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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 조선 지배계층의 중국 인식 ㅣ 푸른역사 학술총서 7
계승범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11월
평점 :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는 국익의 손/익계산을 치열하게 굴릴 수 밖에 없는 해외파병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당시 조선시대의 중국인식을 살펴보고자 하고 있다. 저자가 실록에서 분석한 것에 따르면 중국(중원 혹은 중화국가)이 조선조에 해외파병을 요청한 것은 15례가 있다고 한다. 이 15번의 해외파병 사안에 대하여 당시 조정의 논의를 살펴보면 건국초인 15세기와 16세기가 극명하게 갈린다. 물론 조선이 존명사대를 국시로 건국되었으나, 세종대나 세조, 성종대의 해외파병은 국익에 부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거부하거나, 생색내기 파병, 그리고 파병을 했더라도, 그것이 원래 계획에 있었던 경우(건주여진과 관련된 파병건)일뿐이었다. 임금을 물론이고 조정대신들의 인식도 비슷했다.
이런 인식의 변화가 생겨난 것은 중종대라고 한다. 아무래도 인조반정과는 다르게 자신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될줄을 몰랐던 상황에 올랐던 탓에 아무래도 중종자신의 기반이 취약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고, 조선의 왕은 명나라의 황제에서 그 권위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중종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고 보인다. 이때에 들어서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군신을 넘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까지 이야기하고, 그것을 스스로도 내면화 하는 과정에 이른다고 보인다. 그리고 그 절정은 광해군대의 파병논의에 이르러서는 극명하게 모습을 드러난다. 당시의 광해군의 행위는 왕위의 불확실성에 따라 과도한 실수가 있었다고 보지만, 당시 명과 후금의 건곤일척(??)의 대결에서 파병건에 대해서는 분명히 제대로된 인식을 가졌다고 보이는데, 그에 대응하는 비변사와 기타 대신들의 반응은 너무 황당하다는 것이다. 이미 국익=명에 대한 사대로 굳어진 상태로 보였다. 정말 이전에도 이후로도 보이기 힘든 멘털리티라고 볼 수 있다.
반정의 이유로 제일원인을 광해군의 대외정책에 둔 것도 참으로 혀를 차게 만드는 상황이다. 이미 그들의 멘털리티가 그 상태였으니 그렇긴 하겠지만, 반정의 제일명분을 그 이유로 둠으로 인해서 도대체 도망칠 수 없는 구석으로 스스로를 밀어버린 것이다. 거기다 더해 반정 그 이후 논공행상의 불만으로 일어난 이괄의 난이 아니였다면, 정말 최소한이나마 호란의 여파를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후로 청나라에 대한 북벌이니 뭐니 소중화니 하는 소꿉놀이만 하다가 결국은 망국의 길로 이르렀다고 생각하면, 측은한 느낌이 들다가도 짜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