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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잡아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솔 벨로우 지음, 양현미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솔 벨로Saul Bellow는 처음에 <오기 마치의 모험>을 읽고 지루해 미치는 줄 알았었다. 펭귄클래식에서 세 권, 1,400 쪽 넘는 장편으로 나오는데, 그때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하여간 읽어내기가 참 힘들었다. 함께 사놓은 두 권짜리 <허조그>도 그러려니 싶어 읽기를 뒤로 미루어 놓았던 기억이 있다. 날자가 좀 지나 <허조그>를 읽으니까, 같은 이태동 번역이었는데도 이건 또 참 재미있고 공감이 가는 거였다. 그래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비의 왕 핸더슨>까지 독파했다. <비의 왕 핸더슨>도 참 재미나게 읽었다. 인류학적 지식이 좀 있으면 더 재미있었을 소설이었다. 다른 분들한테도 권할 만하더라. 이때쯤 해서 또 다른 솔 벨로의 작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번으로 나온 <오늘을 잡아라>가 언제 품절이 풀리나 한정 없이 기다리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품절이 아니라 절판 상태로 접어들고 만다.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 170번으로 <오늘을 잡아라> 대신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썩은 잎>을 새로 찍어버렸으니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분명 미국 솔 벨로 재단과, 또는 역자와의 계약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헌책방에도 별로 보이지 않아 혹시나 하던 중, 인터넷 헌책방에 한 권이 느닷없이 눈에 띄어 서슴지 않고 집어 들었다.
이거? 재미있다. 재미라기보다, 내가 뭘 알겠는가마는 굳이 말을 하자면,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 토미 윌헬름이 뉴욕의 자본주의와, 어떤 방식으로 간에 시대에 제대로 적응한 적자適者fittest들과 맨몸으로 부딪혀 새빨갛게 부서지는 모습에 공감할 수 있게 작품을 만들었다. 이런 책은 절판시키면 안 되는 책으로 분류해야 할 거 같은데, 한국의 자본주의도 이젠 뉴욕만큼 사나워져서 돈이 안 되는 책으로 판명나면 얄짤 없나보다.
책은 200쪽에 달해 분량으로 굳이 분류를 한다면 중편 또는 짧은 장편이라 할 수 있겠다. 무대는 뉴욕의 글로리아나 호텔과 주변에 위치한 증권회사와 광장의 카페와 담뱃가게 등에 국한되며, 내용 역시 이젠 흰머리가 섞인 금발의 배 나온 중년 토미 윌헬름이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모든 돈 700 달러를 전형적인 사기꾼 탬킨 박사한테 홀랑 날려버린 날의 아침부터 오후까지로 한정한다. 물론 윌헬름이 멀쩡하게 아내와 두 아이가 사는 집에서 나와 하필이면 이젠 은퇴한 성공한 내과의사인 친아버지 애들러 박사를 포함해 혼자 사는 노인들이 주요 투숙객인 글로리아나 호텔에 살 수밖에 없으며, 어떤 이유로 한 때는 영업이사의 자리를 노리다가 지금은 실업자 처지로 전락했는지도 책을 관통해 중요한 이야기 거리로 등장하기는 한다.
지금은 절판이라서 여간해 읽어볼 기회가 없는 책이니 내용을 좀 이야기해드릴까?
애들러 박사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겠다. 그 중에 ‘윌헬름 애들러’라는 젊은이가 있는데, 이 아이가 생긴 게 멀끔하고 판판하여 대학 다닐 때 학교신문에 사진이 나온 적이 있었겠다, 이걸 본 영화사 말단 기사 하나가 애한테 편지를 해서 카메라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했겠다, 테스트를 해보니 스타는 아니더라도 주인공한테 애인 뺐기는 조연 정도는 하겠다, 그래 다니던 학교 2학년을 마치고 아빠, 엄마, 누이하고 대판 싸운 다음에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LA로 날아가 영화판을 무려 7년이나 떠돌아다니며 딱 한 장면이 나오는 엑스트라를 하고는 ‘나한텐 이 길이 아닌가벼’, 싶어 다시 뉴욕으로 와서 취직을 했겠다, 원래 토미란 이름을 쓰고 싶어 예명으로 토미 윌헬름이라고 한 이 친구가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두었는데 염병을 한다고 대가리에 흰 털 돋자 새로 애인이 생겼겠다, 애인이 가톨릭 신자라 이혼을 하면 곧바로 결혼으로 이어질 것인데 우라질 마누라가 당최 이혼을 해주지 않고 날이면 날마다 아이들 양육비를 무한정 청구하겠다, 이 상황에 회사 잘리면서 자존심 상한다고 회사에다 욕을, 욕을 한 것 때문에 백기 들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동종회사에선 받아주지도 않고, 이 나이에 새로 신입사원으로 지원해도 뽑아주지 않겠다, 같은 호텔에 사는 돈 많은 은퇴한 아버지는 절대로 자신이 늙은 아들을 짊어질 생각을 하지 않아 죽고 싶은 마음을 무릅쓰고 호텔비 청구서를 대신 좀 갚아 주십사 해도 눈꺼풀 하나 깜짝하지 않겠다, 와중에 남아 있던 전 재산 700불을 사기꾼 탬킨 박사가 홀랑 자시도 토꼈겠다, 이 와중에 마누라한테 지급至急urgent한 일이 있으니 전화 바란다는 쪽지를 받고 전화를 하니 급하기는커녕 빨리 돈을 보내라는 거였다, 윌헬름이 아버지한테 바란 건 돈도 돈이지만, 돈은 두 번째고 아버지로서의 친절과 배려와 뭐 이 비슷한 건데 사랑하는 유대인 아버지는 재수 없게 진정한 유대인이라서 대가리 다 컸고 이젠 살아갈 날이 산 날보다 더 조금 남은 아들에게 돈이고 배려고, 친절이고, 네 에미 코딱지고 뭐 하나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 이런 거.
1956년 작품. 양차대전이 다 끝나고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 잡은 미국의 경제적 수도 뉴욕에 세상의 모든 돈이 모여 있던 시기. 이 눈부신 성장과 번영의 시기에도, 돈벌이에 관한 한, 특히 증권, 선물, 기타 금융이나 고리대금에 관한 한 경쟁자가 없는 유대인들 가운데도 이렇게 부적응자, 루저가 존재하고 있어서 바늘 끝만큼의 정처도 찾지 못하는 비극이 엄연하게 있었다. 이런 작품의 기본은 독자가 패배자를 안타깝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작가의 손길에 성패가 따른다는 것. 만일 이 의견에 동의하시면 <오늘을 잡아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거 같다.
그저 미국이나 한국이나, 1950년대나 2010년대나, 너나 나나, 참 먹고 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