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 문학전집 1 : 사반의 십자가 - 탄생 100주년 기념 김동리 문학전집 1
김동리기념사업회 / 계간문예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나와 비슷한 시절을 지닌 사람들은 <사반의 십자가>를 꼭 읽어봐야 하는 교양도서 정도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사반’이란 것이 사람의 이름이며, 심지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그의 왼쪽에서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강도’ 또는 ‘도적’인줄 몰랐을 것이다. 지금 예수와 함께 죽은 강도들의 이름을 검색해보니까, 성경엔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을뿐더러 왼쪽 오른쪽 구분하지 않고 그 중 한명이 죽어 예수와 함께 낙원으로 갔고, 다른 한명은 예수더러, 임자가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임자와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비방했다고 한다. 답글을 올린 엄숙한 기독교인은 심지어 알지도 못하면서 왼쪽 오른쪽을 구분하는 건 ‘성서를 오염시키는 행위’란다. 그러니 이 같은 진실에 입각해 발언하자면, 이미 죽은 김동리는 왼쪽 강도에게 ‘사반’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 땅 위에서도 일어나게, 죽음을 앞둔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더러 마치 에굽의 모든 장자들한테 같은 날 죽음을 선사해주어 집집마다 같은 날에 제사지내게 만든 모세처럼 기적을 일으켜주길 끝까지 기대했다는 취지로 작품을 썼으니, 지금 김동리는 23년 동안(벌써! 세월 빠르다) 지옥의 유황불에 지글지글 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유대인들한테 제일 큰 백그라운드는, 야훼. 선택받은 민족으로 모세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기타 등등의 판관들의 자손인 이들의 역사는 탈 에굽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이스라엘 땅에서 언제나 잘 먹고 잘 살았던 건 아니어서, 이들이 주로 타국의 신부와 결혼하면서 유입된 이국의 신들에게 경배할 때마다 질투의 야훼가 불칼로 다스려 온갖 민족들에게 침략을 당하고야 만다. 이때마다 혜성같이 거의 메시아 급의 인물이 등장해 유대민족을 압제에서 구하곤 했으니, 서기 30년 조금 넘은 시절,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이 또다시 메시아의 재림을 기대했던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있겠다. 우리한테도 비슷한 야담野談이 전승해 내려온다. 주로 백기완, 심지어 이청준 등의 글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소년장사 이야기. 주로 양반 지배계급이나 왜나라 사람들이 소년장사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혈맥이 지나가는 산맥에 쇠못을 박아댄 이야기, 기억하시지? 하여간 AD 30년경에 일곱 명이 팔뚝에 날 선 비수를 쓱 그어 피를 뚝뚝 흘려 받은 다음 야만스럽게 그걸 섞어서 서로 마심으로 ‘혈맹의 단’ 즉 혈맹단血盟團을 결성해, 각 단원은 수하로 또 다른 일곱 명의 이차 세포를, 또 일곱 명의 삼차 세포를 등등으로 구성한 대규모 독립투쟁 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여기서 대장, 즉 단장을 먹는 인물의 이름이 바로 ‘사반’이다. 사반은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으면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로마의 군대에 대항을 해봤자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메시아의 재림을 기대하던 중 예수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세금 걷는 공무원, 세리를 걷어찬 거 빼고 여하한 폭력에도 절대 반대를 외치던 예수가 로마 군대와의 전쟁을 수긍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죽은 다음 하느님 우편에 앉을 생각만 잔뜩 하고 있던 예수께서. 여기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갈리는 지점이다. 서로 타협이 가능하지 않을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까. 그러니 이를 주제로 소설을 쓸 수 있었겠지. 근데 신기하다. 책의 시간 배경에서 한 세대에서 한 30년쯤 지나면,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젊은이들이 한 패가 되어 거세게 로마에 대항하는 무장단체를 결성한다. 그리고는 정말로 세계최강의 군대인 로마군과 전쟁을 벌이게 되는 바, 결론은 유대민족이 거덜이 나고, 이때 눈부신 활약을 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의 공적으로 두 부자가 차례대로 황제의 위에 오르게 된다. 티투스가 2년밖에 황제를 못해 그게 혹시 야훼가 불침을 놓은 건지는 몰라도.
 조금 지루했다. 420쪽 가까이 되는 장편소설. 분량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신은 벌써 19세기에 휘두른 니체의 망치에 맞아 절명한 상태라 나로 하여금 도무지 흥미를 느끼게 해주지 못한다. 원래 “현대문학”지에 연재했던 것에다가 삼사백 매 정도를 보충해 1958년에 상재하고, 그걸 다시 개작을 해 1982년에 재상재한 책. 그래서 그랬나?
 김동리는 황순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순수문학을 평생 고집했던 작가. 황순원 선생은 일제가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자 학교를 때려치우고 평양 근처 시골로 내려가 골방에서 우리말로 소설을 썼고, 김동리 선생은 붓을 아예 꺾어버렸다. 이거 쉬운 일 아니었을 걸?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가 연기한 악당 염석진이 해방 후 반민특위에 출석해 무죄를 받은 다음, 안옥윤(전지현)한테 총 맞기 바로 전에 이렇게 말하잖나.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몰랐으니까!” 김, 황 양씨도 언제 해방이 돼 조선어로 작품을 쓰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여전히 조선어로 단편소설을 썼으며, 붓을 꺾었던 거다. 작가가 작품을 못 쓰는 상황이란 우리 같은 독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 않았을까. 이때 김동리는 <사반의 십자가>를 구상했단다.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조선. 그러나 목숨이 먼저니 감히 쓰지는 못하고 머릿속에서 자꾸 가지만 치다가,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서 고통 속에 숨어 살고, 나중에 부산에 내려가 소위 ‘밀다원 시대’를 만나고, 다시 수복해 서라벌예대 문창과 교수를 하면서 드디어 20년을 구상한 <사반의 십자가>를 원고지 위에 옮기게 된다. 비록 이이가 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격렬한 리얼리즘 또는 참여문학 종사자들로부터 수없이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세상에 이런 꼰대도 분명히 훌륭한 존재의 이유를 갖는 법이다. 숨 막히던 시절, 고집스레 순수문학의 길을 가는 작가들도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소설판이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을 테니까.



 독후감 다 썼다. 이제 잡담 시간.
 1. 자신이 생각하기에 천주교든 개신교든 하여간 환자 수준의 기독교 신자/신도라면 책을 읽기 전에 지금 읽을 책이 전문 거짓말쟁이가 쓴 소설이란 점을 충분히 인식하시라. 이걸 읽고, 읽으면서 감히 성서에 나온 진리를 왜곡했다느니 하시려면 애초부터 손에 잡지 마시라.
 2. 김동리가 1913년생. 그의 예수는 우리가 이발소 거울 위에 달려 있어 보곤 했던 바로 그 초상화의 예수. “예수의 그 호수같이 맑고 푸른 두 눈이 하늘의 끝없음을 머금은 채 사반의 핏발 선 굵은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114쪽), “예수는 그 백랍같이 희고 긴 손(왼손)을 들어 보였다. 순간, 사반은 ‘그 백학이 깃을 편 듯한 손’이라고 하던 도마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만큼 그의 희고 긴 다섯 개의 손가락 사이에서는 어쩌면 곧장 무지개가 비낄 듯한 황홀한 환상 같은 것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115쪽) 푸른 눈과 백학이 깃을 편 듯한 손과 길고 얇은 손가락의 가진 ‘목수carpenter’가 말이 돼?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그리고 짧고 두꺼운 손가락과 억센 손톱을 지닌 건장한 체격. 이게 내가 생각하는 중동 아시아인 목수였던 예수의 모습이다.
 3. 이걸 읽자마자, 어떤 종류의 안도감이 흐른다. 드디어 오랜 숙제를 해결한 거 같은 느낌. 원래 <을화>를 고르려 했는데 작년 이맘때든가, 아, 벌써 3년 전이다, <무녀도>를 읽은 바 있고, <을화>가 단편 <무녀도>를 개작한 것이란 점이 <사반의 십자가>로 선회하게 했다. 하긴, <을화>하면 난 영화배우 김지미가 먼저 떠오르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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