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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솔 벨로우 지음, 양현미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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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솔 벨로Saul Bellow는 처음에 <오기 마치의 모험>을 읽고 지루해 미치는 줄 알았었다. 펭귄클래식에서 세 권, 1,400 쪽 넘는 장편으로 나오는데, 그때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하여간 읽어내기가 참 힘들었다. 함께 사놓은 두 권짜리 <허조그>도 그러려니 싶어 읽기를 뒤로 미루어 놓았던 기억이 있다. 날자가 좀 지나 <허조그>를 읽으니까, 같은 이태동 번역이었는데도 이건 또 참 재미있고 공감이 가는 거였다. 그래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비의 왕 핸더슨>까지 독파했다. <비의 왕 핸더슨>도 참 재미나게 읽었다. 인류학적 지식이 좀 있으면 더 재미있었을 소설이었다. 다른 분들한테도 권할 만하더라. 이때쯤 해서 또 다른 솔 벨로의 작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번으로 나온 <오늘을 잡아라>가 언제 품절이 풀리나 한정 없이 기다리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품절이 아니라 절판 상태로 접어들고 만다.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 170번으로 <오늘을 잡아라> 대신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썩은 잎>을 새로 찍어버렸으니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분명 미국 솔 벨로 재단과, 또는 역자와의 계약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헌책방에도 별로 보이지 않아 혹시나 하던 중, 인터넷 헌책방에 한 권이 느닷없이 눈에 띄어 서슴지 않고 집어 들었다.
 이거? 재미있다. 재미라기보다, 내가 뭘 알겠는가마는 굳이 말을 하자면,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 토미 윌헬름이 뉴욕의 자본주의와, 어떤 방식으로 간에 시대에 제대로 적응한 적자適者fittest들과 맨몸으로 부딪혀 새빨갛게 부서지는 모습에 공감할 수 있게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책은 절판시키면 안 되는 책으로 분류해야 할 거 같은데, 한국의 자본주의도 이젠 뉴욕만큼 사나워져서 돈이 안 되는 책으로 판명나면 얄짤 없나보다.
 책은 200쪽에 달해 분량으로 굳이 분류를 한다면 중편 또는 짧은 장편이라 할 수 있겠다. 무대는 뉴욕의 글로리아나 호텔과 주변에 위치한 증권회사와 광장의 카페와 담뱃가게 등에 국한되며, 내용 역시 이젠 흰머리가 섞인 금발의 배 나온 중년 토미 윌헬름이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모든 돈 700 달러를 전형적인 사기꾼 탬킨 박사한테 홀랑 날려버린 날의 아침부터 오후까지로 한정한다. 물론 윌헬름이 멀쩡하게 아내와 두 아이가 사는 집에서 나와 하필이면 이젠 은퇴한 성공한 내과의사인 친아버지 애들러 박사를 포함해 혼자 사는 노인들이 주요 투숙객인 글로리아나 호텔에 살 수밖에 없으며, 어떤 이유로 한 때는 영업이사의 자리를 노리다가 지금은 실업자 처지로 전락했는지도 책을 관통해 중요한 이야기 거리로 등장하기는 한다.
 지금은 절판이라서 여간해 읽어볼 기회가 없는 책이니 내용을 좀 이야기해드릴까?
 애들러 박사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겠다. 그 중에 ‘윌헬름 애들러’라는 젊은이가 있는데, 이 아이가 생긴 게 멀끔하고 판판하여 대학 다닐 때 학교신문에 사진이 나온 적이 있었겠다, 이걸 본 영화사 말단 기사 하나가 애한테 편지를 해서 카메라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했겠다, 테스트를 해보니 스타는 아니더라도 주인공한테 애인 뺐기는 조연 정도는 하겠다, 그래 다니던 학교 2학년을 마치고 아빠, 엄마, 누이하고 대판 싸운 다음에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LA로 날아가 영화판을 무려 7년이나 떠돌아다니며 딱 한 장면이 나오는 엑스트라를 하고는 ‘나한텐 이 길이 아닌가벼’, 싶어 다시 뉴욕으로 와서 취직을 했겠다, 원래 토미란 이름을 쓰고 싶어 예명으로 토미 윌헬름이라고 한 이 친구가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두었는데 염병을 한다고 대가리에 흰 털 돋자 새로 애인이 생겼겠다, 애인이 가톨릭 신자라 이혼을 하면 곧바로 결혼으로 이어질 것인데 우라질 마누라가 당최 이혼을 해주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아이들 양육비를 무한정 청구하겠다, 이 상황에 회사 잘리면서 자존심 상한다고 회사에다 욕을, 욕을 한 것 때문에 백기 들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동종회사에선 받아주지도 않고, 이 나이에 새로 신입사원으로 지원해도 뽑아주지 않겠다, 같은 호텔에 사는 돈 많은 은퇴한 아버지는 절대로 자신이 늙은 아들을 짊어질 생각을 하지 않아 죽고 싶은 마음을 무릅쓰고 호텔비 청구서를 대신 좀 갚아 주십사 해도 눈꺼풀 하나 깜짝하지 않겠다, 와중에 남아 있던 전 재산 700불을 사기꾼 탬킨 박사가 홀랑 자시도 토꼈겠다, 이 와중에 마누라한테 지급至急urgent한 일이 있으니 전화 바란다는 쪽지를 받고 전화를 하니 급하기는커녕 빨리 돈을 보내라는 거였다, 윌헬름이 아버지한테 바란 건 돈도 돈이지만, 돈은 두 번째고 아버지로서의 친절과 배려와 뭐 이 비슷한 건데 사랑하는 유대인 아버지는 재수 없게 진정한 유대인이라서 대가리 다 컸고 이젠 살아갈 날이 산 날보다 더 조금 남은 아들에게 돈이고 배려고, 친절이고, 네 에미 코딱지고 뭐 하나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이런 거.
 1956년 작품. 양차대전이 다 끝나고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 잡은 미국의 경제적 수도 뉴욕에 세상의 모든 돈이 모여 있던 시기. 이 눈부신 성장과 번영의 시기에도, 돈벌이에 관한 한, 특히 증권, 선물, 기타 금융이나 고리대금에 관한 한 경쟁자가 없는 유대인들 가운데도 이렇게 부적응자, 루저가 존재하고 있어서 바늘 끝만큼의 정처도 찾지 못하는 비극이 엄연하게 있었다. 이런 작품의 기본은 독자가 패배자를 안타깝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작가의 손길에 성패가 따른다는 것. 만일 이 의견에 동의하시면 <오늘을 잡아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거 같다.
 그저 미국이나 한국이나, 1950년대나 2010년대나, 너나 나나, 참 먹고 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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숄로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8
미하일 숄로호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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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하일 숄로호프의 대표 단편 <인간과 운명>과 대표 단편선집 『돈 강 이야기』 가운데 열세 편, 합해서 모두 열네 편의 단편 작품을 모은 책. 열네 편의 작품 몽땅 소위 말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리얼리즘 문학과 달리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쓰인 다분히 체제선정용 문학 장르라고 생각하면 비슷하다. 놀라운 것은 숄로호프가 <고요한 돈 강>을 발표하면서 작품 속에 카자크 족에 의한 반혁명 반란의 미화와 관련해 스탈린에 의해 내용에 관해 지적받은 적이 있으면서도 제 1회 스탈린 문학상을 받았다는 것. 이거 궁금했었다. 근데 이 책의 해설을 보니 막심 고리끼가 주선을 해 숄로호프가 스탈린을 직접 만나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고요한 돈 강>의 3부도 곡절 끝에 출판할 수 있었으며 상까지 타냈단다. 거기다가 “소련작가동맹회의 대표”란 감투까지 덜커덕 쓰게 되니 행운아라고 할 밖에. 아울러 막심 고리끼의 소련 내 끗발도 정말 대단하다. 하긴, 이름이 막심 고리끼, 우리 말로하면 “매우 쓰다”란 뜻이니.
 나중에 숄로호프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수용소 군도>를 출간하는데 정부 당국이 심통을 부려 출간은커녕 엮어 넣으려고 할 때, 표현의 자유의 편에 서서 솔제니친을 지지한다고 발표했음에도, 솔제니친은 숄로호프가 쓴 <고요한 돈 강>애 대하여 (숄로호프 사후인지는 모르겠다만) 표절시비를 제기했다고 한다. 난 솔제니친과 그가 쓴 작품은 다 싫어하는 안티 팬으로 글쎄, 숄로호프의 작품집 『돈 강 이야기』를 읽어봤으면 쉽게 표절시비를 할 수 없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는 한에서 말씀드리자면, 표절 논의가 누구 작품을 베껴 썼다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이가 쓴 것을 자기 이름으로 냈다는 걸로 아는데, 1999년에 자필 원고가 발견되고 이에 따라 어떤 유명한 이가 수행한 “원고에 기초한 방대한 연구 성과”를 계기로 논란이 진정됐다고, 이 책의 해설에 나와 있다. 하여간 난 솔제니친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솔제니친 건은 더 얘기하지 않겠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소비에트 리얼리즘에 관하여. 이 장르의 대표주자를 들자면 스탈린에게 숄로호프의 배알을 청할 정도의 원로 막심 고리끼와,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단 한 편의 작품으로 고리끼와 비견되는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주인공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공통점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으니,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이다. 이런 인간들을 다룬 대표적인 책이 피터 애클로이드가 쓴 <플라톤의 반란>. 서기 3,400년, 그들은 인류 최후의 혁명을 완수했다고 주장하는데, 혁명 후 러시아와 진짜 흡사하다.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은 완벽한 정의와 높은 이상,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가진 휴머니스트들의 출현.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자신의 신념에 대해 돌이켜보고 의심하는 변증법적 두뇌회전이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단순한 인간들. 뭐, 양보해서 고리끼나 오스트로프스키 같은 이들은 혁명 전 또는 혁명 중이었으니, 혁명의 완수를 위한 문화운동으로 일반 인민들의 의식화 교재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억지로) 이해해줄 수 있지만, 혁명 후에도 변하지 않고 유구하게 소비에트 리얼리즘 문학을 하는 이들은? 이해해줘야 한다. 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숄로호프만 보더라도 위대한 작품 <고요한 돈 강>에서 자신이 낳고 자란 땅, 돈 강 유역의 카자크 족들이 조상대대로 황제와 조국을 수호한 전통으로 반혁명군을 지지하여 적군赤軍과 교전을 벌이는 걸 다분히 호의적으로 썼다가 소련 땅에서 출간을 하느니 마느니, 콩밥을 먹느니 마느니 이 지경이 돼본 경험이 있지 않은가. 줄리언 반스가 쓴 <시대의 소음>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새로운 파시스트 스탈린이 보는데서 초연으로 올린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를 작곡했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CIA, 아니, KGB한테 잡혀가 총살을 당할지 몰라 잡혀갈 때를 대비해 (꼴사납게 잠옷 바람으로 끌려갈 수 없다고 생각해)집안에서도 정장 비슷하게 입고 있었던 딱 그 시절이다. 그때 <고요한 돈 강>을 썼다. 비록 작품을 출간하는 건 성공했을지라도 스탈린 죽을 때까지 심심하면 스탈린이 직접 “그 책 이 부분하고 저 부분은 내용을 좀 고쳐서 다시 찍어라.”라고 참견을 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 다음부터는 소위 소비에트 리얼리즘에 복무하는 작품들은 써야했지 않겠어.
 근데 왜 책에 나오는 열네 편의 단편소설 이야기는 안 하고 자꾸 숄로호프와 <고요한 돈 강>만 가지고 떠드느냐 하면, 만일 숄로호프를 읽어보고 싶으면 <고요한 돈 강>을 읽지 않으면 얘기가 되지 않으며, 그 책을 진짜 읽었다면 굳이 이 단편집까지 찾지 않아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 그 동네에서 벌어지거나 돈 강 유역을 지나가는 사람에 의한 과거회상(<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이며,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소비에트 리얼리즘을 돈 주고 사 읽으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결정은 당신이 하시라. 내 경우엔 <고요한 돈 강>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그의 단편소설집이 있는 걸 알고, 이럴 줄 번히 알면서 아주 나중에라도 그냥 한 번 읽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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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대표희곡 선집 2
한국극예술학회 엮음 / 월인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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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친 열 편의 대표 희곡을 담고 있다. 작가로는 임희재, 차범석, 이용한, 유치진, 이근삼, 천승세, 오영진, 오태석. 이 중에 차범석과 이근삼은 두 편의 작품을 ‘대표희곡선집’에 포함시키는 기염을 토한다. 또 유치진은 1931년에 쓴 <토막>이 선집 1편에, 이어 57년 작품 <산불>을 2편에 올림으로 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오영진도 1편에 1949년 작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2편에도 67년작 <해녀(海女) 뭍에 오르다>를 실었다. 좋게 이야기하면 차범석, 오영진 양 씨의 필력이 워낙 출중해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고, 약간 비틀어 생각하면 그만큼 우리나라에 극작가 풀이 일천해서 풍성하지 못한 작품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여길 수 있겠다. 한국극예술학회에서 편 <한국현대대표희곡선집>은 이렇게 단 두 권으로 끝난다. 20세기 말에 나온 시리즈의 원래 취지는 1990년대까지의 대표 희곡을 다 선정하는 것이었지만 이후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의 대표작품은 출판사 월인(月印)과 같은 회사인 “연극과인간”에서 김성희 선생이 선정한 열 편의 작품으로 대신하는 듯하다. 김성희 선생의 책에서도 다시 이근삼과 오태석의 작품을 하나씩 소개하는 바, 이근삼은 우리나라 대표 희곡 서른네 편 가운데 무려 세 편이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 책을 1편과 비교하면, 당연히 그동안 시대가 발전하고 외국문물도 보다 활발하게 유입된 것과 함께 해서, 본격적인 현대성을 획득하고 있다. 1950년부터 3년간 이어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자연스레 실존주의과 리얼리즘이 가장 활발하게 활약한 시기였으며 이런 경향은 희곡(또는 연극)에서도 두드러져 보인다. 물론 1930년대에도 백철이 슈프레히코어 같은 양식의 작품 <수도를 걷는 무리>를 선보이기도 했으나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실존주의적, 사실주의적 표현 속에서도 실험적 시도를 서슴지 않고 포함시키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거기에 이근삼을 비롯한 유학파를 기수로 보다 다양한 실험을 적용시키기도 한다, 한 무대를 쪼개 조명의 F.I와 F.O, 암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막을 대신하고 다양한 심리적, 환경적 표현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게 되기도 하는데, 해설에 의하면 영화의 기법을 차용한 결과란다.
 그러나 1960년대 까지, 물론 10여 년 전에 한국전쟁이란 거대한 사건의 영향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소재 역시 한국전쟁의 끄트머리의 불안정한 사회, 전쟁 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는 인간상, 제대군인들의 상실감 등이 중요한 소재로 대두되고, 한편으로는 복구시기 사회의 부조리, 부정부패, 물질만능 같은 걸 그리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천승세는 섬에 사는 가난한 어부의 비참한 삶을 리얼하게 보여주며, 오영진 역시 제주도의 가난한 황산포구에서 물질을 하며 아들 하나를 키우고 사는 해녀가 비정한 서울의 부르주아 사이에서 어떻게 희생되는지를 그려낸다.
 열 편의 희곡이며 565쪽에 달한다. 보통 희곡집이라면 대사 위주라 속도가 잘 나가지만, 이 책은 빽빽하게 장편 희곡을 담고 있어서, 요즘 시중의 희곡집으로는 대강 일고여덟 권의 분량에 해당한다. 정가가 11,000원. 10% 할인하면 만 원 내도 거스름돈 받는다. 소위 말하면 가격대비 가성비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극작가 면면을 보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이가 임희재. 누군지 아시려나? 1969년부터 70년까지 동양방송(TBC)에서 시청률 90% 이상을 자랑하던 드라마 <아씨>의 작가다. 임희재를 비롯해 당시 극작가들은 (연극을 하면 극작가가 됐든 배우가 됐든 배를 곯을 수밖에 없어) 유명세를 타게 되면 TV 드라마 제작에 더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이 말고도 이용찬 역시 극작가라기보다 라디오 연속극 작가, TV 드라마 작가로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천승세의 <만선>은 20대 중반에 읽어보고 이제 재독한 것. 천승세는 일반인 또는 국문학이나 문예창작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겐 <황구의 비명: 黃狗의 悲鳴>으로 유명하지만 1970년대에 장편소설 <낙과를 줍는 기린>이나 <사계의 후조: 四季의 候鳥>에서 엽기발랄하고 재기 넘치고, 화려무비한 대사를 무차별로 쏟아낸 전력이 있다. 물론 이 두 장편이 그의 초기 또는 전성기 시절의 리얼리즘하고 차이가 있어 널리 읽히지 않았는지 모르기는 하나 하여간 입심 하나는 죽여줬다. <만선>을 다시 읽으며 떠오른 생각은 애초 이이가 극작가로 등단을 해서 소설 속에서 특별히 독특한 대사를 만들어내는데 다른 작가들보다 월등히 유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중순에 강서구 신정동의 붐비는 시내버스에서 이 양반을 우연히 만나 천선생 아니시냐고, 이리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를 차렸더니 나더러 묻더라. 누구냐고. 그래 팬이라 했더니 멋진 콧수염을 기른 키 크고 잘 생긴 중년이 눈이 둥그래지며 알아봐서 고맙다고, 한 번 더 만나면 소주 한 잔 하자고, 자기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지만 다시 만나는 우연은 생기지 않았다. 이 양반 어머니가 1940년 들어 일본어로 글을 쓰느니 팍 붓을 꺾어버린 소설가 박화성 선생이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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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아이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2
외된 폰 호르바트 지음, 조경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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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작가 호르바트한테 가장 부러운 거. 젊어서 우화적 죽음을 맞았다는 것. 독일에서 퇴폐문학으로 낙인이 찍혀 이이의 작품은 전부 공연 불가, 출판 불가 판정을 받아 오스트리아로 갔지만, 사실 독일의 속국이었던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도 이하동문이라 그때부터 유럽 경향 각지로 방랑생활을 했고, 이 책을 비롯해 자신의 후기(그래봤자 30대) 작품을 안타깝게 네덜란드에서 출판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한 시절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걷다가 때마침 뇌성벽력이 치고, 벼락을 맞은 나무가 부러지면서 외된 폰 호르바트를 덮쳤는데, 이때 큰 가지에 머리를 맞아 뇌진탕으로 서른일곱의 아까운 나이에 그만 숟가락 놨다.
 흠. 갑자기 생각나는 독일 소설가 한 명. 토마스 브루시히. 이이의 책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에서 남태평양의 휴양지 야자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 때마침 떨어진 코코넛열매에 맞아 뇌출혈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데 (얼마나 감개무량한 죽음이든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혹시 브루시히가 이 호르바트의 죽음에 힌트를 받아 그렇게 썼던 거 아냐?
 로자 룩셈부르크가 죽고 사흘 만에 독일에선 총선거가 치러진다. 이때 거대정당이었던 사회민주당과 지잡당인 민주당과 중앙당이 뭉쳐 연립내각을 형성하고 소위 바이마르 헌법을 제창하면서 성립한 바이마르 공화국. 그러나 이 민주공화국은, ① 1차 세계대전 패전의 치욕을 힘겹게 견디며 ② 아직도 아리안족의 우수성에 대한 믿음이 넘치지만, ③ 여전히 열등한 민족들인 승전국의 과다한 핍박에 지친, 자국민들을 효과적으로 다독이지 못해, 1933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란 파시즘, 즉 나치에 의하여 괴멸된다. 1917년에 태어나 나치 치하에서 청년기를 맞은 주인공 ‘나’는 학교 졸업 후 근 5년을 실업자, 양아치, 노숙인, 좀도둑으로 살며 하마터면 경찰에 잡혀 호적에 붉은 줄 갈 뻔하기도 몇 번이었다. 아버지는 원래 잘 나가는 호텔의 웨이터로 괜찮게 살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한 쪽 다리를 절게 되면서 이젠 변두리 선술집의 웨이터를 하며 손님들이 던져주는 팁으로만 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로 떨어져 입만 뗐다 하면 정부와 국가에 대해 불만만 잔뜩 털어놓는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지!”
 딱 이 시점에 나는 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한다. 앞으로 있을 전쟁은 지난날의 세계대전과는 전혀 딴판일 것인데, 훨씬 규모가 크고, 거대하고, 가혹할 것이며, 여하간에 섬멸전이 되리라는 기대를 안고. 게르만 민족으로서 주변 잡다하고 열등하고 야만적인 언어를 쓰는 국가를 통합해 게르만의 영토를 확장하고,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위해 게르만 민족을 우두머리로 하는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일. 그걸 독일의 군대가 수행한다는 믿음으로. 국가가 지향하는 원대한 목표를 위하여 국민 개인의 희생은 반드시 필요로 하며, 희생된 개인의 영광은 천세를 넘어 영웅적 행위를 기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피 끓는 청춘이기도 한 화자. 놀이동산에 놀러갔다가 마법의 성이란 구조물에서 표를 파는 아가씨한테 넋이 나가기도 하고, 그녀를 (그녀의 눈에 띄지 않고)조금이라도 오래 바라보기 위해 맞은편의 가판대에서 진짜 맛없는 아이스크림을 두 개나 사먹으면서 턱을 떨어뜨리기도 하는 젊은이. 하지만 국가가 원해 화자의 애끓는 짝사랑에도 불구하고 아무 예고 없이 내전 중에 있는 작은 나라에 의용군으로 참전해 ‘청소하듯’ 원주민들을 쓸어버린다. 유럽의 질서를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마음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현지인들을 학살한다. 와중에, 저항하는 농민군들을 향해 자살하듯 권총 한 자루만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존경하는 대위를 구출하기 위해 몸을 날렸으나 대위는 기어이 고꾸라지고 ‘나’도 팔에 기관총 한 방을 맞아 팔뼈가 박살이 나고 만다.
 독후감이란 것. 예전처럼 ‘독서록’이란 이름의 노트에 나 혼자 볼 요량으로 쓴다면 나는 절대로 이렇게 쓰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곧바로 결론으로 들어가 퇴폐문학분자였던 호르바트의 글이 어떻게 그런 분류를 거쳐 분서갱유의 참담을 당했는지를 쓸 거 같다. 하지만 책을 사기 전에 누구나 읽어볼 수 있는 공개 서재에서 독후감을 쓸 때 그런 의견을 피력한다면, 이 독후감을 읽는 분은 책의 내용 전반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혹시 퇴폐문학이 아니라 퇴폐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경우엔 줄거리 말고 음악 고유의 것들이 추가되니 좀 덜 낭패할 텐데, 스토리가 절대 위주인 소설엔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맞을 거 같다. 이것만 얘기하며 마감하자.
 개인과 국가의 문제를 다룬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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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센덴 동서 미스터리 북스 130
서머셋 모옴 지음, 신상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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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왜 ‘어센덴’이라고 했을까? 원제는 Ashenden. 우리말로 쓰면 ‘어셴딘’ 정도로 읽힐 거 같은데. 뭐 소설가이자 중앙대 문창과 교수를 역임한 역자 신상웅 선생이 영문학 학사를 하셨으니. 근데 어째 좀. 179쪽에 독일 여자가 영국인 주인공 어센덴에게 이런 대사가 하는 게 나온다.


 “그런데 당신네 영국인도 음악을 아나요? 페어셀 이후 작곡가다운 작곡가는 한 사람도 없잖아요!”


 작품의 무대가 되는 시기가 1차 세계대전 중(1914~1918년)이다. 브리튼이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이니 독일인이 영국 사람한테 이렇게 비아냥거릴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페어셀’이라니? 헨리 퍼셀Henry Purcell이겠지. 이건 흔한 농담이거든. 영국엔 퍼셀 말고는 음악가가 없다든지 뭐라든지. (뭐 다울랜드Dowland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는 거지.) ‘페어셀’이 처음 든 의문이었다.
 처음이니까, 뭐 타이포typo 비슷한 걸로 생각했다. 근데 나중에 주인공 어센덴이 러시아 유부녀 아나스타샤 알렉산드로브나와의 연애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여자가 이혼하기 전에 만일 둘이 살면 행복할 수 있을까를 시험하기 위해 1주일 간 파리에서 짧은 동거를 실험하기 위해 도버해협을 건너는 씬이 몇 차례 나오는데, 출발지-도착지를 도버-카레, 카레-파리, 파리에서 한 판 잘 때려 놀다가 다시 파리-카레, 카레-도버라고 쓰는 거다. 프랑스 칼레는 로댕의 조각으로 유명한 바로 그 칼레, Calais다. 이 1주일의 여행을 통해 어센덴이 아나스타샤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건, 사실은 “그녀가 아니라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스트라빈스키, 바크스트 등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별한다. 그건 그거고, 굳이 Calais를 ‘카레’라고 하며, 바크스트는 누군지도 모르겠다. 구글에도 ‘바크스트’가 검색이 안 된다. 그러나 눈 밝은 이가 러시아 화가 레옹 박스트Leon Bakst를 일컫는 것이라고 밝혀냈다. 어쨌거나 제발 아니기를 비는 바이지만, 내가 아는 모든 세상의 언어 사용자 가운데 Calais를 ‘칼레’라고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본인밖에 없는 거. '선거'election을 '발기'erection과 동일하게 발음하는 사람들. 신상웅 선생이 1938년 일본 출생으로 Calais를 ‘칼레’가 아니라 ‘카레’로 발음할 수밖에 없는 일본어에 너무 능통해서 영어로 된 원서는 참고도 안 하고 그냥 일본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 헌책도 아니고 정가에서 10% 빠진 새 책을 산 이유가 서머싯 모옴이 쓴 ‘미스테리’ 책이란 것 때문이었다. 그래 기대한대로 책은 재미있었다. 어찌됐건 재미만 있으면 뭘 더 바라면 할 말 없지만 어떤 책을 번역했다는 말도 없이 오직 판권은 동서문화사(동판)에 있다고만 쓰여 있는 건 21세기엔 좀 그렇다. 동판. 고 김주혁 나오는 영화 <공조>에서 김주혁이 팔아먹으려고 막 총 쏘고, 사람 죽이고 그러는 게 다 백 달러짜리 위조지폐 ‘동판’ 때문 아냐? 동서문화사(동판)도 바로 이 ‘동판’을 의미한다.
 어쨌건 책은 재미만 있으면 된다. 맞지? 아니. 이제는 21세기. 우리는 해당 번역서가 어느 책을 원전으로 했는지 알아야 하며 원전을 출판한 회사에 합당한 로열티를 지불한 책을 원할 때가 됐다. 물론 동서문화사는 내가 알기로 지적재산권에 대한 법적 책임이 없다. 법이 발효되기 전에 번역한 책들이라서.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동서문화사가 잘못했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그 회사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안 줘도 되는 돈을 왜 주느냔 말이지. 다만 이 책도 초판이 1977년. 이젠 (보다)정당하게, 그리고 새롭게 번역한 책을 읽을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는 주장이다. 초판 나오고 40년이 넘었으면 이런 주장도 당연한 거 아냐?


 서머싯 모옴의 특이 이력 가운데 하나가 마지막 낭만적 전쟁이자 최초의 대량 학살 전쟁이었던 1차 세계대전 당시 스파이로 일했던 것. 당시의 경험은 소설가로서 그냥 묵혀둘 수가 없는 '경험자산'이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이젠 1차 세계대전의 스파이 경험담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 수 있고 즐길 과거사가 될 수 있을 때가 오자 드디어 숨겼던 경험을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작가가 다른 이도 아니고 윌리엄 서머싯 모옴. 아주 색다른 스파이 소설을 만들었다. 긴박한 사건과 폭력, 아슬아슬한 시한폭탄 같은 거, 거의 또는 별로 없다. 스파이 소설에서도 모옴의 관심은 오직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집중된다.
 모두 열여섯 장章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 또는 두 장이 한 묶음으로 한 부분이 되는 일종의 옴니버스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은 작가 어센덴이 첩보대장 R대령에게 스카웃되어 취리히를 베이스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를 누비면서 첩보활동을 하며 활동의 대상으로 만나는 열여섯 명을 관찰한 기록이다. 열여섯 명이 다 공작의 대상이 아니라, 심지어 첩보대장, 회유해서 이중 스파이로 만들어야 하는 적 쪽의 스파이, 특정 국가에서 만난 영국과 미국의 대사, 재판은 하지 않았지만 총살형이 확정된 매국노, 볼셰비키 혁명의 와중에 계약서 도장 받으러 아시아 횡단 열차를 탄 미국 회사 직원, 살인청부업자 등등 천태만상이다.
 재미있다. 그러나 모옴의 다른 작품들 중에 워낙 흥미진진한 것들이 많아 이미 그런 것들을 읽어보신 분에게 책을 읽어보라 권한다면 잘못하면 귀싸대기나 한 방 얻어터지기 십상.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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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0-18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 책인데...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해서 나오면 좋겠네요. 하하하하.

Falstaff 2018-10-18 10:14   좋아요 0 | URL
저도 새로 나올 책의 잠자냥님 평을 기다리겠습니다!
모옴이면 진짜 새로 번역할 만한데 아직 나오지 않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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