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저를 책 읽기의 짜릿한 엑스터시로 끌고 갔던 것들만 골랐습니다. 이름하여 Top 10, 그리고 '최고의 한 권'.

 2018년엔 권 수로 219권, 편 수로는 192편을 읽었습니다. 가장 긴 책은 홍성원의 <남과 북> 여섯 권 짜리고, 다음이 조지 엘리엇의 <다니엘 데론다> 네 권 짜리였습니다. 이 가운데 먼저 약 50편을 골랐습니다. 내역은 글 아래에 따로 첨부했습니다. 선별한 책 중에서 또 골라 열 권을 선택했고, '한 권의 책'은 그 책을 읽는 순간, 이것이 올해 최고의 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각은 오늘까지 바뀌지 않았고요. 소개는 읽은 날짜 순서로 하겠습니다. 이 열 권과 특별한 한 권이,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의 선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참 좋겠습니다.

 

 

1. 오에 겐자부로, <만엔 원년의 풋불>

 

 오에 겐자부로 자신이 만엔 원년, 그의 전작 <익사>에서 보다시피 1860년의 농민 반란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을 것. 당시 가장 격렬한 저항을 벌였던 종조부를 둔 한 청년이 68세대로 성장, 반미운동의 전초적 투쟁을 벌이다가, 갑자기 변절, 이후 의식의 혼란을 초래한다. 미국에서의 실종을 거쳐 만엔 원년에 종조부가 투쟁을 벌였던 고향으로 돌아온 다카시. 그가 지역 실권자 조선인 백승기와 벌이는 한 판 풋볼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까.



 2. 메릴린 로빈슨, <하우스 키핑>

 

 <하우스 키핑>을 선택했으나 사실 같은 이유로 <홈>도 추천한다. 가족 구성원이 떠나가고, 상처받고, 돌아오고, 기다리고, 다시 떠나는 일, 그 쓸쓸함. 기관차를 전속력으로 몰다가 선로를 이탈해 깊은 호수에 빠져 시신도 못찾은 남편. 친구 차를 빌려 아이들을 친정집에 맡기고는 역시 전속력으로 호수를 향해 돌진해 실종돼버린 딸. 이제 남은 가족들은 그들이 죽었음을 알지만, 어느 날 문득, 남편이나 딸이 슬며시 웃으며 조심스레 현관문을 여는 날이 있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기다림. 서늘한 아픔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3. 알렉시 제니, <프랑스식 전쟁술>

 고등학교 생물교사가 이런 책을 썼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보통의 프랑스 시민들은 복종과 순응으로 시간을 버텨냈을 뿐이지만, 타국에 의한 피통치가 얼마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지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알제리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가 독일 군인들에게 당한 고통보다 백 배 이상 더 악랄한 살상과 살육을 벌였다는 지적. 프랑스적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는 결코 피부색을 달리하는 왜소한 아시아 인들을 향하지 않고 오직 갈리아 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불편한 진실을, 생물교사 알렉시 제니는 정식으로 드러낸다.



4, 귀스타브 플로베르, <부바르와 폐퀴셰>

 플로베르의 유작으로 미완성 작품이다. 우울한 명상형 은둔자 플로베르가 인생의 마지막이 될 것을 알고 쓴 것 같은 작품. 세상을 살고 이제 갈 때가 되어 돌아보니 별 거 없이 사는 거 자체가 한 판의 코미디. 그리하여 플로베르는, 위대한 작가가 가끔 그러하듯, 마지막 작품으로 희극을 선택한다. 희극의 진정성은 희극 자체에 진정한 비극을 품고 있어야 하는 법. 두 필경사 부바르와 폐퀴셰가 뜻과 돈을 모아 쓴 사과 브랜디와 이름이 같은 칼바도스로 낙향, 하는 일마다 실패를 맛보는 장면을 읽으며, 그래 인생 자체가 칼바도스 맛이야, 희극 속의 쓴 비극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으리.



5. 헨릭 시엔키에비츠, <쿠오바디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TV에서 재탕, 삼탕으로 본 영화 때문에 이 책을 멀리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우연히 읽게 된 <쿠오 바디스>는, 영화가 원작의 재미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지 깜짝 놀랐다. 폴란드의 자랑 시엔키에비츠의 글이 얼마나 아름답고, 세련됐으며 재기발랄하기도 하고, 심지어 깊은 사색까지 포함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TV 때문에 직접 독서의 매력을 놓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것 다 빼고, 책 표지에 나신의 여성이 부여잡고 키스를 퍼붓는 대리석상의 주인공 페트로니우스의 현명한 언행을 감상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이 작품은 명작이다.



6.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칼루스와 루카스. 두 번째 세계대전이 두 쌍동이 형제가 엄마의 손에 이끌려 할머니 집에 도착해 그곳에서 살게 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외할머니 집에서 형제는 절대로 울지 않고, 굽히지 않고, 그러면서도 성실하고, 옳다고 생각하면 잔인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으며, 한 편으로는 따뜻한 마음과 행동을 그치지 않는다. 착한 악마들. 완전하게 건조한 문장으로 블랙 유머와 엽기적 내용을 서슴없이 서술하는 크리스토프. 이 쌍동이 형제가 정말 쌍동이일까? 의식의 분리, 선악, 호오, 이런 두 양식이 상호 교차되는 것의 상징 코드 아닐까? 그건 독자 마음이다.



7. 홍성원, <남과 북>

 

 전쟁을 치룬 나라로, 대한민국이란 나라보다 전쟁 전반을 조망하는 문학작품이 없는 국가도 없다. 무승부로 끝난 전쟁 이후 남쪽과 북쪽 모두 전쟁의 위험을 강조하며 정권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남쪽은 국방군이, 북쪽은 인민군이 절대 선이었어야 했을 것이리라. <남과 북>은 70년대에 발표했다가, 박정희가 죽자마자 곧바로 개작을 해서 전쟁 발발 바로 전부터 종전 바로 후까지 전선과 후방에서 각각 전쟁의 비참함을 당한 모든 국민의 모습을 담은 역작. 진정한 전쟁문학이 없던 우리나라에 확실한 이정표를 제시한 기념비.



8.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부제처럼 기본적으로 가치, 즉 품질에 대해, 인간과 인간의 사고와, 나아가 모든 물질과 재화의 가치, 품질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열한 살짜리 아들 크리스를 등 뒤에 태우고 미국 중부를 떠나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여행을 하며, 한 편으로 여정에서 생긴 조그마한 일과 특히 모터사이클을 매개로 가치, 질에 관한 탐구로 사고를 확장하게 된다. 작가 자신이 다양한 학문을 통섭한 수재로 철학, 수사학, 수학과 물리학을 포함한 자연과학, 기계공학 등에 탁월한 지식으로 무장한 상태. 그리하여 사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을 타도하기 위해 플라톤, 소크라테스, 그 이전의 소피스트들까지 탐색하기에 이르는데, 모터사이클의 뒷자리에 앉은 아들 크리스는 여행 도중 아빠 등짝 밖에 보지 못했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알아차린다.



9. 알베르 코엔, <주군의 여인>

 

 "이토록 장려하고, 화려하고, 장황하지만 아름다운 넋두리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둘만의 사랑'이라는 감옥과, 한 인간의 고결함을 천상에서 지옥으로 순식간에 떨어지게 만드는 질투와, 결국 땅 속 나무 상자 안의 바싹 마른 뼈밖에 남지 않을 풍만한 아름다움의 허무와, 야훼가 선택한 자신의 민족을 향해 서서히 그러나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위협의 숨막힘을 어느 인류가 있어 이보다 더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라고 독후감을 썼다. 이 길고 긴 장편소설을 읽는 내내 화려한 문장의 매력 때문에 행복했다. 서로가 숨막히게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두 연인을 질식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아, 나는 그걸 안다.



10.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1918년. 러시아가 공산혁명에 성공하자 서둘러 서유럽으로 망명한 것과 달리 혁명과 동시에 파리에서 러시아로 돌아와, 조모를 망명시키고 자신은 러시아 안에서 살기로 결심한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혁명 정부에 의하여 현재 자신이 묵고 있는 메트로폴 호텔에서의 유폐형을 선고받고, 스위트룸에서 지붕밑 <라 보엠>의 미미가 살던 꼭대기 방으로 옮기게 된다. 귀족으로 태어나 인간 자체가 신사인 백작은 책상다리 안쪽 비밀 책상 속에 든 예카테리나 금화로 일 하지 않고도 고급호텔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지만, 특별하게 관계를 맺는 몇 명의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면서 이 고급스러운 작품을 만들게 된다. 나는 쉽게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이건, 명작이다.




2018년 최고의 한 권.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시는 삶이어야 한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또한 보편성 역시 확보해야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아 서울을 떠나 해남 미황사 아랫동네에 방을 하나 얻어 남은 삶을 보내야 했던 김태정. 가난하고 병마에 고통을 받지만 결코 궁상의 골짜기로 빠지지 않는 단단한 중심의 시인. 인생의 곤고함을 이 시인만큼 깔끔하게 노래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시에 관해서는 말을 길게 하면 오히려 더 좋지 않은 법. 나 역시 조심스럽게 이 책의 일독을 모든 분께 권한다.




* 참 아쉽게 위의 열한 편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윌리엄 트레버의 모든 책을 꼽는다.




2018년에 읽은 매력적인 작품 목록.

도서명출판사/제작사저 자,  역 자
사서 빠뜨재미마주즈느비에브 빠뜨, 최내경
화이트 노이즈창비돈 드릴로, 강미숙
루시 골트 이야기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아르세니예프의 인생문학동네이반 부닌, 이항재 
호르두발지만지카렐 차페크, 권재일
운명민음사임레 케르테스, 유진일
더 컬러 퍼플한빛문화사앨리스 워커, 안정효
플라톤의 반란자작나무(송학)피터 애크로이드, 한기찬
시대의 소음다산책방줄리언 반스, 송은주
마농의 샘펭귄클래식마르셀 파뇰 | 조은경
싱글 맨창비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조동섭
만엔 원년의 풋볼웅진지식하우스오에 겐자부로 | 박유하
의식동아시아레슬리 마몬 실코, 강자모
하우스키핑마로니에북스메릴린 로빈슨 | 유향란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민음사모신 하미드, 왕은철
여름의 끝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민은영
프랑스식 전쟁술문학과지성사알렉시 제니, 유치정
부바르와 페퀴셰책세상귀스타브 플로베르, 진인혜
쿠오 바디스민음사헨릭 시엔키에비츠 | 최성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민음사제임스 M. 케인, 이만식
절망문학동네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최종술
노변의 피크닉현대문학스트루가츠키 형제, 이보석
미국은 섹스를 한다자작나무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까치아고타 크리스토프 | 용경식
칠레의 밤열린책들로베르토 볼라뇨, 우석균, 
천국은 다른 곳에새물결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김현철
고슴도치의 우아함아르테뮈리엘 바르베리, 김관오
아메리카나민음사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황가한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김태정 지음
그랜드 호텔문학과지성사비키 바움, 박광자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학고재사바하틴 알리, 이난아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문학과지성사리온 포이히트방거, 문광훈
남과 북문학과지성사홍성원
비 온 뒤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 정영목
윌리엄 트레버현대문학윌리엄 트레버, 이선혜
아무도 없어요최측의농간박서원 지음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민음사조너선 사프란 포어, 송은주
랜덤하우스코리아메릴린 로빈슨, 유향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문학동네리처드 플래너건, 김승욱
칠드런 액트한겨레출판이언 매큐언 | 민은영
달콤한 노래arte(아르테)레일라 슬리마니, 방미경
사촌 퐁스을유문화사오노레 드 발자크, 정예영
우리 시대의 아이문예출판사외된 폰 호르바트, 조경수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서커스조르지 아마두, 안정효
한국 현대 명작 희곡선집연극과인간김성희 지음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문학과지성사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장경렬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민음사에벌린 워, 백지민
주군의 여인창비알베르 코엔, 윤진
모스크바의 신사현대문학

에이모 토울스, 서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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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2-31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주군의 여인>을 읽어봐야겠습니다. 폴스타프 님 새해에도 소주와 책과 함께 즐거운 나날 보내세요~!

Falstaff 2018-12-31 12:49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잠자냥님도 내년엔 책은 그만두고, 돈 왕창 버시고요, 하시고 싶은 거 맘대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컨데 세계일주 같은 거요.
<주군의 여인>이 좀, 아니 많이 장황합니다. 읽다가 자빠질 수도 있는 책이라서 선뜻 권하기엔 조심스럽습니다. 뭐 그런 거 다 팔자니까, 알아서 하시기를 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2-31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의 책들은 우직 묵직 견고합니다 무게가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Falstaff 2018-12-31 23:06   좋아요 1 | URL
내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네요.
말씀 고맙습니다. 카알벨루치님께 늘 좋은 일만 생기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김동리 문학전집 1 : 사반의 십자가 - 탄생 100주년 기념 김동리 문학전집 1
김동리기념사업회 / 계간문예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나와 비슷한 시절을 지닌 사람들은 <사반의 십자가>를 꼭 읽어봐야 하는 교양도서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사반’이란 것이 사람의 이름이며, 심지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그의 왼쪽에서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강도’ 또는 ‘도적’인줄 몰랐을 것이다. 지금 예수와 함께 죽은 강도들의 이름을 검색해보니까, 성경엔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을뿐더러 왼쪽 오른쪽 구분하지 않고 그 중 한명이 죽어 예수와 함께 낙원으로 갔고, 다른 한명은 예수더러, 임자가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임자와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비방했다고 한다. 답글을 올린 엄숙한 기독교인은 심지어 알지도 못하면서 왼쪽 오른쪽을 구분하는 건 ‘성서를 오염시키는 행위’란다. 그러니 이 같은 진실에 입각해 발언하자면, 이미 죽은 김동리는 왼쪽 강도에게 ‘사반’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 위에서도 일어나게, 죽음을 앞둔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더러 마치 에굽의 모든 장자들한테 같은 날 죽음을 선사해주어 집집마다 같은 날에 제사지내게 만든 모세처럼 기적을 일으켜주길 끝까지 기대했다는 취지로 작품을 썼으니, 지금 김동리는 23년 동안(벌써! 세월 빠르다) 지옥의 유황불에 지글지글 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유대인들한테 제일 큰 백그라운드는, 야훼. 선택받은 민족으로 모세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기타 등등의 판관들의 자손인 이들의 역사는 탈 에굽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이스라엘 땅에서 언제나 잘 먹고 잘 살았던 건 아니어서, 이들이 주로 타국의 신부와 결혼하면서 유입된 이국의 신들에게 경배할 때마다 질투의 야훼가 불칼로 다스려 온갖 민족들에게 침략을 당하고야 만다. 이때마다 혜성같이 거의 메시아 급의 인물이 등장해 유대민족을 압제에서 구하곤 했으니, 서기 30년 조금 넘은 시절,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이 또다시 메시아의 재림을 기대했던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 우리한테도 비슷한 야담野談이 전승해 내려온다. 주로 백기완, 심지어 이청준 등의 글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소년장사 이야기. 주로 양반 지배계급이나 왜나라 사람들이 소년장사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혈맥이 지나가는 산맥에 쇠못을 박아댄 이야기, 기억하시지? 하여간 AD 30년경에 일곱 명이 팔뚝에 날 선 비수를 쓱 그어 피를 뚝뚝 흘려 받은 다음 야만스럽게 그걸 섞어서 서로 마심으로 ‘혈맹의 단’ 즉 혈맹단血盟團을 결성해, 각 단원은 수하로 또 다른 일곱 명의 이차 세포를, 또 일곱 명의 삼차 세포를 등등으로 구성한 대규모 독립투쟁 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여기서 대장, 즉 단장을 먹는 인물의 이름이 바로 ‘사반’이다. 사반은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으면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로마의 군대에 대항을 해봤자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메시아의 재림을 기대하던 중 예수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세금 걷는 공무원, 세리를 걷어찬 거 빼고 여하한 폭력에도 절대 반대를 외치던 예수가 로마 군대와의 전쟁을 수긍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죽은 다음 하느님 우편에 앉을 생각만 잔뜩 하고 있던 예수께서. 여기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갈리는 지점이다. 서로 타협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까. 그러니 이를 주제로 소설을 쓸 수 있었겠지. 근데 신기하다. 책의 시간 배경에서 한 세대에서 한 30년쯤 지나면,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젊은이들이 한 패가 되어 거세게 로마에 대항하는 무장단체를 결성한다. 그리고는 정말로 세계최강의 군대인 로마군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바, 결론은 유대민족이 거덜이 나고, 이때 눈부신 활약을 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의 공적으로 두 부자가 차례대로 황제의 위에 오르게 된다. 티투스가 2년밖에 황제를 못해 그게 혹시 야훼가 불침을 놓은 건지는 몰라도.
 조금 지루했다. 420쪽 가까이 되는 장편소설. 분량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신은 벌써 19세기에 휘두른 니체의 망치에 맞아 절명한 상태라 나로 하여금 도무지 흥미를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 원래 “현대문학”지에 연재했던 것에다가 삼사백 매 정도를 보충해 1958년에 상재하고, 그걸 다시 개작을 해 1982년에 재상재한 책. 그래서 그랬나?
 김동리는 황순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순수문학을 평생 고집했던 작가. 황순원 선생은 일제가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자 학교를 때려치우고 평양 근처 시골로 내려가 골방에서 우리말로 소설을 썼고, 김동리 선생은 붓을 아예 꺾어버렸다. 이거 쉬운 일 아니었을 걸?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연기한 악당 염석진이 해방 후 반민특위에 출석해 무죄를 받은 다음, 안옥윤(전지현)한테 총 맞기 바로 전에 이렇게 말하잖나.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몰랐으니까!” 김, 황 양씨도 언제 해방이 돼 조선어로 작품을 쓰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여전히 조선어로 단편소설을 썼으며, 붓을 꺾었던 거다. 작가가 작품을 못 쓰는 상황이란 우리 같은 독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 않았을까. 이때 김동리는 <사반의 십자가>를 구상했단다.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조선. 그러나 목숨이 먼저니 감히 쓰지는 못하고 머릿속에서 자꾸 가지만 치다가,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서 고통 속에 숨어 살고, 나중에 부산에 내려가 소위 ‘밀다원 시대’를 만나고, 다시 수복해 서라벌예대 문창과 교수를 하면서 드디어 20년을 구상한 <사반의 십자가>를 원고지 위에 옮기게 된다. 비록 이이가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격렬한 리얼리즘 또는 참여문학 종사자들로부터 수없이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세상에 이런 꼰대도 분명히 훌륭한 존재의 이유를 갖는 법이다. 숨 막히던 시절, 고집스레 순수문학의 길을 가는 작가들도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소설판이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을 테니까.



 독후감 다 썼다. 이제 잡담 시간.
 1. 자신이 생각하기에 천주교든 개신교든 하여간 환자 수준의 기독교 신자/신도라면 책을 읽기 전에 지금 읽을 책이 전문 거짓말쟁이가 쓴 소설이란 점을 충분히 인식하시라. 이걸 읽고, 읽으면서 감히 성서에 나온 진리를 왜곡했다느니 하시려면 애초부터 손에 잡지 마시라.
 2. 김동리가 1913년생. 그의 예수는 우리가 이발소 거울 위에 달려 있어 보곤 했던 바로 그 초상화의 예수. “예수의 그 호수같이 맑고 푸른 두 눈이 하늘의 끝없음을 머금은 채 사반의 핏발 선 굵은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114쪽), “예수는 그 백랍같이 희고 긴 손(왼손)을 들어 보였다. 순간, 사반은 ‘그 백학이 깃을 편 듯한 손’이라고 하던 도마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만큼 그의 희고 긴 다섯 개의 손가락 사이에서는 어쩌면 곧장 무지개가 비낄 듯한 황홀한 환상 같은 것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115쪽) 푸른 눈과 백학이 깃을 편 듯한 손과 길고 얇은 손가락의 가진 ‘목수carpenter’가 말이 돼?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그리고 짧고 두꺼운 손가락과 억센 손톱을 지닌 건장한 체격. 이게 내가 생각하는 중동 아시아인 목수였던 예수의 모습이다.
 3. 이걸 읽자마자, 어떤 종류의 안도감이 흐른다. 드디어 오랜 숙제를 해결한 거 같은 느낌. 원래 <을화>를 고르려 했는데 작년 이맘때든가, 아, 벌써 3년 전이다, <무녀도>를 읽은 바 있고, <을화>가 단편 <무녀도>를 개작한 것이란 점이 <사반의 십자가>로 선회하게 했다. 하긴, <을화>하면 난 영화배우 김지미가 먼저 떠오르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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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평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4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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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여 전에 룰포의 다른 책 <페드로 파라모>, 아니 <뻬드로 빠라모>를 읽고 “상쾌하고 뒤통수 때리는 작품”이라고 간략한 느낌을 끼적였다. 그래 여태까지 룰포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가 쓴 다른 책 <불타는 평원>을 읽어보자고 차일피일 했다가 이제야 읽었다. 다른 거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룰포가 쓴 또 한 권의 책이란 것 때문에 골랐다. 룰포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보다 10년을 앞서 태어났는데 그의 <뻬드로 빠라모>가 <백년의 고독>에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고 한다. 무슨 얘기냐 하면, <뻬드로....> 독후감에서 슬쩍 비치기만 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환상문학이 여기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도 있다는 뜻.
 <불타는 평원>에선 이런 환상문학 적인 요소는 거의 없다. 물론 세밀하게 읽는다면 환상문학이 등장하기 바로 앞선 전조현상 정도는 발견할 수 있겠지만. 룰포는 전 생애를 걸쳐서 <뻬드로 빠라모>와 열일곱 편의 단편을 모은 <불타는 평원>, 이렇게 딱 두 권만 출간했다고 한다. 룰포가 쓴 두 권의 책의 공통점은 멕시코의 황야지대, 산악지역 등을 무대로 한다는 것.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10년대와 20년대의 멕시코 혁명에 관해 선행학습을 좀 하는 편이 좋다는 것. 그러나 나처럼 게으른 인종이 소설 한 권을 읽자고 남의 나라의 역사를 뒤져볼 턱이 없다는 것. 그리하여 정부군이 우리 편인지, 반란군 또는 농민군이 우리 편인지 도통 알 도리가 없다는 것. 이런 것들이 애로사항이다.
 하긴 뭐 혁명도 어차피 사람 사는 일 아닌가. 우리 편인지 너네 편인지 굳이 알지 못해도 충분히 재미있다. 작중 등장인물은 언제나 정부군에 쫓기는 농민군 또는 반란군이며, 전쟁/전투 중에 새우등 터지는 멕시코 시골 촌사람들이며, 그중에서도 배운 거 없고 가진 거 없는 무지렁이들이기 때문에. 이게 말이 쉬운 것이지 사실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내무부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작가가 혁명의 황폐화와 황무지에서의 삶, 그리하여 보다 본능에 가까운 생존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장을 그린 것은 특별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기는 하지만도.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의 내용을 다 소개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본문만 191쪽이니까 한 편당 평균 11쪽에 불과한 손바닥 소설, 장편掌篇 모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표제작인 <불타는 평원>과 마지막 작품 <아나끌레또 모로레스>를 제외하면 작품의 평균 길이가 훨씬 줄어들기도 하고. 20세기 초반, 멕시코 고원의 황무지 지역에서 벌어지는 혁명전쟁, 말이 혁명전쟁이지 사실상 정부군에 의한 소탕작전과 피해자들, 와중에 거친 삶을 살아내느라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데 모든 힘을 쏟는 군상들에 관한 객관적인 묘사, 그리고 이 세 유형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는 의식의 흐름 같은 것들을 감상할 수 있다.
 어차피 라틴 아메리카의 환상소설, 또는 아몰랑주의 소설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후안 룰포를 경험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거 같은데, 아직 룰포를 읽어보시지 않았다면 <뻬드로 빠라모>를 먼저 읽어보심이 어떨까 싶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93번으로 이 책보다 먼저 번역해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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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2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남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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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12월의 스페인 마드리드. 세계적으로 극심한 물자부족을 겪게 만들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전쟁이다. 때는 바야흐로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어 아메리카를 제외한 전 유럽의 산업은 완전히 거덜이 난 상태였다. 이때 참전하지 않고 그냥 마음속으로 같은 파시즘의 나라 독일이 승전하기를 은근히 기원하던 스페인은 전시 특수를 즐길 황금 찬스였으나, 아뿔싸, 스페인은 스페인 나름대로 프랑코 개자식에 의해 벌써 내전이 발생, 일찌감치 나라를 말아먹은 상태라 전시 특수를 향유할 산업기반이 없었던 거였다. 프랑코 시대에, 나중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젊은 작가 지망생이 하나 있어, 나도 처음 들은 바, 공화진영이 아니라 반란군인 프랑코 파시즘 진영에 자진 입대해서 용감하게 싸우다 부상까지 당한 이가 있었으니 이 인간이 바로 카밀로 호세 셀라. 프랑코 진영에 가담했을 때 나이가 스무 살. 스무 살이라면 성년이기는 하지만 평생을 책임질 뚜렷한 확신을 갖기엔 조금 미숙한 상태. 하여간 이런 이력은 내전 후 자신의 소설작업을 다른 작가들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시즘, 또는 전체주의 또는 이런 비슷한 것들을 다 모아, 독재정권은 스페인이나 독일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다 똑같아서 한때 파시즘에 동조했다고 해 작품의 주제나 표현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래 셀라가 쓴 리얼리즘 작품 <파스쿠알 두아트레 가족>은 금서로 찍히고,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벌집>은 끝내 출판 허가가 나지 않아 몇 년 후 아르헨티나에서 출간하기에 이른다고 작품 해설에 나온다. <파스쿠알 두아트레 가족>도 읽어보려고 서점 보관함에 들어 있는데 엉뚱하게도 더 나중에 출간한 <벌집>을 먼저 읽게 됐다.
 지금 같으면 이런 소설의 출판금지 결정을 어처구니없어 하거나 비웃을 수 있겠지만 1948년 인생의 절정기를 맞아 온몸으로 신경질을 뻗어냈을 프랑코를 감안한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나름대로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쉽게 다른 분께 일독을 권하기는 좀 난감한 소설이다. 첫 장면이 끊임없이 “젠장”, “정말 짜증나네!” 같은 험한 단어를 쏟아내며, 마드리드 시내 한 카페의 사장 도냐 로사가 끔찍하게 큰 엉덩이로 손님들을 툭툭 건들면서 탁자 사이를 오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근데 소설의 첫 문장은, 따옴표 안에 묶인 걸로 봐서 누군가의 대사가 확실하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이제 이런 말을 하는 데 진력이 나긴 했지만,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니 어쩌겠소.”


 그러나 도대체 누가 이 대사의 주인공인지 밝히지 않는다. 누굴까. 내전 이후, 세계대전 말기의 극심한 경기침체기를 맞아 그래도 현상을 유지하게 위해 누군가 먹물 든 이들이 오늘만 참자, 내일이 되도 또, 오늘만 참자, 결코 전망 또는 희망을 잃지 말자고, 소위 희망고문을 하고 있는 것. 대한민국의 2010년대 말에 그대로 차용해도 어색하지 않을 경구다.
 그리하여 소설 <벌집>은 (내가 1944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이라고 생각하는 세계대전 말기의) 마드리드에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시민들, 현재로서는 전혀 전망을 가지고 있지 못한 남녀 시민들을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당시 마드리드 시민들도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불행했다는 걸 알 수 있고, 2010년대 후반의 대한민국 국민들도 정말 제각각으로 불행하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만일 위에 인용한 것이 여전히 효용이 있다면 말이다.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가난한 다수와 작은 성공을 대단한 성공인 것처럼 오해하는 적은 숫자의 중소 상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주인공을 한 명 고르자면 대학을 졸업하고 한 때는 시를 썼지만 끔찍하게 큰 엉덩이를 가지고 있는 도냐 로자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먹고 돈이 없어 하마터면 허벅지를 걷어차일 뻔한, 그러나 이미 모욕은 모욕대로 겪은 ‘마르틴’이란 실업자라고 볼 수 있겠지만, 진짜 주인공들은 동시대를 살면서 함께 셀라가 자기 소설에 등장시킨 모든 가난하고, 배고프고, 병들고, 병든 애인의 약값을 위해 몸을 팔정도로 아둔하고(남자가 나중에 어떻게 변할 줄 알아!), 1 페세타어치 군밤으로 한 끼니를 때웠으면서도 건강을 위해 저녁 식사는 가볍게 한다고 둘러대야 하는 시민들과, 한 푼의 적선을 위해 하루 열 시간이 넘게 플라멩코 춤을 추며 노래해야 하는 집시 꼬맹이이기도 하고, 전 재산을 겉모습이 번드르르한 사기꾼한테 투자했으면서도 그 사기꾼을 향해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인쇄소나, 빵집이나, 카페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가끔은 혹독하고 가끔은 관대하기도 한 모든 군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다.
 즉 셀라는 큰 화면에 같은 시대의 마드리드를 사는 중류, 중류 이하 계급의 인간 모습을 판화 찍듯 꾹꾹 눌러 그대로 묘사하기만 한다. 이런 작품에서 소설의 맛을 착 감기게 만드는 역할은, 일종의 악역들의 행위, 바로 조금 부자들. 저녁 식사 때마다 과식을 해 밤새 뱃속이 더부룩하고 가끔은 요동을 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 가난뱅이 앞에서 비싼 시거를 태우며 유쾌하게 어때 자네도 한 대 피워볼래? 번히 권유에 응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호기를 부릴 수 있는 작은 인쇄소 사장, 이런 인물들이다. 내전과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대전으로 인해 절대 궁핍에 시달리는 대다수 시민들에게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 할 수 있는 희망고문자들. 아무리 프랑코가 무식한 깡패 개자식이라고 해도 이 작품 속에 든 시대의 절망에 관해 눈치를 채지 못했을 턱이 없다. 그러니 같은 언어를 쓰지만 수 천 킬로미터 떨어진 아르헨티나에서 초판을 찍을 수밖에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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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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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책읽기를 끝내고, 이제 독후감을 쓰려 화면을 열어놓았다. 난감하다. 책을 읽으면 독후감을 쓰고, 썼으면 그걸 남에게 보여주고 싶고, 이게 루틴으로 지켜지던 일상적 취미, 라고 여겼으며,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도 분명히 느낌이란 것이 (그것도 강하게) 있었다.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1부, 1922년에 주인공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에 유폐되는 판결을 받고 (위원회의 의견은, 당신은 당신이 그리도 좋아하는 그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오. 하지만 절대 착각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이 한 걸음이라도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총살될 테니까.)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니나’라는 열 살 먹은 소녀와 친해지는 장면까지 읽으며, 에이모 토울스, 이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기에 이토록 유려하고, 아름답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그러면서도 조금은 까탈스럽고, 어딘지 모르게 버터냄새를 맡을 수 있게 유머러스한 글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해, 1부 읽기를 마치자마자 이이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봤다. <우아한 연인>이라는 책이 있으나 현재는 절판이다. 중고책도 인터넷에선 발견할 수 없다. 내친 김에 책을 펴냈던 출판사 홈페이지까지 방문해서, 지금 장안에 <모스크바의 신사>가 절찬리에 읽히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같은 작가가 쓰고 귀사가 찍은 책 <우아한 연인>의 중쇄를 심각하게 고려할 시기라고, 게시판 한 줄에 자국을 내고야 말았다.
 구 러시아의 마지막 귀족이라고 해도 별로 틀리지는 않을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1부 끝부분에서는 현악사중주단에서 2 바이올린을 연주해 먹고 살다가 결국은 유배형에 처해지는 또 다른 귀족 니콜라이 페트로프 공작이 역시 성탄 전야에 잠깐 등장하기도 하지만 32세 때부터 시작해 64세까지 모스크바의 고급 호텔에 유폐를 당하면서도 귀족 특유의 절제와 적응과 임기응변과 처세와 사교술과, 무엇보다 깊고도 넓은 교양과 지식으로 무장한 백작의 현명하고도 화려한 생존기야말로 책의 백미라 할 것이다. 여기쯤에서 내 양식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콕 집어 작가가 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서 유럽인이어도 마찬가지인데, 어쨌든 자본주의 시각에서 본 작가의 과거 귀족 계급에 대한 짙은 향수. 이게 어쩐지 발목을 잡았다. 물론 메트로폴 호텔, 모스크바에 있는 최고급 호텔 안을 무대로 하기 때문에 온갖 고급스러운 먹을 것, 마실 것, 행동 또는 행위, 에티켓을 포함한 복잡한 예절, 유물, 향수와 추억 등의 출현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럼에도 특정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을 선정하는 것, 귀족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맞지 않을뿐더러 비싸기만 한 와인을 추천해주는 웨이터를 향한 경멸이라니. 무대가 1922년 부터 54년까지다. 물론 부르주아의 힘이 하도 막강해서 그렇긴 했지만, 이미 서쪽 유럽에선 자신의 귀족적 계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보편적이었음에도 (이미 망한 다음이라서 오히려 더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산드르는 자신을 ‘각하’나 ‘백작님’이라 호칭하는 데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시간이 더 지나 어느덧 인생의 황혼이 오면, 여보게 그냥 알렉산드르라고 부르게, 하는 세월이 오긴 하지만. 백작은 결국 옆 테이블의 젊은 커플에게 다가가 웨이터의 권유를 무시하고, 적절한 와인을 추천하고야 만다. 그리하여 나중에 백작이 경멸스럽게 ‘비숍’이라 칭할 웨이터는,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해 백작만큼 적절한 와인을 추천할 수 없기 때문에 당한 일을 일종의 치욕으로 마음 속 치부책에 적어두게 된다. 난 이 장면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와 독자는 쓰고 읽으면서 비숍이란 웨이터, 나중에 차례로 부지배인, 수석지배인이 되는 인물을, 속에 든 거 없이 철저하게 규격화된 인간형으로 규정하고 (사실도 그렇지만) 백작과 정 반대의 자리에 터를 정해버린다.
 솔직하게 쓰자면 나도 그랬다. 책을 읽으면서 어느 음식엔 어느 와인이 어울리는지 정도를 알아두면 참 좋겠다. 조금 더 나가서, 집 앞 ‘홈 플러스’에 가 싸구려 칠레 와인이라도 한 병 사 마셔볼까? 뭐 이런 생각. 그러나 중심을 잡아야지.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와인은 무슨. 한 20년 전 쯤부터 와인 열풍이 부는 듯했지만, 역시 난 천성이 귀족들하고는 원래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런지 무식한 쪽을 택하겠다. 삼겹살 수육에 소주 한 병이면 됐지 뭘 와인까지. 애초에 서양 와인 만드는 포도농사를 짓지 않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도 와인 선택에 능숙하지 않으면 2류 인생이라고 이해할까봐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대표적으로 와인을 이야기했을 뿐, 여전한 서양 귀족에 대한 동경 같은 걸 경계하는 수준으로 이해해주시라. 주인공이자 귀족 떨거지인 알렉산드르가 버틸 수 있는 힘은 할머니가 쓰던, 물려받은 책상 다리 안에 숨은 비밀의 공간에 담겨있던 금화였다. 아무 직업도 없고, 이제 더 이상 지역 농장에서 올라오는 소작료도 없이 다른 호텔도 아니고 메트로폴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카테리나 대제의 옆모습이 양각으로 새겨진 금화. 과거 제정 시대가 남긴 유물로 제정 시대의 인물이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도 여전히 최고의 미각을 달래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알렉산드르는 고급 식당에서 웨이터 주임으로 일하게 되지만, 그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나날을 보내기가 무료해서 그런 거 같다.
 또 다른 것 하나는 혁명 정부. 마르크스가 가장 크게 실수한 것은, 인간본성을 선한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 아닐까. 소위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새로운 독재자가 등장해 새롭게 프롤레타리아를 통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사실 숱한 작가들의 입을 통해 여러 번 읽고 들었던 내용이다. 파리의 작업실에서 개떡 같은 그림을 그리고 앉았던 피카소가 소비에트 정권에 무한한 지지를 보냈지만, 정작 소비에트에선 피카소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줄리언 반스의 지적. 이 책에서도 알렉산드르의 대학 동창이자 시인인 미하일 표도르비치 민디히가 등장해 아흐마토바, 불가코프, 마야콥스키, 만델시탐 등과 합세해 러시아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을 결성하고도, 협회가 작품에 가위질을 해대는 걸 참지 못해 황폐해지는 모습도 그리고 있다. 작가동맹이 결성된 이후 불가코프는 단 한 줄도 작품을 쓰지 않았고, 아흐마토프 역시 극도로 적은 양의 집필만 유지하고, 심지어 마야코프스키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총알을 박아 넣는데 성공해버리고 만다. 에이모 토울스의 의도가 처음부터 그랬겠지만, 레닌과 스탈린 시대를 넘어 이후 흐류쇼프 시대 초기까지 인민들을 질식시키는 고단위의 경찰력으로 소비에트 공화국과 종사자들을 묘사하는데, 심지어 행정국장 오시프라는 작자는 그러면서도 서유럽의 문화와 위에서 얘기한 상류사회의 규범들을 익히기 위해 약 20년 간 백작 알렉산드르에게 과외공부를 받는 것으로 연출했다. 성분 좋은, 다른 말로 하자면, 보르도 와인이라고는 맛은커녕 구경도 하지 못한 농민, 노동자 출신인 ‘혁명 공화국 상류계급’들의 가슴 속에서마저 유럽의 상류사회와 사교에 관한 동경과 모방심리가 있었다는 걸 군불 때듯 은근히 일러주기에 이른 것. 혁명 후 세상은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각하가 메트로폴 호텔의 6층 골방에서 세월을 보는 동안 과거의 빈민, 농노, 노동자들도 고급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시대로 바뀌어버렸다. 불행하게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체(政體)가 비밀경찰 주도의 새로운 파시스트 체제로 변한 게 흠이지만. 공화국에서 KGB의 전신이었던 비밀경찰의 악행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은 대개 구체제의 상류계급과 지식인들이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무식한 인민들은 (1930년대 초기까지의 험난한 세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씩이나마 삶의 질을 높여가고 있지 않았겠는가. 비록 빵 한 덩이를 얻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야하는 불편이 계속되긴 했지만. 그래 레닌과 스탈린이 죽었을 때, 방부처리를 한 그들의 시선을 눈으로 확인하고 한 바탕 자기 설움 때문이라도 목 놓아 곡을 하고 싶었던 인민들이 수 킬로미터씩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지 않던가. 우리나라에서도 1979년 박정희 장사 지낼 때 광화문 거리에 쏟아진 한복 입은 시민들이 얼마나 많았으며,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숱한 인민들의 눈물바람을 본 ‘사실’이 있다.
 만일 소비에트 혁명 정권이 (아, 지금 25도짜리 진로골드소주 한 병, 맥주 500cc 말아서 마시고 왔다. 빨리 독후감 끝내야 한다. 큰일이다.), 할리우드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처럼 서른두 살의 로스토프 백작을 정원 가꾸는 조경사, 또는 일반 노동자로 살게 했다면 어땠을까. 내 생각으로는 백작의 천부적인 사회친화력과 달변과 사람에 대한 애정과, 깊고 넓은 지식으로 나름대로 괜찮은(세상에 ‘행복’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남은 생을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까지는 그냥 책을 읽으면서 지극히 작은 부분, 예컨대 한 2% 정도의 이견. 그런데 미안하게도 너무 길게 쓴 거 같다. 이제 진실을 이야기할 차례. 이거, 명작. 내놓고 말하는데, 요즘 시대에 이 <모스크바의 신사>를 능가할 소설문학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을 거 같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좀 거슬리는 부분을 강조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만일 이 독후감을 여기까지 다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나머지 98%의 감상, 진짜 무지하게 재미있는 소설이란 확신을 믿고 얼른 책 주문을 하시거나, 냅다 도서관으로 달려가셔도, 책값이나 에너지의 소실을 확실하게 능가하는 효용을 얻으시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언필칭,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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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03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으셨는지 그렇다면 리뷰 쓰셨는지 궁금해서 찾아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다 첫 단락에서, 아니 이 이름이 그 이름이??? 하고 있어요. ㅋㅋㅋㅋㅋ
아, 저도 이 책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폴스타프 님 별 다섯이라서 너무 행복하네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9-03 09:0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이 책 정말 재미있어요.
근데 제가 모던 클래식 열 권에 이 작품을 선정하지는 못했답니다. 본문에도 썼다시피 작품 전체에 너무 농밀하게 퍼져있는 버터 냄새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다.
제가 이 책 한 스무 권은 팔아준 거 같아요. 보는 사람마다 재밌다고 떠들고 다녀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