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6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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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말의 매사추세츠 세일럼. 이곳에서 젊은 일진 아가씨들 몇 명이 쇼를 벌인다. 그 가운데 애비가일, 열여덟 살의 이 아가씨가 일찍이 완고하고 정직하고 신심 가득한 농부 프록터 씨 집의 하녀로 일한 바 있었다. 이때 마침 부인 엘리자베스가 산후를 맞아 남편을 따뜻하게 대하지 않고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곁을 멀리했다. 왕성한 혈기를 다스리기 힘들었던 잘 생긴 외모의 프록터 씨는 외양간에서 하녀 에비가일과 정을 통한다. 그러면서 불륜의 와중에 흔히들 그러하듯이 허튼 약속 정도는 흘려버렸겠지. 부인이 이를 알고 하녀를 해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 동네 아가씨들과 어울려 한밤중에 숲 속의 한적한 곳에서 노래하고, 밤참을 끓여먹고, 알몸으로 춤을 추다가, 하버드를 졸업했으며 권위의식에 쪄들어 자신의 권위를 위해 그리스도나 하느님의 복음보다는 지옥불과 악마의 현시 같은 설교에 목숨을 건 목사 패리스에게 발각되고 만다. 아가씨들 속에 마침 패리스의 질녀도 섞여 있었는데, 이 아이는 알몸으로 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집단 히스테리인지 뭔지 그만 넋을 잃고 마치 악마에 홀린 것같이 거짓으로 시체놀이를 시작하며 세일럼 조용한 농촌 마을에 광기가 덮이기 시작한다. 한 밤중 알몸의 무도, 항아리에서 끓고 있는 마법의 물약처럼 보이는 모종의 수프, 흑인 노예의 주술적 중얼거림, 수프를 끓이던 항아리 속에 개구리 한 마리가 뛰어 들어갔다는 진술, 게다가 순진하기 그지없다고 자기 홀로 생각하던 질녀까지 속한 집단의 행위를, 하느님이나 예수의 말씀 대신 지옥의 유황불에 관해, 교회당에 찬란한 광명을 밝히는 황금촛대에 관해(돈을 거둬 지금 사용하고 있는 백랍의 촛대를 황금으로 바꾸란 뜻이지 뭐.) 신도들에게 설파하던 속된 목사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악마가 지옥에서 땅을 뚫고 솟아 세일럼에 악취 나는 입김을 쏘이기 시작했다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비벌리에서 악마퇴치에 일가견이 있으며 패리스에 비해 신앙적 양식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조금 더 있는 헤일 목사를 초빙하기에 이른다. 헤일 목사가 도착해 애비가일을 비롯, 한밤의 알몸의 무도를 벌인 처녀들과 상담을 하고, 이는 명백한 사탄의 왕림에 의한 사건으로 규정, 본격적인 마녀사냥에 나서게 된다. 혼란을 틈탄 애비가일, 이 맹랑한 아가씨가 사건의 우두머리 격으로, 그녀의 본심은 프록터 씨의 아내 엘리자베스를 마녀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자리를 꿰차는 것.
 작품을 쓴 때가 1950년대. 매카시 선풍이 극에 달했던 시기. 밀러는 <시련>의 실제 무대였던 매사추세츠의 마녀 사냥 사건을 통해 매카시 열풍과 절묘하게 비틀어 버렸는바, 매카시 일당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희곡을 읽어보자마자, 어떻게 했느냐 하면, 기소해버렸다. 책 뒤에 나오는 작가 연보를 보면, 1953년에 초연했다고 나와 있는 반면, 출간은 언제 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책 속에 묘사한 것을 볼 때, 초연 후 희곡 출간은 나중에 한 것이 분명하다. 책 속에 초연 당시 관객들의 분위기 같은 것도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또, 1690년대 미국 동부지역에서 기독교라는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집단에서 이데올로기란 이름으로 얼마나 야만스러운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증명한 것을, 1950년대 세계정치에 빗대 이야기하기도 한다. 가령.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믿는 나라에서는 약간이라도 중요한 저항 행위는 모조리 자본주의라는 사악한 마녀와 결부되어 있고,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견해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붉은 지옥과 동맹을 맺고 있다는 비난을 공공연히 받게 된다.” (56쪽)


 내가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헤스터의 행각이 마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개척시대 초기의 답답한 청교도적인 질식 상태의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서이다. 가톨릭에 의한 핍박을 피해 죽음의 항해를 무릅쓰고 아메리카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가톨릭보다 더 지독한 교조적 기독교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미국은 유럽보다 더 숨 막히고, 가식적이고, 보수적인 토양으로 변질된다.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세상에서 빅토리아 시대 문화가 가장 찬란하게 구현되었던 곳이 바로 미국 아니었나? 정신적으로 미국인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쫓겨 온 구대륙 문화에 한 발 꿀리고 들어갔던 거였다. 그 반동으로 구대륙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당시 유행에 휩싸였던 것이고. 물론 지금은 돈의 힘으로 역전이 되긴 했다. 하여간 구대륙보다 더 보수적이고, 고리타분한 구속의 전통이 미국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발현되었던 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메카시즘 아니었나 하는 것. 17세기 말의 기독교는 인간 개인을 옥죄는 확실한 이데올로기였다. <주홍글씨>와 같은 이유로 나는 이 책을 고통스럽게, 아니, 과장하지 않고 말하자면, 힘겹게 읽었다. 이미 내 독후감을 읽으시는 분들은 다들 아시다시피, 유물론자로서 이런 논의를 보는 시점은 시니컬할 수밖에 없으니까. 더구나 가장 우습게 아는 종교적 장치가 바로, 지옥, 내세, 윤회, 등인데 그중 가장 웃긴 것이 바로 지옥과 악마. <시련>의 등장인물들이 가장 중요하게 논의하고, 재판하고, 서로 죽이고, 이런 행위가 지옥과 악마와 관련 된 것이었으니, 이를 어이할꼬. 밀러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기독교 시대 이전까지는 하계(下界)가 결코 인간에게 적대적인 세계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모든 신들이 유용한 존재이고, 이따금 실수를 함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인간에게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리고 기독교가 인류에게 인간의 무가치함(구원받을 때까지는)을 꾸준히 조직적으로 주입해 온 사실을 보면, 악마란 인간을 채찍질하여 특정한 교회나 교회 국가에 굴복시키기 위해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해서 고안되고 사용된 무기로서 필요했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55쪽)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가 유럽을 중심으로 지구의 절반을 2천년 동안 효과적으로 다스렸던 이면, 저변, 기초적 생각은 인간이야말로 생존해야 할 아무 가치가 없는 죄악 덩어리라는 학습이었다는 의견. 물론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유일하고 배타적인 (자기들만의)사랑의 종교. 그러나 밥 잘 먹고 종교에 대한 논의는 더 하기 싫다. 소화 안 된다.
 책 속의 종교판관인 부주지사 댄포스는 이렇게 (기독교적으로 또는 매카시 식으로) 선언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법정을 지지하지 않으면 반대하는 걸로 간주된다는 것이오. 그 중간 입장은 있을 수가 없어요. 지금은 아주 정확한 시기이며, 명백한 때요. 우리는 더 이상 악이 선에 섞여 세상을 미혹하는 어스레한 오후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오. 이제, 하느님의 은총으로 빛나는 태양이 떠올랐으며, 광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필경 그 태양을 찬양할 거요.” (141쪽)


 청교도의 아버지, 필그림 파더들의 정체는 이랬다. 집단과 특정 개인의 이익을 위해 다른 개인의 삶과 생명과 재산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의식. 현실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가져온 역사의 한 장면을 읽는 일은 참 여러 가지로 재미있다. 하, 그러고 보니 이처럼 비 기독적인 독후감을 쓰고 있는 이 시간이 안식일 새벽기도 시간이다. 이런 게 인생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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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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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쯤 전에 한 번, 그리고 20년쯤 전에 한 번,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어보려 했다가 실패했다. 20년쯤 전에 산 책은 아직도 책꽂이에 꽂혀있다. 그 책하고 궁합이 맞지 않아 결국 읽지 못했을까 싶어서 이번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번, 강유나 번역의 책을 골라, 다 읽었다. 이삼십년 전엔 이 드라마가 와 닿지 않아서 끝까지 읽지 못했을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는 소설과 달라 내용을 미리 알아도 책을 읽는데 별 불편함이나 감동의 절감효과가 없다. 그래 간략하나마 스토리를 소개한다.
 60세가 넘은 주인공 윌리 로먼이 샘플이 가득 든 여행가방을 들고 집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극은 시작한다. 34년 동안 한 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한 윌리. 이젠 늙어 운전도 힘에 겹고, 전엔 봉급과 영업수당을 받았지만 이젠 봉급 없이 수당으로만 생활을 꾸려야 하는데, 도시에 살면서 기본 생활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집세, 가전제품 월부금, 보험료 등등. 이를 알고 있는 이웃이자 오랜 친구인 찰리가 수시로 소액을 (못 받을 줄 알고도 빌려)주어 보탬이 되지만, 윌리는 체면상 찰리가 제의하는 직원으로의 채용에는 응할 수 없다. 아들만 둘. 큰 아이는 서른세 살의 비프, 작은 아이도 서른이 넘은 해피. 잘 생긴 외모와 미식축구에 특출났던 비프는 열일곱 살 때까지 지역의 총아였으나 졸업시험에서 수학 F를 받는 바람에 대학에 진학하지도 못하고 인생을 거의 포기, 서부로 가서 주급 25달러의 목동 일을 하다가 딱 오늘 동생과 함께 집에 들른 상태.
 대공황의 끝 무렵을 맞아 가진 것이라고는 예전 시절 화려한 추억과 그때부터 시작한 허풍과 장담과 과대망상과 심각한 우울증. 부자는 날이 밝으면 각기 사장과 전 직장의 사장을 찾아가, 아버지는 뉴욕에서 내근을 하게 해달라고 하고, 비프는 자신에게 1만, 혹은 1만5천 달러를 투자해달라고 요구하기로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없어서, 윌리는 34년간 봉직했던 회사에서 단칼에 해고를 당하고, 비프 역시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사장의 만년필만 훔쳐 나온다. 윌리와 비프가 다 계획에 성공할 것을 가정해서 둘째 해피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세 부자의 만찬을 계획하지만, 만찬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부자간 거친 말다툼으로 끝나고 만다.
 그날 밤, 어머니 린다는 만나기만 하면 거짓과,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 때문에 다투기만 하는 세 부자를 견디지 못해 두 아들에게 집에서 떠나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가족은 마음속에 상처를 가득 안고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 거칠게 반항했던 큰 아들 비프가 자신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아버지 윌리는, 자신이 아들에게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감격해서, 보험금 2만 달러를 떠올리며 집을 나서 차에 올라 전속력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난 20대 때도, 30대 때도 이 이야기가 정말 재미없었다. 34년간 봉직한, 심지어 자기 이름을 지어준 직원을 잠깐 고민도 하지 않고 해고해버리는 젊은 사장. 자본주의라는 정글의 법칙이다. 사실 죽음에 이르는 세일즈맨, 윌리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주택부금도 거의 끝나 집도 자기 집이 되는 것이 멀지 않았고, 가전제품의 월부금도 거의 마지막에 달하며, 두 아들 역시 이젠 더 이상 부양의 의무를 지지 않는 상태. 아내와 나, 오직 두 명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데 왜 죽음에까지 이르러야 했을까.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현재의 나’가 주인공 윌리와 매우 비슷한 상태다. 이젠 아무 빚도 없이 집과 백색가전과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으나 수시로 퇴사를 압박받고 있는 늙은 직원. 여기서 나는, 앞으로 당신들 거의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노동법에 감사를 하고 있고, 해야 한다. 우리나라 기업주에게는 미국과 달리 해고의 자유가 없으니. 나도 두 아들만 키웠고, 아이들은 다 독립해 나갔다. 그러니 좀 비슷하지? 게다가 큰 아이의 신붓감이 어제 인사를 왔잖아? 기특하게도. 나는 요즘엔, 며느리 감이 생기면 시부모가 먼저 전화를 해서 일차 방문해 저희 소개를 좀 해도 될까요? 이리 물어봐야 하는 것이 기본 에티켓인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더라고.
 하여간 지금의 내 상태가 윌리와 좀 덜 비슷했다면, 상대적으로 좀 더 다양하게 이 세일즈맨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해석할 수 있을 텐데, 오히려 꽤나 유사한 상황이라 윌리의 유일한 사인을 나는 우울증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윌리를 감싸고 있는 정서는 과거, 그러니까 윌리가 수당만 한 주에 150 달러를 받던 공황 이전의 시절. 고등학교에서 풋볼 선수로 명성을 떨치던 비프와 잘생긴 외모로 여학생 깨나 울리고 다녔던 해피. 세일즈를 위해 다니던 도시에서 가끔 벌이던 로맨스. 그러나 현실은 비록 몇 번 남지 않았지만, 각종 할부금과 주택융자금, 낡은 집을 유지하기 위한 수선비 등등. 여기에 현실에 낙오된 듯 보이는 두 아들. 심지어 가족들이 보기에도 아버지 윌리에겐 심각한 정신장애가 있는 상태로, 수시로 이미 죽은 형의 모습이 보이기도 해서, 가족 간의 대화에 불쑥 형의 유령이 끼어들기도 하는 단계. 가족은 윌리를 사장에게 보내 뉴욕에서의 내근을 요구하게 만드는 대신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상담을 받게 했어야 했던 건 아닐까.
 물론 드라마는 ‘대부분의 정상인’을 모델로 하지 않는다. 정상인이 주인공이면 너도 그렇게 살고, 나도 그렇게 사니 그 속에서 두드러진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도 쉽지 않고, 만들어봤자 독자가 재미나게 읽어주지도 않으니까. 내가 윌리라면 어땠을까. 쉬운 해결책. 다 때려치우고 집 팔아서 소도시로 내려간다. 그럼 쥐꼬리만 하지만 연금도 나오고, 뉴욕에서 집 팔고 소도시에 작은 집 산 차액으로 그리 궁상스럽지는 않을 거 같은데. 물론 나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고, 밀러는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같을 수는 없다.
 이렇게 독후감의 형식을 빌어 윌리와 그의 가족과 다른 의견을 개진한다고 해서, 이 작품이 별로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고 앞으로 나는 세 명의 극작가,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그리고 아서 밀러의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을지언정, 책을 고르다 눈에 띄면 반드시 읽어볼 것이라고 작정했다. 그만큼 재미있고, (10년만 일찍 읽었다면 더욱 그러했겠지만) 공감했고, 남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할 만큼 좋은 책이란 생각도 들었다. 다만 내가 윌리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일 뿐. 문학적 감정의 과장은 언제나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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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08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적 감정의 과장은 언제나 정당하다’ 너무 멋진데요 팔스타프님! ㅎ

Falstaff 2019-01-08 10:48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성깔 있는 개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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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열정>을 읽고 단박에 산도르 마라이에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마라이의 우리말 번역본 ‘소설’은 전부 품절이나 절판이다. 수필집은 한 권 판다. 그래 기다리기만 하다 어느 날 드디어 헌책방에서 <성깔 있는 개>를 찾았고, 이제 읽었다. 잠깐 검색해봤다. 백과사전 위키피디어가 언제 수정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책은 미국에도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마존에 <성깔 있는 개>의 영어판도 없다.) 마라이가 1900년생이고, 89세에 자기 머리통에 총알을 관통시킴으로 해서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죽고 나서야 그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30세 부터는 자신의 모국어인 헝가리 언어, 전 지구에서 극히 일부분만 해독 가능한 약소국의 언어로 작품을 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위키피디어에 의하면 가장 빨리 번역한 것이 2001년 <헝가리의 추억>이란 시집이다. (세상에, 시도 썼네.)
 <열정>에서 마라이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저 헝가리의 먼 촌구석 자신의 영지에 돌아와 무려 41년 43일을 기다린 끝에 필생의 친구 콘라드와 재회하는 장면을 그렸다. 75세 동갑나기 친구 콘라드가 먼먼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늘 기억하고, 마치 채무처럼, 자신을 찾아올지 확신하며 나이에 비하면 최고의 건강을 유지하면서 무려 41년을 기다린 주인공 헨릭. 그들이 이제 생을 정리할 단계에서 인생을 조망하고, 달관하고, 성찰을 거듭한 세월을 끝내고 필생필사의 한 판 승부를 그린 참 멋있는 작품이다.
 32세의 마라이가 쓴 <성깔 있는 개> 역시 헝가리 문자로 쓴 소설이다. 때는 양차 세계대전의 중간쯤. 약 20년 간 유럽은 잠깐 평화의 시기를 지냈으나 동서유럽의 접경지 헝가리의 부다 지역에선 전쟁 동안 거의 모든 산업기반시설이 망가져버려 시민들은 가난과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리 그리해도 세월을 흐르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지나고 드디어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온다. 이름은 났지만 가난한 문인이자 주인공인 ‘신사’는 백 펭고(당시 헝가리의 화폐단위)를 가지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선다. 곤고한 시기였고, 그래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서로 선물을 교환하지 말자고 약속했으면서도 언제나 작은 선물을 준비해야 했던 시기. 신사는 시내 중심가를 거닐다가 난데없이 택시를 타고 동물원을 찾아, 그곳에서 개 사육사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순종 헝가리 견종 ‘풀리’인줄 알고 낳은 지 4주 된 잡종견 한 마리를 60 펭고에 사 먼지덩이 같은 털 뭉치처럼 보이는 작은 강아지 ‘추토라’를 주머니에 넣어 온다. 사육사가 철석같이 약속한 품종 확인서도 받지 않고서.
 이후 약 10개월에 걸친 개 사육기. 개를 키워본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할 내용들. 개도 점차 커가면서 자아가 발달하고, 성격이 형성되며, 고집도 생기고, 넘쳐흐르는 젊음 또는 건강을 과시해야 하고, 사고도 치면서 성장을 하는 법. 애당초 신사가 잘못했다. 개는 마당 있는 집에서 놔길러야 한다는 게 내 생각. 비록 이젠 개를 키우는 것보다 먹는 일을 더 즐기지만, 나도 소싯적엔 마당 넓은 집에서 포인터, 도베르만, 복사 등을 키우는 집에서 자라서 안다. 몸높이 37~44 센티미터의 중형 개 추토라를 1920년대 부다(자꾸 ‘부다’ 그러니까 헛갈리시지? 바로 옆에 강이 흐르는데 강 너머 지역이 ‘페스트.’ 합해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다.)의 좁은 아파트에서 키우는 게 애초에 넌센스였다.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의 작은 강아지는 날이 가고 주가 갈수록 점점 커지는데 이에 비해 아파트 면적은 절대 커지지 않는 한계 속에서 개가 받을 스트레스는 전혀 감안하지 않았으니. 여기에 잡종견이 순종보다 훨씬 똑똑하고, 다른 말로 하면, 영악하다는 진실을, 신사와 그의 가족은 알긴 알았으되, 진짜 알게 됐을 때는 너무, 늦었다. 그리하여 신사와 그의 가족은 똑똑한 개 추토라를 국경 너머 먼 목장지대로 보내버리기로 결정을 하고, 말대로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를 알아챈 추토라의 반항은 극적으로 작품을 비극으로 끌고 가버린다. 어째 비슷하지? <열정>에서 헨릭과 콘라드의 대결과 <성깔 있는 개>에서 신사와 추토라의 맞짱.
 <열정>이 두 노인 사이 평생을 기다렸던 필생필사의 대결만 아니라 그것이 포함하는 세월 동안 익고 또 익었던 무상함이 독자의 가슴에 호소를 하듯, 이 책도 강아지를 귀여워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가족같이 여기다가 몇 번의 전환점을 맞아 뭔가를 느끼게 된다. 그 ‘뭔가’가 마지막 바로 앞 페이지에 ‘과감하게도’ 분명한 단어로 나오는데, 차마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에 옮길 수 없다.
 하여간 산도르 마라이는 참 이상한 작가다. 이상한 방법으로 독자의 심금을 저리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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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선택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7
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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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이렇게 늦게 읽은 것은, 아래 첨부한 것과 같이, 지난 세기 말에 내가 (아직도!)빌어먹고 사는 회사의 사보에 연재했던 칼럼처럼, 같은 제목의 영화의 인상이 그토록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소피의 선택>을 얼마나 재미있게 보았는지 굳이 원작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제 어느덧 사보 칼럼을 쓰던 시절도 근 20년이 지나가버려 책을 고를 때마다 윌리엄 스타이런이 쓴 원작, <소피의 선택>이 자꾸 눈에 밟히는 거였다.
 두 권 900쪽이 훌쩍 넘어가는 장편소설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영화에서는 원작에서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한 관찰자 스팅고의 사생활 거의 전부를 다루지 않은 건 자연스럽게 보였다. 조금 바꾸어 말하면, 소설의 궁극적 목적은 소피가 숨기거나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들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있다. 당연히 그녀의 비밀은 20 세기 전반기에 벌어진 인류사 상 가장 비참했던 시절의 고통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던 개인의 참혹한 비극, 뿐만 아니라 참혹한 환경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끝 간 데 없이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 인간 이전의 한 생명체로의 본능을 고스란히 밝히는 일. 이 깊은 비밀 혹은 거짓말이 은폐하고 있는 진실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작가는 일인칭 관찰자 스팅고에게도, 비밀 또는 거짓말을 갖고 있는 두 주인공, 소피와 네이선에게도 극적인 전환점 또는 충격을 여러 번 마련해야 했겠다. 이런 과정을 다 밟아야 하니 작품을 길어질 수밖에 없었고, 출간한 시점이 1979년, 잘 팔리는 책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노골적 베드씬이 몇 장면은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소설의 독후감도 그렇고, 영화 감상문도 그렇고, 재미있으면서도 오래 머리에 남을 작품에 관해 쓰면서 작품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내용을 함부로 밝힐 수는 없다. 그래 이런 작품에 관해 쓰기가 대단히 난감하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다루지 않을 것임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만일 당신이 소설도 읽고, 영화도 볼 생각이 있으면 꼭 소설부터 읽고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원작을 아주 잘 따라간 영화라, 소설의 중요한 부분만 집중해 영상에 담았기 때문에 만일 나처럼 영화부터 봐서, 주인공들의 표정과 성격과 연기가 머리에 박힌 다음에 소설을 읽으면, 소설문학 특성상 사건들의 개연성을 주기 위한 준비단계가 장황하게 느낄 수 있을까봐 그러하다.
 주인공 소피Sophie는 악명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년 반을 견디며 생존한 여인이다. 그녀가 아우슈비츠와, 해방 후 소련군 관리 아래에 있던 비르케나우 여자 수용소에서 또 몇 년을 지내는 동안 극심한 굶주림과 각기병을 필두로 한 각종 질병에 시달려 이가 모두 빠진 상태로 뉴욕의 브루클린에 도착한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은인이라 할 수 있고, 나중에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며, 진정한 천재를 가졌으나 편집증 증세가 있는 제약회사 파이저Pfeizer 연구원으로 알려진 네이선을 만나 전쟁 전의 미모를 되찾는다. 물론 벤베누토 첼리니가 만든 것처럼 기막히게 아름답고 체형에 꼭 맞는 틀니와 함께. 남부 출신 작가지망생이자 이들의 관찰자인 스팅고가 단순히 값이 싸다는 이유로 이 유대인 지역의 분홍 페인트가 잔뜩 칠해진 하숙집으로 들어오면서 셋의 우정이 깊어지고, 문학인생이 보다 풍요로워 지는데, 세상에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간혹 네이선의 편집증이 광적인 수준까지 도달해 소피와 관찰자 스팅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편집증. 이게 배우자나 애인을 향할 경우에 편집증은 엄청난 질투의 모습을 띠고 사나운 손톱을 세우게 된다. 부유한 유대인의 둘째 아들인 네이선, 그토록 자상하고 배려해주고, 활수한 친절이 넘치던 쾌활한 천재는 편집증이 도질 때마다 소피를 학대하고, 급기야 폭행하고, 스팅고에게조차 가차 없이 독설과 모욕을 퍼붓는다. 세상에 네이선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소피. 그녀는 어떻게 세상천지 홀로 몸이 되었을까.
 그렇다. 책은 폴란드 여자 소피가 어떻게 해서 세상의 의지가지 하나 없이 브루클린에 홀로 남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일찍이 폴란드 유명 법학자를 아버지로, 음악을 가르치는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둔 소피. 그녀도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빈에서 공부를 하려던 잘 나가던 부르주아 계급. 그래, 하나만 일러두자. 소피의 아버지는 평소 독일 제3제국의 의식을 맹종, 아니, 앞서가던 의식의 선구자로 폴란드 내에서 유대인을 말살하고자 주장하던 반유대주의의 선봉장이었으며, 그녀의 남편 또한 아버지의 애제자였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가장 먼저 총살을 당했던 독일 정신 지지자들. 나치에겐 폴란드인들은 그들의 철학이나 정신세계와 관계없이 모두 쓰레기였으니까. 남은 사람은 결핵으로 죽어가는 엄마와 아이들. 혹시 엄마가 고기를 자시면 조금이라도 더 연명을 할 수 있을까, 도시 밖으로 나가 햄 한 덩이를 가지고 들어오는 ‘중요한 범죄행위’를 벌이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돼 아이들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들어간 여인. 책에는 아래와 같은 발언이 두 번 나온다.


 이 이야기 끝에 소피가 친위대 하우프트슈투름퓌러(대위) 프리츠의 환영사에 대해서 말해 주었는데, 소피와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다시 옮겨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의 말이 정확하게 기억나요. 그가 말했죠. ‘너희들은 요양원이 아니라 강제 수용소에 온 것이다.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굴뚝으로 연기가 되어 나가는 거다.’라고 그랬어요. 그러고는 ‘이 사실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철사에 목을 매고 죽어도 좋다. 여기 유대인이 있으면, 너희들은 이 주 동안만 살게 될 것이다.’라고 했죠.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어요. ‘여기 수녀가 있나? 수녀는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한 달 동안 살게 된다. 나머지는 모두 석 달이다.’” 소피는 수용소에 도착한 후 이십사 시간이 안 돼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었고, 프리츠가 독일어로 이를 확인해 준 것일 뿐이었다. (2권 253쪽)


 이것 말고도 혹시 들어보셨나? 나는 처음 알았다. “레벤스보른.”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또 하나의 악마적 행위로 투명한 피부와 금발을 지닌 소년 소녀들을 3제국으로 납치해 독일인으로 양육하는 프로그램이다. 일단 이런 어린 아이들을 대량 납치한 다음 (폴란드의 한 군郡 지역에서 몇 만 명의 어린이가 납치되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들을 심사해 선택된 아이들은 독일의 각 가정으로 입양시켜 독일인으로 키우고, 탈락한 아이들은 역시 굴뚝의 흰 연기로 바꿔버리는 행위였단다. 아우슈비츠 안에서 소피는 자기 아들이 그나마 레벤스보른으로 선택을 받으면 앞으로 아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세상 한 쪽에서 살 수는 있을 테니 그렇게 만들기 위해 수용소장 헤스를 유혹하기도 한다. 이건 영화에서 나오지 않는 장면.
 이렇듯 책은 아우슈비츠와 브루클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어져 나간다. 간혹 스물두 살의 숫총각 스팅고의 이루어지지 않고 폭소만 터지게 하는 성적 무용담과, 미국 남부와 북부 지역간 갈등이 곁들여지고. 그러나 역시 소설의 척추는 어디까지나 가장 불행한 운명을 거치는 ‘인간’의 비극과 후유증, 불운한 천재와의 극적인 사랑에 맞추어져 있다.
 이와 별개로, 나는 그냥 보통의 인간, 그가 착하거나 악하거나 별로 구별하지 않고 늘 우리 곁에 있던 그냥 사람이, 나쁜 권력을 쥐게 됐을 때 변할 수 있는 모습에도 관심이 많이 갔다. 스탠퍼드에서 유치장 실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2차 세계대전 당시 순간의 변심, 왔다 갔다 하는 기분, 대상자의 외모와 노소, 무엇보다 첫인상에 따라 손짓 한 번에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자의 행동 양식. 이게 내게 대단한 관심을 일으켰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안 가르쳐드리겠다. 재미있는 책이니 직접 읽어보시고 틀림없이 나와 다를 의견을 개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함.
 책의 주요 내용을 드러내지 않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을 이 정도 했으면 그걸로 됐다. 독후감은 여기서 끝난다. 이제 한 가지 궁금한 것. 주인공 소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년 반, 이어서 소련 치하의 비르케나우 여자 수용소에서 일정 기간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소피의 건강에 치명상을 준 것은 나치의 손아귀에서, 전시 치하에 있던 아우슈비츠에서라기보다, 해방 후 소련 관리하의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더 심하게 망가졌다. 유대인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소설 <원수들, 사랑 이야기>를 읽어보면 소련 치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한 소련군이 그저 심심해서 주인공(가운데 한 명)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아 뜯어 볼 살까지 한꺼번에 얼굴에서 떨어져나가는 장면도 나오고, 그곳에서도 숱한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증언하는 걸 읽은 적이 있다. 누구라도 그자가 프롤레타리아이기만 하면 만국의 친구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던 볼셰비키의 후예들의 만행은 왜 아직 고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 “도대체 소련 유대 수용소에선 뭐가 있었던 거야?”라고 포스트잇에 적혀 책 속 한 페이지에 붙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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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소피의 선택> - 정처없는 영혼의 종착, 그러나.....
알란 J. 파큘라 감독, 메릴 스트립 주연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요. 사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막연하고 또 어쩌면 진부하게 느껴질 위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좋은 영화를 가리는 척도가 있을 것이지만, 그 가운데 제일 그럴 듯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 보고 난 다음에 그 잔영이 눈에 한참 어리고 어려서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그 한 장면을 가슴 속에 품고 있을 수 있는 영화, 영화를 보는 내내 몰입하던 무아경이 어느새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여전히 깊은 사색을 유도하게 하는, 그런 영화라고 하면 그렇게 큰 까탈은 잡히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19년 전이던가요, KBS의 명화극장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된 영화가 있었습니다. 알란 J 파큘라 감독이 연출을 하고, 그때 벌써 젊어보이지는 않았던 메릴 스트립이 타이틀 롤을 맡은 <소피의 선택>이 그런 영화였지요. 그 후 <소피의 선택>은 가슴 속에 언제나 묵직하게 자리하여 언젠가는 꼭 다시 봐야하는 숙제로 남아있었습니다만 결국 우리나라에서는 개봉한 기억이 없이 세월이 흐르더군요.
 이 장면이었습니다. 30대 중반의 소피와 네이단 커플, 그리고 화자로 등장하는 스물 두 살의 작가 지망생 스팅고가 뉴욕의 강을 가르는 긴 다리를 걷습니다. 네이단이 스팅고의 원고를 빼앗아 읽은 다음입니다. 밤입니다. 때마침 다리 위엔 이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도 차들도 없이 텅 빈 다리..... 중간쯤에 와서 네이단은 술잔을 하나씩 돌리고 샴페인을 따릅니다. 그는 난간위로 올라가 술잔을 들고 말하지요.

 

 “이 다리에서 / 많은 작가들이 미국의 목소리를 작품에 담아냈고 / 저 변두리의 휘트먼이 미국대륙 전체의 정감을 노래했노라. / 일찍이 토마스 울프와 마크 트웨인이 섰던 이곳에서 / 스팅고를 환영하노라 / 그 역시 빛나는 별들 중 하나가 되리라. // 스팅고를 위하여” 


 어떤 재주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이런 건배 제의를 받을 수 있겠으며, 또 어느 빛나는 입술을 가진 천재가 있어 이렇게 건배를 제의할 수 있겠습니까. 영상을 앞의 정황을 묘사하지 않고 이렇게 단면만 소개하면 전혀 감흥이 오지 않지만, 19년 전 20대 초반의 젊은이에게 위 따옴표 속의 수사(修辭), 그리고 이어서 가로등 위에까지 기어 올라간 네이단이 한 젊은 예비 소설가의 앞날을 예견, 그리고 축복하면서 강물을 향해 빈 술잔을 던지는 모습은 정말로 깊은, 그러나 조금쯤은 사치스런 갈망이었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는 이런 정황, 작가의 성공담하고는 거리가 한참 멉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매우 슬프지요. 위에서 인용한 스팅고는 그저 영화의 이야기꾼에 지나지 않는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큰 희생을 이야기한다면 나치즘으로 대표하는 전체주의에 의해서 저질러진 20세기 중반의 유대인 학살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이에 대해선 너무 많은 저술들과 영상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쉽게 언급하기가 힘이 들지요. 대중들에게 친숙한 필름에서도 우린 아주 쉽게 스필버그가 연출을 한 <쉰들러 리스트>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여지껏 매체들이 다루어온 것은 나치즘의 광기와 유대인의 희생의 장면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꼬집을 수 있을 거예요. 많은 작가나 제작자들이 쉽게 대중에게 어필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실적인 학살의 장면이나 그들의 고통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학살의 과정에서 우여곡절 끝에 살육되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후유증에 대해서. 그들의 대뇌에 박혀있을 너무 깊숙한 고통의 기억과 상실과 공포가 어떻게 영혼을 갉아 먹는지에 관해서는 그것이 유럽대륙이건, 헐리웃이건 간에 제대로 숙고된 적은, 아닙니다, 고민은 하였으나 성공을 거둔 작품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물론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영혼이 황폐화돼가는 모습을 그린 <디어 헌터>가 있긴 있습니다만, 그것은 베트남 전쟁의 당사자의 시각을 너무나도 감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쉽게 성공적이었다고는 말하기 결코 힘들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피의 선택>은 참으로 대단한 영화이지요. 나치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인종청소를 이론적으로 지지한 교수 아버지를 둔 소피는 결국 자신도 아버지와 남편이 집단 사형을 당한 다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갑니다. 수용소에서 두 아이를 잃고 우여곡절 끝에 혼자 살아남은 소피가 미국에 도착해서 유태인 네이단과 동거를 합니다.
 네이단은 넘쳐나는 예술적 기질과 기상천외하여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밖에 없는 기행을 곧잘 하고 다니는 천재이지만, 불행히도 망상증 환자입니다. 천재성이 도가 넘은 것이지요.
 모든 것을 다 잃은 소피에게 네이단은 오직 하나, 가진 것, 기댈 수 있는 곳, 그리하여 그녀의 모든 것이 되고, 천재이자 망상증 환자인 네이단 또한 그녀에게 집착합니다. 이제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 서로의 사랑일 뿐이지요. 그리하여 그들의 사랑은 슬픕니다. 미친 듯이 서로에게 몰두하다가, 네이단이 비정상 상태가 되면 물어뜯듯이 소피에게 악다구니를 쓰고, 또다시 뜨겁게  화해하고......
 이들의 사랑과 죽음이 영화의 척추입니다만, 그들의 사랑이 죽음으로 끝을 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보는 사람의 진정성에 호소하는 것이지요. 영혼이 황폐되어 이젠 남길 것이 그들의 사랑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그 두 사람, 두 영혼의 피 흘림이 전편에 걸쳐 묘사되고 있답니다.
 이 영화의 볼거리는 크게 두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겠어요. 하나는 네이단의 광기어린 천재성과 그들의 사랑, 그리고 소피의 고갈된 영혼이 정처를 찾아 떠도는 모습. 그러나.......


 영화의 줄거리는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예고편을 보시고 정작 가슴저린 영화를 안보실 수도 있을 테니까요. 영화가 다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왜 소피의 선택이 죽음에까지 이르는 사랑으로 마감되어야 하는지, 이것은 당신의 몫으로 남겨야 예의이겠습니다.
 소피와 네이단이 침대 위에 나란히 옆으로 누워 죽어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팅고는 에밀리 디킨스의 시선집을 집어 듭니다. 디킨스의 시, 그것이 이들의 죽음이 종결이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는 단초가 되겠기에 여기 소개하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이 쓸쓸한 침상 위에
찬란한 빛이 비치게 하라
심판의 새벽이 돌아올 때까지, 이 빛나는 아침
이불깃 똑바로 접고 베개도 두둑히 두어
아침 햇살 외 그 어떤 것도
감히 훼방치 못하게 하라




 


  * 네이단이 다리 난간에 올라 스팅고를 향해 찬사를 퍼붓는 장면은 소설엔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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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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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로 칼비노. 가장 먼저 읽은 이이의 책은 <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 107번째 작품이었다. 쥐의 간 요리를 좋아하는 누나가 만들어준 달팽이를 먹지 않겠다고 나무에 올라간 남작이 평생 나무 위에서 사는 동화 같기도 하고 우화 같기도 한 엽기 발랄한 작품이어서 호기심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당장 <우주만화>를 골랐다가, 아이고, 지금 생각해봐도 얼마나 황당했는지. 제목에 ‘만화’가 들어가서 가벼운 읽을거리로 생각한 것이 잘못. 지금 기억나는 건 하여간 <우주만화>를 끝까지 다 읽긴 했다는 거 하나. 저 먼 기억의 음각화로만, 내용은 전혀 아니고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미지만 지금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여간 그때 얼마나 칼비노한테 데었는지 한 동안 그이의 작품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반 쪼가리 자작>, <힘겨운 사랑>을 차례로 읽기에 이른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 거기서 말았다. 근데 작년에 김희선이 쓴 <무한의 책>에 책의 상당부분이 미국의 ‘트루데’라는 가상의 도시를 무대로 한다. 책의 후기에서 도시 이름 ‘트루데’는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따왔으며, ‘초원을 유목민처럼 유동하며 세상은 끝도 없는 트루데란 보이지 않는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로’ 차용했다고 밝혔다.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다음에 읽을, 그리고 칼비노가 쓴 작품 가운데 마지막으로 읽을 책으로 선택했고, 이제 읽었다. 그 도시가 8부, 네 번째로 소개된다.
 내게 누군가 보이지 않는 도시의 이름을 하나만 대보라고 하면, Invisible City of Kitezh,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작곡한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쯔>를 떠올리면서 대번에 “키테쯔”를 꼽았을 것이다. 그런데 또 나더러 그럼 키테쯔란 도시를 칼비노가 책에 쓴 55개의 도시처럼 키테쯔의 특징을 강조하여 묘사해보라, 라고 했다면, 차라리 똥을 싸고 말겠다고 답했을 거 같다. 음악 하나 듣고 특징을 강조해서 A4 용지 한 장 분량으로 서술을 한다니 그게 말이나 돼? 된다. 적어도 칼비노한테는.
 책은 13세기 중엽, 젊은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한汗Khan의 제국 일부이자, 몽고인이 지배하는 지금의 중국 땅을 방문해 쿠빌라이 칸을 만나 자기가 구경한 세상의 쉰다섯 도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쿠빌라이 칸은 칭기즈 칸의 손자로 원元나라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작자 치하에서 몽고의 고려 식민지개척을 완성했다는 건 그냥 참고. 몽고 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만든 황제 앞에서 젊은 이탈리아 장사꾼은 자신이 정말 머물렀던 경험이 아니라, 자기 뇌 활동의 결과에다가 고향 베네치아의 곳곳의 흔적을 묻혀 (쉽게 읽기는 힘들지만) 아름다운 도시의 광경을 묘사해놓았다. 내가 읽은 칼비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책. 물론 역자 이현경의 빼어난 한국어 실력이 뒷받침했겠지만 서정적이고, 사색적이고, 다양하게 상징적인 매력적인 한국말 책으로 만들었다. 총 9부. 1부와 9부는 열 개의 도시, 나머지는 각 다섯 개의 도시, 합해서 쉰다섯 개의 도시에 관한 짧고 아름다운 설명이며, 각 부는 앞뒤에 쿠빌라이와 폴로의 대담으로 구성한다. 칼비노가 전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해도 맞고, 그런 따위는 없다고 본다고 주장해도 맞다. 그냥 독자가 읽으면서 생각하는 게 정답인 소설.
 어떤 작품인지 도시 ‘디오미라’를 설명하는 1부의 첫 도시를 통째로 가져오는 것으로, 책의 맛을 보여드림과 동시에 독후감을 끝낸다.





도시와 기억 1



 그곳에서 출발해 사흘 동안 동쪽으로 간 여행자는 육십 개의 은빛 돔과 온갖 청동 신상들, 주석으로 포장한 거리, 수정의 극장이 있고, 황금 닭이 매일 아침 탑 위에서 노래하는 도시 디오미라에 도착합니다. 여행자는 다른 도시에서도 이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보았기 때문에 이미 이들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의 특징은, 해가 점점 짧아지고 음식점 문 위에 달린 색색깔의 등들이 동시에 켜지고 테라스에서 어느 여인이 “오!”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9월의 어느 날 저녁 이곳에 도착한 사람이, 이미 이와 똑같은 저녁을 경험했고 이제는 그때가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질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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