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집 - 茶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0
라오서 지음, 오수경 옮김 / 민음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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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변발을 하고 다니던 만주족 영재 출신.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이른 나이에 죽는 바람에 완전히 자기 실력 하나 가지고 북경사범을 졸업해 19세에 소학교 교장, 25세부터 5년 동안 런던 대학의 강사로 체류하다가 귀국해 교수를 하며 창작에 힘을 쏟은 전기전적인 인물이다. 나는 이이의 작품으로는 런던 생활의 경험으로 쓴 소설 <마씨 부자>, 중원눙의 각색을 통해 읽은 희곡 <낙타 상자>밖에 없어서 라오서의 작품들이 어떻다,라고 이야기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다만 라오서의 한살이를 돌아보면 우여곡절이 많기도 많은 세월을 살았다. 서구 열강의 침략이 계속되는 와중에 청말(淸末)의 혼돈기를 거쳐 청조가 막을 내린다. 이어 위안스카이가 잠깐 위세를 떨치다가 일본이 본격적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국민당이 득세를 해 일본과 맞서 싸우는 틈을 노려 마오가 이끄는 공산당이 점점 세를 불리고, 국민당은 공산당과 합작을 해 일본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다 아는 것처럼 국민당은 공산당에 축출당해 대만 섬으로 유배당하고 만다. 어쨌건 간에 안정을 찾은 중국 땅의 대학애서 선생을 하며 창작활동만으로 한 평생 마감할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문화혁명의 바람을 거세게 맞아 1967년에 늙은 몸을 호수(태평호)에 던져 우여곡절의 대단원을 마친 인물. 중국 현대문학 주머니 속의 송곳. 마치 다이허우잉의 작품 속 등장인물 같다.

희곡 <찻집>은 1957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바로 위 단락에서 이야기했던 ‘서구 열강의 침략이 계속되는 청나라 말기’가 1막, 아직 청나라가 망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펄 벅의 <대지> 2부에서처럼 중국 전역에서 군벌들이 일어나 함부로 백성들을 갈취하던 시기가 2막, 미국과 담합한 부패한 국민당 세력이 권력을 잡고 일본군/공산당과 전쟁을 벌이던 시기가 3막으로 되어 있다. 장소는 베이징의 ‘유태裕泰’ 찻집이다. 처음엔 주인공이랄 수 있는 왕이발이, 부친이 숨을 거둔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 새롭게 가업을 이어받아 베이징의 대표적 찻집 네 군데 가운데 하나인 유태 찻집을 크게 만들겠다는 포부가 있던 시절이다. 그러나 세월이 그걸 내버려두지 않아서 2막과 3막으로 갈수록 점점 쇠락해간다.

1막에서 왕이발이 가업을 더욱 번창시키겠다는 은근한 야심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서태후와 서태후에 기생하는 환관무리 등의 수구적 탄압으로 중국은 날마다 한발씩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담사동의 개혁(또는 유신)마저 실패해 백성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굶주린 백성들은 특히 딸이라면 부잣집이나 세력가의 처첩으로 팔아 가족의 수를 줄여 남은 가족들이나마 배를 곯지 않게 하고 딸이라도 밥술 깨나 먹을 수 있도록 혈연 끊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길거리마다 거지들이 득시글거렸다. 베이징 거리는 완력 쓰는 왈패들과 이들을 고용하는 관리나 부자들이 장악했으며, 이들의 정점에 작품에서 서태후의 환관 방태감龐太監으로 대표하는 고위인사가 있었다.

2막과 3막도 마찬가지다. 권력과 부는 물리적 힘을 가진 깡패와 경찰(비슷한 공권력), 군인들에게 집중되고 백성은 기아선상에서 헤매는데 중간계급인 찻집주인 왕이발은 쉼없이 뇌물과 명목상 보호비를 질러주어야 했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이런 현상은 없어지지 않았다. 백성은 인민으로 변화하기 위한 태동도 시작하지 못했다. 대개 이런 가난과 굶주림과 불평등과 극심한 차별은 서서히 끓어오르다가 드디어 비등점에 도달하기만 하면 작지 않은 규모로 끓어 넘치거나 ‘민란’ 이나 ‘반역’ 또는 ‘혁명’으로 터져 나오기 마련인데 당시 중국에서는 특별한 환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니 바로 외세의 간섭 또는 침략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찻집>을 민족주의적 작품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청말부터 공화국 수립 전 시기까지 중간계급의 생활 터전인 유태찻집을 무대로 한 것부터 거의 모든 계급이 한 장소에서 만나거나 아니면 적어도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고 봐야한다. 그리하여 다른 장소였다면 쉽게 표현하지 못했을 당시 중국의 많은 계급/계층의 등장인물이 서로의 입장에서 짧지 않은 험한 세월을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비단 중국 뿐이었겠는가. 일본을 제외하면 당시 아시아 거의 모든 국가가 비슷한 처지로 몰려 밖으로 유럽 열강의 대책 없는 침공과 안으로 무너져가는 왕국의 헐벗은 시절을 견뎌야 했을 터이니.

책을 넘기면 실제 공연하는 사진이 몇 장 실려 있다. 자오쥐인과 샤춘의 공동연출한 1989년 북경인민예술극원 공연 사진 두 장, 린쟈오화 연출의 1999년 북경인민예술극원 2세대 공연, 그리고 멍징후이 연출의 포스트모던 버전. 멍징후이는 연출도 하지만 극작가이기도 해서 희곡 <떠돌이 개 두 마리>와 슈프레히코어 희곡작품 <워 아이 XXX>을 읽어본 적이 있어서 그가 어떻게 이 작품을 “포스트모던”하게 연출했는지 상당히 궁금하다. 중국의 현대 극연출은 주로 유럽의 공연물에서 볼 수 있는 무대의 해체 뿐만 아니라 각본까지 대폭 손질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책에 실린 멍징후이의 무대 사진은 마치 외계 행성의 비탈지고 건조한 조형물 같이 보이는데 실제 공연을 찍은 것이라 어둡게 촬영되어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작품도 중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리얼리즘 자체인데 그것을 모던도 아니고 포스트모던 하게, 라니 말이지.

큰 규모의 작품이다. 시대적 배경도 수십년에 걸쳐 있고, 등장인물 역시 각 계급을 망라해야 하니까 상당히 많은 편이다. 작은 극장에서 공연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규모를 갖고 있다는 건 쉽게 공연하기 어렵다는 것과 같은 말임에도 역자 해설에 따르면 <찻집>은 1958년 초연부터 2021년까지 720회 이상 공연했는데, 이게 전회, 전석 매진이었다고 하니 중국인에게 이 작품이 갖는 위상과 공감능력을 단박에 짐작하게 만든다. 1960년대 문화혁명 시기엔 라오서의 모든 작품을 공연할 수 없었을 터, 그 기간을 빼고 감안한다면 작품에 대한 중국인의 애정을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우리한테도 이런 극작품이 있을까? 이건 독자, 그리고 소수일 수밖에 없는 연극 애호가의 힘과 애정만 가지고는 만들 수 없다. 한 종족을 대표하는 드라마가 나오기 위하여는 일종의 캠페인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캠페인을 좋아하지 않는 인종으로 굳이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거의 모든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드라마를 꼭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 만일 내게 그렇다면 우리의 으뜸가는 극작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정말로 어려운 질문을 한다면, 극단적으로 사적인 감정이라는 전제 아래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나 천승세의 <만선> 정도를 후보작 가운데 하나로 추천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 연극이 부럽다. 끊임없이 애정을 갖을 수 있는 드라마가 있고, 그것의 리비전 연출한 작품 역시 계속 출현하는 환경. 그러고도 연출가, 희곡작가가 배곯지 않고 오히려 나라 밖으로 활발하게 진출해 다시 새롭게 각색해 공연할 수 있는 저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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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1-10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게 말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말도 안 되는 출연료를 받고
무대에 서는 연극인들도 많더라구요. 물론 잘 되서 TV에도 나가고
영화에도 진출하면 좋지만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도 무대 한 번 서 보겠다고... 눈물 겹죠.
쭝국이 배곯지 않고 예술활동하는 건 정말 부러운 일이긴 한데
대신 당에 충성해야 하는 프로파간다가 있긴 하겠죠.

Falstaff 2023-01-10 17:5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중국인으로 그나마 제대로 폼 잡고 살면서 당의 명령...까지는 아니고 당이 바라는 바를 어기면 뭐 여차 없을 거 같습니다.
거기서 ˝조금˝ 비껴가는 사람들이 연예, 예술, 스포츠 기타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예컨데 박/전 시대 때 소위 3S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아니었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