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웅진의 품에 안기다
이남석 지음 / 서경문화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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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경우 시기를 나눌때 수도에 따라 나뉜다. 한성도읍기, 웅진도읍기, 사비도읍기라는 식으로.  한성도읍기가 압도적으로 길며, 웅진도읍기는 제일 짫다.   웅진으로는 천도는  당시 지배세력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비상사태에 궁여지책이었다. 476년에 장수왕이 친히 3만명의 기병으로 침입 하였고, 그 결과 개로왕은 패사하고 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고, 본서의 저자도 장수왕의 백제 침입의 원인은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서신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개로왕의 북위에 대한 접촉에 대하여  본서의 저자는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평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이유를 고려하고 있다.  예전에 한반도에 중국의 군현이 남아 있을때는 군현과의 교류를 통하여 지배층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활용한 것처럼  당시 남조의 동진과의 유일한 책봉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는다. 헌데,   동진에서 유송으로 교체가 되었고, 바뀐 유송은 외교채널을 다양화 하여 일본과 직접 교류하는 등의 예전의 독점적인 교류를 유지하지 않았다.  그런탓에 국제적 위상의 변화가 생기자 다른 길을 찾고자 북위와의 접촉을 시도 한것으로 본다. 


그리고, 저자는 웅진이 선사시대와 청동기 시대에도 주목할만 취락이 있지 않았던 점으로 보아 이전에도 웅진이 도읍지로는 적합하지 않으며, 그 이유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강조한다. 그 외에도  금강을 기준으로 북쪽에 있던 수촌리 고분군의 세운 세려가들이 당시 웅진으로 천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지방지배세력으로 보았다.  476년 고구려의 한성 침공 당시 문주가 데리고 온 신라군 1만병 외에도 다른 구원군이 있으리라 저자는 보았고, 웅진이 천도한 것에서 추리하여 수촌리 고분 남긴 세력들이 개중 포함되어 결정적 역항을 하였다고 본것이다.  


 그 외 저자는 묘제의 변황양상을 들어 웅진천도 이후에 금강 남쪽에. 백제 중앙지배세력의 묘제인 횡혈식 석실묘가 많은 점을 들어 천도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고, 사비천도 즈음에는 다양하던 지방사회의 묘제가. 횡혈식 석실묘로 단일화가 되어 가는 점.  더이상 재지세력의 묘에서 위세품이 등장하지 않는 점을 들어 왕권의 안정화를 설명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무리가 없다고 판단되나,  취리산 회맹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조금 이상했다. 저자는 회맹을 고구려 정벌에 필요한 배후기지를 확보하기 있었던 것으로 보는데, 668년 고구려 정벌 이후 676년 한반도 남쪽에서 당군을 손쉽게 축출하는 것으로 볼때 당의 실제 목적은 고구려 정벌을 위한 배후기지 확보에 있었다고 이른데서다. 


순진한 건지, 아니면 한국고대사의 연구자들도 연구대상의 차이에 따라 보이지 않는 벽이 있어 기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 것인지. 나당연합군의 전쟁 가운데서도 신라의 군사주권을 심각하게 침해 한바가 있고,  단순히 회맹을 맺기 위하 조치로서 문무왕을 계림주 도독으로 임명한 것이기 보다는 한반도의 북쪽뿐 아니라 남쪽에도 지배의 의지가 있었음을 생각하는게 좀 더 상식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저자의 주장을 곡해한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전쟁을 두고. '손쉽게'라고 하는 건 너무 안이함을 보여주는 건 틀림없다. 


그리고, 별 두개를 준 이유를 말하자면, 일단 중언부언이 너무 심하고, 문장도 매끄럽지 않다.  뭐 원고가 준비되는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모르지만, 이 정도면 편집자하고 너무 소통이 없었던게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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