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저를 책 읽기의 짜릿한 엑스터시로 끌고 갔던 것들만 골랐습니다. 이름하여 Top 10, 그리고 '최고의 한 권'.

 2018년엔 권 수로 219권, 편 수로는 192편을 읽었습니다. 가장 긴 책은 홍성원의 <남과 북> 여섯 권 짜리고, 다음이 조지 엘리엇의 <다니엘 데론다> 네 권 짜리였습니다. 이 가운데 먼저 약 50편을 골랐습니다. 내역은 글 아래에 따로 첨부했습니다. 선별한 책 중에서 또 골라 열 권을 선택했고, '한 권의 책'은 그 책을 읽는 순간, 이것이 올해 최고의 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각은 오늘까지 바뀌지 않았고요. 소개는 읽은 날짜 순서로 하겠습니다. 이 열 권과 특별한 한 권이,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의 선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참 좋겠습니다.

 

 

1. 오에 겐자부로, <만엔 원년의 풋불>

 

 오에 겐자부로 자신이 만엔 원년, 그의 전작 <익사>에서 보다시피 1860년의 농민 반란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을 것. 당시 가장 격렬한 저항을 벌였던 종조부를 둔 한 청년이 68세대로 성장, 반미운동의 전초적 투쟁을 벌이다가, 갑자기 변절, 이후 의식의 혼란을 초래한다. 미국에서의 실종을 거쳐 만엔 원년에 종조부가 투쟁을 벌였던 고향으로 돌아온 다카시. 그가 지역 실권자 조선인 백승기와 벌이는 한 판 풋볼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될까.



 2. 메릴린 로빈슨, <하우스 키핑>

 

 <하우스 키핑>을 선택했으나 사실 같은 이유로 <홈>도 추천한다. 가족 구성원이 떠나가고, 상처받고, 돌아오고, 기다리고, 다시 떠나는 일, 그 쓸쓸함. 기관차를 전속력으로 몰다가 선로를 이탈해 깊은 호수에 빠져 시신도 못찾은 남편. 친구 차를 빌려 아이들을 친정집에 맡기고는 역시 전속력으로 호수를 향해 돌진해 실종돼버린 딸. 이제 남은 가족들은 그들이 죽었음을 알지만, 어느 날 문득, 남편이나 딸이 슬며시 웃으며 조심스레 현관문을 여는 날이 있을 것 같은 고통스러운 기다림. 서늘한 아픔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3. 알렉시 제니, <프랑스식 전쟁술>

 고등학교 생물교사가 이런 책을 썼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보통의 프랑스 시민들은 복종과 순응으로 시간을 버텨냈을 뿐이지만, 타국에 의한 피통치가 얼마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지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알제리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가 독일 군인들에게 당한 고통보다 백 배 이상 더 악랄한 살상과 살육을 벌였다는 지적. 프랑스적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는 결코 피부색을 달리하는 왜소한 아시아 인들을 향하지 않고 오직 갈리아 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불편한 진실을, 생물교사 알렉시 제니는 정식으로 드러낸다.



4, 귀스타브 플로베르, <부바르와 폐퀴셰>

 플로베르의 유작으로 미완성 작품이다. 우울한 명상형 은둔자 플로베르가 인생의 마지막이 될 것을 알고 쓴 것 같은 작품. 세상을 살고 이제 갈 때가 되어 돌아보니 별 거 없이 사는 거 자체가 한 판의 코미디. 그리하여 플로베르는, 위대한 작가가 가끔 그러하듯, 마지막 작품으로 희극을 선택한다. 희극의 진정성은 희극 자체에 진정한 비극을 품고 있어야 하는 법. 두 필경사 부바르와 폐퀴셰가 뜻과 돈을 모아 쓴 사과 브랜디와 이름이 같은 칼바도스로 낙향, 하는 일마다 실패를 맛보는 장면을 읽으며, 그래 인생 자체가 칼바도스 맛이야, 희극 속의 쓴 비극을 음미해보는 것도 좋으리.



5. 헨릭 시엔키에비츠, <쿠오바디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TV에서 재탕, 삼탕으로 본 영화 때문에 이 책을 멀리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우연히 읽게 된 <쿠오 바디스>는, 영화가 원작의 재미에 얼마나 미치지 못하는지 깜짝 놀랐다. 폴란드의 자랑 시엔키에비츠의 글이 얼마나 아름답고, 세련됐으며 재기발랄하기도 하고, 심지어 깊은 사색까지 포함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TV 때문에 직접 독서의 매력을 놓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것 다 빼고, 책 표지에 나신의 여성이 부여잡고 키스를 퍼붓는 대리석상의 주인공 페트로니우스의 현명한 언행을 감상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이 작품은 명작이다.



6.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칼루스와 루카스. 두 번째 세계대전이 두 쌍동이 형제가 엄마의 손에 이끌려 할머니 집에 도착해 그곳에서 살게 되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외할머니 집에서 형제는 절대로 울지 않고, 굽히지 않고, 그러면서도 성실하고, 옳다고 생각하면 잔인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으며, 한 편으로는 따뜻한 마음과 행동을 그치지 않는다. 착한 악마들. 완전하게 건조한 문장으로 블랙 유머와 엽기적 내용을 서슴없이 서술하는 크리스토프. 이 쌍동이 형제가 정말 쌍동이일까? 의식의 분리, 선악, 호오, 이런 두 양식이 상호 교차되는 것의 상징 코드 아닐까? 그건 독자 마음이다.



7. 홍성원, <남과 북>

 

 전쟁을 치룬 나라로, 대한민국이란 나라보다 전쟁 전반을 조망하는 문학작품이 없는 국가도 없다. 무승부로 끝난 전쟁 이후 남쪽과 북쪽 모두 전쟁의 위험을 강조하며 정권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남쪽은 국방군이, 북쪽은 인민군이 절대 선이었어야 했을 것이리라. <남과 북>은 70년대에 발표했다가, 박정희가 죽자마자 곧바로 개작을 해서 전쟁 발발 바로 전부터 종전 바로 후까지 전선과 후방에서 각각 전쟁의 비참함을 당한 모든 국민의 모습을 담은 역작. 진정한 전쟁문학이 없던 우리나라에 확실한 이정표를 제시한 기념비.



8.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부제처럼 기본적으로 가치, 즉 품질에 대해, 인간과 인간의 사고와, 나아가 모든 물질과 재화의 가치, 품질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열한 살짜리 아들 크리스를 등 뒤에 태우고 미국 중부를 떠나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여행을 하며, 한 편으로 여정에서 생긴 조그마한 일과 특히 모터사이클을 매개로 가치, 질에 관한 탐구로 사고를 확장하게 된다. 작가 자신이 다양한 학문을 통섭한 수재로 철학, 수사학, 수학과 물리학을 포함한 자연과학, 기계공학 등에 탁월한 지식으로 무장한 상태. 그리하여 사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을 타도하기 위해 플라톤, 소크라테스, 그 이전의 소피스트들까지 탐색하기에 이르는데, 모터사이클의 뒷자리에 앉은 아들 크리스는 여행 도중 아빠 등짝 밖에 보지 못했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알아차린다.



9. 알베르 코엔, <주군의 여인>

 

 "이토록 장려하고, 화려하고, 장황하지만 아름다운 넋두리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둘만의 사랑'이라는 감옥과, 한 인간의 고결함을 천상에서 지옥으로 순식간에 떨어지게 만드는 질투와, 결국 땅 속 나무 상자 안의 바싹 마른 뼈밖에 남지 않을 풍만한 아름다움의 허무와, 야훼가 선택한 자신의 민족을 향해 서서히 그러나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위협의 숨막힘을 어느 인류가 있어 이보다 더 훌륭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라고 독후감을 썼다. 이 길고 긴 장편소설을 읽는 내내 화려한 문장의 매력 때문에 행복했다. 서로가 숨막히게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두 연인을 질식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아, 나는 그걸 안다.



10. 에이모 토울스, <모스크바의 신사>

 

 1918년. 러시아가 공산혁명에 성공하자 서둘러 서유럽으로 망명한 것과 달리 혁명과 동시에 파리에서 러시아로 돌아와, 조모를 망명시키고 자신은 러시아 안에서 살기로 결심한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 혁명 정부에 의하여 현재 자신이 묵고 있는 메트로폴 호텔에서의 유폐형을 선고받고, 스위트룸에서 지붕밑 <라 보엠>의 미미가 살던 꼭대기 방으로 옮기게 된다. 귀족으로 태어나 인간 자체가 신사인 백작은 책상다리 안쪽 비밀 책상 속에 든 예카테리나 금화로 일 하지 않고도 고급호텔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지만, 특별하게 관계를 맺는 몇 명의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면서 이 고급스러운 작품을 만들게 된다. 나는 쉽게 이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이건, 명작이다.




2018년 최고의 한 권.  김태정,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시는 삶이어야 한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또한 보편성 역시 확보해야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아 서울을 떠나 해남 미황사 아랫동네에 방을 하나 얻어 남은 삶을 보내야 했던 김태정. 가난하고 병마에 고통을 받지만 결코 궁상의 골짜기로 빠지지 않는 단단한 중심의 시인. 인생의 곤고함을 이 시인만큼 깔끔하게 노래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시에 관해서는 말을 길게 하면 오히려 더 좋지 않은 법. 나 역시 조심스럽게 이 책의 일독을 모든 분께 권한다.




* 참 아쉽게 위의 열한 편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윌리엄 트레버의 모든 책을 꼽는다.




2018년에 읽은 매력적인 작품 목록.

도서명출판사/제작사저 자,  역 자
사서 빠뜨재미마주즈느비에브 빠뜨, 최내경
화이트 노이즈창비돈 드릴로, 강미숙
루시 골트 이야기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아르세니예프의 인생문학동네이반 부닌, 이항재 
호르두발지만지카렐 차페크, 권재일
운명민음사임레 케르테스, 유진일
더 컬러 퍼플한빛문화사앨리스 워커, 안정효
플라톤의 반란자작나무(송학)피터 애크로이드, 한기찬
시대의 소음다산책방줄리언 반스, 송은주
마농의 샘펭귄클래식마르셀 파뇰 | 조은경
싱글 맨창비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조동섭
만엔 원년의 풋볼웅진지식하우스오에 겐자부로 | 박유하
의식동아시아레슬리 마몬 실코, 강자모
하우스키핑마로니에북스메릴린 로빈슨 | 유향란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민음사모신 하미드, 왕은철
여름의 끝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민은영
프랑스식 전쟁술문학과지성사알렉시 제니, 유치정
부바르와 페퀴셰책세상귀스타브 플로베르, 진인혜
쿠오 바디스민음사헨릭 시엔키에비츠 | 최성은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민음사제임스 M. 케인, 이만식
절망문학동네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최종술
노변의 피크닉현대문학스트루가츠키 형제, 이보석
미국은 섹스를 한다자작나무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까치아고타 크리스토프 | 용경식
칠레의 밤열린책들로베르토 볼라뇨, 우석균, 
천국은 다른 곳에새물결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 김현철
고슴도치의 우아함아르테뮈리엘 바르베리, 김관오
아메리카나민음사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황가한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창비김태정 지음
그랜드 호텔문학과지성사비키 바움, 박광자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학고재사바하틴 알리, 이난아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문학과지성사리온 포이히트방거, 문광훈
남과 북문학과지성사홍성원
비 온 뒤한겨레출판윌리엄 트레버 | 정영목
윌리엄 트레버현대문학윌리엄 트레버, 이선혜
아무도 없어요최측의농간박서원 지음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민음사조너선 사프란 포어, 송은주
랜덤하우스코리아메릴린 로빈슨, 유향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문학동네리처드 플래너건, 김승욱
칠드런 액트한겨레출판이언 매큐언 | 민은영
달콤한 노래arte(아르테)레일라 슬리마니, 방미경
사촌 퐁스을유문화사오노레 드 발자크, 정예영
우리 시대의 아이문예출판사외된 폰 호르바트, 조경수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서커스조르지 아마두, 안정효
한국 현대 명작 희곡선집연극과인간김성희 지음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문학과지성사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장경렬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민음사에벌린 워, 백지민
주군의 여인창비알베르 코엔, 윤진
모스크바의 신사현대문학

에이모 토울스, 서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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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12-31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주군의 여인>을 읽어봐야겠습니다. 폴스타프 님 새해에도 소주와 책과 함께 즐거운 나날 보내세요~!

Falstaff 2018-12-31 12:49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잠자냥님도 내년엔 책은 그만두고, 돈 왕창 버시고요, 하시고 싶은 거 맘대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컨데 세계일주 같은 거요.
<주군의 여인>이 좀, 아니 많이 장황합니다. 읽다가 자빠질 수도 있는 책이라서 선뜻 권하기엔 조심스럽습니다. 뭐 그런 거 다 팔자니까, 알아서 하시기를 ㅋㅋㅋ

카알벨루치 2018-12-31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의 책들은 우직 묵직 견고합니다 무게가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Falstaff 2018-12-31 23:06   좋아요 1 | URL
내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았네요.
말씀 고맙습니다. 카알벨루치님께 늘 좋은 일만 생기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