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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라이프 1
한야 야나기하라 지음, 권진아 옮김 / 시공사 / 201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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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일본계 종양 전문의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의 딸로 LA에서 출생한 한야 야나기하라는 소설가, 편집자, 여행작가의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본인은 자신을 일컬어 부업으로 소설을 쓰는 잡지 편집자라고 규정한다. 2015년 이후 뉴욕 타임스의 서브 잡지인 티 매거진 T:Magazine에서 일하다가 2017년에 편집장으로 승진했다는데 아직 다니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미국 출판계가 “패션 산업만큼 속물적인 로컬 공동체”라는 그의 말대로 설마 여태 같은 직장에 다닐 수 있겠어? 하여튼 그때 이후로 죽 뉴욕에 살고 있단다. 본업 저널리스트, 부업 소설가로.
이 책 <리틀 라이프>는 2015년에 출간해서 그해 맨부커상과 전미 도서상 최종 리스트에 올랐고, 서평잡지 “커커스”에서 주는 커커스 상을 받아 세금 포함 5만 달러가 예금통장에 찍혔다. 2016년엔 영국에서 오직 여성 작가한테만 주는 여성소설상을 받았는데 상금이 얼마인지는 모르겠다. 두번째 작품으로 이만 하면 대박을 친 거다. 우리나라엔 출간 15개월 후인 2016년 6월에 시공사를 통해 선을 보여 독자들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물론 소수의 아싸들도 있었다. 나는? 중도에서 약간 아싸 쪽으로 기운다. 그래서 시작부터 과감하게 내 감상을 말하자면, <리틀 라이프>는 포르노다. “포르노” 운운하니까 어떠셔? 혹하지? 변태 같다고? 기다려보시라.
네 명의 청년이 등장한다. 열일곱 살의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 열여덟 살인 나머지 세 명. 윌럼 라그나르손, 맬컴 어바인, 그리고 장 밥티스트 마리온. 이들은 보스턴 외곽에 있는 대학, 어떤 대학인지 딱 감이 잡히지만 그냥 넘어가자, 신입생일 때 기숙사 룸메이트로 처음 만나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우정을 간직한다. 그냥 보통의 우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 한 편의 핵심 줄거리가 될 만한 대단한 우정,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한 천사일 수 있는 완벽한 우정, 물론 언제나 완벽하지는 않지만 결국 완벽에 수렴하고야 마는 우정을 나눈다.
윌럼 라그나르손. 스웨덴 이민 농부의 아들. 지적 장애를 가진 형을 잃고 그를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을 안고 산다. 부모 모두 세상을 떴다. 당연히 전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형이 죽을 때 지불해야 했던 어마어마한 병원비가 집이며 목장이며,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동산 일체까지 깨끗하게 말아먹어 보통의 미국 소설 등장인물과 달리 부모가 죽어도 땡전 한 푼 건지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바로 그) 명문대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유명하고 견실한 레스토랑인 “오톨란”에서 웨이터를 하는 배우 지망생이(었)다.
장 밥티스트 마리온. 애칭 “제이비”로 불린다. 아버지가 아이티에서 뉴욕으로 날아와 아이티계 미국인인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고, 제이비를 낳았으나 세 살 때 먼저 눈을 감았다. 공립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어머니는 후에 맨해튼의 마그넷스쿨 교장이자 브루클린 칼리지 객원교수를 역임하며 혁신적인 교수방법으로 뉴욕 타임스 기사에 실리기도 한 유명인사다. 집에 외할머니, 이모 등 여성들 틈바구니 속에서 살았으나 나름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미술학도.
맬컴 어바인. 세상에 나올 때 입에 은수저를 물고 있어서 산과 의사가 기겁을 했다. 유명 로펌 회사 중역까지 지낸 아버지 덕택에 살아생전 한 번도 돈에 궁해 본 적이 없다. 자본주의 시대에 역시 돈이 최고라서 어려서부터 자유로운 영혼을 즐기며 살았지만 바로 이점 때문에 아버지는 맬컴보다 누나 플로라를 편애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맬컴은 (정체상태의) 일, (존재하지 않는) 연애생활, (정해지지 않은) 성정체성, (불확실한) 미래를 고민하다가 건축가로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다.
그리고 주인공,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 이름 “주드Jude.”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지만, 은화 서른 냥에 예수를 팔아먹은 이스가리옷 사람 유다와 이름이 같아 2천여 년간 크게 손해를 본 성 유다 타데오는 “좌절하는 사람”, “절망스러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수호성인이다. <리틀 라이프>의 주인공 주드는 내가 읽은 소설책 가운데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불운한 별을 타고 태어났다. 수호성인은커녕 좌절과 절망 자체이며, 저 먼 기억 속,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겪은 폭력의 지독한 후유증 속에 평생 지배당한다.
어느 싸늘한 아침, 주드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 발가벗은 유아의 모습으로 수도원 앞에 버려져 있다. 이를 발견한 수도사, 신부들은 아이를 입양시키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수도원에서 키웠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아이는 자랐고, “주드”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수도사와 신부한테 수업도 받았다. 수도원의 잡일을 하며 사소한 잘못에도 가혹한 체벌을 당했다. 소년 주드는 하필이면 잘 생긴 모습으로 컸다. 하긴 어떻게 생겼어도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주드는 수도사와 신부 몇 명에게 지속적으로 강간과 폭행을 당해 심신이 망가진다. 십대 초기부터 주드는 돌 벽에 자신의 몸을 던져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온실에서 식물을 키우면서 자신을 한 번도 구타한 적이 없는 친절한 말씨의 루크 신부는 소년 주드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역시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며, 예술가, 의사, 학생, 도축업자의 수호성인 루크.
지옥 속에서 차디찬 벽을 향해 몸을 던지던 주드에게 루크 신부는 자신과 수도원을 탈출하자고 제의한다. 유일한 피난처였던 루크 신부의 뜻을 좇아 고물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주드. 루크 신부는 모텔에 머물며 차마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처럼 가장해 주드의 몸을 판다. 그러면서 틈이 날 때, 주드에게 라틴어를 비롯한 다양한 과목을 가르친다. 적어도 하나는 확실한 건, 학생의 수호성인의 이름을 딴 루크 신부, 에드거 윌못이 훌륭한 교사였다는 점. 윌못은 숱한 성인 남성에게 매춘을 하는 주드가 다시 모텔의 벽을 향해 몸을 던지기 시작하자, 자기 상품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몸에 더러운 색깔의 흠집을 내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게 자해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친절하게, 면도칼로 팔의 근육을 긋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해서 주드는 평생동안 최소한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자신의 팔뚝을 면도날로 긋는 행위를 지속하게 된다. 가른 피부에 흰 줄 같은 새살이 돋고 돋아 촘촘하게 흰 선이 생겼어도 돋은 새 살의 아래를 한 번 더 가르고, 지혈을 하고, 붕대를 감으며 고통을 유지시켜야만 삶을 살 수 있는 주드.
여전히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 루크 신부를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주드는 고아원에 들어가서도 많은 카운슬러들에게 역시 같은 구타와 강간을 당한다. 견디지 못하고 고아원을 탈출헤서도 그를 기다리는 것은 또다른 강간과 폭력이었으며, 평생을 따라붙는 지독한 폭력이었는데, 그건 불시에 나타나 갑작스러운 경련처럼 나타나는 끔찍한 고통이었으니 역자는 이것을 “삽화”라고 번역했다.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병을 앓는 중, 병의 증상이 위급하게 나타나 일정 시간 지속되는 한 차례의 사건을 의미하는 의학용어.”
루크 신부가 함부로 말해본 것을 주드가 계시처럼 기억한 대로 열여섯 살이 가까워오는 시절 기적처럼 선한 사회복지사 애너를 만난다. 여태까지 주드가 만난 모든 인간이 악마였던 것과 달리 이제 주드 앞에 “케일럽”이라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천사이거나 천사의 오른편에 앉은 이들만 나타난다. 괜찮은 위탁가정에서의 몇 달을 보낸 다음 보스턴 근교의 대학에 입학하고, 여전히 면도날로 자신의 팔뚝을 그으며, 진정한 우정 속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순수수학 석사과정을 밞으며 뉴욕 지방 검찰청을 거쳐 최고의 로펌인 로젠 프리처드 앤드 클라인에 입사해 소송분과장으로 일한다. 드디어 사랑을 찾았고, 생각지도 못할 만큼 많은 돈을 벌었으나 여전히 마음 속 괴물의 검은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야 야나기하라
충분하게 감동받을 만한 주인공과 주변인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을 포르노라고 규정하니, 그건 등장인물의 행위를 묘사하는 한야 야나기하라 때문이다. 그는 확실히 “속물적인 로컬 공동체”에서 쓰는 문법으로 소설을 쓴다. 청년 주드가 잘 드는 면도날로 자신의 팔뚝을 섬세하게 긋는 장면. 하이퍼 레알리즘, 또는 포토 리얼리즘 적인 묘사가 연속적으로 창궐하면 이건 소음이며, 공해이며, 춘화이며 포르노다. 처음 팔뚝을 긋는 장면에서 독자는 경악을 하다가, 팔꿈치부터 손목까지의 하박에서 상박의 이두근으로 발전할 때는, 심하다 싶었는데, 이게 연속되면 나중엔 “지루하다”가 된다.
사랑도 그렇다. “연속되는” 짙은 애무나 지루한 노골적 삽입을 포르노라고 하지, 요즘 시대에 촌편처럼 등장하는 베드씬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사랑의 감정, 이 중에서 상실의 감정도 마찬가지. 작가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간략하게 어필할 수 있을까를 궁리해야 마땅…한 거 아닌가? 작품 속에 ‘페르마의 정리’ 증명을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수학자가 증명을 하긴 했는데 여전히 많은 수학자가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기 위해 뇌를 썩이고 있다고. 지금의 증명은 백장이 넘는 A4 용지가 필요해, 이를 대폭 간략한 방법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다고. 그런 것을 이해하는 작가가 왜 팔을 긋고, 나중엔 그것도 모자라 허벅지까지 긋는 행위, 사랑의 상실을 앓는 장면을 그리 연속적으로 크레센도, 크레센도, 점증시켜 기어이 포르노를 만들고 마는지 나는 무척 아쉬웠다. 자극적인 장면의 연속이 지긋지긋했다. 나는 밤에 자다가 진짜 꿈도 꾸었다. 젊은 남자가 면도날로 자기 팔뚝을 그어, 쩍 벌어진 붉은 근육 좀 보라고 내게 내미는. 이런 우라질.
할 말이 여전히 많다. 주드를 둘러싼 사람들. 그저 선하기만 하고 단호하지 못한 인간들. 확실하게 금을 그어버린 선인과 악인의 경계. 이런 등장인물들이 넘치고 넘쳐서 유일하게 제이비, 장 밥티스트, 이이 하나만 그저 사람같이 보였다. 이 말만 보태고, 할 말이 아직도 넘치지만, 이쯤에서 그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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