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공연예술신서 50
김태웅 지음 / 평민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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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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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이자 연출가. 극단 “우인”의 대표. 서울대 철학과 졸업하고 예종 연극원 극작과 예술전문사 과정 졸업, 2004년부터 예종 연극원 극작과 교수. 이게 김태웅에 관한 바이오 전부다. 나머지는 연출과 극작, 수상경력.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2000년에 연우무대에서 공연한 <이爾>를 쓴 극작가였다는 거. 이때 이 연극이 장안의 화제였다는 기억이 난다. 나는 보지 못했다. 다만 특이한 한자어를 제목으로 해서 호기심이 생겼을 뿐. 그저 우리나라엔 없는 중국어 품사인 어조사를 제목으로 하고 있으니 거 참. 그러다가 나중에 알았다. 이 ‘이’가 “꽃 많고 성한 모양”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걸 이준익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히트작을 만들어냈으니 바로 <왕의 남자>였다. 나는 <이爾>를 보지 않았고, 그저 도서관에서 희곡집을 들춰만 봤는데 <왕의 남자>와는 달리 현대 장면도 나오는 걸로 짐작해 연산군 시절 이야기만 영화화한 것으로 짐작한다. 도서관 서가 <이爾> 바로 옆에 먼지만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책이 바로 《반성》이었다.

《반성》엔 희곡 두 편이 실려 있다. <반성>과 <오버 더 레인보우 Over the Rainbow>.

<반성>에는 75세의 남자 신갑성과 그의 처 김명자, 그리고 맏아들, 둘째 아들과 막내딸이 등장한다. 신갑성은 젊어서 온갖 험한 짓을 해 돈을 번 인물이다. 나중에 처가 될 김명자와 잣으로 유명한 동네에서 살았다. 깡패들 데려다가 철거민들 두드려 패고, 권력에 기생해 비리를 저지르기 밥 먹듯이 하다가 난데없이 딸 혜선이가 학생운동을 한다니까 돈벌이에 행여나 해를 끼칠까 싶어 우산으로 딸도 두드려 패던 아버지. 그러다가 늙어 기독교에 귀의해 독실한 장로님이 됐다. 맏아들 일호는 공부 하나는 똑소리 나게 잘 해 전국 수학경시대회 1등을 먹기도 한 수학영재였다. 아버지는 교수나 목사로 만들고 싶었지만 결국 죽도 밥도 아니고 평범한 직장생활 몇 년 후 사업을 하다가 5년 전에 아버지와 대판 싸운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말로는 지역방송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국인 교포 자제를 위한 학원의 수학 강사로 밥 벌어먹고 산다. 둘째 두호는 영화판을 전전하는 영화인이다. 노래와 춤, 연기 같은 것을 좋아해 중학교 다닐 때부터 시간만 나면 기타를 두드리곤 했지만 건전한 사회인을 만들기 위한 아버지 눈에 걸렸다 하면 기타가 박살이 나고 귀퉁백이에 불이 났던 기억만 있다.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으며 전처와 재결합을 모색하고 있다. 와중에 영화제작을 해봤으면, 하는 미련이 남아 아버지에게 자신을 위해 집을 담보로 자신이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말을 꺼냈다가 대판 사달이 나고 만다. 막내 혜선은 열심히 인공수정 시술을 받고 있다. 밖으로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할 때 지독한 고문을 받아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혼외정사를 한 적이 있으며 이때 덜커덕 아이가 생겨 남편 모르게 낙태를 한 후유증이 거의 틀림없다. 소위 ‘운동’을 반대하는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한 기억이 기어이 아버지 생일 파티가 끝난 후에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악을 쓰게 만드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그러나 진짜 이 가족 관계의 치명적 상처는 부부 사이에 있다. 아내 김명자는 재혼이다. 잣나무가 유난히 많은 고향에서 김명자와 신갑성은 서로 눈이 맞은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못한다. 대신 신갑성과 가장 친한 친구와 혼인을 하고 임신을 했다. 아이를 배서 그런지 명자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친구는 갑성과 함께 아내에게 잣죽을 끓여준다고 잣을 따러 산에 올랐다. 잣은 높은 나무에서 딴 것이 더 씨알이 좋다고 이 책에 나와 있는데 정말인지는 다음으로 하자. 그래 친구는 높은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로 올랐고, 갑성도 명자에게 줄 잣죽일 터이니 기꺼이 친구와 함께 바로 옆나무의 꼭대기에 올랐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묘한 욕심이 생겨 잣 터는 나무 작대기로 친구를 밀어 떨어뜨려 죽여버리고 만다. 명자는 충격을 받아 유산을 하고, 시간이 지난 후 명자의 시아버지가 어느 날 밤, 갑성을 불러 명자와 함께 야반도주를 하라고 어깨를 두드려준다. 물론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갑성이 (암으로 추정할 수 있는) 수술을 하고 5년이 지났다. 스스로도 그렇고, 명자가 생각하기에도 그런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싶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장로인 갑성의 믿음은 날이 갈수록 진지해지고 있다. 남편의 마지막이 마치 손에 쥐어질 듯한 명자는 이번 남편의 생일에 며느리와 사위를 제외하고 오직 자신의 가족들만 생일 파티를 열자고 제의한다. 그리하여 미국에 살고 있는 일호까지 무리해서 불러, 자신의 하나 남은 소원, 아버지 눈 감기 전에 예전 가난한 시절에 그랬듯이 한 이불을 다섯 식구가 함께 덮고 자고 싶다는 마지막 바람을 이루고 싶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들 남매들에게는 당장 눈 앞의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 갑성의 유산배분 문제.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정여사는 땡전 한 푼 남겨줄 것이 없이 눈을 감으시어 우리 형제가 여전히 우애 좋은 관계로 남아 있으니 말이지. 하지만 이들 남매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가 유언을 하기를, 집은 아내 명자의 명의로 유지하고, 기타 모든 재산은 아내와 세 자녀, 네 명이 똑같이 나누어 차지하라고 전한다. 곧바로 싸움이 벌어지고, 자신들의 신세 한탄이 터진다. 이런 상태에서 혜선이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폭언까지 나온다. 그러니 진짜로 악마 같은 아빠는 아니었지 않나 싶다. 흥분이 최고조에 도달한 사십 대 여성이 무슨 말을 하지 못할까. 역시 기가 넘어가게 흥분해버린 40대 남성과 50대 남성 역시 혜선과 거의 같은 수준의 막말을 지껄인다.

그러나 희곡의 제목은 어디까지나 <반성>. 이들은 대단원을 향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했다고 반성하기 시작한다. 반성? 진짜 반성? 그러면 자신의 몫을 형제나 엄마에게 줄 수 있다는 얘기야? 그건 아니겠지. 그럼 이들이 말한 반성은 진정한 반성이라고 하기 쉽지 않다. 엄연히 배금의 시대에 말이지. 이 중에도 진짜 반성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누구냐고? 그걸 어떻게 알려드리나. 기가 막힌 마지막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지. 위에서 갑성이 명자의 첫 남편을 살해했다는 거, 이런 거 언제 내 독후감에서 밝힌 적이 있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화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마지막 장면,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반전에 비하면 그까짓 것은 이도 나지 않은 수준이라서 그랬다. 지금 이 책이 품절도 아니고 절판이다. 그러니 (그럴 리 없겠지만) 어떤 반전인지 궁금하시면 서둘러 도서관으로 달려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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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너가의 남매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김윤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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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카프카, 헤르만 헤세, 슈테판 츠바이크, 발터 벤야민 등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독일어 작가 로베르트 발저는 1878년 스위스의 작은 도시 빌Biel에서 태어나는데, 유년 시절에 아버지 발저 씨의 사업이 점점 망조가 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총명해서 공부도 잘하던 로베르트는 잘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열네 살의 나이로 은행 도제로 들어가야 했다. 소년시절에 연극에 매혹되어 있던 로베르트는 실러의 <도적떼> 또는 우리가 흔히 쓰는 제목으로 <군도群盜>를 특히 좋아해 도제 생활을 마친 후, 마쳤다기 보다는 은행에서 쫓겨나고 17세 때 형제 카를이 살고 있는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배우가 되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쉽게 말해서 젊은 시절의 로베르트 발저가 하는 모든 일은 실패했다고 보면 95점. 게다가 어머니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어 오래 치료를 받다가 로베르트가 열여섯 살이던 1894년에 사망한다. 아버지 발저 씨는 사업 실패 후에 거의 영향력을 잃어버리고(돈 못 버는 수컷의 비애라니!), 로베르트는 엄마를 탁했는지 정신적인 문제로 누이 리사와 함께 벨레 근방의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다는데, 리사도 함께 입원했다는 게 아니라, 당시에 누이가 학교 교사 일을 해 로베르트를 당분간 먹여 살렸다는 얘기 같다. 1916년이면 로베르트가 38세 됐을 땐데, 형제 에른스트 역시 발다우의 정신병원에서 죽었고, 1919년엔 베른의 대학에서 지리학 교수를 하던 형제 헤르만은 자살로 생을 마감해버렸다.

발저 가문의 우울한 내력을 소개하면, 아버지는 사업 망하고, 엄마는 정서적 문제로 장기 치료 후 사망. 형제 가운데 카를은 화가, 에른스트는 정신병 사망, 헤르만은 대학 교수, 누이 리사가 학교 교사, 아주 나중에 다른 누이 파니가 권유해서 로베르트 본인 역시 베른에서 정신분열, 장기 입원 후 78세까지 살다가 병원 근방을 산책하다 눈 속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 먼저 책을 다 읽고 발저 가문의 내력을 알게 되면 <타너가의 남매들>이 바로 자신의 가족 이야기로, 진짜 형제, 누이들이 개별적이 아니라 각각의 특징을 여러 인물에게 분산시켜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의 등장인물 남매는 맏이가 상당히 이름난 학자인 클라우스 박사요, 둘째가 저 뒤에서야 술꾼들의 수다를 통해 딱 한 장면에서 거론되다시피 정신병원에서 숟가락 놓는 에밀이며, 셋째가 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진중한 성격으로 형제들을 원격으로 돕고자 하는 누이 헤드비히요, 넷째가 바로 여성들이 봤다 하면 홀랑 빠져들고 마는 매력을 가진 그림쟁이 카스파이고, 막내가 로베르트 발저의 분신이랄 수도 있어서 학교 잘 다니다 때려치우고 온갖 직업을 전전하지만 불과 몇 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해고를 당하거나 스스로 그만 두어버리는 우리의 주인공 지몬이다.

실제로 로베르트 발저는 스물일곱 살 때인 1905년에 화백 형 카를이 살고 있던 베를린으로 가서 하인양성소를 한 1년 못 미치게 다니다가 연말에 오버슐레지엔에 있는 담브라우 성에서 진짜 하인으로 일하기도 한다. 이때의 경험을 담아 펴낸 책이 <야콥 폰 군텐 Jacob von Gunten>, 우리나라는 문학동네에서 <벤야민타 하인학교>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며, 내가 읽은 첫 번째 로베르트 발저이기도 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발저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감도 잡히지 않아 사람 속을 뒤집어 놓기도 했다. 이후 로베르트 발저는 로베르트 무질과 함께, “뇌 흔드는 로베르트들”로 나한테 찍혀 다시는 읽지 않았다가, 사실 출간한 책도 별로 없기도 했고, 올해부터 다니기 시작한 동네 도서관 개가실에 들여놓고 5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새 책과 다름없이 손 때가 타지 않은 상태로 잘 모셔져 있는 것을 발견해 한 번 읽어볼까, 읽다가 또 뇌 헝클어지면 안 읽으면 그만이지, 하는 심정으로 빌려 읽었다가, 이게 웬일이니, 나름 대박이다.

지몬, 이 스무 살 청년으로 말할 거 같으면, ‘지몬’이라고 하는 것보다 영어식으로 ‘시몬’이라고 읽는 것이 더 편하겠지만 역자의 의견을 좇아주는 것이 또한 독자의 예의라 계속 ‘지몬’으로 하겠지만, 이 청년의 근본적인 본질은 “촌놈” 또는 “농촌출신”이라는 건데, 그렇다고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것이 없어서 겨우 스무 살 밖에 먹지 않았지만 하는 말뽄새를 보나 행동하는 것으로 보나, 생각하는 것을 보나, 머릿속에는 3백년 묵은 거북이, 그것도 도가 터서 곧 날개까지 새로 날 것 같은 선zen 거북이가 들어 있는 것이 틀림없어서 굳이 세상살이에 아득바득, 애달캐달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철학이 있음은 물론이고 가지고 있는 철학을 진짜 삶에서도 관철시키고자 한다. 21세기 우리나라로 예를 들면, 부모의 영향권에서는 이미 벗어나 있고, 동생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으나 동생들도 어엿한 성인이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결정이라고 믿는 관대한 형과, 여러모로 자신의 친구와 다름없는 작은 형, 기꺼이 돌봐주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의지하려는 건 봐주지 않는 마음씨 좋은 누이를 둔 막둥이 남동생을 생각해보시라.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공부를 더할 수도 있으나 공부는커녕 어떠한 스펙에도 관심이 없고, 사회적 안정과 “일반인이 생각하는” 의식주와는 별로 가깝지 않은 생활, 가장 중요한 오늘 고단한 머리를 뉠 수 있고 소박한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살을 덮어주는 의복만 있으면 만족하는 스무 살 청년.

당연히 아르바이트 정도만 만족하고 어떤 정규 직업도 사양하는데 이는 철저하게 자신의 다차원적인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이고, 이것 만으로 본인이 거의 완벽하게 만족을 느낀다는 건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스스로 이 청년, 지몬처럼 오늘을 지내고 있는 21세기 우리나라의 청년들조차 지몬의 의식/생활방식을 쉽게 이해하지는 못할 듯하다. 나름대로 상당한 수준의 지성을 가지고 있고, 번듯한 직장에서 훌륭하게 일을 할 정도의 역량도 지녔지만 자신을 향한 조금의 정당하지 못한, 또는 못하다고 느끼는 질책을 견디지 못하는 비사회성의 소유자. 비사회성을 가졌다고? 격한 단어이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부적응자. 아마 로베르트 발저 본인이 그랬을 거 같다. 그리하여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 창작에 힘을 쏟았고, 그것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지자 거의 모든 일에 염증과 두려움과 혼란과 방황을 거쳐 병증이 생겼고 그것을 이기지 못해 오랜 정신치료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가족력까지 있었으니. 스무 살 지몬은 행복했을지 몰라도 서른한 살의 로베르트 발저는 전혀 그러지 못했으니.

그러나 이 책을 누가 이따위 스토리 텔링으로 읽느냐 말이지. 내용? 독특하지, 독특해. 그러나 어디서 본 것 같다. 그렇지? “I would prefer not to” 하면 떠오르는 인물. 그러지 말자. <타너가의 남매들>을 읽을 때 당연히 그이가 생각나겠지만 눈 질끈 감고 그건 그냥 한 번 넘어가보자. 그러면 보이는 것. 저 밀물 같은 유장한 수다.

지금 생각해보면 새삼스레 “다시 책을 읽어볼까?” 싶어서 책 읽기를 시작했던 십 년 전, 로베르트 발저가 쓴 <벤야민타 하인학교>를 읽다가 경끼한 것이 바로 이 밀물 같은 수다 때문 아니었을까 싶다. 밀물 같은. 이 표현이 맞다. 해일 같은, 폭포 같은, 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고 흐르기는 흐르는데 급격한 유속을 가졌다기 보다 묵지근하니 지르지만 그게 쉼없이 쳐들어와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드는 단어들의 침범. 예를 들어 이랬다. 첫 페이지에 나오는 귀절이다. 지몬이 일자리를 얻으러 서점에 들러 책방 사장한테 자기를 써달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길지만 인용하면서 독후감을 끝내겠다.

“저는 서적상이 되렵니다. 저는 그러기를 갈망하고 있으며 그 무엇도 제가 마음먹은 바를 실행에 옮기는 걸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서적상이라는 것을 저는 예전부터 뭔가 매혹적인 것으로 머릿속에 그려 왔으며 제가 뭣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 좋고 멋진 것을 하지 못한 채로 썩고 있어야만 하는지도 이해가 안 됩니다. 보시다시피, 어르신, 지금 이렇게 어르신 앞에 서 있자니 제가 어르신의 상점에 있는 책들을 판매하는 일, 어르신이 바라 마지않을 만큼 얼마든지 많은 책들을 판매하는 일에 탁월한 적임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타고난 점원이랍니다. 매너 있고, 민첩하고, 예절 바르고, 신속하고, 냉정하고, 결단력 있고, 셈에 밝고, 면밀하고, 진실하고, 그러면서도 또, 아마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너무 미련 맞게 진실한 건 아닙니다. 저는 가난한 대학생 녀석을 상대하게 되면 값을 깎아 줄 수도 있습니다. 부자인 사람들에게라면 호의를 베푸는 차원에서 값을 올려 부를 수도 있어요. 종종 자기 돈을 어찌해야 좋을 지 모르는 사람들일 테니요. 저는 이렇게 아직 어려 봬도 사람을 좀 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사람을 좋아합니다. 사람이 각양각색인데도요. 그러니까 저는 제가 가진 사람 보는 눈을 이윤을 올리자고 함부로 쓰는 일은 결코 없을 거란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녀석을 지나칠 정도로 배려하는 바람에 어르신의 귀한 사업에 누를 끼칠 생각 역시 없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제 애정은 판매라는 저울 위에서 사업의 이치와 더불어 보기 좋게 균형을 유지할 것입니다. 사업의 이치란 중요한 것이고 제가 보기엔 사랑 가득한 영혼과도 같이 삶에 꼭 필요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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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3-01-14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밀물같은 해일같은 폭포같은 수다😯 그래서 지몬은 서점에 취직 되었나요? 저 장황한 말을 듣고 주인이 과연 뽑아줬을지 궁금하네요🤔😆

Falstaff 2023-01-14 11:30   좋아요 1 | URL
당연히 취직합니다. 저런 말빨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장사를 잘 하겠어요. 그리고 진짜로 잘 팔기도 하고요. 근데, 도무지 싫은 소리를 듣지 못해서, 며칠 안 가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야단 맞았다고 그날로 관두고 나와버립니다. ㅎㅎㅎ

moonnight 2023-01-14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뱅글뱅글@_@;; 저는 골드문트님 독후감으로 만족하렵니다@_@; 엄두도 안 나는군요 @_@;;;

Falstaff 2023-01-14 11:31   좋아요 1 | URL
문장이 조금 유장한데요, 이런 글들을 시간을 갖고 음미하면 나름대로 괜찮은 맛이 나기는 합니다. ㅎㅎㅎ 저처럼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셔요!!

stella.K 2023-01-14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이렇게 불행할 수가. 금치산자라니…ㅠ
근데 정말 수다 엄청나네요. 저만큼이 혼자하는 말이라니…
이거 만약에 연극 대사였다면 진짜 경기했을 겁니다.
지금까지 대사 많기로 악명 높은 사람이 김수현 작가였는데. ㅎㅎ

Falstaff 2023-01-14 13:0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좀 더 있습니다. 차마 다 쓰기엔 인용이 너무 길더라고요.
게다가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오기도 한답니다.
제가 백수만 아니라면 이런 책은 사서 꽂아놔도 괜찮을 거 같은데요. ^^;;

그레이스 2023-01-15 0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저의 <벤야민타 학교> 읽겠다고 사논지 꽤 됐는데;; 두번이나 그러셨으면 각오해야겠네요. <산책자>도 있는데....;;

Falstaff 2023-01-15 11: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사셨으면 읽어야지, 아깝잖아요. ^^

hnine 2023-01-15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책자와 세상의 끝, 이렇게 두권만 읽었어요. 두권 다 에세이지요.
소설도 읽어보자 했는데 아직 못읽었네요. 이 사람의 최후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 여파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있어요.

Falstaff 2023-01-15 16:5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찬찬히 읽으셔요. 괜히 스트레스 받으실 필요 없습니다. ^^

yamoo 2023-01-16 18: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발저의 책이 지만지에서 나왔네요...아, 발저의 책을 모으고 있는데, 지만지 저 책 시리즈는 너무 비싼거 같아요...헌책 나올때까지 다른 책 읽으면서 기둘려야 될 듯해요..ㅎㅎ

Falstaff 2023-01-16 21:5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도서관 가세요. 저도 아주 오랜만에 갔는데요, 아후.... 뎡말 둏더라고요!!! ㅋㅋ
 
무어의 마지막 한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2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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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드디어 나왔군요! 저는 문학세계사 판으로 읽었습니다만 절판이라 아쉬웠습니다. 얼른 사 읽으셔요. 이건 소장용입니다. 진짜 드런 사랑 이야기. 크..... 동서양은 물론이고 중세로 거슬러가는 휘황찬란한 구라의 향연. 이런 거 루슈디 아니면 어디 가서 구경도 못합니다. 강추, 강추, 또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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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1-13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알겠습니다😅

Falstaff 2023-01-14 05:14   좋아요 0 | URL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

바람돌이 2023-01-13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 ^^

Falstaff 2023-01-14 05:15   좋아요 0 | URL
오, 이거 재미나요. <악마의 시> 이후 처음 쓴 성인용(19금 아닙니다) 장편소설이라더군요! ^^

잠자냥 2023-01-14 01: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드럽다는 말 하지 마세요…. 드런 사랑 저에게 한동안 금지어 ㅋㅋㅋㅋㅋ 앜ㅋㅋㅋㅋㅋ

- 2023-01-14 01:4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별 다섯개 준 사람 아니세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동물성애???ㅋㅋㅋ

잠자냥 2023-01-14 02:00   좋아요 1 | URL
그건 그거고 울렁거리는 거는 어쩔 수 없어 ㅠㅠ

- 2023-01-14 01:54   좋아요 1 | URL
두려워… 말과 개… 개와 말… 일단 본적도 없는 뎈ㅋㅋ 암튼 자기 전엔 안 읽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1-14 02:00   좋아요 1 | URL
안 돼! 여긴 골드문트 서재야! 문트 님 심약해서 내 리뷰도 끝내 못 읽은 섬세한 사람인데 그 사람 안방을 일케 더럽히면 안 돼! ㅋㅋㅋㅋㅋㅋ

- 2023-01-14 02:04   좋아요 0 | URL
어이쿠 골드문트님 죄송함다!!!! 저번 부터 제가 자꾸 이상한 거(청소년 시기의 괴로움 같은?) 물어보고 그럼 잘 답해주시고 ㅋㅋㅋ 그러셔서 제가 버릇이 잘못 들었네요… 심약한 문학청년이셨을 텐데… 마음만은 지금도 윤동주 이실텐에 ㅋㅋㅋ 저의 이 죽일놈의 호기심을 왜 여기서 떠들었는지ㅋㅋㅋㅋ 죄성합니다 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1-14 05:2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우리말 어감이 참.... 재미납니다.
산 같이 쌓인 향신료 자루 위에 기어 올라가 난만한 사랑을 나누는 젊은 남녀. 행위 내내 맛있는, 신묘한, 환각적인 공기와 향이 두 정인을 애워싸는 그런 사랑, 크....

- 2023-01-14 0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Falstaff 2023-01-14 05:21   좋아요 1 | URL
윤동주, 특히 이 시, 예쁜 시어와 달리 별로 정이 안 가는데요. ㅋㅋㅋㅋ

건수하 2023-01-14 1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드런….? 저도 어제 본 게 있다보니 이상한 상상만 ㅠㅠ

Falstaff 2023-01-14 11:33   좋아요 2 | URL
에휴. 그게 참 ㅋㅋㅋ

페넬로페 2023-01-14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얼른 구입해서 읽어야겠어요^^

Falstaff 2023-01-14 15:54   좋아요 1 | URL
훌륭한 선택입니다! ^^

yamoo 2023-01-16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것습니다! 얼른 모셔오갔습니다..ㅎㅎ

Falstaff 2023-01-16 22:00   좋아요 0 | URL
옙. 이 책은 야무 님도 좋아하실 거 같습니다. ^^

yamoo 2023-01-17 10:02   좋아요 0 | URL
문학세계사인가 문학수첩인가...그 출판사 상하권으로 돼 있는 본으로 있습니다. 역자가 다르면 모셔오구요. 같은 역자라면 패쑤할게염~~^^;;

Falstaff 2023-01-17 15:36   좋아요 0 | URL
역자가 다르고요, 문둥이네 집에서 이번에 새로 번역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즐겁게 읽으셔요!!!

모과차 2023-01-18 16: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골드문트님 글에서 접하고, 왠지 무척이나 궁금했던 책인데 이렇게 재출간됐네요. 이번 기회에 바로 구매해야겠어요. 덧붙여, 올리신 글들 언제나 조용히 즐겨 읽고 있습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ㅎㅎ

Falstaff 2023-01-18 22:1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진짜 별 거 없는 페이퍼인데요.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작품, 재미있습니다.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
 
폐허의 형상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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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1973년 정월 초하루,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한 산부인과에서 쇠똥을 허옇게 뒤집어썼으면서도 입엔 은수저를 물고 세상으로 빠져나온다. 부모가 욕심이 많아 어려서 총명탕을 먹였는지 공부도 잘 해, 누구나 콜롬비아 국립대학에 갈 줄 알았지만 워낙 집안에 좋은 연줄이 많아 그들의 영향권 밖에서 지내보고 싶은 마음에 국립대 말고 사립 로사리오 대학 법학과에 진학한다. 후안의 부모, 속 깨나 썩었는데, 지도급 인사들의 자제가 주로 다니던 국립대도 그런 경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립대, 특히 로사리오 대학은 1990년대 초반 당시 가장 적극적인 반정부 시위를 펼치던 곳이었다. 그럴 리 없지만 행여 후안이 반정부 시위에 그것도 수뇌부로 가담하기라도 하면 집안 망신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말이지. 그러나 걱정도 팔자. 당시 콜롬비아는 정치 투쟁 말고도 마약 왕들끼리, 마약 왕들과 정부군과의 사이에 무자비한 전쟁과 테러리즘 때문에 도처에 범죄가 횡행하고, 심지어 대낮에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함부로 기관총을 다니던 중원 고수들의 활극 시기였다. 법 공부도 잘하지만 일찍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훌리오 코르타사르 등의 라틴 문학과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의 영문학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학문에 관한 비슷한 깊이만큼 겁도 많아서, 한 해 수백명이 테러를 당해 죽어가는 콜롬비아에 정이 똑 떨어져 (스페인이라면 그나마 조금 이해라도 하겠는데)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공부하니 이게 웬 돈지랄인지. 하여간 무려 16년 세월을 유럽에서 보낸 2012년,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고 훨씬 안전해진 조국으로 돌아와 여태 살면서 작품활동에 전념을 기울이고 있다. 위 내용은 이이의 전작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의 독후감에 이미 올린 것을 참고해 다시 쓴 거다.


  음모론에 관한 소설이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독후감을 쓰다가 여차하면 작금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비교할까봐 조심스럽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쓰는 독후감이기 때문에, 특히 우리나라처럼 잘 드는 과도로 토막 낸 사과 같이 딱, 반이 갈려 서로가 서로를 잔뜩 꼬나보고 있는 마당에 여차하면 양쪽 다로부터 욕이나 푸짐하게 얻어 걸리기 십상이라서, 욕이란 건 될 수 있으면 안 먹고 사는 편이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 최대한 정치판과 비교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니 읽는 분께서도 애초 이해하실 마음을 잡숫고 보시면 좋겠다. 하긴 이 땅의 거대 정당 두 개가 다 거기서 거기지, 좌우가 어딨고 진보-보수가 어딨니? 어디 가서 특정 정당을 진보니 좌파니 하지 마시라. 쪽팔려 돌아가시겠다. 두 거대 정당의 차별점은 그냥 1찍, 2찍, 지지 정당만 다를 뿐이다. 한쪽이 하는 짓이라고는 수구 골통 짓이고, 다른 쪽이 하는 짓이라곤 데마고기 뿐이니, 그냥 그렇게들 계속 살아라. 괜히 남 독후감 쓴 거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  무지하게 장황하다. 나는 이이가 쓴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었다. 물론 지금은 보고타 북쪽 250킬로미터에 있던, 당대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어린이들의 꿈과 환상을 위해 지은 개인 동물원 “얌마라”를 탈출한 1.5톤 무게의 흑진주색 하마와 마지막 장면 정도만 기억한다. <추락하는…>에 비하면 <폐허의 형상>은 장황하고 장황하다. 본문만 670페이지이지만 마음 같아서는 4백쪽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폐허의 형상>은 콜롬비아 근현대사에 있었던 무수한 테러 사건 가운데 두 장면을 특정해 상세묘사 한다.

  한 명은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정식 이름은 라파엘 빅토르 제논 우리베 우리베. ‘우리베’를 연달아 두 번 쓴 걸 보니까 부모가 친척 관계였던 것 아닐까 싶다. 1859년생으로 일찍이 콜롬비아 내전 당시 최후의 전쟁으로 일컫는 마지막 “천일전쟁”에 참여했다가 패전을 한 인물로 내전 종식 후 콜롬비아의 좌파 자유진영인 자유당 대표를 지내다가, 책에 등장하는 젊은 변호사 안솔라가 법정에서 끝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결국 두 명의 목수, 헤수스 카르바할과 오비힐도 갈라르사가 누구의 사주도 없이 휘두른 손도끼에 정수리를 얻어맞아 1914년 10월 15일, 백주 대낮에 절명하고 만 것으로 결론이 난다. 이때가 1914년. 유럽에서는 세계대전을 시작해 기관총이 난사하는데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전군 돌격’을 외친 마지막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지금 시각으로 보면 야만의 시대. 목수 두 명이 독단적으로,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장군이 자유당을 말아먹고 있으며 조만간에 그들 같은 소규모 수공업자를 전부 굶겨 죽일 거라고 확신에 차 벌건 대낮에 유명인사 가운데 유명인사인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의 정수리를 도끼로 쪼갤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이들은 근처에 운집했던 군중들에 의해 린치를 당하기 전에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로 곧바로 들어가 콜롬비아 역사상 가장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4년을 보낸다. 이 사이에 미주알이 째지게 가난했던 이들 가족은 건물주가 되고, 금고 아래 깔린 현금이 위에서 누르는 현금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당연히 이들은 하수인에 불과했을 것. 

  또다른 한 명은 1948년 4월 9일에 애매한 나치주의자이자 장미십자회에 심취한 청년 후안 로아 시에라가 역시 백주 대낮, 만인 환시리에 인파가 붐비는 보고타 거리 한 복판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을 걸어가던 콜롬비아 좌파 정당의 기수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 작중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라디오 DJ이자 법의학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법학 전공자이자 심각한 수준의 불건전한 강박증에 시달리는 모습이 인간이 되기 위해 고통받는 악마와 비슷한 카를로스 엘리에세르 카스바요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백년의 고독>을 쓴 가르시아 가브리엘 마르케스에 의하면 아주 근접한 위치에 있었던 옷을 잘 입은 신사 차림의 남자가 그 자리에서 즉각 군중들에게 가이탄을 쏜 범인을 지목하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 대장 가이탄에게 네 발의 총알을 발사한 범인 시에라는 근처 약국으로 도망을 해, 약사는 본능적으로 셔터를 내렸지만 구두닦이를 비롯한 유난히 험한 성격의 군중들이 셔터를 부수기 시작하자 어차피 문을 열 수밖에 없는 약사가 다시 셔터를 올린다. 밖으로 끌려 나온 저격범을 향한 구두닦이들의 구두통에 의한 두부 가격과 철제 의자로의 폭행으로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렀고, 드디어 숨이 넘어갔음에도 군중들은 시에라를 발가벗겨 포장도로로 질질 끌고 가 대통령 궁에 벗겨버린 옷으로 마치 십자가에 묶인 누구처럼 매달아버리려고 했으나 대통령 경호대원들의 사격과 추격, 이어서 시민들을 향한 대량 학살로 진행되고 만다. 시민 가운데 몇 명은 시에라를 절대 죽이면 안 된다는 것, 살려서 법정에 올려야 범행을 사주한 진짜 세력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을 흥분한 군중들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반대쪽에선 서둘러 저격범의 입을 막아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백년의 고독>을 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최초로 군중을 선동한 이를 두고 “회색 스리피스 슈트를 입고 영국 공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고 책을 통해 진술한다. 물론 마르케스는 그를 직접 보지 못했다.


​  총명하지만 극단적인 집착 증세를 보이는 심야 라디오 DJ 카를로스 카스바요는 가이탄 암살 사건의 배후 조종자를 찾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한다. 이것은 “사물의 진실을 읽는 법”을 찾는 여정이어서 이후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도 모두 가이탄 저격과 연결시킨다. 예를 들면, 알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 비행기 한 대에 무너져버리는 건물은 전부 개소리고 사실은 미국 내부에서 꾸민 일이라는 것. 누구든 현상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는 법이라서 미국 정부가 하고 싶은 전쟁을 정말로 하기 위하여 민간인 3천명을 희생시켰다는 거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매릴린 먼로의 죽음 사이에도 공통점이 분명하게 있다는데 어떤 공통점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중요하고 충격적인 사건일수록 거대한 조직은 베일에 가린 채로 행위를 직접 저지른 인물의 입을 영원히 막는다는 건데, 과거에는 분명히 맞는 의견이었을지언정 SNS가 발달하고 익명의 의견이 자유롭고도 무책임하게 살포되는 현재 시점에서도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런 음모론을 작가는 펼쳐서 옹호하거나, 알려서 오히려 야유한다.

  작가와 작중 등장인물이 천착하는 것은 두번째, 1948년 4월 9일에 있었던 호르헤 가이탄 암살 사건과 사건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 집단의 정체. 그리하여 <폐허의 형상>은 중증 편집증 환자라고 볼 수 있는 카를로스 카스바요가 지금은 가이탄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의 옛집에 오전 11시에 잠입해 마지막 관객까지 다 퇴장한 후, 너클더스터를 낀 손으로 유리를 파손해, 가이탄이 피격을 당했을 당시 입고 있어서 네 개의 구멍이 뚫린 정장 한 벌을 훔치려 한 절도 미수로 체포된 모습을 작가 자신,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가 TV를 통해 전혀 놀랍지 않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  장편소설은 특성상 다양한 에피소드를 거느린다. 이러한 에피소드가 찬란히 빛을 발해 작품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경우도 있다. <전쟁과 평화>의 폴로네이즈 장면을 에피소드의 대표로 꼽는 것은 나 한 명인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다. 이 책 <폐허의 형상>은 그러나 그게 좀 심했다. 만일 바스케스가 콜롬비아 근현대사에서 음모설을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사건을 동등하게 비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그건 작가 마음이니까 내가 뭐라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장황하다. 너무 장황하다. 예를 들어 ‘나’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가 카를로스 카스바요와 알게 지내는 과정, 그와 함께 가이탄의 저격에 관하여 작업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타당성을 위한 여정, 카스바요를 소개한 인물과의 인연이 생긴 사연, 심지어 전작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에서 이야기했던 것의 재탕, 삼탕까지, 장황해도 너무 장황하다. 작품 전개상 “반드시 필요한” 1914년 10월 15일의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저격 사건은 심지어 2백쪽을 넘겨 묘사를 하고 있다.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문장 사이의 넘김이 매끄러워 읽는데 무리는 없지만 지금 읽고 있는 에피소드가 스토리에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책의 초반을 지날 때부터 이런 생각을 쉼없이 하게 만든다.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데엔 동의. 그러나 나는 권하지 않겠다. 읽고 싶으면 읽으시라. 말리지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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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 - 茶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0
라오서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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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변발을 하고 다니던 만주족 영재 출신.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이른 나이에 죽는 바람에 완전히 자기 실력 하나 가지고 북경사범을 졸업해 19세에 소학교 교장, 25세부터 5년 동안 런던 대학의 강사로 체류하다가 귀국해 교수를 하며 창작에 힘을 쏟은 전기전적인 인물이다. 나는 이이의 작품으로는 런던 생활의 경험으로 쓴 소설 <마씨 부자>, 중원눙의 각색을 통해 읽은 희곡 <낙타 상자>밖에 없어서 라오서의 작품들이 어떻다,라고 이야기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다만 라오서의 한살이를 돌아보면 우여곡절이 많기도 많은 세월을 살았다. 서구 열강의 침략이 계속되는 와중에 청말(淸末)의 혼돈기를 거쳐 청조가 막을 내린다. 이어 위안스카이가 잠깐 위세를 떨치다가 일본이 본격적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국민당이 득세를 해 일본과 맞서 싸우는 틈을 노려 마오가 이끄는 공산당이 점점 세를 불리고, 국민당은 공산당과 합작을 해 일본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다 아는 것처럼 국민당은 공산당에 축출당해 대만 섬으로 유배당하고 만다. 어쨌건 간에 안정을 찾은 중국 땅의 대학애서 선생을 하며 창작활동만으로 한 평생 마감할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문화혁명의 바람을 거세게 맞아 1967년에 늙은 몸을 호수(태평호)에 던져 우여곡절의 대단원을 마친 인물. 중국 현대문학 주머니 속의 송곳. 마치 다이허우잉의 작품 속 등장인물 같다.

희곡 <찻집>은 1957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바로 위 단락에서 이야기했던 ‘서구 열강의 침략이 계속되는 청나라 말기’가 1막, 아직 청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펄 벅의 <대지> 2부에서처럼 중국 전역에서 군벌들이 일어나 함부로 백성들을 갈취하던 시기가 2막, 미국과 담합한 부패한 국민당 세력이 권력을 잡고 일본군/공산당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가 3막으로 되어 있다. 장소는 베이징의 ‘유태裕泰’ 찻집이다. 처음엔 주인공이랄 수 있는 왕이발이, 부친이 숨을 거둔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 새롭게 가업을 이어받아 베이징의 대표적 찻집 네 군데 가운데 하나인 유태 찻집을 크게 만들겠다는 포부가 있던 시절이다. 그러나 세월이 그걸 내버려두지 않아서 2막과 3막으로 갈수록 점점 쇠락해간다.

1막에서 왕이발이 가업을 더욱 번창시키겠다는 은근한 야심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서태후와 서태후에 기생하는 환관무리 등의 수구적 탄압으로 중국은 날마다 한발씩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담사동의 개혁(또는 유신)마저 실패해 백성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굶주린 백성들은 특히 딸이라면 부잣집이나 세력가의 처첩으로 팔아 가족의 수를 줄여 남은 가족들이나마 배를 곯지 않게 하고 딸이라도 밥술 깨나 먹을 수 있도록 혈연 끊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길거리마다 거지들이 득시글거렸다. 베이징 거리는 완력 쓰는 왈패들과 이들을 고용하는 관리나 부자들이 장악했으며, 이들의 정점에 작품에서 서태후의 환관 방태감龐太監으로 대표하는 고위인사가 있었다.

2막과 3막도 마찬가지다. 권력과 부는 물리적 힘을 가진 깡패와 경찰(비슷한 공권력), 군인들에게 집중되고 백성은 기아선상에서 헤매는데 중간계급인 찻집주인 왕이발은 쉼없이 뇌물과 명목상 보호비를 질러주어야 했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이런 현상은 없어지지 않았다. 백성은 인민으로 변화하기 위한 태동도 시작하지 못했다. 대개 이런 가난과 굶주림과 불평등과 극심한 차별은 서서히 끓어오르다가 드디어 비등점에 도달하기만 하면 작지 않은 규모로 끓어 넘치거나 ‘민란’ 이나 ‘반역’ 또는 ‘혁명’으로 터져 나오기 마련인데 당시 중국에서는 특별한 환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바로 외세의 간섭 또는 침략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찻집>을 민족주의적 작품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청말부터 공화국 수립 전 시기까지 중간계급의 생활 터전인 유태찻집을 무대로 한 것부터 거의 모든 계급이 한 장소에서 만나거나 아니면 적어도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고 봐야한다. 그리하여 다른 장소였다면 쉽게 표현하지 못했을 당시 중국의 많은 계급/계층의 등장인물이 서로의 입장에서 짧지 않은 험한 세월을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비단 중국 뿐이었겠는가. 일본을 제외하면 당시 아시아 거의 모든 국가가 비슷한 처지로 몰려 밖으로 유럽 열강의 대책 없는 침공과 안으로 무너져가는 왕국의 헐벗은 시절을 견뎌야 했을 터이니.

책을 넘기면 실제 공연하는 사진이 몇 장 실려 있다. 자오쥐인과 샤춘의 공동연출한 1989년 북경인민예술극원 공연 사진 두 장, 린쟈오화 연출의 1999년 북경인민예술극원 2세대 공연, 그리고 멍징후이 연출의 포스트모던 버전. 멍징후이는 연출도 하지만 극작가이기도 해서 희곡 <떠돌이 개 두 마리>와 슈프레히코어 희곡작품 <워 아이 XXX>을 읽어본 적이 있어서 그가 어떻게 이 작품을 “포스트모던”하게 연출했는지 상당히 궁금하다. 중국의 현대 극연출은 주로 유럽의 공연물에서 볼 수 있는 무대의 해체 뿐만 아니라 각본까지 대폭 손질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책에 실린 멍징후이의 무대 사진은 마치 외계 행성의 비탈지고 건조한 조형물 같이 보이는데 실제 공연을 찍은 것이라 어둡게 촬영되어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작품도 중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리얼리즘 자체인데 그것을 모던도 아니고 포스트모던 하게, 라니 말이지.

큰 규모의 작품이다. 시대적 배경도 수십년에 걸쳐 있고, 등장인물 역시 각 계급을 망라해야 하니까 상당히 많은 편이다. 작은 극장에서 공연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규모를 갖고 있다는 건 쉽게 공연하기 어렵다는 것과 같은 말임에도 역자 해설에 따르면 <찻집>은 1958년 초연부터 2021년까지 720회 이상 공연했는데, 이게 전회, 전석 매진이었다고 하니 중국인에게 이 작품이 갖는 위상과 공감능력을 단박에 짐작하게 만든다. 1960년대 문화혁명 시기엔 라오서의 모든 작품을 공연할 수 없었을 터, 그 기간을 빼고 감안한다면 작품에 대한 중국인의 애정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우리한테도 이런 극작품이 있을까? 이건 독자, 그리고 소수일 수밖에 없는 연극 애호가의 힘과 애정만 가지고는 만들 수 없다. 한 종족을 대표하는 드라마가 나오기 위하여는 일종의 캠페인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캠페인을 좋아하지 않는 인종으로 굳이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거의 모든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드라마를 꼭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내게 그렇다면 우리의 으뜸가는 극작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정말로 어려운 질문을 한다면, 극단적으로 사적인 감정이라는 전제 아래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나 천승세의 <만선> 정도를 후보작 가운데 하나로 추천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 연극이 부럽다. 끊임없이 애정을 갖을 수 있는 드라마가 있고, 그것의 리비전 연출한 작품 역시 계속 출현하는 환경. 그러고도 연출가, 희곡작가가 배곯지 않고 오히려 나라 밖으로 활발하게 진출해 다시 새롭게 각색해 공연할 수 있는 저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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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1-10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게 말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말도 안 되는 출연료를 받고
무대에 서는 연극인들도 많더라구요. 물론 잘 되서 TV에도 나가고
영화에도 진출하면 좋지만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도 무대 한 번 서 보겠다고... 눈물 겹죠.
쭝국이 배곯지 않고 예술활동하는 건 정말 부러운 일이긴 한데
대신 당에 충성해야 하는 프로파간다가 있긴 하겠죠.

Falstaff 2023-01-10 17:5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중국인으로 그나마 제대로 폼 잡고 살면서 당의 명령...까지는 아니고 당이 바라는 바를 어기면 뭐 여차 없을 거 같습니다.
거기서 ˝조금˝ 비껴가는 사람들이 연예, 예술, 스포츠 기타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예컨데 박/전 시대 때 소위 3S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