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과거 을유세계문학전집 131
드리스 슈라이비 지음, 정지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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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읽는 슈라이비. 그는 1926년 프랑스령이었던 모로코의 마자간에서 파트미 페르디와 그의 독실한 이슬람교 아내 사이에서 소설 중에는 일곱 형제, 순서대로 카멜, 드리스, 압델 크림, 나짐, 마디니, 자드, 하미드 가운데 둘째 아들로, 실제로는 (역자의 주장에 따르면) 세명의 누이를 포함한 열 남매의 일원으로 마자간, 현재 지명으로 엘 자디다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엔 다른 형제와 같이 기숙 쿠란 학교에 다니다가 라바의 프랑스계 ‘게수 초등학교’에 다녔다. 시설도 형편없고 저승사자 같은 교사한테 학대 비슷한 교육을 받다가 프랑스 학교에 들어갔으니 갑자기 뇌활동이 활발해져 눈부신 학업성취를 이끌어 냈다. 저절로 큰 기대를 갖게 된 아버지 슈라이비 씨는 드리스를 카사블랑카에 있는 프랑스 “기독교” 사립 리세 리예 고등학교에 입학시키는데, 여기서도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작문, 독일어 등 주요과목은 최우등이거나 차석을 차지해 일찌감치 “신세계”를 배우기 위한 재목으로 선택받기에 이른다. 근데 문제는 이게 위키피디어에 나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쓴 소설 <단순한 과거>의 한 대목이라는 점. 하지만 나는 그게 사실일 거라고 믿는다.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1954년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에 발표한 데뷔작 <단순한 과거>가 자서전과 소설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니까. 막내아들 하미드가 실제로는 뇌수막염으로 죽었고 엄마는 여든 살이 넘게 장수한 반면, 소설에선 막둥이는 아버지한테 맞아 죽었으며 엄마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이 다르다고 했다.

  드리스 슈라이비가 <단순한 과거>를 발표해서 데뷔작부터 스타덤에 오른 다음 해 1955년에 카틀린과 결혼해 다섯 아이를 낳았고, 1978년에 스코틀랜드 여성 시나 맥칼리언과 재혼해 또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으니, 도대체 언제까지 낳은 거야? 그건 아빠 닮았구먼.

  위의 두 문단을 보면, 실제로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소설 속에서 아버지 파트미 페르디, 실제로는 진짜 자기 아버지 파트미 슈라이비 씨일 수도 있는 아버지는, 설마 고의로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한 순간 열을 받아 휘두른 주먹으로 막둥이 아들을 때려 죽였으며, 얼마 후 자기 주관이라고는 1도 없이 그저 어려서는 아버지, 커서는 남편, 늙어서는 아들들, 삼종지도의 길만 충실하게 걷던 어머니도 삶에 얼마나 넌더리가 나던지 그냥 창문에서 자유낙하를 감행해 자살함으로써, 위대하신 알라의 품에 들지 못하고 억겁을 세월을 지옥의 유황불에 불살라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니 주인공 드리스 페르디가 프랑스로 유학길을 떠나기 전까지 시절을 묘사한 이 소설에서 가정의 폭군으로 존재한 아버지와 (요새 이런 말이 유행이던데) 시스템 적으로 그런 폭군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던 이슬람 문화,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아 부정은 하지 못 할지언정, 이슬람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반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보면 이 소설이 나온 1954년은, 모로코를 위시해서 튀니지와 알제리, 이렇게 마그레브 지역에서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모로코에서 영재로 인정받아 식민 모국인 프랑스로 유학을 해 화공학을 전공한 미래의 모로코 인재라는 작자가 모국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써서, 이슬람교와 모로코의 가치와 문화에 거칠게 저항했다는 점이 당시 모로코 식자들한테 매우 마땅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같은 프랑스 기독교 학교에 다니더라도 프랑스인 또는 백인이 아니라 모로코인이 학생일 경우에 받아야 했던 차별 같은 것도 묘사가 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괴물 폭군 아버지와 이슬람의 비합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문화에 대한 저항이 하도 커서, 프랑스 백인 문화에 대한 반감을 모국의 독자들이 체감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라마단. 난 이게 뭘 말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허공에 해 있을 때 밥 안 먹는 날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라며? 무함마드가 쿠란의 첫번째 경구를 받은 날을 기념하는 거란다. 올해는 3월 10이부터 4월 8일까지라고. 이슬람에 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서 갑자기 내 입도 무거워진다. 그래도 쿠란의 경구를 받았으면 좋은 날 같은데 왜 밥을 안 먹지? 드리스 슈라이비에 의하면 마시지도, 먹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섹스도 못하는 기간이라고 한다. 책을 열면 첫 장면이 라마단의 스물네 번째 밤이다. 때는 1940년대 초. 모로코의 전통이 깊은 도시 페스 거리엔 훈족처럼 거지들이 떠돌았고, 이 거지들은 지난 13세기부터 천삼백 년 동안 내려오는 이슬람의 종이었던 같이 ‘나’ 드리스 페르디는 이슬람교의 결정체인 군주의 종 신세였다. 여기서 말한 ‘군주’가 바로 아버지 파트미 페르디를 일컫는다. 페스 시 앙고라 거리에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집에서 군주는 상체를 똑바로 펴고, 앞을 똑바로 보고 앉아 있다. 별로 차갑지는 않았지만 권위적이었고, 별로 권위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앞에 서기만 하면 그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들은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집에서는 전지전능했다는 것이다. 3년 간 성지순례를 다녀온 아버지. 성지에 가 검정 돌에 손을 대고 묵상을 한 사람들에게 부치는 단어 ‘핫지’를 이름 앞에 달아 ‘핫지 파트미 페르디’라고 불리는 차tea 전문 도매상인.

  핫지 파트미 페르디의 일곱 아들은 태어나면 1년 동안 젖을 먹고, 2년 동안 울었다. 이게 유아기에 할당된 최소한의 자유 시간이었고 이 기간이 지나면 곧바로 공포 속에서 자라며 침묵을 배워 나갔다. 이렇게 엄한 훈육이 다 선한 인간을 만드는 건 아니라서 맏이 카멜은 아무 생각 없고 무책임했으며 주인 앞에서 완벽한 꼭두각시 노릇을 했지만 집 밖에 나가기만 하면 할 짓은 다 하고 다녔다. 라마단 24일차 밤에도 카멜은 식구들이 자기를 기다리느라 밥도 안 먹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명백하게 술에 취한 채 다 늦게 사창가에서 귀가했다. 드리스는 아버지 앞에 따로 앉아 있고 나머지 다섯 아이들은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어 벽에 드리운 다섯 그림자로 불안한 시간과 배고픔을 견디고 있었고. 살벌한 우리의 군주. 당장이라도 가볍지 않은 폭력이 발생할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 어머니는 기도한다.

  “저의 군주이자 주인에게 헌신하는… 그리스인과 러시아인의 성자들이시어, 작은 사고가 나거나, 계단에서 넘어지거나, 알 수 없는 세균에 감염되거나, 독일군 폭탄이 터지거나, 아무거나 좋으니, 저를 죽여주세요…. 그리스인과 러시아인의 성자들이시어…….”

  그리고 드디어 군주는 카멜의 몸을 잡아 벽에 밀쳐 누르고, 내동댕이친다.

  “이것이 다 네가 자랑스럽게 마신 포도주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네가 조금 전에 품었던 반항심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칼 내놓아라.”

  집안 저 구석에 버려져 있던 주머니칼을 시간 날 때마다 닦고 기름치고, 날을 세운 칼. 형이 들어오면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서 칼날을 군주의 목에 꽂아버리겠다고 각오를 다지던 칼이었다.

  군주가 내리는 가장 큰 벌. 그건 여기, 집에서 머무는 것. 각자는 파렴치한 행동과 증오와 과부생활과 분노를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특히 너, 드리스 페르디. 하루 종일 굶은 나는 저녁 식사를 거절하고 일어난다. 너무 오래 기다려 배 고프지 않았고, 내일부터 더 이상 금식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군주가 하사한 보리빵 한 덩이는 창문 밖 거지에게 적선해버렸다.


  이렇게 극단으로 치닫는 부자관계. 사회적으로도 억압적일 수 있는 이슬람 문화. 프랑스 학교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차별. 프랑스 학교에서 바칼로레아 시험을 보아 압도적 성적을 거둔 드리스. 그러나 면접관에게 드리스는 요구한다.

  “제 요청은 이곳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선생님,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는가요? 예를 들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든가, 영광스럽게도 친근하게 대해 주었는데 오히려 저의 태도에 격분하셨다든가? 제가 혁명가의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든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하실 말씀이 있나요?”

  면접관은 마지막으로 남은 최종 심사에서 빵점을 주겠다고 협박하지만 드리스는 오히려 평온하다. 이제 세상에서 드리스는 완전한 소외를 만나게 된 것.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한 명은 누구? 죽으나 사나 군주, 아버지 밖에 없었다. 전쟁과 미군에 의하여 사업이 결딴난 줄 알았던 군주는 카사블랑카 근방에 어마어마한 땅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 토마토 농장을 만들고 있었는데, 거 참, 잘 나가다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로 군주가 먼저 드리스에게 화해를 청하고, 면접관은 모종의 거래를 통해 빵점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화공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괴물 아버지. 많이 읽었다. 그의 난데없는 화해신청. 그거 가능해?

  어떻게 하다 보니 결론을 말해버리고 말았네? 정말 이렇게 끝나냐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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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3-29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진위청, <번화>
화요일. 이사벨 아옌데, <비올레타>
목요일. 그레이엄 그린, <코미디언스>
금요일. 존 밴빌, <케플러>
아옌데, 그린, 밴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건?
 
한스 암슈타인 / 친구들 / 꿈속의 집 / 렘볼트 혹은 어느 주정뱅이의 하루
헤르만 헤세 지음, 이인웅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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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의 유작. 헤세의 세 번째 아내이자 마지막 아내이며, 그와 함께 묻힌 유일한 아내인 니논 헤세는 남편이 죽은 후 1965년에 열다섯 편의 유작을 모아 《Hermann Hesse: Prosa aus dem Nachlass》, 대강 “헤르만 헤세의 산문 유품” 정도로 읽히는 책을 발간한다. 출판사 지만지의 “편집자 일러두기”에 분명하게 이렇게 쓰여 있다. 이 가운데 역자가 “작품성이 높은 네 작품을 선정해 번역한 것”이 이 책이다. 본문은 215페이지에서 끝난다. 이후에 해설이 35페이지, 헤세의 연보가 12페이지, 역자 소개와 저작, 그리고 논문 목록이 31페이지 달려 있다. 즉 안 읽어도 인류평화에 그리 영향을 주지 않을 분량이 78페이지에 이른다. <한스 암슈타인>은 31쪽, <꿈속의 집>은 49쪽, <렘볼트 혹은 어느 주정뱅이의 하루>는 15쪽 밖에 안 되는데 부속 잡글이 78페이지라고? 이미 생을 마감한 이인웅 전 외국어대 교수의 논문 목록을 알고 싶다고 내가 언제 말한 적 있어? 이래놓고 정가가 22,800원이다. 원서가 열다섯 편의 산문, 번역서가 여기서 달랑 네 편 싣고 말이지. 저번에도 그러더니 지만지 또 이 지랄이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 읽었어도 이렇게 열이 풀풀 나는데, 행여 내돈내산 했으면 심장병 도질 뻔했다.


  나는 유고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냥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에 끌려 읽었지, 유고집이란 건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헤르만 헤세가 왜 젊은 시절에 쓴 글을 발표하지 않았을까? 그거 눈에 보이는 거 같지 않나? 왜 작품을 쓰다가 중도에 쓰기를 그만 두고 책상 서랍에 쑤셔 놓았는지 뻔할 뻔 자 아냐? 그럼에도 이 책을 읽은 건 헤르만 헤세였기 때문이다. 결론은 헤르만 헤세가 아니라 헤르만 허세. 역시나.

  제일 앞에 실은 <한스 암슈타인>은 한스 암슈타인이라는 철부지 청년의 줏대 없는 사랑 이야기. 1903년이니까 분명히 20세기 작품이지만 괴테나 휠덜린이 눈썹을 휘날리던 18세기 시절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헤세 여사님도 책에 관해 조예가 깊었던 걸로 쓰여 있다. 그러면 이런 작품은 남편의 유지를 유념해서 그냥 불 싸질러야 마땅하지, 이렇게 책으로 내 놓으면 어쩌냐는 말이다. 한 번 활자로 찍히면 죽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을.

  <친구들>은 가장 긴 소설로 125쪽 분량이다. 하지만 그동안 읽었던 헤세의 작품에 다 들어 있는 내용이다. <데미안>과 <싯다르타> 등등. 출연진들이 대학생인 것만 다르고.

  나머지 두 편의 미완성 작품은 입에 올리기 싫다. 이런 책은 읽지 않는 것이 속 편하고, 내지 않는 것이 국가 경제를 위해 이바지하는 일이요, 아마존 밀림의 보존에 기여하는 일이다. 말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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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03-28 0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심 화나심이 보입니다. 저도 공감해요. 유고집 저도 신뢰하지 않는데 작가가 생전에 출간하지 않은덴 다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본인이 젤 잘 알죠. 그걸 굳이 굳이 찾아내 출판하고 낭비하고 이름에 먹칠하고... 왜 그러는걸까요...
저도 알지만 말을 않겠습니다. 엊그제 저도 당한 일이라...
이건 당한 거예요^^

Falstaff 2024-03-28 16:13   좋아요 1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이제야 PC 앞에 앉았군요.
지만지가 이런 짓 자주 합니다. 특히 단편집 원본에서 한 두 작품만 떼어 단행본 한 권 만드는 일이요.
이 책은 유고집 유감에다가 지만지 출판사가 하는 짓까지 다 합해서 왕창 열 받았답니다. ㅎㅎㅎ 열 내봐야 뭐합니까, 명만 줄지요.
 
사마르칸트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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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로망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에서 시작해 요동반도, 베이징, 시안, 티벳을 거쳐, 아니면 몽골과 고비사막을 건넌 후, 카슈미르 고원을 거쳐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그리고 이곳에서 길이 갈려 투르크메니스탄, 이란으로 갈 수도 있고, 북쪽의 카자흐스탄, 러시아를 건널 수도 있는 멀고 먼 황야, 그러나 곳곳에 숨은 보석 같은 아름다운 광활함에 대한 경의 또는 로망, 선망. 이런 꿈을 갖고 있으니 <사마르칸트>라는 제목의 책을 어떻게 읽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작가 아민 말루프는 레바논에서 태어나 베이루트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 생활을 하다 내전이 벌어지자 1976년에 프랑스로 귀화해 살며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 이이와 비슷한 사람 가운데 <프랑스어의 실종>, <사랑, 판타지아>, <알제의 여인들>을 쓴 아시아 제바르도 있다. 제바르는 알제리 출신인 것만 다르다. <사마르칸트>는 1988년 작품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의 역자 이원희가 1997년에 번역 출간했으나 절판 상태로 세월을 보내다 이번에 “교양인” 출판사를 통해 보완 개정판으로 나왔다. 역자가 직접 말했다. “역자는 당시 이슬람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많이 미흡했던 번역을 보완하여 개정판을 내게 되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밝힌다”고. 좋다, 독후감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하겠다. 역자는 “이슬람에 대한 정보와 이해 부족”을 탄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우리말을 매끄럽게 읽히게 할 수 있을까를 조금만 더 고민했으면 좋았겠다고. 이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특히 두 번째 파트로 들어서면 갑자기 우리말 문장의 질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음에도 읽는 게 지겨운 상태로 떨어지고 말았다. 어,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졌나? 싶어 세수하고 와서 읽어도 마찬가지다. 그래 다시 몇 페이지 앞으로 와서 읽기 시작했더니, 암만해도 퇴고가 소홀했던 것 같다. 역자가 혹시 이 독후감을 읽을 지 모르겠다. 당연히 불쾌하고 마음도 상하겠지만, 부탁이니 그저 한 아마추어가 읽기에 그랬나 보다, 하고 웃으며 지나갔으면 좋겠다.


  《루바이야트》라고 아시는가?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페르시아의 시인, 천문학자, 수학자 오마르 하이얌이 쓴 것을, 19세기에 영국인 에드워드 핏제럴드가 번역해 세상에 내놓은 시집이다. 우리나라엔 민음사, 오정인쇄에서 나온 건 절판이고, 지금은 지식을만드는지식, 지만지 시선집 시리즈로 팔고 있다. 시는 시인데, 당시 왕족, 귀족 등의 식자층은 일반 서민 대중의 노래라고 천시하던 “루바이”라고 부르던 4행시 75편을 모은 책이다. 현대의 평론가, 학자들은 그러나 이 책에 실린 4행시를 정말 오마르 하이얌이 쓴 것인지 의심하고 있다. 말은 그래도 상당부분을, 사실상 에드워드 핏제럴드가 쓴 작품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고 한다. 루바이 한 편을 읽어보자.


  여기 나무 그늘 아래 빵 한 덩어리

  포도주 한 병, 시집 한 권 – 그리고 황야에서도

  내 곁에서 노래하는 그대가 있으니 -

  황야도 낙원이나 다름없구나. (《루바이야트》, p.11, 지만지 2020)


  오마르 하이얌은 페르시아 사람, 정확하게 ‘니샤푸르’라는 곳에서 아브라힘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이란 북동쪽 호라산에라자비 주의 비날루드 산기슭에 있는 도시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흘러 들어오는 마약 때문에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뭐 그런가 보다. 이 시에서 중요한 건 당연히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셀주크 제국에서 포도주 한 병과, 내 곁의 그대, 즉 연인에 관해 노래했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물론 당시에도 이슬람 종파 간에 강경과 온건파가 갈려 있었지만 내놓고 이런 시를 쓴 건 놀라운 일이다. 작품 속에서 하이얌이 두려워한 것이 자신이 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었고, 가장 두려워한 것은 대중이었다. 바보 같은 “대중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존심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라나? 이런 의문은 곧 풀린다.

  하이얌이 스물네 살 때. 사마르칸트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당시였다. 거리에서 초라한 몰골의 가난하고 비참한 노인이 스무 명 가량의 장정들에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하이얌이 보니 늙은 자베르. 하이얌이 태어나기 11년 전에 죽은 아부 알리, 당대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며 모든 학문의 왕으로 이성의 사도로 숭배했던 아부 알리 이븐시나, 서양에서는 아비센나라고 부르던 큰 학자가 자신의 형이상학과 의학의 후계자로 여길 정도로 가장 총애했던 제자, 자베르였다. 그러나 자베르는 자기 사상을 너무 거침없이 공언하는 바람에 대중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번 옥살이를 하고, 세 번이나 공개 태형을 받아 정신이 이상해져 비참한 말년을 보내던 중이었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하이얌이 장정들 앞에 나서 자기 이름을 밝히고 괴롭힘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자, 얼굴에 칼자국이 난 젊은이가 오마르 하이얌을 향해 “호라산의 별이요, 페르시아와 이라크의 천재요, 철학자들의 왕자인 고명하신 오마르”라고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걸더니, 일단 괴롭힘을 멈추는 대신 사형까지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연금술사”라는 죄목으로 오마르 하이얌을 고발해버렸다.

  샤리아 법정의 판관을 가리키는 “카디” 아부 타헤르는 칼자국 청년을 꾸짖어 물리친 후 하이얌에게 말한다.

  “자네에게 귀한 능력을 주신 신께서 또한 현명함, 침묵할 줄 아는 지혜도 자네에게 주셨기를 바라네. 그것이 없다면 그 어느 것도 존중될 수 없고, 지켜질 수도 없다는 걸 잊지 말게. 지금은 비밀과 공포의 시대라네.”

  그리고 나무상자를 열고 책 한 권을 꺼내 엄숙한 몸짓으로 오마르에게 주었다. 256쪽의 백지로 되어 있을 뿐인 책. 최고급 중국 종이 ‘카키드’로 묶은 책으로 읽는 용도가 아닌, 오마르 하이얌에게 시구가 떠오르면 기록을 하고 절대 비밀로 남기라 한다. 그러니까 시를 쓰기는 하지만 결코 다른 이에게 보여주지 않은 책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 카키드 종이로 묶은 책에 1백에서 2백 수의 시를 썼다고 추측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에드워드 핏제럴드는 75편을 번역했다고 주장했다. 시를 쓰고 보관을 비밀로 했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의 시인은 술과 연인을 노래할 수 있었고, 그것을 남길 수도 있었던 것.

  오마르 하이얌은 수학자이기도 하다. 미지수 x를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이다. 그래서 수학 이야기. 카디 아부 타헤르는 왜 하필이면 256쪽의 책을 주었을까? 생각보다 많은 분이 알고 계실 듯. 큰 전지를 반으로 자르면 두 장이 나온다. 그걸 다시 반으로 자르면 네 장. 이렇게 해서 일곱 번 자르면 128장이 나오고, 128장이면 256쪽이 된다. 즉 2의 8제곱. 반도체의 용량도 이 법칙을 따른다. 1M DRAM, 2, 4, 8, 16, 32, 64, 128, 256M DRAM. 수학은 삶의 곳곳에, 생각보다 많은 곳에 숨어있다.


  책은 모두 4부part로 되어 있다. 1부와 2부는 오마르 하이얌이 살면서 시를 쓰게 되는 사연과 그의 사랑과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가 있던 카라한 왕조, 이 왕조를 간접 지배한 셀주크 제국을 넘나드는 11, 12세기 페르시아의 격랑과, 격렬한 역사와 종교 계파의 혼돈 속에서 시를 쓰고, 책이 사라지는 과정을 그렸다. 3부와 4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로 순식간에 8백년이 흐른 다음이다.

  1912년 4월 14일 밤과 15일 새벽 사이, 뉴펀들랜드의 난바다에서 거대한 호화선, 결코 침몰하지 않을 바다 위의 궁전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부딪혀 옆구리가 찢어지는 바람에 결국 대서양 해저로 가라앉을 당시, 일등실의 손님이었지만 하마터면 물고기 배 속에 장사지낼 뻔한 벤자민 O. 르사즈 씨가, 보트를 가지고 있어 노를 잘 젓는다는 이유로 여성들만 태운 구조정에 올라 목숨을 건졌으나 타이타닉 호의 금고 속에 보관하고 있던 《루바이야트》는 배와 함께 대서양 해저로 가라앉을 때까지, 책의 발견과 보관과, 역시 르사즈 씨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문제도 있는(것 같은) 책이다. 같은 저자, 같은 역자의 다른 책 <타니오스의 바위>도 곧 읽을 예정이다. 기대도 하지만 걱정도 있다. 뭐 사는 게 다 그렇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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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파크
유디트 헤르만 지음, 신동화 옮김 / 마라카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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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열일곱 편의 짧은 이야기를 담은 선집.

  내가 사랑했던 20~30대 70년 개띠 독일여성 유디트 헤르만도 어느새 2016년, 40대 중년이 됐고, 이제 소설 속 주인공 역시 중년과 노년의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 시기를 맞았다. 이이의 새로운 작품집 《레티파크》가 시중에 깔린 것을 보고, 《여름 별장, 그 후》, 《단지 유령일 뿐》, 《알리스》에서 경험했던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를 여전히 구사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헤르만의 문장은 흘러나오는 것이라기 보다 갈고 쪼아서 만들어내는 거라고 봐 애초부터 다작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고, 장편소설은 더 애를 먹을 거라 짐작했다.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이이가 두 편의 장편소설도 출판했는데, 장편이라고 해도 2백쪽에 미치지 못하는 분량이라고, 역자 해설에 쓰여 있다. 두 장편이 나온 시기가 2014년과 2021년임에도 아직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나라 출판계가 혹시 장편소설로의 경쟁력을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실제로 헤르만의 단편집 세 권은 민음사에서 나왔으나 《레티파크》는 마라카스라는 신생 출판사가 찍어, 한국어 출판계약도 조금 변한 거 같기도 하고.

  독후감 시작도 하기 전에 어째 시선이 삐딱한 거 같다. 이 책이 본문만 241페이지. 열일곱 편의 짧은 단편이 실렸으니 한 편당 14쪽 분량이지만 이 가운데 적어도 두 쪽은 각 단편의 문지방으로 사용했고, 각 작품이 홀수 페이지로 끝나면 다음 짝수 페이지는 공백으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니 말이 241쪽, 편당 14쪽이지 그냥 열 쪽, 다섯 장 분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하여 “짧은 단편”, 단편이라고 하면 충분할 것 하나 더 붙여 “짧은” 단편이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건 나도 그렇고, 역자도 그랬던 듯하다.

  아무리 단편소설이라도 그래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이렇게 초단편을 남발하면 이걸 장편소설이라고도 하는데, 이때의 장은 길다는 뜻의 장長이 아니라 손바닥 장掌을 써서 장편소설掌篇小說, 손바닥 한 면이면 충분할 분량이라고 우스개를 날릴 수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오늘 아침에 읽기 시작해 오후 두 시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물론 점심도 먹었다. CJ 덮밥, 강된장보리비빔밥. 열일곱 편을 읽었지만 다 고만고만해서 탁 떠오르는 것도 없고, 어째 그래, 허벅지를 탁, 치며 그렇지! 이렇게 감탄한 적도 없다. 물론 어제가 쇤네 생일이라고, 기쁘다 구주 배셨네, 만 백성이 노래하는 2월 25일이라고 가족들이 다 모이는 바람에 낮술부터 과해 오늘 컨디션이 영 말이 아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하여간 그랬는데, 괜히 하루를 망가뜨린 것 같은 기분은, 유디트 헤르만, 이 사랑스런 여성의 작품이라고, 기대가 과하게 컸던 반작용일 수도 있다.

  오늘 느낀 점. 작가한테 함부로 정 주지 말자. 독후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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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3-25 07: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월 25일 생신을 3월 25일에 알게되어 축하드려요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4-03-25 09:37   좋아요 1 | URL
생신은 3월 25일, 오늘이신 거 같아요. 폴스타프 님이 아직 숙취라 날짜를 2월 25이라 착각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ㅋㅋㅋㅋ

건수하 2024-03-25 09:57   좋아요 1 | URL
음력 아닐까요?

망고 2024-03-25 10:11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님 생신 날짜의 미스터리🤔

잠자냥 2024-03-25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신축하드립니다~!! ˝숙취야 빨리 물러가라!˝ 기운을 선물로 드립니다~!!ㅋㅋㅋㅋ

stella.K 2024-03-25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좋아서 괜찮을 것 같았는데 이리 말씀하시니 참고하게 되네요.
저도 생신 축하드립니다.^^

건수하 2024-03-25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

Falstaff 2024-03-25 10: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제 생일엔 사람들이 노래합니다. 기쁘다 구주 배셨네..라고요.
배 속에 열달 있다 나오니까 성탄절 빼기 열달하면 2월 25일. 그리하여 성탄은 아니고 성임절, 바로 2월 25일입니다. ㅎㅎ
많은 분께서 축하해주시니 감격입니다. 며칠 후에 내시경 예약해 술 한잔은 못하겠고...시원한 물이라도 한 컵 해야겠습니다. ^^

잠자냥 2024-03-25 10:29   좋아요 2 | URL
엥? 설명을 들었는데 오히려 술 취하는 기분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tella.K 2024-03-25 11:02   좋아요 1 | URL
아니 이미 지나군요. 근데 왜 한달이 지나서... 아무래도 쑥시러우셨나 봅니다. 다음엔 그리하시 마십쇼.^^

자목련 2024-03-25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한테 정을 준 것 같은데, 어쩌죠? ㅎㅎㅎ
늦었지만 생신 축하드려요!
내시경 끝나고 술 맛나게 드시고요^^

Falstaff 2024-03-25 16:12   좋아요 0 | URL
저는 단지 유령일 뿐 독후감에 이런 말도 썼답니다. ˝낯선 여자한테, 단 한 번의 눈길로 사랑에 빠져버렸지 뭐야.˝ ㅎㅎㅎ 옙, 벌써 내시경 끝내고 어떤 걸 먹을꼬, 꼽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2024-03-25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 너무 웃겨요 ㅋㅋㅋ
평이 좋았던걸로 기억하는데....

Falstaff 2024-03-25 20:19   좋아요 1 | URL
ㅎㅎㅎ 넵. 제가 단편에는 좀 짜기도 하고요, 그래도 셋을 넘기기 힘들다 싶었습니다만 이번 책은 저하고 합이 맞지 않았나 봅니다. -_-;;
 
4 3 2 1 (1) (양장)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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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권, 본문만 1,541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

  이 책을 읽기 전에 폴 오스터의 젊은 시절을 검색해 보면 더 좋을 듯하다. 오스터는 오스트리아 혈통의 유대 중산층 집안에서 1947년 2월 3일에 태어났다. <4 3 2 1>의 주인공 아치볼드 아이작 퍼거슨은 오스터보다 딱 한 달 뒤인 1947년 3월 3일 러시아 출신 유대 중산층 가정에서 낳고 자란다. 오스터는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 석사를 하고 1970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는 데 힘을 쏟는다. 작중 퍼거슨은 컬럼비아 대학에 다닐 수도 있고, 돈이 모자라 학비와 기숙사비, 식대를 지원하는 장학금을 받고 스탠퍼드로 갈 수도 있다. 미국에서 1947년생으로 공부 머리가 있고,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대학에 진학해서 저 징글맞은 1960년대의 반전, 반제국주의 대 참전 애국주의의 갈등을 겪어야 했을 터이다. 그렇게 유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었을 것. 이 책을 읽지 않은 분이 지금까지 쓴 초두를 보면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헷갈리기 십상이리라. 좋다, 다 생략하고 후딱 본문으로 들어가보자.


  이야기는 20세기를 시작하는 노베첸토, 1900년 1월 1일에 막이 올라간다. 당시 19세였던 이사크 레즈니코프는 재킷 안감에 1백 루블을 꿰매 넣은 채 자신이 태어난 도시 민스크를 탈출해, 오직 걸어서 함부르크, 바르샤바, 베를린을 거쳐 ‘중국여제’라는 여객선에 승선했다고 하는데 혹시 바르샤바, 베를린, 함부르크 아니었을까 싶지만 길고 긴 장편소설에 이런 거 가지고 시비하지 않겠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뉴욕항에 도착한 것이 1900년 1월 1일. 문학동네에서 <실종자>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아메리카>의 유대인 주인공 카를 로스만은 뉴욕에 들어오며 칼을 든 자유의 여신상을 본 반면, 오스터의 이사크 레즈니코프에게는 한 현명한 유대 노인이 접근해서 러시아식 긴 이름을 갖고 미국에 정착하기 쉽지 않을 터이니 간단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래 뭐라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젊은이, 록펠러라고 하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네, 근사한 이름을 하나 골라주었지만, 러시아 민스크 촌놈이 록펠러라는 이름이 어디 쉽게 입에 붙어야 말이지. 그래서 이민국 직원이 당신 이름이 뭐요, 라고 물었을 때, 이사크의 머리엔 도무지 록펠러가 떠오르지 않아 당황하면서, 얼른 대답한 것이 러시아, 폴란드 유대인들의 언어인 이디시어로 “Ikh hob fargessen.” 우리 발음으로 “이크 호브 파게센” 즉 “잊었는데요.”라고 했더니 이민국 공무원께서 오, 그래 알았어. 이커보드 퍼거슨 Ichabod Ferguson으로 장부에 적어버렸다. 우리가 아는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으로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축구 명문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만 27년 이상 감독을 지낸 83세의 노인뿐일 걸? 미국에서도 크게 환영을 받지는 못하는 유대인 이사크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시침 뚝 떼고 스코틀랜드 이민자로 행세할 수 있었건만, 문제는 여전히 이디시어 발음을 감추지 못하는 영어였다나.

  어깨가 넓은 거구의 잡역부 유대인 이커보드는 26세 생일 직후에, 14세 때 혼자 뉴욕에 도착한 고아 출신 유대 처녀로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성격의 패니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만 셋 낳고, 시카고의 가죽제품 공장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다가 강도가 쏜 총에 맞아 42세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시카고에 정나미가 떨어진 패니는 아들 루이스(14), 에런(12), 스탠리(9)를 데리고 뉴저지 뉴어크로 이사해 센트럴워드의 아파트 꼭대기층 셋방에 정착한다. 그런데 사실일 수도 있고 추측일 수도 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니, 패니와 이커보드가 미네소타에서 네번째로 딸을 출산한 적이 있다는 거. 잡역부 부부가 한 겨울에 미국에서도 춥기로 이름 높은 미네소타에서 하도 팍팍하게 살아서 차마 넷째까지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 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말도 전해진다. 하여간 이 형제들 가운데 주목할 건 막내 스탠리다.

  자라는 동안 형들에게 자주 놀림과 괴롭힘을 당한 스탠리. 왜 그랬을까? 두 형은 하나같이 불량해서 맏이 루는 습관성 도박에 빠져들고, 둘째 아널드는 동네 양아치가 된 반면 스탠리는 주구장천 성실한 학생이었으니 형들 보기에 눈꼴이 좀 시었던 거다. 뉴어크의 센트럴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미식축구 엔드와 4백미터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던 스탠리는 학교를 졸업한 1932년에 대학에 가고는 싶었지만 사정을 뻔히 아는지라 꿈도 꾸지 않고 작은 라디오 수리점을 열었다. 말 그대로 “작은.” 구두 수선점 만한 크기로. 스탠리는 11세 때 어머니가 휘두른 빗자루에 맞아 오른쪽 눈이 부분 실명이 되었지만, 미국에서도 새옹지마가 있었든지 덕택에 2차 세계대전이 벌어져 징집 신체검사에서 4-F 등급을 받아 합법적인 병역 면제 처분을 받는다. 문제가 있는 두 형의 병역은 책에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폭군 어머니가 장악한 집구석이 지긋지긋해 20대 초반에 얼른 장가들어 탈출한 반면, 막둥이 스탠리는 눈부신 20대 시절에 이름난 바람둥이로 온갖 유대 여성을 사냥하며 인생을 즐겼다. 그러다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21세의 아름다운 유대 처녀 로즈 애들러를 만나자 비혼주의 신념을 한 방에 무너뜨리고 결혼해버린다. 이것이 퍼거슨의 부계 내력.


  아치 퍼거슨의 엄마 로즈 애들러 쪽을 보자.

  로즈의 아버지 벤저민, 벤지 애들러는 바르샤바 출신, 어머니 에마 브로모위츠는 오데사 출신 유대인이지만 두 명 다 세 살이 되기 전에 미국에 도착에 디트로이트와 뉴욕의 허드슨에서 살았다. 이건 퍼거슨 씨와 달리 영어 사용에 전혀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이디시어 구사에 애를 먹는 미국 유대인이란 말이었다. 벤지는 191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뉴욕에 와서 1943년 현재 맨해튼에 있는 부동산 회사를 소유한 소수의 주주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이 올라 있으니 나름대로 큰 성공을 거둔 이였다. 젊은 사업가라는 명함을 가지고 총각시절부터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긴 애들러 씨가 1919년 초겨울에 업스테이트 뉴욕의 일요일 야유회에서 에마를 만나 사랑에 빠진 건 사람들이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19세기 젊은 여성보다 더 말이 없고, 소극적이며, 그래서 얌전하고 보건부 장관이 인정한 숫처녀 에마가 매사 사방천지에 아드레날린을 발산하며 거들먹거리는 벤지의 청혼을 허락했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 뉴욕의 유대인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을 정도였단다. 하여간 이들은 만난 즉시 결혼을 해 1920년에 밀드레드, 22년에 로즈, 이렇게 딸만 둘 낳아 곱고 아름답게, 그리고 똑똑하게 키워냈다.

  밀드레드는 공부 머리가 대단해서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도 취득해 여기저기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다가 아주 늦게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기는 하는데, 그냥 살 수도 있고 이혼할 수도 있다. 반면에 로즈는 데이비드 래스킨이라는 남자와 할 거 다 하는 진한 연애 중이었다가, 전쟁이 터져 데이비드가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기초 군사훈련을 받던 도중 폭발사고로 산산이 터져 죽어 가슴 속이 텅 빈 틈을 골라 스탠리가 청혼을 한 거였다. 로즈는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뉴욕에서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해서 웨스트 27번가의 초상 사진가 늙은 이매뉴얼 슈나이더먼 사진관의 접수원 겸 비서 겸 경리로 들어가 차근차근 사진에 관한 것들을 배운다. 1940년대엔 미국에서도 드물게 스탠리는 로즈의 꿈을 이루기 위해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계속 사진 일을 할 수 있게 동의하지만, 결혼 18개월 동안 로즈가 세 번 임신을 하고 세 번 유산을 한 후에 다시 임신을 하자, 딱 집안,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오직 출산을 위해 몸조리할 것을 권유했으며, 로즈 역시 동의한다. 말이 그렇지 이게 완전히 감옥살이 아냐? 이때 평소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언니 밀드레드가 로즈를 찾아와, 놀면 뭐하니,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게 있으니까 하여간 내 말대로 해, 하면서 당시 괜찮은 미국인이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면서 재미있는 작품”을 일러준다. 그러니까 기초 가운데 생 기초적인 서양문학 리스트. 이 목록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 있을 터. 과연 몇 작품을 아직 안 읽었나 한 번 체크해보시라.

  “밤은 부드러워라, 오만과 편견, 환락의 집, 몰 플랜더스, 허영의 시장, 폭풍의 언덕, 마담 보바리, 파르마의 수도원, 첫사랑, 더블린 사람들, 8월의 빛, 데이비드 코퍼필드, 미들 마치, 워싱턴 스퀘어, 주홍글씨, 메인 스트리트, 제인 에어”

  로즈는 임신의 침상 위에서 이 열일곱 편의 장편소설을 다 읽었으며, 이후 스탠리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몇 권을 더 읽고 드디어 1943년 3월 2일 오전 10시에 양수가 터져 큰 동서 밀리에게 전화를 해 베스 이즈리얼 병원 산과병동에 들어가 3월 3일 02시 07분에 아치볼드 아이작 퍼거슨을 출산한다.


  스탠리의 두 형, 로와 아널드는 로즈가 본 남자 가운데 가장 잘 생긴 두 명이었고, 여기에 시어머니 패니를 가져다 붙이면 완벽하게 “사회 부적응자 삼총사”가 만들어졌다. 작은 라디오 수리점에서 시작해 크게 점포를 키워 가전제품 일습과 나중엔 거의 모든 생활용품을 파는 상점 몇 개로 진화한 사업가 스탠리는 유대인의 가족 관념에 입각해 맏형 루의 도박 빚을 몇 번에 걸쳐 갚아주고, 둘째 형 아널드가 카운터의 현금을 여러 차례 슬쩍 가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자기 점포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꼬박꼬박 월급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창고에서 큰 불이 나 상품 전부가 홀랑 타버려 큰 위기를 맞는다. 아니, 화재가 나서 위기를? 보험은 어떻게 하고? 어째 이 이야기를 하자마자 형들이 조금 의심스럽지? 맏이가 또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가 홀랑 날려먹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불을 질렀을 수도 있고, 둘째가 동네 건달들과 어울려 마지막으로 크게 한 탕 하고 손 씻겠다는 명분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수사 결과 틀림없이 내부자 소행이라고 결론을 내린 경찰과 보험회사. 스탠리는 차마 형들을 감방에 보낼 수 없어서 보험회사와 경찰서에 사건 의뢰를 포기할 수도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보험금을 타고 상점을 다시 일으킬 수도 있다. 어차피 그건 선택의 문제니까. 누구의 선택일까? 스탠리의 선택? 혹은 작가인 폴 오스터의 선택?


  한 길을 가다가 길에 세 방향으로 분리된다. 어떤 길을 택해 가느냐에 따라 선택한 사람의 인생은 바뀔 수밖에 없다. 만일 열아홉 살의 이사크 레즈니코프가 원래 계획대로 아이작 록펠러가 됐다면 마흔두 살에 야간경비원으로 일하다가 가슴에 총을 맞았을까? 그렇게 금슬 좋은 스탠리와 로즈가 살면서 점점 금이 가 돈만 아는 유대인 스탠리가 안면 몰수하고 이혼해버리면 외아들이자 작품의 주인공 아치 퍼거슨은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아니, 아니. 그것보다 소년 퍼거슨이 중학교 다니면서 여름방학 때 캠프에 참여했다가, 지금 시대라면 일찌감치 알 수 있었던 만성 심혈관 질환이 닥치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삶을 마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일을 기점으로 더없이 친한 야구 친구였던 조지프 앤턴은 더 이상 야구를 비롯한 모든 공놀이를 포기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 누가 보장할 수 있나. 그래 어차피 인생은 순간순간 선택하는 일이다.

  오스터가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고, 자신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여러가지 경우를 감안해 진행하다가 차마 하나의 줄거리로 밀고가기 힘들어 이 경우, 저 경우를 다 함께 작품으로 만들어보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두번째 경우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어서 책을 읽으며 불만이 쌓였다가, 아이그, 폴 오스터의 못 말리는 입담에 푹 빠져 며칠 동안 재미있게 읽었다. 이렇게 긴 작품을 읽고 나서, 그게 만일 재미까지 있다면, 조금은 뿌듯한 느낌이 든다. 이 기분 때문에 점심 때 나가 낮술 한 잔 했어도 그리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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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 2024-03-22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낮술에 무척 공감합니다 ^^

Falstaff 2024-03-22 15:43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망고 2024-03-22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꺼운 소설인데 그래도 재미있다니 다행입니다 저도 조만간 이 책 읽고 싶어요

Falstaff 2024-03-22 15:44   좋아요 1 | URL
저는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첫빠따‘로 읽었습니다. ㅎㅎㅎ 직접 사기는 돈도 돈이고, 책장에 빈틈도 없어서.... ^^;;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오스터가 재미는 확실하니까요.

그레이스 2024-03-25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 리스트때문에 보고싶네요^^

Falstaff 2024-03-25 20:17   좋아요 1 | URL
그죠? 전 두 편을 안 읽었더라고요. 몰 플랜더스하고 메인 스트리트. 누가 썼는지도 모르겠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