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유재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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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 1980년대, 90년대에 읽고, 시간이 흘러 대표적 조르바 팬이었던 이윤기가 죽어 드디어 그리스어 원전 작품의 직역이 감행돼 또다시 읽었다. 들은 이야기라서 정확한지 풍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윤기 씨가 그리스어를 공부한 이에게 자신 살아생전엔 <....조르바>는 번역하지 말아달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나도 몰랐는데 이번 유재원 번역의 후기에 보면, 여태까지의 <....조르바> 번역이 그리스어→영어→한국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불어→영어→한국어였단다. 내가 지금 고 이윤기의 다단계 중역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유재원의 이번 번역이 나오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조르바>를 읽기 위해 훨씬 더 긴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었을 터이니. 후기를 보면 고 이윤기와 유재원이 미노타우로스의 섬 크레타에 있는 카잔자키스의 묘를 방문해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소주와 마른 오징어를 놓고 절을 두 번 반 했다는 일화도 적어 놓았다. 그만큼 고 이윤기도 특별히 이 작품을 아꼈다고 한다.
 20대에 한 번, 30대에 한 번, 50대가 저무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읽는 <그리스인 조르바>. 책을 읽으며 나는 엉뚱하게 헤세가 생각났다. 헤세는 한 살이라도 젊어서 읽어야 제맛인데, <그리스인 조르바>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깊게 공감하는 종류의 작품이다. 주인공 조르바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63세의 노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화자 ‘나’와 나누는 다양한 대화를 읽으면서, 젊은 시절이었다면, 이런 주책없는 늙은이를 봤나, 혀를 끌끌 찼을 장면이, 이번엔 키득거리면서 즐거운 유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숱하게 많았다. 그렇다고 앞으로 10년 정도 세월이 더 지나, 또다시 읽어볼 생각은 없다. 그리하여 이번의 일독이 내 평생 마지막 <....조르바>가 될 터.
 앞선 두 번의 <...조르바>에선 없던 프롤로그가 붙어 있는 것이 놀라웠다. 그것이 다단계 중역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인지, 우리나라 출판사의 편집자가 이딴 건 빼버리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롤로그가 붙어 있다는 점 하나만 가지고도 이번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유재원 번역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아쉽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프롤로그를 편집과정에서 삭제했으면 혹시 마지막 장인 26장도 아예 빼버렸거나 대폭 축소해버린 건 아닐까? 고 이윤기 번역의 열린책들에서 나온 <....조르바>는 해설까지 합해서 482쪽. 문학과지성사는 본문만 539쪽, 해설까지 587쪽. 이런 생각이 조금은 타당할 정도로 페이지 수에서 차이가 난다. 프롤로그는 겨우 10쪽에 불과하니.
 유재원은 번역보다 더 힘들고 피를 말리는 과정으로 문학과지성사의 편집자 김은주 팀장이 이끄는 교정과 수정, 표현 다듬기 과정이었다고, 한쪽, 한줄, 한 낱말, 한 글자, 심지어 행간까지도 독수리처럼 매서운 눈매로 잘못을 짚어냈다고 밝혔지만, 그래도 오타는 나온다. 내가 발견한 것이 네 번. 몇 쪽 몇 행에서 나오는지 가르쳐 드리려다가 관둔다. 그래야 매의 눈을 가진 편집팀이 한 번 더 완벽한 교정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처음부터 끝까지 팔 것이니까.
 오늘 독후감에선 내용 소개가 없다. 독서 자체가 삼독이었으며, 원래 유명하게 소개된 작품이라 내용에 관해서 말을 더 보탤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  보너스. 조르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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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30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스인 조르바>가 있지만 이 번역서를 또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덕분에..
삼독이라.... 먼훗날 또한번 이 소설을 읽었다는 리뷰를 보고싶네요. ^^

Falstaff 2019-01-30 15:00   좋아요 1 | URL
ㅎㅎㅎ 글쎄 이 작품을 또 읽게 될 지는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 책은 언제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딱 읽어버리게 되더라고요. ^^

붕붕툐툐 2019-01-30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진짜 좋아하는 책이에요!! 직역 나와서 넘 좋다는!!

Falstaff 2019-01-30 15:45   좋아요 1 | URL
저도 직역본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득달같이 사서 읽은 책입니다.
이 책 정말 좋아요. 한때 인터넷 이름으로 ‘조르바‘를 썼던 시절도 있었습지요. ^^

coolcat329 2019-12-0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이글을 일주일만 일찍 읽었다면 좋았을텐데요... 그리스번역책이 나온줄도 모르고 지난주에 샀네요 ㅎㅎ

Falstaff 2019-12-03 19:57   좋아요 1 | URL
ㅎㅎ 인생이지요 뭐.
본문에 썼다시피 저도 <...조르바>만 세 권을 가지고 있는 걸요. ^^;;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4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정동섭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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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소설의 초장에 등장해,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스페인의 바다호스 지방, 그 중에서도 아주 촌구석인 알멘드렐라호에서 약 삼십 리 떨어진 벽촌에서 진짜로 태어나 성인이 되고, 사고를 치고, 죽어간 파스쿠알 두아르테의 육필 수기 또는 회고록을, 그저 오탈자의 교정 정도를 보는 수준으로 옮겨 적은 일 말고는 없다고 능청을 떤다. 설마 이런 장치를 진짜인줄 아는 독자는 없겠지. 그리하여 일종의 피카레스크 소설이 쓰여 지는데,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피카레스크 양식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폭력적인 아버지와 매몰찬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파스쿠알이 성인이 되어 흉악범죄라고 분류되는 살인을 두 번 저질러 사형에 처해지는 여정을 담았다. 사실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이 살아온 바를 순서대로 기술한다면 피카레스크의 범주에 들지 않기도 쉽지 않을 터이긴 하지만.
 역자 해설에서 정동섭은 스페인·중남미어 문학과 교수답게 스페인의 현대문학 일반을 소개하면서 이 작품을 1940년대 스페인에서 등장해 살아남은 “전율주의”의 대표 작품이라 말하고 있다. 1940년대라면 프랑코 반란군에 의하여 저질러진 내전이 반란군의 승리로 끝나고, 이 와중에 스페인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인재들이 나라 밖으로 몸을 피해 이른바 빈 동굴 현상, 즉 동공현상이 벌어졌던 시기. 그래도 스페인에 남아 있던 작가들은 프랑코의 적대적인 문학검열을 피해야 했을 텐데, 검열에 관한 한 국제적 명성을 떨친 바 있는 우리나라 작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듯, 시인 소설가 극작가들이 스스로 먼저 자체 검열의 함정에 빠져버리고는 했나보다. 말이 멋있어 전율주의지, 그거 사실 별거 없다. 1970년대 대한민국 소설 판에서 유부남과 여대생의 불륜 얘기, 밤에 호스티스로 일하며 동생이나 애인 뒷바라지 하는 이야기가 창궐했던 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는 말씀. 로베르토 볼라뇨는 <야만스런 탐정들>에서 독재 치하에서 전위문학을 주창하는 ‘내장주의’라는 문학 장르를 소개하는데, 스페인의 전율주의와 (작품 속)칠레의 내장주의가 표현방법 외의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후장주의’와는 확실히 다르기는 하지만. 즉 정치나 사회적인 문제에서 좀 떨어진 것을 쓰면 검열을 피할 텐데, 이 책처럼 무지렁이들의 범죄 이야기 같은 걸 쓰면 어떨까, 해서 생긴 ‘주의’ 가운데 하나가 전율주의 아니겠는가 하는 의견. 세상의 모든 사조는 당시 환경에 적응해 발전시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다분히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뭐 아니면 말고.)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단, 재미있게만 읽었다. 동의하지도 않고, 동감하지도 않고, 바람직하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대한성서공회가 공동번역한 <성서> 독후감에 써먹은 바 있는 국회의원이자 양아치 출신의 절름발이 목사 이동철이 쓴, 그러나 황석영의 이름으로 간행했던 <어둠의 자식들>을 읽어보면,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와 친숙한 1960년대와 70년대의 뒷골목 범죄자들의 이야기라서 더욱 ‘친밀하게’ 느껴질 텐데, 그것이 만일 스페인에서 쓰였다는 가정 아래, 모르긴 몰라도 최고의 ‘전율주의’ 문학이라 각광을 받았을 수 있었을 거다. 그러니 내가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을 읽으면서 무슨 특별한 감동이나 동감을 느낄 리가 있었겠느냐는 것이지. 이 책이 스페인 문학사에 어떤 위치를 누리고 있는 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건 스페인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암기 사항이다. 작년 말에 이이가 쓴 <벌집>을 읽었다. 두 권이면 됐다. 호세 셀라는 더 볼 일이 없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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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0
쥘리앵 그린 지음, 김종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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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센 강
 서울시 성북구에도 센 강이 흘렀다. 북악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모여 정릉천을 이루었고, 더 큰 지류인 중랑천에 합류하기 위해 왼편으로 그 유명한 미아리 텍사스를 에둘기 바로 직전, 한 시절엔 대한민국의 문학청년들의 집합소였던 서라벌 예술대학이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으며, 예대가 중앙대 예술대학으로 흡수된 이후 단과대학의 캠퍼스를 중·고등학교가 나누어 썼으니 중등학교로는 규모가 컸던 셈이다. 1970년대 초중반, 모교 서라벌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텍사스 뒷골목으로 걸어서 통학을 하며 바람직한 산교육을 받던지, 길음시장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센 강을 건너는 가장 가까운 골목을 통과해 구멍이 뻥뻥 뚫린 공사장 철판을 잇대 만든 임시 다리를 건너야 했다. 정릉천 주변에 밀집했던 염색공장에서는 흐르는 물을 매일 총천연색으로 물들였으며, 재수 없이 발목 하나라도 물에 담갔다 하면 너무 아름다워 차라리 발목을 잘라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만드는 냄새를 하루 종일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장마가 지면 철판으로 만든 임시 다리가 떠내려가고, 학교에서는 가마니에 모래를 채워 징검다리처럼 폴짝 폴짝 뛰어다니게 장치를 해두었는데, 이게 문제여서, 학생들 등굣길에 동네 꼬맹이들이 아침부터 이리저리 뛰놀고는 했다. 등굣길 학생들은 아침엔 학교 쪽으로, 저녁엔 길음시장 쪽으로 일방통행이었으나, 꼬맹이들이야 어딜 그럴 수 있나. 간혹 동네 꼬마들은 반대편에서 펄쩍 날아오는 큰 덩치의 형들과 공중에서 정면충돌하여 빨갛거나 노랗거나 새파란 정릉천 물속으로 머리카락 끝까지 풍덩 빠지곤 했다. 그 꼬맹이들 아직 잘 살고 있는지 몰라.


 2. 센 강
 늙수그레한 남녀가 서로 다투고 있다. 둘 다 초라한 입성에 남자는 술에 취해 있고, 여자는 제르베즈 여사만큼 다리를 전다. 남자는 무어라 고함을 치기도 하지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한다. 여자는 남자의 주먹과 발길질의 사정권 밖에 있으려 무척 조심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둘은 센 강의 선착장 쪽으로 향한다.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필리프. 곧 무슨 험한 사고가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둘 사이에 개입해 남자를 제압하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근처에 경찰이라도 있다면 부탁하고 싶다. 하필이면 밤이 깊어 아무도 없다. 그들의 뒤를 밟는 필리프. 석탄회사 이사로 부르주아 계급의 신체 건강하고 키 크고 건장한 체격의 보유자. 그러나 외양과 달리 키 작고 술 취한 중늙은이 앞에 다가가 어쩌면 당장이라도 벌어질 수 있는 폭력, 예를 들어 다리를 저는 여인을 산 채로 센 강에 던져버린다든지, 교살을 한 다음에 시체를 강에 유기한다든지, 하는 가능성을 완력으로 제압하기엔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들의 뒤를 밟다가 결국은 놓쳐버리고, 대신 모자를 깊숙이 쓴 각진 얼굴의 키 작은 사내가 등장해 약간의 현금을 요구하자 대항할 생각 없이 속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사내의 머리 위로 높이 던져, 잠깐의 시간을 벌어 죽자 사자 달아나는 인물. 그에게도 센 강은 일 년여에 걸쳐 초라한 입성의 중늙은이 남녀, 특히 다리를 저는 여인의 죽음과, 하마터면 실제로 일어났을지도 모를 자신의 죽음으로의 강이 된다.

 

 3. 센 강
 필리프의 두 여인. 아내 앙리에트와 처형 엘리안. 예쁘기만 하지 알고 보면 그리 비싸지 않았던 가난한 여인 앙리에트와 한 침상에 들기 위해 유약한 필리프가 제시한 조건은 결혼. 결혼 첫날 밤, 드디어 작업에 들어가려는 순간 앙리에트는 높은 소리로 한없는 웃음의 폭포를 쏟아내고, 딸꾹질까지 겸해 점점 더 참을 수 없는 홍소를 퍼붓는 것에 질려버린다. 결혼과 동시에 앙리에트를 향한 사랑은 종말을 고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로베르가 태어난 다음부터 둘은 절대로 한 침대에 오르지 않는 단계로 고착된다. 더구나 부모 둘 다 서로가 사랑하지 않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오직 육체의 결합이 만들어놓은 아들 로베르를 향한 애정도 없어 파리 외곽지역의 기숙학교에 처넣어버린 상태. 앙리에트가 고집을 부려 처형 엘리안을 같은 집으로 데려와 집사 비슷한 위치로 만들어놓고, 그녀는 아침 먹을 때 외에는 얼굴 한 번 맞대지 않는 무관심과 비겁함과 매사 주관이 없는 남편이 알거나 모르거나 가난하고, 키 작고, 별로 잘 생기지도 않은 애인을 만들어 주 2회 밀회를 즐기고 있다. 심지어 애인이 요구하는 칠천 프랑을 남편에게 뜯어내기 위해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언니에게 부탁해 기어이 애인이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 언니 엘리안의 평생소원은 동생 앙리에트가 죽거나 이혼을 당해 필리프가 홀아비 혹은 이혼남이 되면 자신이 차지하는 가망 없이 가책만 되는 일. 필리프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처녀의 몸으로 동생의 남편을 사랑하는 불행한 여인은 동생이 남편에게 전혀 애정이 없고, 애인만을 사랑한다는 것을 은근하게 알려줘도, 매사에 맺고 끊는 것이 없는 필리프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아내의 정부를 확인했으면서도, 어영부영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대신 아들 로베르와의 사이는 돈독해지고. 어느 안개 낀 9월 30일 아침. 필리프는 로베르의 손을 잡고 센 강으로 산책을 가, 로베르를 다리 위에서 기다리게 해놓고 강변으로 내려가 장갑을 벗은 다음 손목을 흐르는 센 강의 물속으로 넣는다. 이어 팔꿈치까지. 또 어깨까지. 이제 발뒤꿈치에 약간의 힘만 주어 근육을 튕기기만 하면 약 이삼 분 질식의 시간이 준비가 되어 있고, 그 단계만 지나면 그토록 기다리던 ‘아무 의미도 없는 삶’을 끝낼 수 있을 텐데.

 

 4. 나는 이런 작품을 좋아한다. 그러나 섣불리 다른 분께 권하지 못하겠다. 분명히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인간의 형질 속에 있는 본성의 미묘함을 세밀하게 잡아채는 작품. 1890년 생으로 1932년에 이런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놀랐다. 전적으로 아마추어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프루스트와 누보 로망, 딱 그 사이에 걸쳐 있는 소설을 읽은 느낌. 물론 문장은 프루스트와는 달리 간결하다. 적어도 간결한 편이다. 해설을 읽어보면 사르트르의 <구토>나 까뮈의 <이방인>과 유사한 실존 소설이라는 설명도 있다. 수긍이 가기는 하지만 세밀한 감정의 묘사는 나로 하여금 누보 로망 쪽으로 더 기울어지게 만든다. 역자 김종우의 우리말 문장도 좋다. 독자 평에는 번역이 좋지 않다는 의견도 있으나, 내가 읽기로는 원작 자체가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닌 거 같다. 읽기를 끝내자마자 쥘리앵 그린, 이이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보았으나, 번역한 작품은 이거 말고 하나도 없다. 이름을 기억해놔야 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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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1-28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넘 아름다운 리뷰에요~ 저도 지루함을 잘 느끼는 독자지만, Falstaff님의 리뷰를 읽으니 읽어보고 싶은 맘이 샘솟네요~~

Falstaff 2019-01-28 09:48   좋아요 1 | URL
이런 과찬을 하시다니. 고맙습니다.
선택의 결과는 ㅎㅎㅎ 책임지지 않겠습니다.

bgkim 2019-04-02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린의 다른 번역본이 두권 있습니다.80년대 초에 간행되엏네요.<레비아탕>과<모이라>가 학원

bgkim 2019-04-02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에서 <미친사랑의 노래(아드리엔 므쥐라)>가 중앙일보사에서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왔어요.헌책으로 간혹 눈에 띄니 꼭 구입해 읽어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Falstaff 2019-04-02 20:53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예, 기회가 닿으면 꼭 읽어보겠습니다.
 
지옥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8
앙리 바르뷔스 지음, 오현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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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대단히 유명한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바르뷔스의 번역 저작이 이 <지옥> 말고는 한 권도 없다. 이이가 말년에 공산주의에 심취해, 1934년 모스크바 방문 중 현지에서 사망해 그랬나? 1873년 생. 이 작품은 1908년 출간. 역자 오현우 선생은 작품 해설에서 “바르뷔스는 에밀 졸라를 계승한 극명한 사실주의풍의 작품세계로 프랑스 문학사에서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내 눈에는 이 책 <지옥>에서 졸라의 그림자는 발견할 수 없었다. 졸라라기보다 오히려 세기말 주의 비슷한 탐미, 허무, 비장, 죽음 같은 어두운 무드가 초지일관 계속되는 데 조금 질렸을 뿐이다. 매우 아름다운 문장들. 작가 자신이 시집 <흐느끼는 여인들>로 스물두 살에 데뷔를 해서 그런지 시적인 산문으로 위에서 얘기한 세기말 적 분위기를 정말 아름답게 써놓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단박에 바르뷔스의 글에 빠져버렸고, 문학 창작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필독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감각적이고 치명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하나 둘이 아니어서 만일 그것들을 독후감에 인용한다면 A4 용지로 열 장은 넘겨 써야할 거 같다.
 그러나, 할머니가 내게 가르쳐준 만고의 진리. “꽃노래도 삼세번.”
 100쪽을 넘기면서 엉뚱하게도 스페인의 시인이자 소설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생각났다. 저절로 그이가 떠오르더라. 탐미적이고, 아름다움을 찾는 뛰어난 시선과 단어를 가진 매력적인 문장가. 그이가 쓴 <인상과 풍경>을 읽고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 세상에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 하, 그런데. 처음에 깜짝 놀랐던 로르카 표 몽상과 탐미와 섬세한 감각이 하도 계속되니까, 나중엔 아주 질려버리고 말았다.
 바르뷔스의 이 책은, 고독한 한 프랑스 남자가 당연히 여성을 찾다가, 몇 번의 좌절 끝에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방 벽의 빈틈으로 옆방을 들여다보는 행위를 담았다. 우연히 찾게 된 빈틈으로 처음엔 그냥 빈 방, 그 텅 비어 있음의 나체 상태를 보는 것에서, 하녀가 혼자 들어와 반라의 상태까지 되는 것을 지나, 드디어 방에 든 첫 번째 커플. 사촌 관계인 둘이 서서히 피부를 맞대고, 키스를 하고, 옷을 벗고 벗기는 순간 그들을 찾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여성 동성애자 커플을 지나, 드디어 성인 남성과 여성이 저녁 어스름 빛 속에서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남자는 시인, 여자는 ‘에메’라는 이름의 유부녀. 이른바 불륜 관계. 당연히 이 소설은 작가의 뇌 활동에 의해서만 쓰인 것이어서, 이들이 쉬지 않고 입을 맞추며 나누는 대화 역시 전부 작가의 상상력일 터인데, 매우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치명적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하다가, 너무 장황하게 늘어져 지쳐빠지게 만든다. 남편을 통해서는 성적 만족도, 사랑의 확인도 감지하지 못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한 방에 들어 이리도 장황한 말을 할 수, 들을 수 있을까. 여자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내가 여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러면 남자는? 리비도의 분출을 억제하고 자연의 어둠이 그대와 나 사이를 막아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없을 때까지 적극적 몸의 접촉을 억제하고, 죽자 사자 아름답고 치명적이고 감각적인 단어로 만들어진 문장만 나불대며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농담해? 이런 의미에서 “졸라를 계승한 극명한 사실주의 풍”은 헛소리, 또는 이 작품을 뺀 다른 소설에 해당하는 말이라 단정했다. 이들의 대화에서 주가 되는 명사들은, 거의 다 추상명사들이다. 꿈, 슬픔, 죽음, 과거, 사랑, 구원, 선량, 겨울, 비탄, 기타 등등, 기타 등등, etc, etc. 그래, 그래. 나중에 하긴 한다. 작품을 처음 출간한 1908년 수준으로 보면 매우 선정적일 수도 있는 언어로.
 이어서 난데없이 죽음을 앞둔 그리스 출신 부자 노인이자 병자와, 젊은 아가씨와 출산을 앞둔 여자. 이렇게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필이면 임산부는 화자이자 며칠 후 실업자가 되면서 호텔방을 해약하고 나가버릴 음험한 관찰자 앞에서 산도를 훤하게 드러내놓고 출산을 하며, 병자는 데려온 젊은 처녀와 결혼을 통해 거액을 상속해주고, 그리하여 부인이 된 여자는 눈만 살아 있는 남편에게 (그리고 벽의 빈틈 사이로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에게) 이제 온전히 남편의 것이 된 자신의 동정녀 상태인 나신을 공개하고, 그리스 정교를 믿는 병자는 가톨릭 신부 앞에서 다분히 사회주의적 토론을 통해 회개하기를 거부한 후 죽음을 맞으며, 죽음을 앞둔 환자 앞에서 호텔 주인이 몰래 들어와 가방 속에서 지폐뭉치 한 다발을 훔쳐나간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추상명사의 대행진. 이어 상복을 입은 처녀 과부 안나가 자신의 처녀성을 던져버린다. 독자는 자신이 읽고 있는 장면을 소설의 진짜 스토리의 하나로 읽어도 되고, 작가 또는 화자의 상상력의 힘으로 이야기를 꾸며내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자신을 벽의 틈새로 옆방을 엿볼 수 있는 한 호텔방에 유폐한 채 스스로를 관음의 지옥 속으로 떨어뜨린 남자의 이야기. 나중에, 벽에 작은 구멍을 뚫고 옆방을 들여다보는 남자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는, 그 즈음 각광을 받기 시작한 소설가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글쎄. 내 생각엔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지난 세기말적 작품이 조금 더 발전한 상태인 것 같다. 20세기 초반 작품임에도 상당히 모던한 감각이 돋보이는데, 내 취향엔 조금 과했다. 내가 18세기, 19세기 초반 독일의 낭만주의 작품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잠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남이 써놓은 글 열심히 필사하는 작가 지망생들은 읽어볼 만하겠다. (근데 ‘필사’가 좋은 방법이긴 한가? 필사 좋아하다가 자신이 필사해놓은 대목을 자기 작품 속에 그대로 베낀 경우는 없을까? 난 있다는데 만원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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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망스 세계문학의 숲 52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시공사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 52번째 작품.
 이 출판사의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엔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다. 이제 겨우 52권의 책을 냈을 뿐이지만 출간한 권수에 비해 밀도 있는 작품이 몰려 있다. 예를 들어, 출간 역순으로,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잭 케루악의 <다르마 행려>, 허먼 멜빌의 <피에르, 혹은 모호함>, 카슨 매컬러스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F 스콧 핏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 일리아 일프와 예프게니 페트로브 공저 <열두 개의 의자>, 안나 제거스의 <제7의 십자가>, 재닛 프레임의 <내 책상 위의 천사>,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에밀 졸라의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발레리 라르보의 <페르미나 마르케스>, 콘라드 죄르지의 <방문객>, 등등. 여기다가 다른 출판사와 겹치는 <베를린 알렉산더 공원> 같은 것들까지 합하면 정말 정선한 작품이 모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멜빌과 핏제럴드의 작품은, 번역과 오역 여부는 모르겠고, 역자가 바꾼 우리말 문장에 문제가 ‘많은 것 같아’ 권하지 못하겠다. 이 두 작가의 책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것들이 매혹적이라,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를 주시해왔는데, 회사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2016년에 한 권, 17년에도 한 권, 18년에도 또 단 한 권만 냈을 뿐이다. <아르망스>는 2018년에 찍은 단 한 권의 세계문학의 숲. 그것도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19세기를 프랑스 소설의 세기로 만든 작가 가운데 한 명인 스탕달. 어찌 일독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작품을 발표한 시기가 1827년. 190년 전이다. 스탕달은 나폴레옹 군대에 입대해 1814년 키 작은 영웅이 엘베 섬에 유배될 때까지 충직한 지지자로 있다가 유배 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살았다. 엘베 섬에서 탈출해 백일천하를 누린 나폴레옹에게 합류하지 않은 서른한 살의 스탕달은 이탈리아의 따뜻한 풍광 속에서 열심히 연애를 하고 실연을 당했다고 책 앞날개에 쓰여 있는데, 자신 스스로가 우울증 증세가 심해 자살시도도 하고 그랬나보다. 이탈리아에서 꾸준히 저작생활을 하다 마흔네 살이 됐을 때 발표한 첫 번째 소설이 바로 <아르망스>.
 지금부터는 내 짐작이다. 프랑스에서는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다. 저 멀리 십자군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 12세기 당시 왕을 모시고 전쟁에 참여한 유서 깊은 귀족들이 진짜 귀족이고, 재주는 파리 시민이 부리고 돈은 코르시카 촌놈이 벌었던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 때 보나파르트가 함부로 던져주던 귀족 작위를 얻은 신흥귀족 사이엔 서로 반목과 멸시가 있었다(고 다른 책에서 읽었다). 나폴레옹 지지자였던 스탕달 입장에선 당연히 오랜 귀족들에 대한 묘한 질시와 경멸과 열등감과 이상하게도 자신의 눈에 두드러져보이던 위선 같은 것이 강조되었을 수 있다. 여기다가 자신이 심각하게 경험한 우울증. 이 둘이 합해져 그의 첫 번째 소설 <아르망스>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잽싸게 망명했다가 1825년 전후로 다시 돌아온 옛 귀족의 우울증이 심한 외동아들을 주인공 ‘옥타브’로 내세웠다. 옥타브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프랑스인 어머니와 러시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세상에 나왔지만 아버지가 일찌감치 전사하고 엄마마저 곧바로 숨이 넘어가 먼 친척인 드 보니베 부인 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사는 아르망스 드 조일로프 양이다.
 재미난 것이, 아주 전형적인 19세기 문학이라는 점인데, 이 전통은 20세기 한국의 대중문화인 만화에서 주요 모티브로 쓰인 적이 있다. ‘이상무’라는 만화가를 기억하시나? 그가 만든 대표적 주인공 독고탁. 천애고아로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우연히 그룹 회장급 생부가 나타나 팔자 고치고 잘 산다는 거. 옥타브의 집안인 드 말리베르 가문이 오랜 망명 생활 끝에 귀국해보니 집안의 재산이 거덜이 난 상태. 거렁뱅이 귀족보다 한심한 것도 드물단다. 그러다가 1826년 왕정복고 후 옛 귀족의 잃어버린 재산을 회복해준다는 법령에 따라 한 방에 수백만 프랑의 재산이 생기는 기적이 벌어지고, 찬밥 신세인 잘생긴 청년 옥타브 역시 한 순간에 사교계의 총아로 떠오르게 된다. 이 청년이 가난한 아가씨 아르망스와 연애를 하는 이야기. 이게 소설의 주요 줄거리가 된다. 소설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의사 불통”으로 인한 오해와 결투와 질투와 명예와, 우여곡절 끝의 결혼과 비극적 결말로 종을 치게 되는데, 읽다보면 답답해 죽는다, 죽어. 작품 속에, 특히 비극에선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갈등이 생기는 방식과 그로 인해 두 주인공 사이의 골이 깊어지는 구조가, 물론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어, 그냥 19세기 초반에 나온 소설의 한계려니, 하고 말았다.
 혹시 나처럼 <적과 흑> 그리고 <파르마 수도원>을 머리에 떠올리고 이 책을 읽는 분은 읽는 도중에 남자 주인공 옥타브의 예를 따라 우울증 증세가 도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리라. 분명히 경고했다. 우울증 정도는 가뿐하게 여길 수 있으면 이 책에 도전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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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1-24 1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답답하셨죠? 왜 말을 안하는 지 원... 현대 드라마에서 남주인공 여주인공들이 꼭 그러더니 스탕달에게서 배웠나봅니다. ㅎㅎ 암튼 아르망스의 그 이유는 참 ㅋㅋㅋ 헛웃음이 ㅋㅋㅋㅋㅋ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원 애두 참...

Falstaff 2019-01-24 12:37   좋아요 1 | URL
제 말이 그겁니다.
마누라가 바가지 긁으면서 가끔 하는 말이, 당신은 내가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하참. 제 대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응. 말 해야 알아. 네가 귀신이랑 사는 줄 아니?
이거 읽으면서 정말 속 터지더군요. 책 읽으면서 잠자냥님 원망해본 게 처음입니다. ㅠㅠ (ㅋㅋㅋ)

레삭매냐 2019-01-24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잔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에
<아르망스>에 대한 언급이 나오던데...

그래서 더 반갑게 느껴지는 리뷰였습니다.

근디 출판사가 시공사라... ...

잠자냥 2019-01-24 21:28   좋아요 1 | URL
시공사는 작년에 대표가 아예 바뀐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전 씨 일가는 시공사와 아무 상관 없을 거예요.

Falstaff 2019-01-25 10:26   좋아요 1 | URL
전씨 자서전도 다른 출판사에서 찍었습지요.
이래서 인간이 나쁜 짓을 하더라도 좀 적당히 해야 한다니까요.
대대로 죄 받잖아요.

잠자냥 2019-01-25 10:55   좋아요 1 | URL
전 씨 및 이순자 자서전은 그때 ‘자작나무숲‘이라는 출판사에서 냈는데, 알고 보니 그 출판사는 시공사 임프린트 출판사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썩은 자서전은 아들내미가 내준 게 맞지요.

관련 글 http://blog.aladin.co.kr/socker/9259387

그러나 어쨌든 작년에는 대표가 바뀌었고, 새 대표가 인터뷰에서 자신은 전 씨 일가와 아무 상관없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으니 좀 믿어볼까 싶습니다.

Falstaff 2019-01-25 12:36   좋아요 1 | URL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은 좋은 작품이 다수 포진해 있는데, 본문에도 썼지만, 멜빌과 핏제럴드는 권하지 않습니다.
번역문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품을 망칠 수 있는지 경험하고 싶으신 분께는 적극 추천!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하는 편집 관련 종사자께도 적극 추천. 일반 독자에겐 비추 itself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