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지상에 없는 방 한 칸. 나는 여기서 봉인된 채 녹
슬어가는 중입니다. 지리멸렬한 문장들이 구름처럼 떠돌다
목마름으로 내려옵니다. 내가 꿈꾸는 것은 매일 조금씩 지
워지는 것.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나를 덜어내는 일. 이
도시가, 사회가, 친구가, 애인이, 지하실 박스 속에 담겨 몇
년째 풀지 못해 썩어가는 책들이 나를 들춰보고 조금씩 떼
어먹기를, 그리하여 어느 여름날 선풍기 바람에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릴 수 있으면. 부치지 못한 편지들은 부치지 못한
대로 잠들고, 집 나가 돌아오지 못한 마음은 살아서 내 죽음
을 지켜보길. 그러니 하나도 새롭지 않은 절망이여 날마다
가지치고 어서 꽃 피워 융성해지시기를. 내가 지워진 자리,
내가 지워진 세상을 가만히 만져본다. 따뜻하구나. 거기 나
없이 융성한 저녁이여.
이승희, 부치지 못한 편지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하리글씨 #하리쓰다 #harigraphy
계간 <미네르바> 에 실린 부치지 못한 편지가 더 좋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