쁩니다.

에밀리 브론테의 고독한 상상력의 산물인 <폭풍의 언덕>만큼 기이한 로맨스도 드물 거에요. 알리샤님이 앞으론 부디 알콩달콩 유치한 연애를 하게 되기를.^^

윤대녕을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반가워요. '상춘곡'은 최고의 단편이죠. 향긋한 봄꽃 내음이 페이지 페이지마다 은근히 배어있는 명품 소설이에요. 윤대녕은 내면에 바다를 감춘 사막 같은 남자? 그나저나 알리샤님 멋지군요. 윤대녕이 그리워 제주도로 훌쩍, 이라니. 우-와-♡

알리샤님은 카뮈도 좋아하게 될거에요.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