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인간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오호... 재미있다. 물론 악당인 주인공이 좋지는 않다. 아무리 오락이라도 사람 죽이는 직업을 가진자에게 호감을 느끼기는 쉽지않다. 이는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다.

개인적으로 악당인 주인공이 한번 무참히 죽어버리는 것도 좋겠다 싶었는데 마지막 단편에서 보자니 그런 결말은 어려울 듯 하다. 두번째 단편에서는 라이벌 구도를 잡아 줄 캐릭터도 등장하는데 이후도 쭉 풍선인간이 활약하는 단편 쓸 생각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간비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6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루하다. 리비에르의 가치관에는 뭔가 모를 거부감이 있지만 그가 말했던: “인생에는 해결책이란 없어, 앞으로 나아가는 힘뿐. 그힘을 만들어낸다면 해결책은 따라온다네.”은 기억에 남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0-12-06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ㅜㅜ 가넷님 평을 볼껄
별 하나 남기고 가넷님 글 지금 봤어요 ㅜㅜ

가넷 2020-12-08 22:34   좋아요 0 | URL
너무 지겹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상황이 공감이 전혀 안가서....
 
인도철학과 불교 불교입문총서 20
권오민 지음 / 민족사 / 200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종교로 우뚝선 불교는 부모 없이 하늘에 뚝 떨어진 고아가 아니다. 불교는 인도라는 지리적 환경과 당대 사회정치문화적 영향 가운데서 기존의 전통에 대한 反전통의 입장에서 하나의 빛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그 둘(인도철학과 불교)은 현실이 고통스럽다는 인식과 윤회와 업사상등을 공유했다.그 안의 내용과 사용 되는 맥락은 다를지라도 불교는 당시 인도의 철학과 종교가 낳은 것이란건 분명하다.


반전통의 기치를 내건 붓다의 주장은 무엇이었던가? 세계는 경험된 것이며 자아란 그 같은 경험을 통해 드러나는 가설적 존재라는 것이다. 붓다는 성도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그 설법은 대기설법이라 하여 듣는 대중의 근기에 따라 달랐다. 이후 열반 이후에는 그러한 설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할 필요성이 생겼다. 아비달마불교가 번쇄한 이미지도 가지고 있으나(대승이 씌운 이미지 일 것이나.)왜 그런지는 이해가 되었다.  

아비달마불교로 불리는 여러 부파 중 당대 유력했던 일파인 설일체유부는 고정불면의 나는 없으나 세계를 구성하는 개개의 法은 실재한다는 아공법유를 주장하였고, 대승의 양측 중 하나인 중관학파는 더 밀고 나가 아공법공까지 주장하였다.

“깨끗함을 근거로 하지 않고서 더러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끗함을 근거로 더러움이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더러움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후 불교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얻어여하는지에 대해 당대 사회문화적 환경과 길항을 맺으며 만개해갔다.

  이 책은 그러한 과정에 생겨난 다양한 불교들을 만족스럽게 전달하고 있다. 불교 내에서도 여러 다른 전통들이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자력을 강조한다. 이 책에 따르면 정토마저 자력적인 정진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그런 점이 타 종교에 비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이렇게 불교의 흐름을 일별하고 나니 선불교란 것이 얼마나 불교내 의 여러전통내에서도 외따로 있는 것인지. 선이란 것이. 파격의 연속이나 그 파격은 일견으로는 흉내낼 수 있는 것이라 사기꾼도 더 쉽사리 존재할 수 있는 듯 하다.  선문답한다는 이야기가 일상에서는 그리 좋은 말만은 아니지 않았던가. 

 배불리 국밥 한 그릇 먹은 것처럼, 이 책을 읽고나니 참으로 든든한 느낌이다. 아주 초기의 입문자들이 읽을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누군가 입문서를 달라하면 개 중 들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쿄대학 불교학과 - 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 공부
정상교 지음 / 동아시아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처음 책이 출간되자마자 구입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이전부터 불교에 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그 때는 다소 관심이 떨어진 상태기는 하였으나 출간된 불서를 한, 두권씩 구입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인연이 되었다.  그리고 작년 말에 있었던 1차 도서 대정리 과정에서 살아남기도 하였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는데, 아쉽게도 재미있을랑 말랑 이라는 허무한 결과가...

 

 책은 물론 저자의 불교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 과정부터 중간에 도쿄대학에 진학하여 본격적으로 불교학을 하게 되는 과정과, 출가한 사촌형님의 이야기, 그리고 중간에 불교와 관련된 오해에 대한 이야기와 간간히 등장하는 학술사적인 부분까지 언급한다. 이렇게 되면 이게 어떤 성격의 책인가 긴가민가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 다섯개가 있다가 두개까지 줄어버렸다.

 

 그래도, 저자의 이런저런 수기들이 재미 나기는 했다. 조금 더 책에 대한 컨셉을 명확히 했더라면 더 재미있거나, 유익하거나 둘 다 이거나 했을텐데 싶다. 그래도 이런 형태라서 그런지 결다리 정도는 얻을 것도 있었고. 

 

 특히, 대승불교에 대한 기원의 이야기. 아직 정확한 정설은 없다지만 그에 대한 학설사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첫번째 가설은 재가자-불탑신앙에서 비롯하였다는 것으로, 도쿄대학 인도철학-불교학과의 히라카와 아키라 교수가 1968년경에 주장 했다. 내용의 요지는  재가자들이 당시 출가자들이 재가자들과 떨어진 사원에서 번쇄한 이론에만 집착되었으며, 재가자 가운데서도 출가자를 능가하는 수행능력과 지식을 갖춘 이들이 등장하자 붓다의 사리를 보관한 불탑이라는 특정 공간을 중심으로 '대승'운동을 전개했고 '경전'을 창작하여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해 나감으로서 대승불교와 그들만의 경전이 탄생했다는 것 이었다. 

 

  이 후 70년대를 지나 그레고리 쇼펜이라는 학자가 고고학적인 고찰을 통하여 첫 번째 가설이 맞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 초기 대승 불교 문헌에 '대승'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고도 수세기가 흐른 기원후 5~6세기가 되어서야 고대 인도의 비문에서 그 단어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첫번째 가설과는 반대로 대승불교라는 조직이 대 중으로 부터 폭넓은 지지가 미약했다고 보여주는 근거라 하였다. 거기다 구법을 위하여 서역으로 도달했던 여행기에서 소수의 대승이  소승과 같이 한 사원에서 기거했다는 기록을 보면 재가자가 기원론은 조금 정설에서는 멀어지는게 맞는 듯 하다.

 

 그리고, 불교의 동진에 중요한 역할이 된 것은 중앙아시아의 나라와 사람들이었다는 점도 포인트로 삼을만 했다. 알고 있었던 것의 바른 교정이나 다른 측면을 아는 것도 큰 깨달음이나 실용적인 변화를 주는게 아니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의에 의하는 한 그것이 어떠한 세계이든 세계의 실상은 공-가-중이므로 이 같이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다. '공'을 떠나 '가'와 '중'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가'와 '중' 또한 그러하다. 앞서 말하였듯이 3제는 하나의 실상을 세가지 마음에 이미 세 측면이 갖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차별의 현실은 본질적으로 공으로서 무차별[不二, 즉 中]이지만, 이 삼자는 혼연의 일체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흔히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완정한 이상적 형태로 여긴다. 이 때 일심동체란 어떠한 경지의 세계를 말함인가?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는 각기 독린된 고정불변의 실체로서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을 갖는 것인가?..... 즉 남편과 아내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님[空]은 영원한 진실이지만 그것은 현실의 차별[假]을 떠나 수립되는 진실이 아니다. 부부 일심동체라고 함은 아마도 둘이 아니면서 둘이며, 둘이면서 둘이 아닌 상태[中]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실로 말을 능숙하게 타는 이를 말과 혼연일체가 되어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자는 어떤 자인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은 말을 부리는 자이며, 말은 이에 따라 달리는 동물이라는 주객분별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空觀]. 그렇다고 이것이 말타기를 그만두었다는 말은 아니다. 주객분별의 생각을 버리고 말과 하나가 되었을 때 바야흐로 기수와 말은 자유자재로 활동한다. 말은 바르게 달리고기 수는 교모하게 몬다[假觀]. 이때 주객분별을 버렸으므로 말과 기수는 둘이 아니지만 각기 서로의 활동을 다하기 때문에 둘이다[空假相卽의 中觀] (p.360)



 아비달마논사들의 입장은 자아는 없으나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구성요소[法]는 실재한다는 아공법유를, 대승은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는 다만 가설적 상태일뿐이라는 아공법공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의 차이를 종합하려는 것이  천태 지의대사였다. 위의 인용한 것은 지금 읽고 있는 11장 천태의 내용이다.


 누군가는 대승이 부파불교(아비달마)가 오염시킨 불교를 다시 근본불교로 되둘렸다고 판단하며 초기경전으로 대승경전을 읽는 시도를 하고 있다. 조만간 읽어보겠지만 언뜻 이해는 되지 않는다. 아비달마가 그냥 설명만 듣는 것으로도 너무 복잡하다는 건 알지만 대승의 중관과 유식도 그에 못지 않다. 양극단을 배제하는 것이[不二] 곧 중[中]라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 또한 극단이 아닌가 싶기도. 


무아,윤희,업을 설명하고자 하는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 같다.  


개인적으로 처음 접했던 초기불교의 소박함이 더 좋으며, 대승이 내놓은 이야기 보다는 아비달마가 전반적으로 맞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견해가 생겼다.  단순히 입문서를 보고 생긴 견해이므로 언제라도 수정이 될 가능성은 다분하지만. 


쉬는 주말이라 어제까지 '2부 인도불교'편까지만 읽고 챙겨둔 다른 소설책을 잠사 읽으려고 했는데 계속 잡힌다. 11장만 마무리 하고 보고 싶은 소설을 집었다가 다음주에 이 책은 일독을 마치면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