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형상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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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1973년 정월 초하루,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의 한 산부인과에서 쇠똥을 허옇게 뒤집어썼으면서도 입엔 은수저를 물고 세상으로 빠져나온다. 부모가 욕심이 많아 어려서 총명탕을 먹였는지 공부도 잘 해, 누구나 콜롬비아 국립대학에 갈 줄 알았지만 워낙 집안에 좋은 연줄이 많아 그들의 영향권 밖에서 지내보고 싶은 마음에 국립대 말고 사립 로사리오 대학 법학과에 진학한다. 후안의 부모, 속 깨나 썩었는데, 지도급 인사들의 자제가 주로 다니던 국립대도 그런 경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사립대, 특히 로사리오 대학은 1990년대 초반 당시 가장 적극적인 반정부 시위를 펼치던 곳이었다. 그럴 리 없지만 행여 후안이 반정부 시위에 그것도 수뇌부로 가담하기라도 하면 집안 망신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말이지. 그러나 걱정도 팔자. 당시 콜롬비아는 정치 투쟁 말고도 마약 왕들끼리, 마약 왕들과 정부군과의 사이에 무자비한 전쟁과 테러리즘 때문에 도처에 범죄가 횡행하고, 심지어 대낮에 오토바이 뒷자리에서 함부로 기관총을 다니던 중원 고수들의 활극 시기였다. 법 공부도 잘하지만 일찍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훌리오 코르타사르 등의 라틴 문학과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등의 영문학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학문에 관한 비슷한 깊이만큼 겁도 많아서, 한 해 수백명이 테러를 당해 죽어가는 콜롬비아에 정이 똑 떨어져 (스페인이라면 그나마 조금 이해라도 하겠는데)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공부하니 이게 웬 돈지랄인지. 하여간 무려 16년 세월을 유럽에서 보낸 2012년,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고 훨씬 안전해진 조국으로 돌아와 여태 살면서 작품활동에 전념을 기울이고 있다. 위 내용은 이이의 전작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의 독후감에 이미 올린 것을 참고해 다시 쓴 거다.


  음모론에 관한 소설이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독후감을 쓰다가 여차하면 작금 우리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비교할까봐 조심스럽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쓰는 독후감이기 때문에, 특히 우리나라처럼 잘 드는 과도로 토막 낸 사과 같이 딱, 반이 갈려 서로가 서로를 잔뜩 꼬나보고 있는 마당에 여차하면 양쪽 다로부터 욕이나 푸짐하게 얻어 걸리기 십상이라서, 욕이란 건 될 수 있으면 안 먹고 사는 편이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 최대한 정치판과 비교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니 읽는 분께서도 애초 이해하실 마음을 잡숫고 보시면 좋겠다. 하긴 이 땅의 거대 정당 두 개가 다 거기서 거기지, 좌우가 어딨고 진보-보수가 어딨니? 어디 가서 특정 정당을 진보니 좌파니 하지 마시라. 쪽팔려 돌아가시겠다. 두 거대 정당의 차별점은 그냥 1찍, 2찍, 지지 정당만 다를 뿐이다. 한쪽이 하는 짓이라고는 수구 골통 짓이고, 다른 쪽이 하는 짓이라곤 데마고기 뿐이니, 그냥 그렇게들 계속 살아라. 괜히 남 독후감 쓴 거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  무지하게 장황하다. 나는 이이가 쓴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읽었다. 물론 지금은 보고타 북쪽 250킬로미터에 있던, 당대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어린이들의 꿈과 환상을 위해 지은 개인 동물원 “얌마라”를 탈출한 1.5톤 무게의 흑진주색 하마와 마지막 장면 정도만 기억한다. <추락하는…>에 비하면 <폐허의 형상>은 장황하고 장황하다. 본문만 670페이지이지만 마음 같아서는 4백쪽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폐허의 형상>은 콜롬비아 근현대사에 있었던 무수한 테러 사건 가운데 두 장면을 특정해 상세묘사 한다.

  한 명은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정식 이름은 라파엘 빅토르 제논 우리베 우리베. ‘우리베’를 연달아 두 번 쓴 걸 보니까 부모가 친척 관계였던 것 아닐까 싶다. 1859년생으로 일찍이 콜롬비아 내전 당시 최후의 전쟁으로 일컫는 마지막 “천일전쟁”에 참여했다가 패전을 한 인물로 내전 종식 후 콜롬비아의 좌파 자유진영인 자유당 대표를 지내다가, 책에 등장하는 젊은 변호사 안솔라가 법정에서 끝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 결국 두 명의 목수, 헤수스 카르바할과 오비힐도 갈라르사가 누구의 사주도 없이 휘두른 손도끼에 정수리를 얻어맞아 1914년 10월 15일, 백주 대낮에 절명하고 만 것으로 결론이 난다. 이때가 1914년. 유럽에서는 세계대전을 시작해 기관총이 난사하는데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전군 돌격’을 외친 마지막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지금 시각으로 보면 야만의 시대. 목수 두 명이 독단적으로,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장군이 자유당을 말아먹고 있으며 조만간에 그들 같은 소규모 수공업자를 전부 굶겨 죽일 거라고 확신에 차 벌건 대낮에 유명인사 가운데 유명인사인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의 정수리를 도끼로 쪼갤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이들은 근처에 운집했던 군중들에 의해 린치를 당하기 전에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로 곧바로 들어가 콜롬비아 역사상 가장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4년을 보낸다. 이 사이에 미주알이 째지게 가난했던 이들 가족은 건물주가 되고, 금고 아래 깔린 현금이 위에서 누르는 현금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된다. 당연히 이들은 하수인에 불과했을 것. 

  또다른 한 명은 1948년 4월 9일에 애매한 나치주의자이자 장미십자회에 심취한 청년 후안 로아 시에라가 역시 백주 대낮, 만인 환시리에 인파가 붐비는 보고타 거리 한 복판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을 걸어가던 콜롬비아 좌파 정당의 기수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 작중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라디오 DJ이자 법의학에 상당한 지식을 가진 법학 전공자이자 심각한 수준의 불건전한 강박증에 시달리는 모습이 인간이 되기 위해 고통받는 악마와 비슷한 카를로스 엘리에세르 카스바요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백년의 고독>을 쓴 가르시아 가브리엘 마르케스에 의하면 아주 근접한 위치에 있었던 옷을 잘 입은 신사 차림의 남자가 그 자리에서 즉각 군중들에게 가이탄을 쏜 범인을 지목하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 대장 가이탄에게 네 발의 총알을 발사한 범인 시에라는 근처 약국으로 도망을 해, 약사는 본능적으로 셔터를 내렸지만 구두닦이를 비롯한 유난히 험한 성격의 군중들이 셔터를 부수기 시작하자 어차피 문을 열 수밖에 없는 약사가 다시 셔터를 올린다. 밖으로 끌려 나온 저격범을 향한 구두닦이들의 구두통에 의한 두부 가격과 철제 의자로의 폭행으로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렀고, 드디어 숨이 넘어갔음에도 군중들은 시에라를 발가벗겨 포장도로로 질질 끌고 가 대통령 궁에 벗겨버린 옷으로 마치 십자가에 묶인 누구처럼 매달아버리려고 했으나 대통령 경호대원들의 사격과 추격, 이어서 시민들을 향한 대량 학살로 진행되고 만다. 시민 가운데 몇 명은 시에라를 절대 죽이면 안 된다는 것, 살려서 법정에 올려야 범행을 사주한 진짜 세력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을 흥분한 군중들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반대쪽에선 서둘러 저격범의 입을 막아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백년의 고독>을 쓴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최초로 군중을 선동한 이를 두고 “회색 스리피스 슈트를 입고 영국 공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고 책을 통해 진술한다. 물론 마르케스는 그를 직접 보지 못했다.


​  총명하지만 극단적인 집착 증세를 보이는 심야 라디오 DJ 카를로스 카스바요는 가이탄 암살 사건의 배후 조종자를 찾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한다. 이것은 “사물의 진실을 읽는 법”을 찾는 여정이어서 이후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도 모두 가이탄 저격과 연결시킨다. 예를 들면, 알카에다, 오사마 빈 라덴, 비행기 한 대에 무너져버리는 건물은 전부 개소리고 사실은 미국 내부에서 꾸민 일이라는 것. 누구든 현상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는 법이라서 미국 정부가 하고 싶은 전쟁을 정말로 하기 위하여 민간인 3천명을 희생시켰다는 거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매릴린 먼로의 죽음 사이에도 공통점이 분명하게 있다는데 어떤 공통점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중요하고 충격적인 사건일수록 거대한 조직은 베일에 가린 채로 행위를 직접 저지른 인물의 입을 영원히 막는다는 건데, 과거에는 분명히 맞는 의견이었을지언정 SNS가 발달하고 익명의 의견이 자유롭고도 무책임하게 살포되는 현재 시점에서도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런 음모론을 작가는 펼쳐서 옹호하거나, 알려서 오히려 야유한다.

  작가와 작중 등장인물이 천착하는 것은 두번째, 1948년 4월 9일에 있었던 호르헤 가이탄 암살 사건과 사건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 집단의 정체. 그리하여 <폐허의 형상>은 중증 편집증 환자라고 볼 수 있는 카를로스 카스바요가 지금은 가이탄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의 옛집에 오전 11시에 잠입해 마지막 관객까지 다 퇴장한 후, 너클더스터를 낀 손으로 유리를 파손해, 가이탄이 피격을 당했을 당시 입고 있어서 네 개의 구멍이 뚫린 정장 한 벌을 훔치려 한 절도 미수로 체포된 모습을 작가 자신,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가 TV를 통해 전혀 놀랍지 않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  장편소설은 특성상 다양한 에피소드를 거느린다. 이러한 에피소드가 찬란히 빛을 발해 작품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경우도 있다. <전쟁과 평화>의 폴로네이즈 장면을 에피소드의 대표로 꼽는 것은 나 한 명인지도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다. 이 책 <폐허의 형상>은 그러나 그게 좀 심했다. 만일 바스케스가 콜롬비아 근현대사에서 음모설을 주장할 수 있는 다양한 사건을 동등하게 비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그건 작가 마음이니까 내가 뭐라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장황하다. 너무 장황하다. 예를 들어 ‘나’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가 카를로스 카스바요와 알게 지내는 과정, 그와 함께 가이탄의 저격에 관하여 작업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타당성을 위한 여정, 카스바요를 소개한 인물과의 인연이 생긴 사연, 심지어 전작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에서 이야기했던 것의 재탕, 삼탕까지, 장황해도 너무 장황하다. 작품 전개상 “반드시 필요한” 1914년 10월 15일의 라파엘 우리베 우리베 저격 사건은 심지어 2백쪽을 넘겨 묘사를 하고 있다.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문장 사이의 넘김이 매끄러워 읽는데 무리는 없지만 지금 읽고 있는 에피소드가 스토리에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책의 초반을 지날 때부터 이런 생각을 쉼없이 하게 만든다.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데엔 동의. 그러나 나는 권하지 않겠다. 읽고 싶으면 읽으시라. 말리지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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