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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너가의 남매들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김윤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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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카프카, 헤르만 헤세, 슈테판 츠바이크, 발터 벤야민 등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독일어 작가 로베르트 발저는 1878년 스위스의 작은 도시 빌Biel에서 태어나는데, 유년 시절에 아버지 발저 씨의 사업이 점점 망조가 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총명해서 공부도 잘하던 로베르트는 잘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열네 살의 나이로 은행 도제로 들어가야 했다. 소년시절에 연극에 매혹되어 있던 로베르트는 실러의 <도적떼> 또는 우리가 흔히 쓰는 제목으로 <군도群盜>를 특히 좋아해 도제 생활을 마친 후, 마쳤다기 보다는 은행에서 쫓겨나고 17세 때 형제 카를이 살고 있는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배우가 되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쉽게 말해서 젊은 시절의 로베르트 발저가 하는 모든 일은 실패했다고 보면 95점. 게다가 어머니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어 오래 치료를 받다가 로베르트가 열여섯 살이던 1894년에 사망한다. 아버지 발저 씨는 사업 실패 후에 거의 영향력을 잃어버리고(돈 못 버는 수컷의 비애라니!), 로베르트는 엄마를 탁했는지 정신적인 문제로 누이 리사와 함께 벨레 근방의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다는데, 리사도 함께 입원했다는 게 아니라, 당시에 누이가 학교 교사 일을 해 로베르트를 당분간 먹여 살렸다는 얘기 같다. 1916년이면 로베르트가 38세 됐을 땐데, 형제 에른스트 역시 발다우의 정신병원에서 죽었고, 1919년엔 베른의 대학에서 지리학 교수를 하던 형제 헤르만은 자살로 생을 마감해버렸다.
발저 가문의 우울한 내력을 소개하면, 아버지는 사업 망하고, 엄마는 정서적 문제로 장기 치료 후 사망. 형제 가운데 카를은 화가, 에른스트는 정신병 사망, 헤르만은 대학 교수, 누이 리사가 학교 교사, 아주 나중에 다른 누이 파니가 권유해서 로베르트 본인 역시 베른에서 정신분열, 장기 입원 후 78세까지 살다가 병원 근방을 산책하다 눈 속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 먼저 책을 다 읽고 발저 가문의 내력을 알게 되면 <타너가의 남매들>이 바로 자신의 가족 이야기로, 진짜 형제, 누이들이 개별적이 아니라 각각의 특징을 여러 인물에게 분산시켜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의 등장인물 남매는 맏이가 상당히 이름난 학자인 클라우스 박사요, 둘째가 저 뒤에서야 술꾼들의 수다를 통해 딱 한 장면에서 거론되다시피 정신병원에서 숟가락 놓는 에밀이며, 셋째가 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진중한 성격으로 형제들을 원격으로 돕고자 하는 누이 헤드비히요, 넷째가 바로 여성들이 봤다 하면 홀랑 빠져들고 마는 매력을 가진 그림쟁이 카스파이고, 막내가 로베르트 발저의 분신이랄 수도 있어서 학교 잘 다니다 때려치우고 온갖 직업을 전전하지만 불과 몇 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해고를 당하거나 스스로 그만 두어버리는 우리의 주인공 지몬이다.
실제로 로베르트 발저는 스물일곱 살 때인 1905년에 화백 형 카를이 살고 있던 베를린으로 가서 하인양성소를 한 1년 못 미치게 다니다가 연말에 오버슐레지엔에 있는 담브라우 성에서 진짜 하인으로 일하기도 한다. 이때의 경험을 담아 펴낸 책이 <야콥 폰 군텐 Jacob von Gunten>, 우리나라는 문학동네에서 <벤야민타 하인학교>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며, 내가 읽은 첫 번째 로베르트 발저이기도 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발저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감도 잡히지 않아 사람 속을 뒤집어 놓기도 했다. 이후 로베르트 발저는 로베르트 무질과 함께, “뇌 흔드는 로베르트들”로 나한테 찍혀 다시는 읽지 않았다가, 사실 출간한 책도 별로 없기도 했고, 올해부터 다니기 시작한 동네 도서관 개가실에 들여놓고 5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새 책과 다름없이 손 때가 타지 않은 상태로 잘 모셔져 있는 것을 발견해 한 번 읽어볼까, 읽다가 또 뇌 헝클어지면 안 읽으면 그만이지, 하는 심정으로 빌려 읽었다가, 이게 웬일이니, 나름 대박이다.
지몬, 이 스무 살 청년으로 말할 거 같으면, ‘지몬’이라고 하는 것보다 영어식으로 ‘시몬’이라고 읽는 것이 더 편하겠지만 역자의 의견을 좇아주는 것이 또한 독자의 예의라 계속 ‘지몬’으로 하겠지만, 이 청년의 근본적인 본질은 “촌놈” 또는 “농촌출신”이라는 건데, 그렇다고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것이 없어서 겨우 스무 살 밖에 먹지 않았지만 하는 말뽄새를 보나 행동하는 것으로 보나, 생각하는 것을 보나, 머릿속에는 3백년 묵은 거북이, 그것도 도가 터서 곧 날개까지 새로 날 것 같은 선zen 거북이가 들어 있는 것이 틀림없어서 굳이 세상살이에 아득바득, 애달캐달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철학이 있음은 물론이고 가지고 있는 철학을 진짜 삶에서도 관철시키고자 한다. 21세기 우리나라로 예를 들면, 부모의 영향권에서는 이미 벗어나 있고, 동생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으나 동생들도 어엿한 성인이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결정이라고 믿는 관대한 형과, 여러모로 자신의 친구와 다름없는 작은 형, 기꺼이 돌봐주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의지하려는 건 봐주지 않는 마음씨 좋은 누이를 둔 막둥이 남동생을 생각해보시라.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공부를 더할 수도 있으나 공부는커녕 어떠한 스펙에도 관심이 없고, 사회적 안정과 “일반인이 생각하는” 의식주와는 별로 가깝지 않은 생활, 가장 중요한 오늘 고단한 머리를 뉠 수 있고 소박한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살을 덮어주는 의복만 있으면 만족하는 스무 살 청년.
당연히 아르바이트 정도만 만족하고 어떤 정규 직업도 사양하는데 이는 철저하게 자신의 다차원적인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이고, 이것 만으로 본인이 거의 완벽하게 만족을 느낀다는 건데, 아마 모르긴 몰라도, 스스로 이 청년, 지몬처럼 오늘을 지내고 있는 21세기 우리나라의 청년들조차 지몬의 의식/생활방식을 쉽게 이해하지는 못할 듯하다. 나름대로 상당한 수준의 지성을 가지고 있고, 번듯한 직장에서 훌륭하게 일을 할 정도의 역량도 지녔지만 자신을 향한 조금의 정당하지 못한, 또는 못하다고 느끼는 질책을 견디지 못하는 비사회성의 소유자. 비사회성을 가졌다고? 격한 단어이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부적응자. 아마 로베르트 발저 본인이 그랬을 거 같다. 그리하여 자기 혼자 할 수 있는 일, 창작에 힘을 쏟았고, 그것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지자 거의 모든 일에 염증과 두려움과 혼란과 방황을 거쳐 병증이 생겼고 그것을 이기지 못해 오랜 정신치료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가족력까지 있었으니. 스무 살 지몬은 행복했을지 몰라도 서른한 살의 로베르트 발저는 전혀 그러지 못했으니.
그러나 이 책을 누가 이따위 스토리 텔링으로 읽느냐 말이지. 내용? 독특하지, 독특해. 그러나 어디서 본 것 같다. 그렇지? “I would prefer not to” 하면 떠오르는 인물. 그러지 말자. <타너가의 남매들>을 읽을 때 당연히 그이가 생각나겠지만 눈 질끈 감고 그건 그냥 한 번 넘어가보자. 그러면 보이는 것. 저 밀물 같은 유장한 수다.
지금 생각해보면 새삼스레 “다시 책을 읽어볼까?” 싶어서 책 읽기를 시작했던 십 년 전, 로베르트 발저가 쓴 <벤야민타 하인학교>를 읽다가 경끼한 것이 바로 이 밀물 같은 수다 때문 아니었을까 싶다. 밀물 같은. 이 표현이 맞다. 해일 같은, 폭포 같은, 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고 흐르기는 흐르는데 급격한 유속을 가졌다기 보다 묵지근하니 지르지만 그게 쉼없이 쳐들어와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드는 단어들의 침범. 예를 들어 이랬다. 첫 페이지에 나오는 귀절이다. 지몬이 일자리를 얻으러 서점에 들러 책방 사장한테 자기를 써달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길지만 인용하면서 독후감을 끝내겠다.
“저는 서적상이 되렵니다. 저는 그러기를 갈망하고 있으며 그 무엇도 제가 마음먹은 바를 실행에 옮기는 걸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서적상이라는 것을 저는 예전부터 뭔가 매혹적인 것으로 머릿속에 그려 왔으며 제가 뭣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 좋고 멋진 것을 하지 못한 채로 썩고 있어야만 하는지도 이해가 안 됩니다. 보시다시피, 어르신, 지금 이렇게 어르신 앞에 서 있자니 제가 어르신의 상점에 있는 책들을 판매하는 일, 어르신이 바라 마지않을 만큼 얼마든지 많은 책들을 판매하는 일에 탁월한 적임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타고난 점원이랍니다. 매너 있고, 민첩하고, 예절 바르고, 신속하고, 냉정하고, 결단력 있고, 셈에 밝고, 면밀하고, 진실하고, 그러면서도 또, 아마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너무 미련 맞게 진실한 건 아닙니다. 저는 가난한 대학생 녀석을 상대하게 되면 값을 깎아 줄 수도 있습니다. 부자인 사람들에게라면 호의를 베푸는 차원에서 값을 올려 부를 수도 있어요. 종종 자기 돈을 어찌해야 좋을 지 모르는 사람들일 테니요. 저는 이렇게 아직 어려 봬도 사람을 좀 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사람을 좋아합니다. 사람이 각양각색인데도요. 그러니까 저는 제가 가진 사람 보는 눈을 이윤을 올리자고 함부로 쓰는 일은 결코 없을 거란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녀석을 지나칠 정도로 배려하는 바람에 어르신의 귀한 사업에 누를 끼칠 생각 역시 없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제 애정은 판매라는 저울 위에서 사업의 이치와 더불어 보기 좋게 균형을 유지할 것입니다. 사업의 이치란 중요한 것이고 제가 보기엔 사랑 가득한 영혼과도 같이 삶에 꼭 필요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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