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 교린관계의 허와 실 경인한일관계 연구총서 5
손승철 지음 / 경인문화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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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적으로 이 책을 골랐던 이유는 한일관계의 폭력적인 근대적 관계로의 변환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서 선택한 것 이였다. 기본적으로 폭력적인 근대적 관계로의 전환, 그리고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는 앞선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를 모르고서는 정확한 이해가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 하에서였다. 앞서 말하자면 나름 얻을 건 있었지만 재미는 그다지 없었다. 저자의 글은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써 낸 것은 아니더라는 말이다. 연구서에서야 뭐 그런걸 요할 수 있겠냐만, 노태돈 교수나 노중국 교수의 글은 어려움에도 흥미롭게 읽힌다는 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었다. 물론 전공한 시대사가 다르긴 하지만.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 책은 조일관계를 중화적 교린체제와 탈중화적 교린체제로 크게 나누고 있으며, 조금 더 나누어서 조선 초기 중화적 교린체제가 확립되는 시기와, 임란 직후 중화적 교린체제로의 부활, 이후 명과 새로이 떠오르는 세력인 후금 사이에서 오는 혼란함에 대비하기 위한 탈중화적 교린체제의 성립, 차후에 일본의 막부의 종말과 메이지정부의 일방적인 전통적인 외교방식의 거부와 함께 왜관을 침입하면서 교린체제 종말로 나누고 있다.

 

 

당시 조선에게 있어서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안은 왜구의 문제였다. 고려 말 (특히 우왕 때는 왜구의 침입이 엄청 심했다고 한다.)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국운을 다하기도 했던 바, 새로 건국을 선포한 조선으로서는 이 사안은 분명히 해결해야지만 정당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실질적으로 입는 피해를 막아야지만 제대론 나라가 아니겠는가. 물론 근대적인 민주국가가 아닌 다음에야 民에 대한 책임의 정도는 달랐겠지만. 그런 필요에서 조선은 일본에 대해서 왜구를 억제해 줄 것은 요청했는데, 그 방법은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다원적이고 계층적인’ 외교관계라 칭했다.

 

 

1392년에 통일정권을 확립한 요시미쓰가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일본 전국을 지배하거나 대표할 역량에는 미치지 못하였기에 요시미쓰 장군을 비롯하여 대마도주, 지방의 여러 세력들에 외교적 접촉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요시미쓰가 통일정권을 확립하였고, 태종이 1401년 고명과 인신을 받아 책봉관계를 맺은 가운데, 요시미쓰 역시 1403년 11월 ‘일본국왕지인’의 금인와 일본국왕에 봉하는 조서를 받으며 명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적 국제질서에 편입되었다. 이에 조선은 큰 나라인 명에 사대하여 무력에 의한 위험을 감소시키고, 또 그에 기대어 다른 나라는 교린 하여 안정적인 질서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요시미쓰의 통일정권이 성립되고 책봉 받은 것 까지 생각하면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 역시 일원화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특이하게도 조선과의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명의 책봉을 받아서 중화질서에 편입된 요시미쓰 막부와는 대등한 교린관계를, 기타 나머지 통교자는 대마도주로 일원화 하여 기미의 교린관계로 나누어졌다. 즉,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관직을 주어 칭신을 허락하고 해마다 상경을 시켜 내조를 의무화’ 했다.

 

 

이렇게 대마도는 조선과 에도의 막부를 중간 매개하는 과정에서 괘나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이득을 얻는 가운데(물론 대마도주의 안위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다) 조선과 일본사이의 국서를 개작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조선과 에도 막부 사이에 좁힐 수 없는 인식 차와 그에 따른 이견을 몰래 조율하는 과정에서 대마도주와 그 가신들이 벌인 희대의 사기극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은 임진전쟁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다시 동아시아 중화적 질서로 회복하기를 원하였는데, 명이 1644년 멸망하게 되면서는 조선이 명에 이어 중화를 이어받았다는 ‘조선중화주의’라는 이념에 입각하여 (당시 청과 형제지맹을 맺은데 이어 군신지의를 요구하는 청에 대한 대비를 위해서도)에도 막부와 외교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하였는데 반해, 도쿠가와 막부의 입장에서는 막부의 정당성의 확보를 위해 국제적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하는 정치적 입장에서 조선에 사신의 파견을 요청하기도 하였고, 거기다 ‘일본형 화이의식’에 근거하여 국교 회복을 위한 탐적사, 회답겸쇄신사를 비롯하여 국서개작 사건 폭로 이후의 1636년 병자통신사를 모두 예전에 번국인 나라가 신하의 예를 취해 왔다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얼마나 상반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 짐작이 된다.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들어서면서 서로 상호공존을 위한 평화로운 교린관계를 이후 이어나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하여, 일본에서는 ‘일본형 화이의식’에 입각하여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외교관계의 허구성이 형성되어 갔으며, 이후에는 통신사의 필요가 줄어듦에 따라( 조선에 있어서는 청과의 관계가 안정되기도 하고, 에도의 막부 입장에서는 여러 경제적 빈곤에 따른 어려움으로 접대가 어려워지는 등의 상황) 1811년 역지통신 실시되었고, 그 이후로 역지통신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지만 결국에는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1868년 9월에는 일본의 왕정복고와 서계양식의 변경을 알리는 통보와 함께 교린체제를 붕괴 시켰고, 1872년은 일본이 부산의 왜관을 접수하는 등, 사실상의 침한을 시작하면서 교린체제의 종말을 맞이했다.

 

 

이렇게 보면 정말 뭐하는 짓인가 싶다. ‘조선중화주의’와 ‘위정척사’는 결과적으로 한반도민에게 커다란 불행을 안겨주었으며 일본 역시 ‘일본형 화이의식’에 입각한 ‘조선 멸시관’은 정한론으로 이어지고 당시 대한제국을 식민지화면서 이후에 전개되는 한일 간의 평화로운 관계 성립과 동아시아의 평화유지에 있어서 불안의 씨앗을 심어두고 말았다. 물론 북한문제가 동아시아의 평화에 있어서 주된 문제가 되긴 하겠지만, 일본 제국주의가 일제식민지화 라는 역사기억을 공유하는 한민족을 비롯한 동아시아 제민족에 대한 폭력의 기억은 여전히 또렷하며 결코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일본 정부를 봐서는 요원한 일인 듯 느껴진다. 중국 역시 동아시아의 불안에 일조한다. 이전의 중화주의라는 것은 지리적, 문화적인데 비해서 근래에 보이는 중화의식은 인종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물론 중화라는 것에 대한 공부가 더 필요하겠지만, 대충 이해된 것에 의하면 그렇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에는 동아시아의 평화 확립과 유지라는 백년대계를 생각하는 지도자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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