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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ㅣ 공연예술신서 50
김태웅 지음 / 평민사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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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이자 연출가. 극단 “우인”의 대표. 서울대 철학과 졸업하고 예종 연극원 극작과 예술전문사 과정 졸업, 2004년부터 예종 연극원 극작과 교수. 이게 김태웅에 관한 바이오 전부다. 나머지는 연출과 극작, 수상경력.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2000년에 연우무대에서 공연한 <이爾>를 쓴 극작가였다는 거. 이때 이 연극이 장안의 화제였다는 기억이 난다. 나는 보지 못했다. 다만 특이한 한자어를 제목으로 해서 호기심이 생겼을 뿐. 그저 우리나라엔 없는 중국어 품사인 어조사를 제목으로 하고 있으니 거 참. 그러다가 나중에 알았다. 이 ‘이’가 “꽃 많고 성한 모양”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걸 이준익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히트작을 만들어냈으니 바로 <왕의 남자>였다. 나는 <이爾>를 보지 않았고, 그저 도서관에서 희곡집을 들춰만 봤는데 <왕의 남자>와는 달리 현대 장면도 나오는 걸로 짐작해 연산군 시절 이야기만 영화화한 것으로 짐작한다. 도서관 서가 <이爾> 바로 옆에 먼지만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책이 바로 《반성》이었다.
《반성》엔 희곡 두 편이 실려 있다. <반성>과 <오버 더 레인보우 Over the Rainbow>.
<반성>에는 75세의 남자 신갑성과 그의 처 김명자, 그리고 맏아들, 둘째 아들과 막내딸이 등장한다. 신갑성은 젊어서 온갖 험한 짓을 해 돈을 번 인물이다. 나중에 처가 될 김명자와 잣으로 유명한 동네에서 살았다. 깡패들 데려다가 철거민들 두드려 패고, 권력에 기생해 비리를 저지르기 밥 먹듯이 하다가 난데없이 딸 혜선이가 학생운동을 한다니까 돈벌이에 행여나 해를 끼칠까 싶어 우산으로 딸도 두드려 패던 아버지. 그러다가 늙어 기독교에 귀의해 독실한 장로님이 됐다. 맏아들 일호는 공부 하나는 똑소리 나게 잘 해 전국 수학경시대회 1등을 먹기도 한 수학영재였다. 아버지는 교수나 목사로 만들고 싶었지만 결국 죽도 밥도 아니고 평범한 직장생활 몇 년 후 사업을 하다가 5년 전에 아버지와 대판 싸운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말로는 지역방송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국인 교포 자제를 위한 학원의 수학 강사로 밥 벌어먹고 산다. 둘째 두호는 영화판을 전전하는 영화인이다. 노래와 춤, 연기 같은 것을 좋아해 중학교 다닐 때부터 시간만 나면 기타를 두드리곤 했지만 건전한 사회인을 만들기 위한 아버지 눈에 걸렸다 하면 기타가 박살이 나고 귀퉁백이에 불이 났던 기억만 있다.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으며 전처와 재결합을 모색하고 있다. 와중에 영화제작을 해봤으면, 하는 미련이 남아 아버지에게 자신을 위해 집을 담보로 자신이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말을 꺼냈다가 대판 사달이 나고 만다. 막내 혜선은 열심히 인공수정 시술을 받고 있다. 밖으로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할 때 지독한 고문을 받아 임신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혼외정사를 한 적이 있으며 이때 덜커덕 아이가 생겨 남편 모르게 낙태를 한 후유증이 거의 틀림없다. 소위 ‘운동’을 반대하는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한 기억이 기어이 아버지 생일 파티가 끝난 후에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악을 쓰게 만드는 기폭제로 작용한다.
그러나 진짜 이 가족 관계의 치명적 상처는 부부 사이에 있다. 아내 김명자는 재혼이다. 잣나무가 유난히 많은 고향에서 김명자와 신갑성은 서로 눈이 맞은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못한다. 대신 신갑성과 가장 친한 친구와 혼인을 하고 임신을 했다. 아이를 배서 그런지 명자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친구는 갑성과 함께 아내에게 잣죽을 끓여준다고 잣을 따러 산에 올랐다. 잣은 높은 나무에서 딴 것이 더 씨알이 좋다고 이 책에 나와 있는데 정말인지는 다음으로 하자. 그래 친구는 높은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로 올랐고, 갑성도 명자에게 줄 잣죽일 터이니 기꺼이 친구와 함께 바로 옆나무의 꼭대기에 올랐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묘한 욕심이 생겨 잣 터는 나무 작대기로 친구를 밀어 떨어뜨려 죽여버리고 만다. 명자는 충격을 받아 유산을 하고, 시간이 지난 후 명자의 시아버지가 어느 날 밤, 갑성을 불러 명자와 함께 야반도주를 하라고 어깨를 두드려준다. 물론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갑성이 (암으로 추정할 수 있는) 수술을 하고 5년이 지났다. 스스로도 그렇고, 명자가 생각하기에도 그런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싶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장로인 갑성의 믿음은 날이 갈수록 진지해지고 있다. 남편의 마지막이 마치 손에 쥐어질 듯한 명자는 이번 남편의 생일에 며느리와 사위를 제외하고 오직 자신의 가족들만 생일 파티를 열자고 제의한다. 그리하여 미국에 살고 있는 일호까지 무리해서 불러, 자신의 하나 남은 소원, 아버지 눈 감기 전에 예전 가난한 시절에 그랬듯이 한 이불을 다섯 식구가 함께 덮고 자고 싶다는 마지막 바람을 이루고 싶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들 남매들에게는 당장 눈 앞의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 갑성의 유산배분 문제.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정여사는 땡전 한 푼 남겨줄 것이 없이 눈을 감으시어 우리 형제가 여전히 우애 좋은 관계로 남아 있으니 말이지. 하지만 이들 남매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가 유언을 하기를, 집은 아내 명자의 명의로 유지하고, 기타 모든 재산은 아내와 세 자녀, 네 명이 똑같이 나누어 차지하라고 전한다. 곧바로 싸움이 벌어지고, 자신들의 신세 한탄이 터진다. 이런 상태에서 혜선이 아버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폭언까지 나온다. 그러니 진짜로 악마 같은 아빠는 아니었지 않나 싶다. 흥분이 최고조에 도달한 사십 대 여성이 무슨 말을 하지 못할까. 역시 기가 넘어가게 흥분해버린 40대 남성과 50대 남성 역시 혜선과 거의 같은 수준의 막말을 지껄인다.
그러나 희곡의 제목은 어디까지나 <반성>. 이들은 대단원을 향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했다고 반성하기 시작한다. 반성? 진짜 반성? 그러면 자신의 몫을 형제나 엄마에게 줄 수 있다는 얘기야? 그건 아니겠지. 그럼 이들이 말한 반성은 진정한 반성이라고 하기 쉽지 않다. 엄연히 배금의 시대에 말이지. 이 중에도 진짜 반성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누구냐고? 그걸 어떻게 알려드리나. 기가 막힌 마지막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지. 위에서 갑성이 명자의 첫 남편을 살해했다는 거, 이런 거 언제 내 독후감에서 밝힌 적이 있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화끈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마지막 장면, 말 그대로 드라마틱한 반전에 비하면 그까짓 것은 이도 나지 않은 수준이라서 그랬다. 지금 이 책이 품절도 아니고 절판이다. 그러니 (그럴 리 없겠지만) 어떤 반전인지 궁금하시면 서둘러 도서관으로 달려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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