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진인 내조 연구 경인한국학연구총서 122
박정민 지음 / 경인문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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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구입한게 2015년도 즈음으로 역사(연구)서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을 적이다.  그래서 어쩌다가 보니 구입을 하게 되었던 책이 바로 이 책인데, 묵혀두다가 이제서야 읽었다.  손승철 교수의 한일관계사 연구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것에 비해서는 시큰둥 했던 것 같다.  아마 그 이유는 본서에서 저자가 연구를 시작하며 들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명확해 졌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비교적 적었던 이유는 이 책의 주제의 관계사의 하나의 주체(??)였던 여진인이 지금 현재의 국가를 이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각설하고,  책은 제목과 같이 여진인의 내조 현황과 그에 대한 각종 규정과 제도 추이등을 살피면서 그 의미를 살피는 것이 핵심내용으로 연구자가 아닌 일반 독자로서 좀 지루한 면이 있다.  책에서 여진인의 내조를 받는 것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그들의 경제적인 요구를 충족시켜주어 북쪽의 변방의 침입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아마 여진관계사와는 달리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이점이 가장 중요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여진인들을 번호로 삼아 북방을 든든하게 하는 것(다른 여진인 부족의 침입을 미리 알리기도 하는 등 조선의 울타리 역할을 하였다.).    또 하나는 조선중심의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것.  그리고 이것을 활용하여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던 점도 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왕위계승에 문제가 있었던 세조의 경우에 해당된다.  그는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통성이나 유교 윤리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그러기에 세종대 규정된 바가 있었으나 여진인의 내조를 많이 받고자 했다. 이는 자신의 덕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저자가 언급한 바는 없지만 태종대에 태종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진인들은 주로 1,2월 혹은 12월 등 농번기를 피하고 국왕의 정조하례에 참석하고자 왔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국가에서 중요한 의식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의식에  이해도가 낮은 면이 있어 어떤 평을 해야되는 건지 모르겠다.   여튼 이후 여러 왕들이 그때 당시의 사정에 따라 내조 횟수를 조정하기도 하고 하는 등 나름 탄력적으로 운영되다가 선조대에 이르서는 임진전쟁으로 전 지역의 피폐화와 재정부족에 의하여 결과적으로는 여진인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누르하치의 등장은 그 관계를 종식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그리고 이시기에 대명의리론등의 사대의식이 강화가 되었던 점도 한 몫했다. 대명사대를 제일 원칙으로 삼은 자들은 명 중심의 국제질서의 번속국으로 남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  누르하치 개인의 카리스마이겠지만  전쟁을 치루고 난뒤에 전쟁 피로도로 인하여 명과 조선 사이에 생긴 힘의 공백이 누르하치 세력이 크는데 영향이 컸다고 평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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