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 33 | 34 | 3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여기는 지상에 없는 방 한 칸. 나는 여기서 봉인된 채 녹
슬어가는 중입니다. 지리멸렬한 문장들이 구름처럼 떠돌다
목마름으로 내려옵니다. 내가 꿈꾸는 것은 매일 조금씩 지
워지는 것.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나를 덜어내는 일. 이
도시가, 사회가, 친구가, 애인이, 지하실 박스 속에 담겨 몇
년째 풀지 못해 썩어가는 책들이 나를 들춰보고 조금씩 떼
어먹기를, 그리하여 어느 여름날 선풍기 바람에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릴 수 있으면. 부치지 못한 편지들은 부치지 못한
대로 잠들고, 집 나가 돌아오지 못한 마음은 살아서 내 죽음
을 지켜보길. 그러니 하나도 새롭지 않은 절망이여 날마다
가지치고 어서 꽃 피워 융성해지시기를. 내가 지워진 자리,
내가 지워진 세상을 가만히 만져본다. 따뜻하구나. 거기 나
없이 융성한 저녁이여.

이승희, 부치지 못한 편지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하리글씨 #하리쓰다 #harigraphy


계간 <미네르바> 에 실린 부치지 못한 편지가 더 좋은 느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6-02-20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씨가 참 매력 있네요^^..
 


내 몸 어딘가에 산기슭처럼 무너진 집 한 채 있다면 그 옆
에 죽은 듯 늙어가는 나무 한 그루 있겠다. 내 몸 어딘가에 벼랑이 있어 나 자꾸만 뛰어내리고 싶어질 때, 밭고랑 같은 손가락을 잘라 어디에 심어둬야 하는지 모를 때, 늙은 나무 그늘에서 잠들고 싶어. 죽을 힘을 다해 꽃을 피우는 일은 못
된 짓이다. 죽을힘은 오직 죽는 일에만 온전히 쓰여져야 한
다. 당신도 모르고 하찮아지고, 할 수만 있다면 방바닥을 구
르는 어제의 머리카락으로, 구석으로만 살금살금 다니면
서 먼지처럼 쓸데없어지자고. 한없이 불량해지는 마음도 아
이쿠 무거워라 내려놓고, 내 몸 어디든 바람처럼 다녀가시
라고, 당신이 나를 절반만 안아주어도 그 절반의 그늘로 나 늙어가면 되는 거라고.

그러면 나 살 수 있을까?

내 몸 어딘가에 나 살고 있기나 한 걸까?

이승희, 제목을 입력하세요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 안에 있는데 경비아저씨가 다가오길래(아파트 경비는 무서워ㅜ주차강력스티커!!) 서둘러 내려서 수업시간이 좀 남아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아저씨는 어린이집이냐 어떤 수업이냐 물으시더니 해맑게 웃으며

˝화이팅!˝

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웃음이 참 따뜻하더라. 차에 다시 탔는데 똑똑 두드리신다.

˝혹시 공주교대예요? 우리 아들이 거기 다녀서.. 혹시나하고..˝

멋쩍게 웃으셨지만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빛나는 눈빛이 보이더라. 수고하시라고 밝게(최대한) 인사하고 문을 닫았다.

보통 경비아저씨들은(내가 본 일부) 추운 날 경비실에 앉아계시던데 홀로 열심히 청소하고 계셨다. 아저씨를 보는데 행복한 청소부가 생각나기도 하고...
모르는 대학생을 응원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아버지의 대한 책도 찾아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고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기고 있다고
내가 목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 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보았다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이승희


---------------------------------


최선을 다해 울었던 적이 언제였지...?
우는 것도 제대로 못한다.
이승희 시인은 나를 자꾸만 울게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2-17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물이 날 때 눈물 몇 방울이라도 흘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강직된 마음을 풀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요.

2016-02-17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지난 토요일에 19도까지 올라갔었는데
갑자기 비가 오더니 엄청 추워졌다.



봄이 오는가 싶으면
이렇게 아직이라며 눈이 내리니
역시 봄은 앙큼하다.



사무실에 갔더니 어떤 분이 하늘에서 쓰레기가 내린다 투덜거린다.
어쩜! 쓰레기라니... 
나도 운전을 하지만 그래도 난 눈이 좋다.
봄이 오길 바라지만 역시 눈 오는 겨울이 좋다.


그래도 내 인생은 그만 춥고 봄이 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31 | 32 | 33 | 34 | 3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