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갔다가 오타루 살았죠
김민희 지음 / 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삿포로 갔다가 오타루 살았죠, 김민희


불시에 찾아오는 인연이 소중하고 귀한 도시

살아가듯 머무르는 ‘게으른 여행자’의 생활 여행





2014년 12월 31일.

삿포로행 비행기에 올랐다. 2014년 마무리는 홋카이도에서 보내겠다는 마음으로. 그곳에 미니언니, 미니짱이 있었다.

미니언니를 알게 된 건 시인과 함께하는 태백여행에서였다. 시인을 좋아하는 우리가 모였고 그곳에서 우리는 인연이 되었다. 시인의 사인이었던 인연이네요가 이루어졌던 역사적인 순간. 그렇게 언니는 진짜 여행자가 되었다. 언니를 보러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언니를 부추겼던 사람들 안에 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감사하게도 나의 이야기가 한 챕터 실렸다.(나 책에 나온 사람이야!!! 꺄~~)


오타루는 그런 곳이었다. 눈으로 뒤덮힌 하얀 세상. 러브레터의 바로 그 곳. 그리고 언니가 있는 곳. 언니가 핼퍼로 있던 모리노키에서 2014년의 마지막과 2015년의 시작을 보냈다. 언니가 특별하다고 했던 그 새해의 오치세를 나도 맛볼 수 있었다. 그 후로 하지 않았다고 하니 단 한번뿐인 그 새해가 나에게 두번다시 없을 특별한 새해였던 것이다. 물론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았지만 그래도 실망스럽지 않았다. 오타루비루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카운트다운을 했던 일, 새해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빌고 일본의 새해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일, 사람이 아무도 없던 테미야공원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걸었던 일, 나홀로 걷던 러브레터의 장소들, 지브리 오르골과 버터샌드, 덴구야마에서 보던 야경, 바다가 보이는 전철, 일본인뿐이던 징기즈칸 가게. 어느 하나 설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에겐 그저 3박 4일의 시간이었지만 그후로도 언니는 홋카이도사랑에 헤어나오지 못했다. 언니가 계속 여행자의 길을, 사랑하는 오타루를 더더 사랑하는 사이, 이렇게 멋진 책을 내게 되었다. 나는 언니가 부러워죽겠다. 언니는 2014년부터 느리지만 천천히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 저 멀리에 있다. 나는 그때의 추억만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 샘난다. 오타루에 다녀온 후 <윤희에게>를 보고 다시 오타루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책에도 나오듯이 <윤희에게>는 오타루를 사랑하게 되는 영화니까. 이 책을 읽고나면 <러브레터>와 <윤희에게>를 다시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나도 <윤희에게>에서 고모가 편지를 부치던 그 우체국에서 사랑하는 당신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면 결국엔 무언가를 이루게 된다. 여행하듯 살고, 살아가듯 여행하던 언니가, 게으른 여행자로 꾸준히 살아온 언니의 삶이 이 책에 있다. 혼자여도 좋은 여행, 그 곳 오타루에, 홋카이도에. 그렇게 사랑에 빠진 언니를 응원한다. 그리고 또다시 그 옆에 내가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언니에게도 2024년 10년 후이겠지만 나에게 2024년이 10년 후다. 우리가 모리노키에서 다시 마지막 밤을 보낼 수 있도록 나도 부지런히 준비해야겠다. 


그러니,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

응, 10년 후에!

p.81





일단 눈물부터 닦고 돈벌러 가야지.



그해 겨울, 눈이 미친 듯이 내리던 설국에서 만났음을 모두 기억하길. 또 언젠가 다시 그곳에 우리 파묻힐 수 있기를. p.50


'여행하듯 살아가고, 살아가듯 여행하자'라는 생각을 늘 해요. 꼭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우리 동네를 걷더라도 여행하는 마음으로 살고, 비행기를 타고 낯선 땅에 내리더라도, 동네 산책하듯 걸음걸음 여유롭게 내딛기를 바랍니다. p.100






사람은 이렇게 평생 배우는 것 같다. 책상에 앉아 배우는 것도 값지지만 살면서 누군가에게 스미듯 배우는 것들이 있다. 그 사람의 생각에서, 행동에서, 마루에서 느껴지는 마음들이 좋아, 어느덧 나도 따라 하게 되는 그런 것들. p.227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거란 예감.

하지만 그 모두의 방향은 좋은 쪽일 거라는 것.

잘했고, 잘할 것이고, 그래서 또한 잘될, 내 인생. p.2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을 건너기 소설의 첫 만남 30
천선란 지음, 리툰 그림 / 창비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을 건너기, 천선란


천선란(지은이)의 말

모두가 각자 품고 있는 그 노을을,

무사히 건너 어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천선란 작가의 북토크를 갔다가 팬이 되었다. 주변에서 천선란 작가를 좋아하고 적극 추천하는 일이 많았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SF라는 장르가 자꾸만 나를 머뭇거리게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익숙한 감정을 낯설게 표현 할 수 있어서 SF소설을 쓴다고 했다. 외로움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을 낯설게 그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읽게 된 책들은 다르게 다가왔다. 작가가 그리는 미래 속에도 우리의 현재가 있다. 작가가 그리는 인물들이 내 옆에 있다. 그들과 함께 느끼고 외로워하고 그리워하면서. 외로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가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다.


가장 외로웠던 나를 만나러 간다.


이 말에 이 책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우주비행사인 공효는 자아 안정 훈련을 위해 무의식으로 들어가 어린 날의 자신을 만나게 된다.


노을이 침범해 붉게 변한 집에 홀로 있는 것을, 어린 공효는 참 싫어했다. 아득히 멀어진 기억이지만 그 감정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p.09


노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어린 왕자가 노을을 마흔 네 번이나 보았던 일을 말해주었던 그 순간을 좋아한다. 노을을 보고 있으면 오롯이 혼자였고 아름다웠고 쓸쓸했으며 외로웠다. 공효에게도 노을이 지는 시간은 홀로 견뎌야 했던 외로운 시간이었다.

누구에게나 지난 날들을 떠올려보면 외롭고 힘들었던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도 있고, 숨겨두거나 회피하기도 했을 것이다. 공효역시 매달려 그것을 딛고 나아가는 길보다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 시간이 흐르고나면 나아지리란 생각으로. 그러나 어린 공효와 마주하고 공포의 대상이었던 타란튤라를 다시 마주하면서 깨닫게 된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았고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들은 매달리기보다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말하는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들이란, 기록이나 시험 통과가 아니라 엄마의 기일이 오면 찾아오는 무기력함, 예고도 없이 밀어닥치는 자기혐오, 앞으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 따위였다.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공효는 도망쳤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을 직면해야 하는지, 무엇을 감싸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천천히 짚기에는 삶이 너무 바빴다. 공효는 해야 할 게 많았다. 당장 눈앞의 것들을 잘 해 내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리라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알아서 사라질 거라고. 하지만 그런 믿음은 틀렸다.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로 죽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p.47


어린 날의 나는 온전히 행복했던 기억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어떤 기억은 상처이고 아픔이며 슬픔이다. 그 외로운 시간 속에 어린 날의 내가 웅크리고 있다. 나는 나를 좋아하지 못했다. 꾸준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내가 싫어서 또 그렇게 가장 먼저 나를 상처주는 사람이었다. 


“응. 나는 네가 보는 시선의 처음이고, 네가 느끼는 감정의 중심이고, 네가 선택하는 모든 순간의 기준이야. 내가 없으면 너는 안이 텅 빌 거야.” p.62


그 때의 나를 빼고는 내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아키나는 공효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건 외로운 자기 자신이야! 네가 달래주지 않은 너라고! p.30' 그러니 잘 만나고 오라고, 한 번은 꼭 끌어안아 주(p.59)라고, 말이다.


이십대 청춘도 아닌데 여전히 나는 나약하고 예민하며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좋아한다고, 그 어린 날의 나도 나라고, 괜찮다고 오래오래 안아주고 싶다. 울면서 소리치는 내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렇게 내가 먼저 나를 안아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시인선 132
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최현우







시인이 이십대를 지나는 동안 써왔던 시들을 모았다. 밝고 빛나는 미래가 기다리는 이십대의 청춘은 아닐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을 꽤 싫어하지만 시인의 이십대는 슬픔과 아픔에 젖어있었던 것 같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홀로 있거나, 통증이 동반되는 불행의 시간들, 깨진 컵 같과 같은 아픔이 있다. 가장 밝은 것은 두들겨맞아 부서지고 피멍 든 채 절뚝거렸으므로(p.87 와디 럼)

한밤중에 이불 속에서 튀어나오는 후회(p.108 추억과 추악), 아끼던 빛깔을 쏟아버렸으며(p.79 회색이 될까), 불행한 말들만 가득했던 나날들이었겠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견디고 버티다보면 지금에 와 있겠다. 두들겨 맞아 부서지고 피멍 든 채 절뚝거려도 당신에게 빛을 주려고 담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망가지지 않은 것들을 주고 싶었다는 시인의 말이 생각한다. 망가져도 괜찮다고. 망가지지 않은 것들을 주고 싶으 그 마음을 기억하고 있다고.

“반짝거리는 모든 세상에는 좋은 슬픔”이 있으므로
“날씨는 태어난 곳의 기억을 버리지 않”으므로
“아름다운 마음들이 여기 있겠습니다”
#출판사리뷰



불을 끈다
방구석에 앉아 무릎을 당겨 얼굴을 묻는다
혼자서,

p.17 #젓가락질가운데
통증을 빻아 만든 가루
시간에 불행을 섞어
한 웅큼 집어 바르고
모르는 거리에서 몸을 말리면

p.24 #회벽
모두 집어던졌지
그때 깨진 컵은 내 살을 기다리며
서랍 속에서 뿔이 되었던가
접은 신발 벗고
피 묻은 유리를 꺼내는 일
아픔은 꺼낼 수 없는 일
p.42 #컵
어디로도 가지 않았는데 돌아가고 싶은
돌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물기 없이 말라붙은 얼굴에는
영혼 대신 페인트를 바른
하나의 표정
하나의 표면
p.48 #목각인형

그러나 아직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둥글게 따라 눕
는다. 사람이 내 쪽으로 돌아누워 아무말 없이 손으로 귀
를 막아준다.
p.77 #kissingagrave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가장 아끼던 빛깔을 쏟아버렸다
p.79 #회색이될까

빛을 담았어
당신에게 주려고 했어
내게 가장 밝은 것은
두들겨맞아 부서지고
피멍 든 채 절뚝거렸으므로
그걸 담아 팔려고 했어
p.87 #와디럼

후회는
지키지 않은 약속의 잘려나간 부분들로 만들어지므로
한밤중의 이불 속에서 섬뜩하게 튀어나오고
p.108 #추억과추악

우리도 그럴 거야
돌려 말한다고 해서 돌려지지 않는 대화가 있다
내가 나에게 속삭이는 마음은 왜
불행한 말들만 있을까
p.114 #선한종말

슬프지 않다
울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주 잠깐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날 밤은 그림자가 그림자를
발밑에 두고 갔다

어떤 마지막보다 그 처음을 생각한다
생각이 난다는 건
자꾸 반송되는 주소 하나가 있다는 건
보낸 적이 없는데 돌아오는
이름과 글씨와 창백한 종이들
p.116 #아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문이 자자한,
읽은 사람마다 다들 추천을 아끼지 않는,

랑과 나의 사막

을 읽기 시작했다!

첫문장

_ 랑의 엔진이 꺼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큐큐퀴어단편선 2
조남주 외 지음 / 큐큐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최진영 외








너무 환하지 않게, 너무 그늘지지 않게

삶을 제자리로 데려가는 아홉 편의 퀴어 소설



새로운 가족의 탄생 

– 조남주 〈이혼의 요정〉



은경은 이혼을 했고 수연은 이혼을 하는 중이다. 수연의 남편은 은경이 수연을 부추겨 이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은경의 남편은 은경에 묻는다. 아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럽겠냐고. 



“두 사람이야 그렇다 치고 애들은? 애들은 이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럽겠어? 다인이는 그 여자를 뭐라고 생각해?" 

“엄마라고 생각해. 은경 엄마라고 부르고. 효림이는 나를 수연 엄마라고 불러. 걔들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 넷 지금 되게 좋은데? 왜 우리가 불행하고 혼란스럽고 우울할 거라고 넘겨짚고 그러지?"  p.35



우리가 정상가족이라 부르는 엄마, 아빠, 아이 둘의 4인가족. 그 안에서도 가장 약자는 아이와 여자. 엄마 둘과 아이 둘이 이혼을 하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사회가 생각하는 정상가족에서 벗어났겠지만 오히려 자유로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상실한 자들이 품은 단 하나의 문장 

– 김현 〈고스트 듀엣〉



석찬을 순식간에 철들게 한 것이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었다면 어땠을까. p.44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그래서 오늘도 무너졌구나.p.45



죽은 연인의 홀로그램과 함께 여행하는 남자의 이야기. 죽은 연인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애도하는 시간을 보낸다. 인생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어도, 무너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뒤돌아 과거로 갈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고 오늘을 살아간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작가의 말이 가장 마음아팠다. 사랑은 사랑일 뿐인데 투쟁으로 얻어내야 하고 숨겨야 하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작가의 말대로 누구나 사랑한다면 마음껏 손잡고 다니기를.



사랑이나 우정으로 이룩되는 공동체의 마음도 있을테지만, 투재이나 연대로 이룩되는 연인들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기 이전에 투쟁이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을, 존재를 존재라 말하기 전에 존재-한다, 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을, 결혼을 결혼이라 말하기 전에 동성 결혼이라고 밝혀 말해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이 여전히 문학의 몫임을, 믿고 싶다.

세상의 모든 짝꿍이 자유롭게 손잡을 수 있기를.

#작가의말_김현





내 안의 숨겨진 정원들 

– 윤이형 〈정원사들〉



데브는 달랐다. 내가 진짜 나를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연애가 싫은 게 아니었다. 그저 데브가 원하는 연애와 내 연애가 달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 다름이 그렇게 힘들었다면, 결국 그 애를 밀어내며 선언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내가 그토록 소중했다면, 지금 여전히 데브를 떠올리며 미련인지 뭔지 모를 이 텁텁한 감정에 젖어 있는 나는 무엇일까. p.85



저는 기뻤어요. 그 정원이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한 존재로서 온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로 갈 수도 없고, 유리를 깨거나 문을 만들어 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지만, 그냥 그게 있다는 게 좋았어요. 이렇게밖에 설명이 안 돼요. p.98



사람에게 인정이란 무엇일까. 왜 혼자서도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아도 가끔은 참을 수 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찔리고 피가 나고 붕대를 감을 일이 생길 걸 알면서도. p.100






데브야, 듣고 있니. 나는 여기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고 더 이상 죽고 싶지도 무리해서 행복해지고 싶지도 않아. 나는 그냥저냥 살아갈 거고 가끔은 오늘처럼 웃기고 유치한 영화를 찍을 거고 낯선 사람의 어깨에 기대 속을 털어놓았다가 후회하기도 하면서 조금씩 더 괜찮아질 거야. 너 없이. p.110




효주는 퀴어 퍼레이드에 갔다가 직장 동료인, 무려 팀장님을 만나게 된다. 애인과 헤어지고 지기 싫어서 퀴어 퍼레이드에 왔다는 효주와 결혼했지만 그래서 퀴어 퍼레이드에 오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래영. 둘은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마음을 풀어낸다. 래영이 말했던 정원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들 마음 속에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정원이 있다. 래영의 정원은 숨겨진 정원이 있었고 그 정원을 알게 되어 기뻤다고 말한다. 이제서야 자신을 한 존재로서 알아차렸다고. 정원에서 나오지 않고 정원을 꾸미고 그곳에 안주하며 살아갈 수도 있겠다.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래영은 정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으나 남편은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효주는 자신의 정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바라보기만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하고 그러면서 그런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까봐 숨기기도 한다.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나는 나일뿐이고 나 스스로 알아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인정받고 싶고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마음을, 정체성을 드러내고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환영받지 못하는, 어쩌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퀴어의 삶과 사랑이 틀린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님을, 보통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평범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덧붙여 윤이형의 작가의 글이 다시 세상에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다고 종종 말하지만 그럴 때조차 말없이 인정받고 싶어 하고,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 하고, 자신이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다고 느끼면 힘들어합니다. 그런 게 인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작가의말_윤이형




백 년 동안의 퀘스처닝 – 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



'나'는 스스로 아들이 아니라 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엄마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엄마는 그걸 이제 알았냐고 되묻는다. 인간이 태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주어진대로 살아가는 것이 맞는 건가. 세상이 멈췄다. 더 이상 인간이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세상. 멈춰버린 세상에서 '나'는 여러 젠더를 횡단하며 실험해보기로 한다. '나'는 자신의 몸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껄끄러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세상의 시간은 다시 흐르고 '나'는 이제 불면에서 벗어난다. 엔도의 죽음 이후로. 이제 '나'는 죽을 때 나 자신으로 죽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성전환이나 젠더에 대해 깊이있게 알지는 못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살아가고 싶어한다. '나'는 에디이거나 애슐리이거나, 둘다이거나 상관없이 그저 나 자신으로 살아가게 된 것처럼. 자신의 존재가치와 정체성, 온전한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뿐이다.



"엄마는 네가 원하는 삶으로 가봤으면 좋겠다. 잠도 잘 자고, 애인도 생기고, 애인이랑 싸우기도 하는 뭐 그런 삶 말이야." p.121



죽지 않는 세상에서 여전히 시스젠더로 남아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더 신기했다. 어떻게 아무런 의심 없이 주어진 성별대로만 살 수가 있지? 그게 진짜 자신이라는 것을 무엇을 확신하지? 내게 젠더는 하나의 나이테에 불과했다. p.130



만약 엔도가 인간이라면 어떤 젠더였으면 좋겠어?” “저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 되고 싶어요. 몸에 털이 나 있고 꼬리도 있는 육식동물, 이를테면 표범이나 재규어 같은 고양잇과 동물이요.” 인공지능이 인간이 되고 싶어 하리라는 것은 선입견에 불과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엉뚱한 소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p.137



“너는 유일하게 혼자다. 하나, 유일, 혼자.”

나를 증명하고 너를 설득하기 위해 – 한유주 <원을 구하기 위하여>



내 안에 자리 잡은 편견 – 최정화 <라디오를 좋아해?>

명주는 라디오 진행자로 라디오를 좋아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그런 명주에게 라디오작가 우희가 거슬린다. 우희는 라디오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때, 사이비 이단교회의 전단지를 나눠주던 우희를 발견하고 난 후였다. '명주는 그런 우희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라디오를 싫어한다고 믿으며 미워한다. 기어이 우희가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싸워오던 편견을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내가 우희를 바라보는 시선이 편견이라니. 편견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편견은 나와 나경이 열렬히 싸우던, 싸우고 있던, 싸워야 했던 대상이다. 편견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울었고 무너졌고 상처받았는가. 그런데 그게 내 안에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p.206



레즈비언인 명주는 편견으로 인해 울고 무너지고 상처받아놓고 자신이 편견어린 시선으로 우희를 바라봤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게다가 애인인 나경이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제대로 된 대화없이 자연스레 지내고 있다.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 시간이 덜 소중해지는 것은 아니다.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진짜로 해어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p.208



누군가를 미워하고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서로 다를 수 있고 또 같을 수 있다.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이 편견으로 바라보는 건 아닌지, 내 시야와 경험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편견의 늪에 빠진 건 아닌지 고민해봐야할 것이다.


“무언가를 버린다면 그건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겠지요”

이상한 나라의 꿀벌들 – 듀나 <바쁜 꿀벌들의 나라>


알콩달콩 중장년 레즈비언 로맨스 – 최진영 〈XOXO〉



나이와 성별을 떠나, 떠나긴 왜 떠나! 누구에게나 사랑은 있다. 사랑은 그냥 아름다운 것이다. 울고불고 싸우고 서운해하고 지지고 볶더라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키스하고 안아주고 사랑하는 두 여자의 이야기. 알콜중독이었던 내가 너를 만나 강해지고 싶었다. 나만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며, 너무 괴롭다고 엉엉 울어버리는 나의 모습이 어린 아이같았다. 마흔 네살의 나이에도 사랑앞에서는 울고 웃고 하는 것이다. 배우자를 동지처럼, 가족까리 그러는거 아니다라는 둥 농담섞인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웃으면 받아준다면 나도 웃고 의아하게 바라본다면 나도 의아하게 바라볼거라는 '나'의 말을 빌려 말한다. 이상한 건 이상하게 바라보는 당신이라고.



아주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와 심하게 울었다. 나는 친구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오랜 친구들이었지만, 우리는 같은 나라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나는 외부인이었다. 타인과의 소통을 단념해가면서도 서로를 믿고 사랑하고 손을 잡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다. 나는 정말 사랑과 믿음이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삶에서 그것들은 점점 희박해졌다. 이미 끝난 소풍인데, 다들 집으로 돌아갔는데, 나만 홀로 남아 보물이 적힌 쪽지를 찾아 헤매는 것도 같았다. p.255



그렇게 살면 답답하지 않아?

너를 걱정하고 싶었는데, 네게 화를 내고 말았다.

네가 나를 알잖아. 그거면 돼.

네 말과 너의 시선, 너의 낮은 목소리 모두 나를 아프게 했다.

어쨌든 가족은 중요하니까.

중요하다고 말하는 너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럼 거짓말하자. 혼자 사는 친구가 많이 아파서 당분간 네가 보살펴줘야 한다고 해. 사실 그건 거짓말도 아닌걸. 너와 같이 살 수 없어서 나는 많이 아프니까.

너는 쓸쓸하게 웃으며 조금만 더 두고 보자고 했다. 그즈음 내 마음에는 아주 작은 생채기가 났다. 금방 나아 흉터가 될 줄 알았는데, 낫지 않고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붉은 피와 흰 고름이 흘렀다. 가끔 나쁜 냄새를 풍겼다. 네가 그 냄새를 눈치챌까 봐 두려웠다. p.271



응. 네가 옆에 있으면 좋겠어. 아픈 나를 안아주면 좋겠어.

네가 와달라고 한다면 나는 가는 수밖에. 나는 너의 늙은 부모님을 생각했다.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친구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를 바라보는 내 눈빛을 감출 자신도 없었다. 너와 내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한다면 너의 부모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 그들이 듣는 '사랑'은 같은 사랑일까? 여자랑 여자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웃어버릴 것 같다.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의 사랑은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는 것.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을 때 그것은 거기 없었다. 너의 가족이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면 나도 미소 지을 것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면, 나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가요? 당신들도 이상합니다. p.280



사랑하는 마음은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그것이 있기에 나를 겨우 견디는 순간이 많다.

(...)

봄은 '아름답다'에서 '아름답지만은 않다'로 기울었다. 봄은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 봄과 꽃은 별 상관 없을 수도 있다. 봄이 있고 꽃이 있고, 내가 있고 당신이 있고, 우연히 눈 마주치고 그것이 거기 있음을 알고, 무언가는 무언가를 아름답다 생각할 수도 무심할 수도, 그것이 거기 있기에 아파할 수도, 보았기에 그리워할 수도 있다.

#작가의말_최진영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 정지돈 〈포스트 게이 아포칼립스〉



김현시인의 투쟁, 정지돈 작가의 패배자라는 단어가 씁쓸하다. 투쟁하고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멈추지 않고 맞서고 싸우고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렇게 얻어내야 하는 사랑. 그래서 정지돈의 글이 읽기는 어려웠지만 이 앤솔로지를 관통하는 문장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이해 없이,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p.3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